D-12 플리! 위대한 모성애!
두 명의 소드마스터를 잃은 슬픔을 잠재우기도 전에 몬데비언 족의 나라, 플리로 가야했습니다. 성전 드렌필드가 사라진지 나흘째 되는 날. 드렌필드의 아들이 그의 모친과는 교감하지 못했지만 성전 플리와는 중요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반쪽뿐이지만 그래도 플리의 백성인 심판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성전 플리에 도착하니 폴의 텔레파시를 받은 각 국 대표들이 저희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물론 겨우 숨을 쉬고 있는 그린과 심판단의 배후인 비스 성녀를 빼고서요.
“폴. 지금 드렌필드가 어떤 꼴인지 알고나 있어?”
휴화산의 재생과 독초의 급격한 증가, 야생 괴수의 잦은 출몰로 딥데어족 모두가 충분한 숙면을 포기하고 매일을 긴장상태로 살아야했습니다. 원로회가 몇 배로 더 고생하는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입니다.
“확실하게 이 머리로 알려주는데 모를 리가 있나.”
폴은 지브릴의 화를 교묘하게 피하려 했으나 그녀가 그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당장 돌아와서 도와줘야 할 거 아냐!”
“다음 타겟이 뭔지 아는데 드렌필드로 돌아가 봤자잖아.”
“그 중요한 걸 지금 와서 당당히 말하는 넌 대체 어떻게 되먹은 놈이냐?”
지브릴은 이를 바드득 갈면서 폴을 노려봤습니다. 저도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지브릴이 대신 다 해주고 있어서 가만히 일리안 쌍둥이 옆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로 부른 거야.”
따지고 보면 제일 긴장해야 할 폴이 모인 이들 중에서 가장 침착했습니다. 그러려고 무던히 노력했겠죠. 그렇게 살아왔다면 딱히 할 말 없고요.
“심판단이 철궤(윌랜드에서 성전 윌랜드를 세계수라 부르듯, 플리에선 성전 플리를 철궤라고 부른다.)를 노린다는 건가?”
처음보는 플리의 대표가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슈볼츠아웃 형제가 생명의 숲에 찾아왔을 때 말했던 힘스텔 킬이란 자였습니다.
“원래는 맨 마지막에 노릴 생각이었나 봐. 쿡. 여기에 녀석들의 아지트가 있다는군.”
“플리가 밀고한 거야?”
“아가씨 눈엔 밀고로 보일 수 있겠네. 그런데 어머니가 제 자식과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건 밀고가 아니지.”
폴은 높게 솟아 있는 절벽에 손을 댔습니다.
세계수가 생명의 숲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플리도 광맥의 산을 지키고 있습니다. 모든 성전이 자식뿐만 아니라 자신의 백성들과 나라와 체이서스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때도 그들은 품 안에 감사 안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인공적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혼혈이라고 해도 하프 데몬은 성전에게 있어서 순혈과 동등한 백성이었습니다. 똑같이 감싸주고 똑같이 지켜봐줬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일부가 심판단을 조직하여 성전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만이 아니라 하프 데몬이 처음 만들어진 때부터 계속 있었던 일입니다.
성전은 그들의 행동을, 순혈이 서로 싸우는 것과 같게 취급하다가 정도가 심해지자 직접 그들을 견제하기로 했습니다. 네 개의 성전 중 드렌필드가 먼저 움직이려는데, 그걸 눈치 챈 비스 성녀가 무리하면서까지 드렌필드를 저지한 겁니다. 그 다음은 플리. 드렌필드의 일도 있었기 때문에 비스 성녀와 비등한 폴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몰상식한 녀석들이 여기 있었을 줄이야. 당장 쳐들어가자고.”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해.”
붉은 눈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노려봤습니다. 그러나 몬데비언족의 용감한 전사는 핏빛의 눈에 밀리지 않았습니다.
“딥데어족은 전투 민족이 아니라 겁쟁이 민족인가?”
“하프 데몬은 하프 블러드와 달리 두 종족의 장점을 모두 취하고 있어서 상대하는 게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야. 게다가 쪽수도 상당하다고.”
“하프 데몬이라니?”
킬 씨는 하프 데몬 이야기를 처음 들은 모양이었습니다. 그를 상대하던 지브릴은 어이 없어하며 슈볼츠아웃 형제에게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뭐야? 이 김빠지는 반응은.”
슈볼츠아웃 형제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습니다.
“하프 데몬? 그런 게 정말, 실제로 존재하는 건가?”
킬 씨도 의심 가득한 목소리로 둘을 추궁했습니다. 대개 일반인이라면 보일 수 있는 반응인데 플리의 대표인 킬 씨가 상황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시점에 그런 우문을 던지다니, 진심으로 할 말을 잊고 말았습니다.
“킬 경. 자네, 텔러를 알고 있지?”
“당연하지. 슈볼츠아웃 가의 자랑스런 전사가 아닌가.”
“실은 그 아이가 하프 데몬이야. 아버지께서 몬데비언족과 딥데어족의 피를 섞어 만든 아이야.”
“그, 그런…….”
킬 씨는 잠시 눈을 내리 깔더니 순식간에 티의 멱살을 잡아챘습니다.
“그래서! 자랑스런 전사가 몰상식한 녀석들과 한패라고? 그 얘길 하고 싶은 건가? 엉? 왜 이런 중요한 얘길 지금에서야 하는 거야?”
심장을 울릴 정도의 엄청난 성량이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광맥의 산을 깨울 수 있을 만큼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말할 수 없었어. 슈볼츠아웃 가가 어둠 속에서 악행을 당연하다는 듯이 저지르고 온갖 만행을 도맡아 했다는 사실도…….”
“내가 말하는 건 슈볼츠아웃의 자랑스런 텔러지 그런 농담거리도 안 될 야사가 아니야!”
금방이라도 티의 목을 물어뜯을 듯한 송곳니와 꿈에 나올까 두려운 황금색 눈동자가 분노에 번쩍거렸습니다. 가문이 아닌 개인의 능력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하고 그 능력을 높게 평가하며, 그에 긍지를 가지는 킬 씨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 정도에서 그만둬. 이제 곧 플리가 우리를 부를 거야.”
광맥의 산을 통해 플리와 교감을 마친 폴이 그의 차가운 음성으로 킬 씨의 화를 누그러뜨렸습니다. 킬 시는 밀듯이 거칠게 멱살을 놨습니다.
“자넬 절대로 용서하고 싶지 않지만, 용서해선 안 되지만! 그래도 전우고 존경해 마다않는 친구기에 참는 거야.”
킬 씨는 미처 다 터뜨리지 못한 화를 꾹꾹 눌렀습니다. 스스로의 정의관에 참 철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구구구]
광맥의 산 전체가 수상한 소리에 휩싸였습니다. 사방을 살피며 경계했는데 적의를 가진 자나 수상한 것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상한 소리도 금방 그쳤습니다.
“이봐들, 위야 위.”
폴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습니다.
“마, 맙소사.”
“철궤가 하늘에…….”
“이게 가능해? 아니, 가능하니까……. 이런.”
성전 플리가 자신의 힘으로 자리를 이탈해서 하늘에 떠있었습니다. 경이로운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두 이 상식을 뒤엎는 진귀한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눈도 떼지 못했습니다. 그때의 모든 감상을 한 마디로 줄이자면, ‘오, 신이시여!’ 이 정도 될 겁니다.
“자, 다들 흩어져야 할 거야.”
“그건 왜?”
“떨어질 거 거든.”
“응?”
“낙하한다고. 플리가.”
“!”
충격 속에서 제 정신 차리기 전에 플리가 무서운 속도로 떨어졌습니다. 바로 저희들 머리 위에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면 그 어마어마한 덩치에 깔려서 끽 소리도 못 내고 압사 당했을 겁니다. 여하튼 다들 제각기 안전하다 싶을 거리까지 피신했습니다.
[쿵!]
보통 뉴노멀족의 세 배 되는 키에 열 사람이 양팔 벌리고 서도 남아도는 너비. 그야말로 집채만 한 강철 상자가 뚝 떨어졌는데 어떻게…, 성전이 아무 이상 없는 건 당연하다 쳐도, 땅바닥에도 흠집하나 나지 않을 수 있는 겁니까? 이건 세계 불가사이에 기록할만한 일입니다.
“아무튼. 다들 자식을 과잉보호해서 탈이야.”
플리가 떨어질 껄 알고 있던 폴도 땅을 만져보며 놀라움을 나타냈습니다.
“여, 여기가 다이아몬드 광맥이 지났던가?”
“여긴 보크사이트랑 니켈 광맥이 있는 곳인데…….”
플리의 대표들도 땅을 만지며 감탄했습니다. 그들 말대로 성전 플리가 떨어진 땅은 어느 샌가 다이아몬드로 뒤덮여있었습니다.
“플리의 힘이야. 광맥의 산에 흠집 내기 싫어서 토지 성분을 바꾼 거지. 이 난국에 쓸데없는데다가 힘쓰고 말이야.”
폴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성전 플리를 흘겨봤습니다.
“초대한다더니 직접 납신 건 무슨 변덕이야?”
“이 산에 들어오게 한 걸로 만족할 것이지 뭘 더 바라는가.”
중년 여성의 엄한 목소리가 귀가 아닌 머리로 들렸습니다. 제가 마법에는 문외한이지만 성전 플리의 목소리는 텔레파시가 아니라고 직감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텔레파시를 받는 느낌과 비슷했습니다. 그것도 그것대로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래, 그래. 질문을 바꾸지. 키니를 숨길 땐 언제고 왜 갑자기 다 까놓고 말하는데?”
“드렌필드가 네 경박한 언사를 알면 한탄에 한탄을 이을 게다.”
“쯧. 알 거 없어. 내 질문에나 대답해.”
보통 사람은 성전을 향해 반말을 하는 건 상상도 못 할 겁니다. 최소한 전 절대 못합니다. 그런데 폴은 성전의 아들이라 그런지 성전 플리를 쉽게 대할 뿐 더러 맞먹기까지 했습니다.
“플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폴이 원맨쇼 하는 걸로 보였을 거야.”
“동감이야.”
일리안 쌍둥이는 겹겹이 쌓인 충격에서 빠져나오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그 동안은 거의 잊고 있었던 건데, 놀라서 벙 뜬 얼굴이 꼭 닮은 게 그들이 일란성 쌍둥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머릿속에 새겼습니다.
“이런, 세이버의 딸이 오는군. 자리를 옮기지.”
한 순간에 앞이 깜깜해졌습니다.
“어……. 패시? 치니비? 폴? 지브릴?”
“그러다가 온갖 이름 다 나오겠다.”
폴이 제 머리를 요란하게 쓰다듬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주변이 환해졌습니다. 참다못한 지브릴이 마법을 쓴 것이었습니다.
“폴 나이티. 설명 좀 해주실까?”
“그게, 아까 플리가 말했잖아. 세이버의 딸이 우리 움직임을 알아챈 것 같다고.”
주변을 둘러보니 텅 빈 방 같은 곳이었습니다. 다시 자세히 보니 사방이며 위, 아래, 모두 육 면이 강철로 돼 있는 특이한 곳이었습니다.
“일단 임기응변으로 우리는 플리의 껍데기 안에 들어온 상태고 플리는 현재 다른 곳에 몸을 숨기는 중이라고 하면 적당한 설명일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아직 놀랄 일이 더 남았다는 사실 자체도 놀랍지만 하루에 수십 번이나 놀랄 수 있단 사실도 진심으로 놀랍고 대단합니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성전수호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달 간의 성전수호록 : D-10 혈안왕의 리바이브! (0) | 2009.03.20 |
---|---|
한 달 간의 성전수호록 : D-11 광맥의 산! 그리고 심판단! (0) | 2009.03.20 |
한 달 간의 성전수호록 : D-13 용호상박에선 용이 이긴다! (0) | 2009.03.20 |
한 달 간의 성전수호록 : D-14 체이서스 유일! 아그네스 레베카! (0) | 2009.03.20 |
한 달 간의 성전수호록 : D-15 사라진 드렌필드! (0) | 2009.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