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마왕보좌록(완)

한 달 간의 마왕보좌록 : D-14.5 [외전2]피브리조, 눈이 트인 자는 숨는다?

★은하수★ 2009. 5. 26. 18:13

D-14.5 [외전2] 피브리조, 눈이 트인 자는 숨는다?

 

루시퍼님 입장에서는 운이 좋았던 거고, 피브리조님 입장에서는 운이 나빴다고 해야 할 거다. 피브리조님이 살았던 동굴을 다시 조사하러 갔던 루시퍼님이 슬그머니 돌아온 피브리조님을 발견하고, 도망가기 전에 잡.아.왔다. 암청색 머리칼에 은청색 눈동자는 아무리 후줄근한 옷과 망토를 걸치고 있어도 신분이 높다는 티가 난다. 하급 마족은 가질 수 없는 카리스마, 위엄, 그리고 분명한 자아가 살 떨리게 느껴진다. 인간인 나도 알겠는데 어떻게 그동안 그곳 하급 마족들 사이에서 100년은 숨어 살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바알, 날 내보내 주게.”

“가.”

미련 없는 한 마디가, 정말 한 마디로 짧고 분명하게 튀어나왔다. 루시퍼님이 옆에서 얼굴을 구기며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루시퍼님이-우연이긴 하지만 그래도- 겨우 찾아낸 피브리조님을 바알님이 멋대로 돌려보내려 하니 말이다.

“너- 말이야…….”

“밤이 깊었잖아. 같은 마왕으로서 예의는 지켜야지.”

피브리조님은 평온한 바알님과 열이 단단히 오른 루시퍼님을 지긋이 바라본다. 그리고 나도 한 번 쳐다봤는데 고개를 돌리다가 우연히 눈이 마주친 것 뿐 다시 두 마왕 쪽을 본다. 내가 볼 때 피브리조님은 뭔가 알고 있다. 지금 그의 표정은 중요한 사실을 숨기고 있을 때의 내 표정과 똑같다.

“저기, 피, 피브리조님. 체스 잘 하세요?”

“……아니.”

난 이 시점에서 월척이라고 외치겠다. 역시 피브리조님은 마왕 벨제뷔트의 실체에 대하 알고 있고 대항까지 해봤다. 그리고 지금, 나란 인간이 그걸 꿰뚫어 봤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두 마왕에 차갑고 뜨겁게 신경전을 벌일 때 피브리조님과 나는 침묵 속에서 탐색전을 펼치고 있다. 그는 날 찬찬히 살펴보더니 거칠어진 손을 망토 틈새에서 벋어 내 머리 위에 얹었다. 나보다 키가 작은 이에게 쓰다듬어 지니까 기분이 약간 묘하다.

“너는 꽤 하는가 보구나.”

아버지 같은 따뜻함이 있다. 5대 마왕 중에서 제일 온화한 마왕이라더니 이 따뜻함 때문인가 보다. 레플리카님이 그랬다. 아바트 길드 숙청 사건 때 피브리조님만 자신을 조용히 타일렀다고 말이다. 어쩌면 피브리조님은 꽤 오래 전부터 마왕 벨제뷔트의 실제 모습을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몇 백 년 전부터 입 다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자만큼은 해요.”

“과연. 그래서 이만큼 말을 모았구나.”

피브리조님은 과거에 마왕 벨제뷔트에게 혼자 대항하다가 절망만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뒤늦게 공략법을 눈치 챘거나 지금 깨달았을 것이다. 은둔을 택했던 건 무기력해졌기 때문일까? 아니, 마왕 벨제뷔트에게서 부하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알아서 잠적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피브리조님이 루시퍼님에게 발견됐다는 소식이 마왕 벨제뷔트에게 전해졌을 테니 지금 바로 다시 은둔하지는 못할 거다. 그렇다면 난 새로 나타난 말을, 체스 판 위에 있었지만 보이지 않던 말을 사용하겠다.

“근데 저는 정식 체스를 할 생각이 없어요. 판을 엎어 버리고 싶은 것뿐인데 꼬마 군이 판을 너무 세게 붙잡고 있단 말이죠. 어른스럽게 그 손을 풀어주시겠어요?”

지금 알았는데, 어느 샌가 모두의 시선이 나와 피브리조님께 집중됐다. 피브리조님의 확보 소식을 듣고 찾아온 그의 제 1비서 히메시스님을 빼고, 전원은 피브리조님을 한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내 의도를 쉽게 간파했다. 피브리조님 본인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는다. 이미 한 번 나락을 본 적이 있으니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마왕 벨제뷔트가 분명 자신을 주시할 텐데 다른 이들과 같이 있으면 그들도 다칠 거라 생각될 거다. 아주 당연한 놀리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도 한 번 고배를 마셨던 일은 두 번 못 한다.

“그런가. 응수하지 않고 아예 망쳐버리는 건가.”

“근데 상대방이 엎기 전에 제가 먼저 엎어야 해요.”

“그래야겠지. 맞는 말이야. 잘못된 게임은 판을 엎어야지.”

다시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따뜻하다. 드릴포비아에서 100년을 살았다더니 손이 상당히 따뜻하다. 몸에서도 냉기가 아니라 온기가 풍겨 나온다. 온정을 오랜만에 느껴서일까, 굉장히 낯익고도 그리운 느낌이 든다. 그리고 피브리조님이 긴 시간동안 느낀 슬픔과 허무와 상실과 절망이 내 안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