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마왕보좌록(완)

한 달 간의 마왕보좌록 : D-14 선우 찬필, 하루 종일 꿈을 보다?

★은하수★ 2009. 6. 4. 16:32

D-14 선우 찬필, 하루 종일 꿈을 보다?

 

어디선가 누군가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인간이 가진 감정 중에서 제일 가치 있고 가장 이성에 가까운 감정은 ‘두려움’이라는 말. 두렵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쁘고, 슬프고, 노여워하고, 지겨워하고, 행복해하는 감정들은 나에게 일깨워 주는 것 없이 그저 그 감정을 느낄 뿐이다. 하지만 두려움은 다르다. 두려움을 느끼면서 인간은 성장한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모르거나 방치하는 인간은 발전할 수 없다.

마왕들은 마왕 벨제뷔트를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그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피브리조님만이 반기를 들었었으나 더 큰 두려움을 깨달았다. 좀 더 노력했으면 피브리조님은 그의 독주행을 막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저지하려고 노력한 자는 더 이상 없었고 심지어 그를 막아야하는 이유조차 모르는 자가 대부분이었다. 마계가 마왕 벨제뷔트의 장난감이 되어 비정상적으로 긴 시간을 흘려보낸 건 필연인 것이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진실을 알면서 은둔을 택한 피브리조님도, 가까운 이가 농락당했어도 진실을 알려 하지 않은 바알님도, 아끼는 자들이 협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레플리카님도, 가장 명석하다면서 나무만 볼 줄 알지 숲은 보지 못한 루시퍼님도 마계의 엉망진창 현실을 책임질 필요 없다. 책임질 수도 없다.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일이 커져버렸다.

-선우 찬필의 기록 : 진실게임(上)

 

간밤에 꿈을 꿨다. 마계에 온 뒤로 예지몽 비슷한 것을 곧잘 꾸게 됐는데 이번에도 그런 꿈이다. 늘 세일마글레님과 연관된 것이다. 그러니 내가 수시로 그에게 연락을 취할 수밖에 없다. 가시 덩굴에 얽혀서 상처 입은 새하얀 고양이와 그 피에 물들어가는 세일마글레님의 가늘고 긴 손이 안타깝게 보이더니 이서서 그의 발밑에서부터 천천히 자라 올라가는 가시덩굴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얼기설기 얽혀있는 틈새로 그가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골 때리는 게 있자면, 꿈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자가 나 말고 한 명 더 있었다는 것이다. 나와 같은 인간이 나와 같은 표정으로 세일마글레님을 가운데에 두고 일직선상에, 그러니까 나와는 정 반대편에 있었다. 꿈에서 자기 모습을 볼 수 있다지만 그는 나랑 생긴 게 전혀 다르다. 다만 키가 비슷하고 안면 근육에 약간의 자극도 주지 않은 무표정을 끝가지 고수하고 있다는 것만 같았다. 생전에 한 번도 본적 없는 인간이 꿈에 나올 수 있다지만 내가 본 인간은 낯설지 않았다. 처음 본 것 같지 않다.

꾸준히 챙겨 먹던 아침 식사도 거르고 일찍 바알님의 집무실에 가서 어제 못 다한 잡무를 마무리 지었다. 새로 도착한 서류를 가지러 가는 도중에 성 안을 배회하는 피브리조님을 만났다. 은둔 시절에 입던 후줄근한 옷을 아직도 입고 있다. 100년을 입어서 익숙해졌단다. 편해서 벗기 아깝단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 인간.”

내 귀가 잘못됐나 보다. 피브리조님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린다. 여리게 연속해서 울려 들리는데 머리도 같이 울린다. 현기증이 나고 속이 울렁거린다. 어딘가에 빨려들 것만 같다.

“조심해. 그가 널 보고 있어.”

[툭]

피브리조님이 내 옆을 천천히 지나가고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즈음에 내 몸은 힘이 쭉 빠지더니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까이 있는 벽에 의지하게 된다. 옆으로 벽에 기댄 채 잠시 서있었다. 보통 현기증이 나면 조금만 쉬면 가라앉는데 이번엔 금방 가라앉지 않는다. 복도가 마냥 길게 보인다.

“조심해. 그가 널 보고 있어.”

[두근!]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한 번 반복된다. 심장이 강하게 방망이질 친다. 덕분에 현기증이 사라지고 갓 일어난 것처럼 머릿속이 맑아졌다. 머리를 긁적이며 벽에서 떨어지고 내 두 다리만으로 내 몸뚱이를 지탱했다. 지난밤의 꿈에 너무 집착했나 보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현실도 아닌 것에 정신을 뺏기다니, 나도 모르는 새에 안이해졌는지도 모른다. 아군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긴장이 조금씩 풀린 거다. 아직 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마음 편하게 있는 선우 찬필아,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찬필 군. 무척이나 피곤해 보입니다.”

“사파야님.”

“눈에 초점이 없습니다. 어제 밤을 새신 겁니까?”

“아- 뇨.”

전혀 피곤하지도 않고 사파야님이 제대로 보이고 목소리도 또렷이 들리는데 그의 눈에는 내가 이상해 보이나? 분명히 난 지금 괜찮은데 왜 사파야님께 기대고 있는 거지? 그의 흑발이 내 눈 바로 앞에서 어른거린다. 이렇게 기대고 있으니까 마음이 편해지고 몸에서 또다시 힘이 빠진다. 마냥 이러고 싶다.

[흠칫]

“죄, 죄송해요.”

마냥 기대고 싶다니 무슨 발칙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몸을 일으켜 세우니까 다시 정신이 번쩍 든다. 언제 또 정신줄을 놨는지 모르겠다. 좀 전에 내가 한 어이없는 행동 때문에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아, 피곤하면 쉬셔야 합니다. 하지만 잠은 자면 안 됩니다.”

그의 말이 날카로운 침이 되어 심장에 박혀 들어간다. 아주 잠깐 현기증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휘청거렸다가, 괜찮아져서 고개를 들었는데 그가 보이지 않는다. 언제 사라진 걸까. 아무 말 없이 가버릴 이가 아닌데 말이다.

“언제까지 퍼 잘 거야?”

바알님의 호통소리에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응? 상체를 일으켰다고?

“이제 그만 일어나.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바알님은 내가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다 갈아입을 때까지 기다린다. 분명히 복도에 있었는데 왜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던 거지? 어찌됐건 다행히도, 지금은 현기증도 없고 잘 안 보이거나 잘 안 들리는 것도 없다. 긴 꿈을 다 꾸고 막 일어난 것처럼 상쾌하다.

워프로 곧장 집무실에 도착하자 각각 비서를 데리고 온 마왕들이 눈에 들어온다. 레플리카님과 제 1비서 델로님, 루시퍼님과 제 1비서 드로키님, 피브리조님과 제 2비서 렌데오님. 레플리카님은 다른 마왕들에게선 같은 마왕 취급을 받으니까 이 자리에 같이 있는 것 같다. 하긴, 눈속임을 위해 형식적으로 대공작으로 강등된 거지 실질적으로는 마왕이 맞다. 그런데 내가 오자마자 피브리조님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내 머리를 차분히 쓰다듬어 준다. 뒤집어 쓴 망토 사이로 그의 눈이 보이는데, 그 눈이 날 보며 안도하고 있다.

“저……. 피브리조님. 이게 무슨 뜻인지…….”

“아니야, 아니야.”

계속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만큼 날 걱정했다는 건가? 왜? 나야말로 내가 방금 전까지 겪은 일이 대체 뭔지 궁금하다.

“너, 네 체질이 뭔지 알고 있냐?”

“체질요?”

“모르는구먼.”

책상 위에 걸터앉은 바알님이 허리를 구부정하게 앞으로 숙였다. 날 지긋이 보는데 한심해하는 눈이라는 걸 단박에 알겠다. 내가 의사도 아니고 내 체질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아니, 의사도 자기 몸은 자기가 알 수 없다. 치료를 못하는 거였나? 어쨌든 난 저런 눈을 받을 이유 없다.

“이 성에 빌붙어 사는 하급 중에 서큐버스 한 녀석이 다 불었어. 네가 깊은 잠을 잘 때면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 된데. 그 사이에 녀석이 네 놈 몸에 붙어서 정력을 조금씩 뺏어 먹었다지만 목숨에 위험할 정도는 아니니까 넘어가고. 그런데 이번엔 영혼이 육체를 못 찾고 헤매서 그 녀석이 날 찾아왔어.”

쉽게 말해서 난 유체이탈 중이었다는 말이구나. 이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지만 속으론 비명을 지르며 처절하게 거부하고 싶다. 깊은 잠을 잘 때면 유체이탈을 하는 구나. 이런 체질을 스스로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 피브리조님께선 유체이탈 중인 저를 보신 거에요?”

“무슨 말이지? 난 줄곧 여기 있었는데?”

렌데오님에게 이끌려 억지로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던 피브리조님이, 바알님 옆에서 습관처럼 서류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내 뒤에 조용히 와서 귀도 살짝 잡아당기고 머리카락도 살짝 잡아당기며 장난을 친다.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지만 큰 손으로 내 머리를 꽉 잡고 고정시킨다.

“아까 피브리조님도 보고 사파야님도 봤는데요? 저한테 조심하라고 하셨잖아요.”

“꿈이겠지.”

“꿈은 잠을 옅게 잘 때 꾸는 거에요.”

바알님이 내 말에 태클을 걸었다. 기분이 팍 상해서 내가 다시 태클을 걸었다. 유체이탈은 잠을 깊게 잘 때 한다면서 아까까지 내가 본 모든 것이 꿈이라니 얘기가 맞지 않다. 그리고 유체이탈하면 그 때 본 것들을 기억하는 거 아닌가? 아니라고 해도 깊게 자면서 꿈을 꾸는 건 말도 안 된다.

“내가 조심하라고 했다고?”

“네. 그리고 그가 절 보고 있다고 하셨어요. 사파야님은 자지 말라고 했고요.”

피브리조님은 내 머리로 장난치다가 갑자기 손을 멈춘다.

“렌데오. 와서 이 인간의 꿈을 읽어봐.”

[탁]

“이 녀석이 인간이지만 지금 내 비서야. 내 허락도 없이 무슨 짓이야?”

“실례.”

바알님이 책상에서 내려와 피브리조님의 팔을 가볍게 쳤다. 덕분에 피브리조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민망해진 그는 머리를 뒤덮고 있는 망토 앞자락을 더 끌어내려서 얼굴 중에 입만 보인다. 뒷걸음질로 자리에 돌아가 앉더니 두 손도 몸을 가리고 있는 긴 망토 속으로 숨긴다.

“바알, 인간이 꿨다는 꿈 말인데 중요한 것일 수도 있어. 인간의 말대로 꿈은 잠을 옅게 잘 때나 꾸는 거야. 근데 깊은 수면 중에 꿈을 꿨다면 주술사들이 꾸는 지각몽이나 예언가들이 꾸는 예지몽 중 하나야.”

레플리카님이 진지하게 바알님과 나를 바라본다. 내가 그간 간간이 꾼 꿈이 예지몽이 맞긴 맞나 보다.

“정말 그런 꿈이라면 더더욱 읽어선 안 돼. 꿈은 꾼 녀석이 해석해야지, 다른 녀석이 개입해서 왜곡시키면 그게 더 바람직하지 못해.”

“해몽을 하겠다는 게 아니야. 인간의 정체성을 알아보고 싶은 거야. 평범한 인간이 지각몽이나 예지몽을 꿀 리가 없잖아. 사파야가 인간을 부른 거라지만, 내가 볼 때 저 인간이 마계로 온 건 필연 같아. 절대 우연이 아니야.”

[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박동수가 빠르게 올라간다. 범인이 들킬까봐 조마조마해 하는 것 마냥 긴장도가 쉴 새 없이 울라간다. 레플리카님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는 주제에 괜스레 양심이 찔린다. 그의 말에서 도망치고 싶기까지 하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 이 빌어먹을 심장은 진정할 겨를을 보이지 않고 눈동자의 초점은 점점 불분명해진다. 의식이 흐려진다.

“그래서?”

잠에서 깨어날 때처럼 바알님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정신이 퍼뜩 든다. 심장도 진정됐다. 눈앞의 모든 것이 다시 제대로 보인다.

“내 비서대리가 그렇게 대단한 녀석이면 그냥 그렇게 인정해. 이런저런 별난 놈이 다 모여 사는 곳이 이 마계잖아.”

날 몰아세우는 분위기가 바알님에 의해 한 번에 정리됐다. 다섯 마왕 사이에 알게 모르게 서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 피부로 느꼈다. 그의 비서대리로 있는 것을 또다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다. 피브리조님과 레플리카님의 말에 휘둘려 스스로 정체성을 의심하고 있었는데 바알님 덕분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이렇게 마음이 편해졌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컴컴한 곳에 촛불 하나가 켜지면 조그만 동요가 일어난다. 촛불 수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어둠에 친했던 자들이 불빛에 친해진다. 속내란 그런 것이다. 꽁꽁 숨기고 있다가도 누군가 한 명이 진실을 드러내면 조금씩 숨긴 것들을 꺼낸다. 결국엔 모든 것이 밝혀진다. 이 중에서 제일 어렵고도 중요한 것은 맨 처음에 진실을 토로하는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에 걸맞게, 처음에 시작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지만 일단 시작하면 술술 풀린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타인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아까울 수도 있다.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 두려울 수도 있다. 그런데 진실을 알리고 싶어도 무엇이 진실인지 몰라 못할 수도 있다. 심증은 있는데 타인을 설득할 재주나 보이는 사실이 없어 혼자 애태울 수도 있다. 무엇이건 상관없다. 머리가 여럿 모이면 진실과 거짓을 현명하게 가를 수 있다. 다만, 자신이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를 땐 답답할 뿐이다. 누가 어떻게 자극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그건 스스로 알아낼 수밖에 없다. 어쩌면 꼭 지켜야하는 비밀일 지도 모른다. 혹시 마왕 피브리조가 이곳에 낄 수 있다면 그가 아마도 이 상태일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수도 있다. 재밌지 않은가.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것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슬픈 역설이 이다지도 흥미로울 수가 없다.

-선우 찬필의 기록 : 진실게임(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