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7 선우 찬필, 혼돈이 되다?
“몸은 좀 어떠세요?”
어제 저녁에, 결혼식장에서 있었던 일을 세일마글레님께 얘기하려고 피어싱을 사용하다가 세일마글레님이 심히 편찮으시단 걸 알았다. 곧바로 끊으려 했는데 이번엔 웬일인지 세일마글레님이 일부러 통화를 길게 끌었다. 휴가 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쉬러 가선 오히려 병을 얻어 고생하다니 즐기지 못하는 시간이 아깝다.
“낮에 몸을 혹사시켜서 저녁에 피로가 몰린 거였어. 푹 자고 나니까 지금은 말짱해.”
확실히 목소리가 원상 복귀했지만 어투랄까 분위기가 조금 낯설다. 정확하게 뭐다라고 말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런 느낌이 든다.
“휴가는 말 그대로 쉬는 거지 노동하는 게 아니잖아요.”
“으응. 그렇지. 어쩌다 보니까 몸을 험하게 다루게 됐어.”
전체적으로 쾌활한 분위기지만 그 이면에 낯선 뭔가가 있다.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내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다른 말로, 지금 나와 얘기를 하고 있는 상대가 내가 아는 세일마글레님이 아닌 다른 사람 같아서 그의 정체를 알아내고픈 마음이랑 비슷하다.
“혹시 헬하운드가 죽어서 마음의 병을 얻으신 건가요?”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 그건 절대 아니야. 그냥 휴양지를 잘못 골라서 고생 좀 한 거야.”
“그런 거라면 얼른 다른 데로 가셔요. 몸이 피곤해지는 곳은 휴양지가 아니라고요.”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알았다. 이건 정말 중요한 사실을 숨기고 다른 것만 내보일 때나 거짓만 밖으로 내놓을 때 직감으로 느낄 수 있는 위화감이다. 세일마글레님에게서 느껴지는 낯선 감각은 은닉된 사실에 대한 경계심이다. 그러니 지인이 아닌 낯선 타인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는 법이고, 자신의 일을 타인에게 죄다 알릴 필요는 없지만, 세일마글레님이 감추고 있는 건 나와 다른 누군가가 꼭 알아야만 하는 아주 중요한 무언가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무얼 숨기고 있냐고 물어보기엔 내가 건방진 것 같고, 세일마글레님 본인이 남이 알길 원치 않는 티가 나서 차마 그쪽 발언은 못 꺼내겠다.
“음……. 좀 뜬금없긴 하지만, 바알님이 걱정 많이 하고 계세요.”
“그러시겠지.”
“아시는 분이 연락 한 번 제대로 안 하시는 거에요?”
“내 나름의 응징이야. 날 너무 부려먹은 나날들에 대한 응징.”
“뭔가 달달하네요.”
“응?”
“아니에요.”
바알님과 세일마글레님이 투닥거리는 모습은 실례되는 말이지만, 처음엔 어린애들 말다툼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애인간의 애정싸움에 가깝다. 파슈만이 두 분의 말다툼을 어떤 생각을 하며 지켜보는지 조금 알듯하다. 더욱이 세일마글레님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생기를 띨 때는 언제나 바알님 얘기를 할 때다. 말로는 이래서 싫다, 저래서 귀찮다 하지만 바알님에 대해 얘기하는 것 자체를 즐거워한다. 그리고 아까까지만 해도 내 신경을 자극하던 낯선 위화감도 없어졌다. 이건 완전히…….
“아, 인간! 바알님께서 찾으신다.”
외팔의 질리온이 멀리서 날 부른다. 그 옆에는 사파야님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저는 이제 쉬는 시간 끝이네요.”
“난 계속 놀아야지. 수고해.”
논다는 말이 어색하게 들린다. 왠지 세일마글레님이 그간 휴가를 즐긴 게 아니라 개인적 일을 했을 거라는 감이 온다. 난 세일마글레님에 대해 아는 바가 바알님이나 사파야님에 대해 아는 것보다 적지만 어떻게 할 것 같다는 추측은 누구보다도 더 잘 되는 것 같다. 바알님 말대로 내가 세일마글레님과 닮은 구석이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사파야님은 레플리카님께 안 가시는 건가요?”
“자칭 볼모로 여기 있는 겁니다. 그래야 다른 마왕들의 눈치를 덜 보지 않습니까.”
역시 기본 심성이 좋은 분이다. 한 때 튜리-엘더 길드의 우두머리였고 현재 아바트 기사단의 기사단장으로 있으면서 더 큰 책임감을 느낄 지도 모른다. 누구보다도 레플리카님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분. 그래서 가까이에서 모시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커도 참고 자신이 그분을 위해 진정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충신은 정말 드물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고,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다니까.”
질리온이 개구쟁이 소년처럼 이를 보이며 길게 씨익 웃는다. 트렌들리샤에서 누구 때문에 팔을 잃었는지 잊지 않았을 터인데 그들을 홀대하기는커녕 환대하는 쪽이다. 레플리카님이 대공작이 되던 그 날부터 그들에게 호의를 보였다. 꼭 소년만화의 마음 넓은 열혈 캐릭터 같다.
“세상은 개인의 이익 추구가 모여서 각각이 합쳐지거나 부딪히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니까요.”
“오, 심오해.”
질리온은 조그만 일에도 넉살좋게 웃는다. 장관들을 보면 질리온만큼 자주 잘 웃는 이가 없다. 무표정이거나 근엄하거나 등 대개 무게 있는 표정을 하는데 질리온은 내가 볼 때마다 표정이 환하다. 장관들이 모여 있을 때의 딱딱한 분위기를 한 꺼풀 벗겨낸달까,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갑갑한 장관들 사이에서 청량제 같은 존재랄까. 그렇게 성격이 좋은 나머지 엘레나의 밥이 되기까지 했으니 그 상황마저 자기 식으로 즐기는 것 같다.
“바알님께서 절 찾는다 하셨죠?”
“응. 표정이 좋지 않으시던데, 뭐 서류 같은 거 잘못 건드렸어?”
“그럴 리가요. 검토를 몇 번 씩이나 하는데.”
사파야님이 만들어준 워프를 통해 바알님의 집무실에 다다랐다. 노크 후 들어가니 내부가 웬 전쟁터로 변해있었다. 바알님이 집무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던지고, 때로 부수고, 망가트려서 안에 들어가기 민망하다. 지금은 잔뜩 화난 얼굴을 하고 안락의자에 등을 기대며 앉아 있다.
“부르… 셨어요?”
사무적이든 뭐든 표정관리를 잘 해야 하는데 집무실 분위기에 밀려서 생각이랑 표정이 따로 논다. 엉망이 된 집무실을 보기만 했을 뿐인데 가슴이 벌렁거린다. 바알님은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화를 주체하지 못한 걸까. 금방 욱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물품을 파손하는 식의 화풀이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건 뭐, 진짜 난장판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화려하게 한 판 벌였다.
“너, 세일마글레가 어디서 뭐하고 있는지 알아?”
“아뇨, 전혀 들은 적 없는데요.”
“그러겠지. 그 녀석이 얘기할 리 없지.”
조금 전까지 내가 세일마글레님과 피어싱으로 대화하면서 약간의 의심을 했었는데 바알님이 세일마글레님에 대해서 물어보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타이밍이 절묘하다. 우연성이 너무 강하면 그 뒤에 우연을 조장한 배후가 있다는데, 이 말 때문에 바알님의 다음 말을 듣기 더더욱 거북해 진다. 실제일 가능성이 높은 예상인데 혹시 바알님은 세일마글레님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아내신 걸까?
“지금 당장 벨제뷔트한테 갈 거니까 전원 소집해!”
다시 한 번 가슴이 벌렁거린다. 바알님 입에서 마왕 벨제뷔트의 이름이 나올 줄 몰랐다. 세일마글레님 얘기를 하는 가 싶더니 왜 갑자기 벨제뷔트님이 튀어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혹시 세일마글레님이 벨제뷔트님의 영지에서 무슨 일을 당한 걸까? 그 분이 뭔가를 저지를 분은 아니니 말이다.
이 보다는 지금 바알님을 막아야 한다. 전원 소집이라니, 그건 벨제뷔트님과 무력으로 담판을 짓겠다는 뜻이다. 바알님이 무력을 행사하면 마왕 벨제뷔트는 또다시 아바트 기사단에게 마왕 바알과 그 이하를 처리하라는 비밀 명령을 내릴 것이다. 이제 막 맺고 쌓은 관계가 무너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을 두고 볼 수 없다. 바알님의 마음을 돌릴 방법이 분명 있을 것이다.
“갑자기 벨제뷔트님께 가신다니요, 세일마글레님께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었나요?”
“그 자식…… 내 거에…… 남의 비서에게 손대다니 제 정신이야?”
순간적으로 내 귀가 움찔 거렸다. ‘내 거.’ 살아 있는 생명체를 두고 바알님이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단어다. ‘내 사람’이라고는 잘 하지만 소유의 뜻이 강하디 강한 ‘내 거’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바알님이 은연중에 세일마글레님에게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번처럼 ‘내 거’라 하며 강한 소유욕을 보이는 건 처음이다. 보통 비서들이 200년 내지 300년을 주기로 바뀌는 거에 비해, 500년 이라는 긴 시간을 줄곧 옆에 둔 것도 이 집착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전원 소집까지 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읏…….”
바알님은 이를 악 물고 화를 삼킨다.
“녀석이 거기서… 그 놈한테 무슨 일을…… 당했을지… 뻔한데……. 바보 같은 자식. 왜 말을 안 한 거야?”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책상 위에 엎드려 괴로워한다. 바알님과 세일마글레님은 정말로 내가 무례하게 예상한 관계인가? 세일마글레님을 향한 바알님의 집착이 제 3자가 끼어들자 더 심해졌다.
“바알님, 무슨 일이십니까?”
파슈만이 조사 결과 보고서를 제출하러 와서 바알님의 용태를 발견했다. 그리고 내게 무슨 일이냐며 눈짓을 보낸다.
“세일마글레님이 지금 벨제뷔트님과 같이 있으시데요. 저도 바알님께 들은 거라 자세한 건 몰라요.”
“녀석이 마왕 벨제뷔트한테? 미치겠군.”
바알님과 세일마글레님을 오랜 시간 지켜봐 온 파슈만은 바알님이 고뇌하는 이유를 곧바로 알아냈다. 구체적인 사정을 듣지 않아도 자세한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절대 불가능 하지만 파슈만은 당연히 가능한 일이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내 눈 앞에서 보란 듯이 진행되는 것을 보니… 아주 약간의 소외감이 가슴을 찌른다. 이런, 내가 이들에게 동지애를 갖게 될 줄이야.
“바알님, 누구한테서 그 얘길 들으셨습니까?”
“…벨제뷔트 녀석이…….”
“그러면 더더욱 침착하셔야 합니다.”
“아, 그래야지. 그래야 하는데…….”
이토록 불안한 바알님은 처음 본다. 세일마글레님이 벨제뷔트님과 같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물론 그 이상의 일이 둘 사이에 있었겠지만- 몸서리를 치고 있다. 과거에 삼자 간에 무슨 일이 있지 않고서야 이토록 경기에 가까운 격한 반응을 보일 리 없다.
어제…… 세일마글레님의 상태가 이상했던 것이 벨제뷔트님 때문이라면, 세일마글레님에게서 낯선 위화감을 느꼈던 것 등등이 모두 맞아 떨어진다. 항상 무심하게 내가 건 통신을 뚝뚝 끊던 분이 자발적으로 시간을 오래 끈 건 벨제뷔트님에게서 느낀 공포와 불안 때문이고, 중의적 표현을 쓰면서 거짓말 하지 않고 내게 사실을 감추는 화법을 구사한 건 과거부터 숨겨온 일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일 것이다’라고 추측의 표현을 쓸 필요도 없다. ‘이다’라고 확신해도 될 정도로 분위기 파악을 끝냈는데 불팔요하게 가설을 세우는 건 낭비다.
“그건 바알님과 세일마글레의 일입니다. 저의 주군은 절대 마왕 벨제뷔트에게 휘둘릴 분이 아니십니다.”
과연 충신이다. 저런 낯부끄러운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용기는 진실 된 충성심에서 나오는 게 분명하다.
[휙 휙]
바알님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모두 나가라는 손짓을 힘없이 한다. 시녀들도, 나와 파슈만도 일제히 집무실에서 나갔다. 슬쩍 쳐다본 파슈만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는 지금 무엇을 걱정하고 있을까? 바알님의 심리? 세일마글레님의 무사?
“어젠 확실히 상태가 나쁘셨는데 오늘 아침엔 좋아지셨어요. 제가 들을 땐 좋아진 척으로 들렸지만 본인이 괜찮다니까 믿어야겠죠?”
“세일마글레 얘긴가?
“이 상황에서 제가 누구 얘길 하겠어요.”
파슈만은 나와 복도를 나란히 걸어가다가 멈춰 선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내 머리 위에 그의 큰 손을 탁 하니 얹는다.
“대리니까…… 알고 있는 게 낫겠지. 실은 이 성 안에서도 아는 이가 드문 이야기야. 사파야…는 알고 있을 테고. 비밀 지켜야 한다.”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비밀 엄수부터 당부한다라……. 심각한 이야기거나 1급 비밀정도 되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리고 성 내부 관계인 중에서 아는 이가 적고 사파야님은 알고 있다면, 장관이라도 모르는 이가 대부분이고 아바트 기사단 측은 아는 이가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도 될까? 내가 일전에 생각했던 대로 세일마글레님은 아바트 일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걸까? 글쎄……. 한 사람의 과거는 곳곳에 퍼진 조각을 찾아 맞추는 퍼즐과 같은 것이라는데 파슈만이 건네주는 조각을 맞추고 나면 뭔가 그림이 보일지도 모른다.
“세일마글레는 실은 여자였어. 바알님의 미인 약혼녀가 바로 세일마글레지. 그런데 둘 사이에 마왕 벨제뷔트가 끼더니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세일마글레에게 역성(逆性) 저주를 걸었지. 그 사이 이야기는 잘 모르지만 마왕 벨제뷔트가 세일마글레의 몸에 두 번 손댔다고 하더군. 여자일 때 한 번, 남자일 때 한 번. 인간은 어떤지 모르지만 마족은 동성 간의 관계도 상관없거든. 아무튼 꽤나 복잡한 사연이 더 얽혀있는 것 같은데, 어찌 됐건 파혼 후에도 바알님이 끝까지 세일마글레를 곁에 두고 있으니 속앓이를 얼마나 하고 계신지 뻔해.”
반은 맞췄… 다. 하……. 두 분이 왜 그렇게 연인사이로 보였는지 알겠다. 실제로 약혼까지 했었고 벨제뷔트님 때문에 파혼했다. 그런데 여전히 가까이 지낸다. 아니, 이건 상관없는데 세일마글레님이 여성이었을 줄이야. 얼굴이 곱상하고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말투가 싹싹한 게 원래 여자였기 때문인가. 신이시여……. 제게, 현실을, 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지성과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나이까.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마왕보좌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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