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마왕보좌록(완)

한 달 간의 마왕보좌록 : D-23 바알, 천적은 따로 있다?

★은하수★ 2009. 4. 8. 18:16

D-23 바알, 천적은 따로 있다?

주위가 한창 시끄럽다고 생각될 무렵, 무의식중에 서류 정리를 완벽하게 끝내고 바알님의 책상 옆에 가만히 서있는 나를 발견했다. 일주일 만에 이 생활에 익숙해질 줄은 몰랐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며 사는 생물이라지만 과연 나도 그럴까하는 의문이 정신적으로 압박했기 때문에 이런 내가 참 경이롭다. 적합하지 않은 형용사라는 건 알지만 스스로를 대견해 하고 앞으로를 격려하는 차원에서 이 정도 과한 칭찬의 형용사는 붙여줘도 된다. 그래도 될 거라고 생각한다.

[쿠과과광!]

[후두둑]

밖에서 질리온과 엘레나의 무한 술래잡기가 한 시간 넘게 계속되고 있다. 이 상황 속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며 다음 일거리를 조용히 기다리는 바알님 옆에 있는 덕분에 나도 평온하게 있는 걸지도 모른다. 원래 내 성격대로라면 몸을 움츠리고서 머리 박고 숨을 곳을 찾아다닐 텐데 말이다. 역시 의지되는 자가 곁에 있으면 자연스레 나도 변하는 법인가 보다.

“바알님. 헬하운드가 세미디트리에서 발견됐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전날 헬하운드가 보낸 인형을 조사하던 파슈만은 그런 인형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장인 길드가 남부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곧장 그곳으로 향했었다. 그리고 새로운 정보를 들고 지금 막 귀환했다.

난 그에게서 인형에 관한 보고서와 헬하운드에 대한 보고서, 이 두 개를 받아들고 바알님께 전달했다. 여기서 잠시 내 두뇌 사전을 뒤적여보면, 세미디트리는 바알님의 영토 서부에서 손꼽히는 거대 도시 중 하나다. 경제력에 있어서는 바알님의 영토 전체에 걸쳐 3위라니 얼마나 번화한 도시일지 안 봐도 비디오다. 참고로 장관 엘레나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며 장관으로 발탁될 때까지 한 번도 그곳을 벗어난 적이 없다 한다. 그 말은 세미디트리 안에서 충분히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특별한 건 없는 건가?”

“사파야와 같이 걷고 있었다는 것 말고는 없다 합니다.”

일전에 레플리카님이 했던 말이 있다. ‘사파야가 튜리-엘더 길드의 대장일 거야. 아바트 길드의 우두머리였던 헷세가 녀석 손에 죽었거든.’ 그래서 사파야라는 마족이 아바트 길드 내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튜리-엘더 길드로 새롭게 일어선 것이라고 예상하는 중이다. 바알님은 개인적인 이유가 더해져서 헬하운드를 경계하고 있지만 실은 제일 경계해야 할 대상은 바로 사파야다.

“사파야가 세미디트리에 있었단 얘기잖아.”

바알님이 한쪽 눈썹을 찡그리면서 파슈만을 노려본다. 보고에 불만이 있으면 으레 나타나는 표정이다.

“그래서 부하들을 이미 세미디트리에 풀어놨습니다.”

“아, 그래?”

역시 철두철미한 파슈만이다. 바알님의 표정이 금방 풀렸다. 질리온이나 기타 장관이었으면 ‘바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라고 말했을 거다. 아니, 그들을 비꼬자는 게 아니라 파슈만의 능력치에 감탄하자는 얘기다.

[슈- 악]

집무실 중앙에 갑자기 마법진이 나타나더니 그 위로 뭔가 형상이 보인다. 마왕의 집무실에 마법진으로 나타나는 간 큰 분이라면 같은 마왕이어야 하는데 그러기엔 옷차림이 평범하고 간소하다. 목을 겨우 덮을 정도의 짧은 머리를 꽁지머리 마냥 아래쪽으로 묶고 눈이 안 보일 정도의 두꺼운 렌즈로 만든 안경을 끼고 왼손엔 두꺼운 책을 오른손엔 긴 펜을 들었다. 겨우 이 정도 밖에 특이한 점이 없다고 말하면 내게 태클을 걸 이들이 꽤 있겠거니와 여긴 마계다. 이 정도 특징은 정말 ‘겨우’ 특이할 뿐이다.

“너……. 누구였지?”

“벨제뷔트님의 제 3비서 알바트로스입니다.”

그 마왕에 그 비서랄까? 나도 내 두뇌 사전을 들쑤시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알바트로스님이라……. 본인이 소개한 대로 마왕 벨제뷔트의 제 3비서고 역대 비서들 중에서 제일 철저하고 까다롭다고 한다. 예를 들면 ‘규칙은 죽는 한이 있어도 철저히 엄수’가 몸에 뱄다는 것 정도다. 아니, ‘것 정도’가 아닌데? 외모랑 규칙 엄수랑 너무 잘 어울리잖아. 뭐든 정해진 규율대로 밀고나갈 것처럼 보인다.

“아- 알바트로스. 그래, 무슨 일인데 버릇없이 나타난 거지?”

“벨제뷔트님의 경고는 무엇보다도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크읏…….”

마왕이라고 다 같은 마왕이 아니다. 암암리에 서열이 존재하는데 벨제뷔트님이 제일 위다. 나머지 네 마왕을 꼼짝 못하게 만들 정도로 대단하다는데 인간들이 알고 있는 마왕의 이미지와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한다. 확실히, 다른 마왕들을 제압·통솔할 수 있을 정도면 힘이나 위압감이 어마어마할 거다.

“뭔 경고…….”

“아바트 길드 건을 비밀로 부친 사실에 노여워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녀석 끄나풀도 아닌데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잖아.”

“레플리카님의 처벌과 관련된 사항이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하셨습니다.”

“녀석들 먼저 제거하고 나서 레플리카를 그쪽에 보낼 생각이었다고.”

“그렇습니까? 그러면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알바트로스님은 사무적인 태도에 형식적인 말투로 일관하다가 자기소임이 끝나자 곧바로 들어갔다.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있는 마족을 여럿 봤지만 알바트로스님은 긴장이 될 정도로 딱딱하다. 지겹다거나 지루하다거나 하는 보통의 사무적인 언행과는 다르게 상대를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바알님이 긴장한 건 알바트로스님이 벨제뷔트님의 비서이기 때문이겠지만 알바트로스님의 그 포스도 한 몫 했을 거다. 아무튼 바알님은 딱딱한 분위기에 약하단 말이야. 갑갑한 걸 싫어하는 이유가 자신이 그에 약해서다 보니 생각보다 약한 모습을 자주 보인다. 이런 식으로 저런 식으로 약점을 남에게 보이면서도 정말 용케 마왕 자리에 앉아있다.

“결국 벨제뷔트가 알아버렸잖아.”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고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 고개는 완전히 뒤로 꺾였다. 의자가 넘어지지 않고 버티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러면 레플리카님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마왕 자리에서 쫓겨나는 건 당연지사고, 어딘가 한 군데 불구가 되는 건 필연지사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고.”

요약하면 ‘무사할 리 없다’가 된다. 레플리카님 본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마왕 벨제뷔트에게 넘겨지면 어떤 일을 당할지. 미리 각오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의 과오가 불러온 결과니까 자신이 받아들이는 건 당연하지만 대개 소인들은 남에게 미루거나 도망쳐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가. 과연 레플리카님은 순순히 처분을 받아들일까? 그래도 ‘마왕’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으니까 그 때문이라도 얌전히 받아들일 것 같다. 조금만 불리해도 스키니아님께 기대지만 이건 그럴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어쩔 수 없을 거다.

“네가 그 놈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

레플리카님 얘기만 나오면 늘 하는 말이다. 내가 우울한 표정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분명하다. 하긴, 누가 우울한 표정을 좋아하겠어.

“바알님. 튜리-엘더 길드의 아지트가 세미디트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알바트로스님의 깜짝 방문 때문에 잠시 뒤로 밀렸던 파슈만이 알아서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킨다. 바알님은 어떤지 몰라도 난 정말 파슈만이 같은 방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알바트로스님이 나타나기 전까지 우리가 하고 있던 얘기가 레플리카님과 전혀 무관한 내용이 아니었다. 헬하운드가 사파야와 관련되고 사파야는 튜리-엘더 길드와 관련되고, 튜리-엘더 길드는 레플리카님과 관련되는 긴 고리에 한숨만 나온다.

“녀석들 아지트를 찾는 일은 레플리카가 하기로 돼 있는데 역시 녀석의 무능에 그 일을 맡길 순 없어. 파슈만, 미안하지만 바깥에 한 번만 더 다녀와. 이번 건은 일이 좀 많이 커서 아무 놈한테나 시키기엔 내가 찝찝해.”

“알겠습니다.”

바알님은 파슈만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리고 그의 능력치를 제일 높게 쳐준다. 문외한인 내가 봐도 다른 장관들은 거기서 거기 같으나 파슈만은 확실히 눈에 띤다. 임무를 가장 잘 수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평소에 느낄 수 있는 분위기로도 알 수 있다.

“아-, 찬필군.”

에……. 세일마글레님이 먼저 날 부르다니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습니까?

“네, 말씀하세요.”

“말씀은 무슨 말씀. 휴가 간 녀석은 얌전히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바알님, 반가우면 반갑다고 하세요. 그간 텔레파시가 한 번도 통하지 않았다면서요. 꼬마마냥 뚱한 얼굴을 하고선…….

“바알님하고 할 얘기는 없으니까 신경 끄세요. 찬필 군, 괜찮은 거야? 아무래도 걱정돼서 말이지.”

이런, 만 하루가 지나서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뒤늦게 챙겨주니까 오히려 내가 더 민망하다.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도 괜찮은데 말이다. 아마도 헬하운드가 친형이니까 이러는 걸 테지. 유감스럽게도 난, ‘형의 잘못을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타인의 책임을 자기가 지는 건, 자신의 책임을 미루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잡담은 여기까지 하자.

“어제 나타난 헬하운드는 인형이었어.”

“그래? 다행이네.”

난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있고 바알님은 어린애처럼 토라져 있는 바람에 파슈만이 대신 세일마글레님을 상대했다.

“글쎄, 다행은 아니었지. 가스 폭탄 인형이었으니까.”

“원래 자기가 직접 나서서 일을 수행하는 작자가 아니잖아. …그동안 조용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이유…… 혹시 알아?”

“신경 꺼. 너하곤 상관없는 일이야.”

멋대로 휴가 갔다고 아직까지 토라져 있는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이제 그만 화 풀어도 될 텐데 말이지. 세일마글레님하고 엮이기만 하면 정신 연령이 후두둑 떨어진다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체통 좀 지키십쇼.’이다.

“저주라는 야비한 수법을 써서 바알님이 유리할지 몰라도 진짜 1 대 1로 붙으면 헬하운드가 이겨요.”

“같은 핏줄이라고 편드는 거야?”

“객관적으로 그렇잖아요.”

으르렁거리는 바알님께 사실 확인을 하자니 두렵고 해서 파슈만에게 조심스레 눈짓을 보냈는데 곧바로 끄덕이는 고갯짓으로 대답이 온다. 오호. 헬하운드가 바알님보다 세구나. …가 아니라, 마왕보다 센 마족이 존재하는 구나! 헬하운드가 내 예상 이상으로 위험한 인물일 줄이야. 그러면 사파야는 얼마나 위험하다는 얘긴지……. 짐작조차 못할 만큼 일까.

“시끄러! 얌전히 놀기나 해!”

“그만 돌아갈까 했는데 정 그렇게 나오신다면 기대에 부응해드리죠. 찬필 군, 앞으로도 바알님을 열심히 도와드려.”

[뚝]

“아… 네…….”

어찌 두 분이 싸우는 모양이 초등학생들 말싸움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부부싸움 같기도 하다. 두 분 다 남성이라 실례되는 발언이라는 건 알지만 이런 유치한 말싸움은 연인들끼리가 아니면 거의 안 한다고 알고 있다. 몇 백 년 간 호흡을 맞춰온 분들이 참 사소한 걸로 다투다니, 역설 같지만, 원래 가까운 사이끼리 유치한 거리로 더 잘 싸운다니까 그러려니 하련다.

바알님은 계속 꿍- 한 상태고 파슈만은 웃고 있다. 웃고 있다? 바알님이 웃지 말란 식으로 노려봐도 파슈만은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못한다. 파슈만에게 있어 이 성은 전부 그의 기쁨조인 것인가. 장관들의 실수나 가벼운 싸움이 그의 즐거운 구경거리라는 건 알고 있지만 바알님과 세일마글레님의 말다툼까지 그쪽에 속할 수 있구나…… 하고 납득하는 것 보다는 뭐든 구경거리로 여기는 파슈만의 사고방식에 감탄하는 것이 먼저일 듯하다. 여하튼 지금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된다는 거다.

“헬하운드한테 건 저주는 나한테 좋을 거 하나 없는데 내가 유리하기는…… 개뿔…….”

하긴, 바알님이 건 저주는 헬하운드가 세일마글레님에게 허튼 짓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건 것이기 때문에 그가 바알님을 노릴 땐 저주가 발동하지 않는다. 나야 세일마글레님의 대리로 있으니까 그 저주의 혜택을 공짜로 받는 것이다.

“그렇게 속상하십니까?”

“뭐?”

“세일마글레가 바알님의 속마음을 모르는 게 속상하시냔 말입니다.”

“누- 가-. 헛소리 집어 치워.”

파슈만도 바알님을 조롱(?)할 때가 있구나. 그냥 충직한 신하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그 이미지가 다른 형상으로 바뀌어 간다.

[콰광!]

질리온과 엘레나의 술래잡기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파슈만, 가서 쟤네먼저 강바닥에 처박아 놓고 그 다음에 밖에 나가든 말든 맘대로 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파슈만의 조롱을 대놓고 피하는 바알님이다. 파슈만은 그 어린 아이 같은 투정을 군말 없이 받아준다. 아무튼 상식을 깨는 재밌는 군신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