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마왕보좌록(완)

한 달 간의 마왕보좌록 : D-13 레플리카, 졸지에 에이스가 되다?

★은하수★ 2009. 7. 1. 16:49

 D-13 레플리카, 졸지에 에이스가 되다?

 

바알님은 제발, 자각해 주셨으면 한다. 내가 아무리 정신적으로 강해졌어도 육체까지 강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보통 인간이라도 할 수 있는 육체적 노동을, 나는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사실인데 일을 시킬 때마다 까맣게 잊을 수 있느냔 말이다. 이제는 세일마글레님이 아니라 내가 비서라는 것에 익숙해졌을 텐데도 육체노동을 맡길 때만큼은 여전히 가차 없는 양을 전혀 거리낌 없이 준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여, 인간. 제법이네.”

아는 척 말 걸어주는 것보다 내 짐을 덜어주는 것이 훨씬 기쁘다. 누구에게나 허물없이 친근하게 대하는 질리온 덕분에 양 팔이 한결 가벼워졌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두 다리도 두 팔과 함께 무너져 내릴 참이었는데, 타이밍 좋은 조력자의 등장은 장마 중에 나타난 햇빛과도 같다.

“엘레나랑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요?”

“말도 마. 내가 그 년 하인도 아니고, 쓸데없는 것만 시킨다고.”

그는 양 볼을 크게 부풀리며 불만을 토로한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두 명은, 이 성 안에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재밋거리 중에서도 최고로 꼽힌다. 나도 어느새 파슈만과 같이 그 둘의 만담 같은 언쟁과 이종격투기 같은 육탄전을 그러려니 하고 지켜볼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원래 있던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진풍경일 더러, 엉ㄴ제나 그 승패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아까 보니까 레플리카님이 뭘 열심히 만들고 계시더라? 델로 녀석 말로는 네가 부탁한 거라며?”

아마 인형극 용 인형일 거다. 속칭 저주 인형이라고도 부르는 기분 나쁜 인형을 다섯 개 주문했다. 이런 쪽에는 피브리조님이 최고라지만 그분께는 좀 더 스케일이 큰일을 부탁드렸기 때문에 오늘 하루 시간이 텅텅 비는 레플리카님이 대신 인형을 만드는 것이다. 마왕 분들께선 효과가 정말 있을지 의심하고 있지만 역시나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날 도와준다. 제일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분은 이번 인형 제작을 자청한 레플리카님이다. 당연한 일이다.

“레플리카님의 무료함을 달래드리려고요.”

“아니, 좀 아닌 것 같은데…….”

“이럴 땐 못이기는 척 눈 감아 주는 거에요.”

“마왕이 정원 구석에서 인형이나 만들고 앉아 있으면 당연히 이상하다고.”

“눈치 챘으면서 물어보는 건 더더욱 실례에요.”

서류를 전송하는 방에 도착할 때까지 질리온과 실없는 잡담을 했다. 신경을 다른 곳에 둔 덕분인지 팔과 다리의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선반 위에 서류를 놓고 팔을 가지런히 내리는 순간 팔뚝 근육이 심하게 저려온다. 근육 줄기가 한 번에 쫙 땅기고 주사 바늘로 사정없이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이 날 괴롭힌다.

“지금 마계 전체가 너 하나 덕분에 유례없던 혼란에 빠진 거 알아?”

“덕분에 군요.”

그렇다. 어디서 어떻게 이야기가 새나갔는지 몰라도 마왕 네 명이 마왕 벨제뷔트를 제압하기 위해 뭉쳤다는 소문이 마계 전역에 쫙 퍼졌다. 이건 완곡하게 내가 재 표현한 것이다. 실은 ‘모든 마왕이 마왕 벨제뷔트를 배신했다’는 소문이 도는 중이다. 처음 나돌기 시작한 곳은 분명 마왕 벨제뷔트가 다스리는 영토 내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더 이상 아바트 기사단에게 접촉하지도 않는다. 그도 상황을 살피고 말을 재배치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혼자 체스를 두다가 상대 플레이어가 ‘짜잔’하고 나타났으니 당연히 체스 말을 처음을 되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덕분에 제대로 그와 두뇌싸움을 할 수 있게 됐다.

“음……. 스릴 있잖아요.”

“네가 할 만한 대사는 아니라고 생각해.”

“동감이에요.”

심리적 성장에 있어 장족의 발전을 일궈낸 스스로에게 극찬의 박수를 치지만, 너무 대담해져서 막나가기 시작한 건, 내가 봐도 이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무서운 현실에 오히려 겁을 상실하고 미친 듯이 날뛰는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분명한 건, 내게 긍정적인 수식은 웨만해선 붙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건 루시퍼님께 드릴 거에요.”

“어? 그런 거야?”

질리온이 나 대신 든 서류더미를 도로 받아서 전송 장치에 하나씩 집어넣었다. 겉에는 A라고 써 있어도 B나 C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바알님과 같이 서류를 검토하고 정리한 내가 전송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엉뚱한 곳으로 서류가 날아가서 전체 업무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 아직까지 그런 적은 없었지만, 방금 질리온의 사소한 행동 때문에 업무 컨베이어 벨트가 꼬일 뻔했다. 정신 바짝 차리고 두 눈 제대로 뜨고 있길 잘했다.

“이래서 비서는 못해먹겠다니까. 차라리, 사지가 찢겨나가도 싸우는 쪽이 훨씬 나.”

“전 복잡해도 괜찮으니까 몸만 편할 수 있으면 돼요.”

“나랑 정 반대네.”

그는 외팔을 머리 뒤로 올려놓고 입을 양옆으로 길게 찢으며 웃었다. 소년틱한 표정이었다. 인간과 마족을 굳이 구분하는 것 자체가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확실히 인간에 좀 더 가깝다. 아니, 인간과 흡사한 점이 많다.

“만약에 인간계로 못 돌아가면 어떡할 거야?”

“세일마글레님께서 곧 휴가를 끝낼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마계를 뒤집어 놓고선 휭-하니 도망치려고?”

“그전에 제가 벌인 일은 제가 다 매듭지어요. 어중장한 건 딱 질색이거든요.”

장난 식으로 웃으면서 말하고 있지만 내가 듣기엔 추궁하는 것 같다. 하급 마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중상급 마족까지 치를 떨만한 큰일을 시작해 놓고서 살그머니 내뺄 생각이라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들린다. 아, 이건 내가 싫다. 난 내가 하기로 한 일은 끝장 보고야 만다.

“벨제뷔트님을 상대로 그렇게 빨리 결착 지을 수 있을까?”

“제가 누군가에 의해 죽는 쪽이 더 빠르겠죠.”

“에?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인간과 마왕의 두뇌싸움이다. 힘겨루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쉽게 밀릴 생각 없다. 하지만 혹여나 머리를 잘못 써서 체스 플레이어의 성격을 건드리면 살아서 곱게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 못한다. 이 정도는 각오했다. 마왕 벨제뷔트의 소행을 바알님과 루시퍼님에게 설명하던 그 날, 집무실에 나와 바알님 단 둘이 있게 되자 아주 솔직한 대화가 오갔다. 그 중, 깊게 관여하면 할수록 지옥에 가까워지는 것이라는 바알님의 혼잣말 같은 언급에 지옥에 가까워지는 것이지 죽어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맞받아쳤다. 난, 죽을 각오로 지금에 임하고 있지만 죽을 생각은 없다. 미련하게시리 자기 목숨, 자기가 갉아먹는 짓은 하지 않는다. 내가 혹시라도 마계에서 죽게 된다면, 그건, 내 일에 책임지지 못하는 순간, 스스로 목을 매든 몸을 내던지든 자결할 때뿐이다. 그럴 거다. 그러니까 죽을 생각 없다. 마계에서는 안 죽을 거다.

“알아요. 제 말은…… 체스든 놀이든 오래 끌면 좋지 않으니까 후딱 끝내고 속 편하게 돌아갈 거란 말이에요.”

질리온은 피식 웃어넘겼다.

“항상 몸을 웅크리기 바쁘던 녀석이 많이 컸네.”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단세포 생물 빼고, 성장하지 않는 건 없으니까요.”

누구에게서 들었던 말이지? 이젠 내 입에서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온다. ‘성장’은 나와 친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익숙해지면 또 변하고, 또 익숙해지면 다시 또 변하니까, 적응할 자신이 없어서 스스로 성장을 거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글쎄. 사람 속은 너무 깊어서 쉽게 알 수 없다는데 내 속을 내가 모르겠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마음이 단단해졌을까?

[지- 잉-]

“어, 소환 마법진이…….”

질리온의 말을 미처 다 듣지 못하고 강제로 이동됐다. 눈앞이 한 순간에 새하얘지더니 질리온 대신에 레플리카님이 웃는 얼굴로 나와 마주보고 있다. 레플리카님이 날 소환했구나. 내가 무슨 물건도 아니고 마왕들은 곧잘 이런 식으로 날 부른다. 자기가 직접 움직일 생각은 전혀 못한다. 왕이니까 별 수 없으려나.

“이것 봐. 이 정도면 꽤 괜찮지 않아?”

레플리카님은 다섯 마왕과 꼭 닮은 인형을 양팔로 끌어안은 채 내게 내민다. 어린 아이가 인형을 안은 채 놀아달라며 조르는 것 같다. 그나저나 마왕 네 명은 얼굴을 아니까 매치가 안 되는 인형 하나가 벨제뷔트님이구나. 피부가 유난히 희다. 피부가 곱고 흰 여성에게 ‘백옥 같은 피부’라는 미사여구를 선사하는데, 마왕 벨제뷔트도 그 미사여구를 붙여도 전혀 문제될 거 없어 보인다. 머리도 좋고, 힘도 세고, 겉모양도 특상품이라니. 이 세상 불공평하다는 산 표본이나 다름없다.

“정말 잘 만드셨어요. 완전 판박이에요.”

바알님 인형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봤다. 밀랍 인형이다.

“저주 인형은 인형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만드냐에 따라 성능이 좌우된다고. 정말이지 공 많이 들였다니까.”

“헤에-. 그러면 마법이 아니라 손으로 일일이 다 하신 거에요?”

“그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 두 손으로 했다고. 델로한테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꿋꿋이 환수했어.”

“진심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대략 50cm정도 되는 밀랍인형 다섯 개를 표정도 세세하게 표현하고, 옷도 개성 있게 각각 다르게 만들어 입혔다. 이걸 다 직접 수제작 했다니 놀랍다. 어쩐지 시간이 좀 걸린다고 생각했다. 정성이라……. 아바트 기사단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더니 이런 사소한 일에도 모든 정성을 쏟아 부는 것이다. 그의 이 지극한 마음을 저버릴 수 없다. 그래서 겁 많고 유약하던 내가 마왕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의 이 노력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다.

“마족이 상급 정도 되면 외모가 대개 수려한데, 마왕 다섯 분은 죄다 빛이 나네요.”

“응? 흠. 마족과 인간의 미의 기준은 서로 다르니까 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레플리카님은 자신이 만든 다섯 개의 인형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더니 풋 하고 웃었다. 그의 눈에는 다섯 마왕 모두가 잘생긴 생물체로 보이지 않나 보다.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각자의 개성이 확실하게 구분되긴 하는데, 외무를 딱 보면 하나같이 예술작품으로 빚어 놓은 것 같다. 에… 그러니까 생긴 건 각각 다르지만 모두 잘생긴 외모라는 거다.

“루시퍼는 성격이 못돼 먹어서 잘 생겼는지 모르겠어. 이 둘은 객관적으로 잘생긴 축에 속하지만.”

외모를 보는 눈은 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레플리카님이 루시퍼님과 좋지 않은 감정이 끊이지 않고 고요히 신경전을 벌이고 있으니까 외모도 그만큼 점수를 깎아버리나 보다. 그런데 바알님과 마왕 벨제뷔트는 객관적으로 잘생긴 축? 마계 최고의 미녀 세일마글레님을 두고 감정이 비틀어진 두 마왕이 나란히 거론되니까 거 되게 묘하네.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묻어두자.

“이제 이걸로 뭐 할 거야? 아니, 인형극 한다며. 무슨 인형극이야?”

“트럼프 인형극을 할 거에요.”

“트럼프 인형극? ……! 그거 어디서 들었어?”

놀란 쪽은 댁이 아니라 접니다.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그렇구나. 마계에도 트럼프 인형극이 있구나. 마피아나 갱 등 불법·폭력 조직 내에서 배신자를 제거하기 위해 고안한 게임이라 마계에는 없을 줄 알았다. 아니, 이름만 같은 놀이일 수도 있다. 레플리카님의 표정이 한 순간 어두워진 걸 보니 여기서도 딱히 깔끔한 놀이는 아닌 모양이다.

“인간 세계에 있는 어둠의 규칙이에요. 피가 반드시 따르는 죽음의 게임이랄까요?”

“으……. 그거 스페이드A가 조커가 아닌 다른 트럼프를 고르면 조커 외의 모든 인형이 다 죽는 거잖아.”

이럴 수가. 인간 세계의 트럼프 인형극하고 똑같다. 두 세계가 비슷한 점이 많고 몇 가지는 완전히 똑같다. 그런데 트럼프 인형극까지 두 세계에 동시에 존재할 줄이야. 내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긴 한데, 이 인형극의 무서움을 다들 알 테니 반발이 심할 것 같다. 나도 고민고민해서 하기로 결정한 건데 이대로 없었던 일로 돌리기엔 준비한 시간이 아깝다. 그리고 다른 방안을 아직 생각하지 못했다.

“그건 평범한 트럼프 인형극이잖아요.”

억지로 웃으면서 말하니까 신용도가 더 떨어지는 것 같다. 하여튼 웃는 낯은 내 얼굴에 안 어울린다니까.

“소멸의 게임에도 평범한 게 있고 평범하지 않은 게 있었나?”

그러고 보니까 마계는 게임 자체를 ‘소멸’, ‘생성’, ‘진화’, ‘구호’, ‘파괴’ 다섯 가지로 나눈다. 트럼프 인형극은 ‘소멸’에 속하는구나.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내가 계획한 트럼프 인형극은 ‘구호’에 해당하는데 말이지. 평범한 트럼프 인형극이 아니라, 특수한 트럼프 인형극이다. 마피아 조직에서 이중 스파이로 활동하던 한 유명한 인물이 이 게임의 본질적인 약점을 꿰고, 새로이 발상해 낸 규칙이 바로 카드 바꾸기 룰렛이다. 이 규칙 덕분에 어둡고 피비린내 나고 추악한 뒷동네의 게임이 일반 사람들도 재미삼아 할 수 있는 게임이 됐다. 그래도 워낙 고지능을 요구하기 때문에 아무나 쉽게 할 수는 없다. 카드 바꾸기 룰렛이 들어가면 쉬워진 것 같으면서도-목숨을 잃을 일은 줄은 것 같으면서도- 되레 더 높은 지능이 필요하다.

“트럼프 인형극에 어떤 패가 들어가는지 아시죠?”

“당연하지. 네 장의 A와 조커잖아.”

“모노 조커 대신에 컬러 조커를, 네 장의 A대신에 세 장의 K와 스페이드A를 넣으면 게임이 변해요.”

그렇다. 트럼프 인형극의 치명적인 약점은 인형 하나에 트럼프 카드 한 장이 매치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약점인데 왜 누구도 간파하지 못했냐고? 에이스와 조커가 마피아나 갱 사회에서 최고로 취급되는 소속원을 칭하는 은어다. 뭐, 이젠 어디서나 에이스니 조커니 이러니까 굳이 뒷세계 은어라고 할 필요도 없다. 아무튼, 이런 이유에서 에이스 네 장과 조커를 사용하는 것이 관습으로 굳었고 누구도 그 규칙을 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뒷세계 전체의 규칙을 깨는 것과 같아서 다른 트럼프 카드를 사용하는 건 암암리에 금지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카드 바꾸기 룰렛의 규칙은 이것만이 아니다.

“보통 카드는 그 카드의 성격과 비슷한 인형에게 주잖아요? 하지만 제가 사용할 카드는 조커 빼고, 랜덤으로 인형을 고를 수 있어요. 인형에 맞춰 카드를 주는 규칙이 아니라 카드에 따라 인형을 맞추는 거에요.”

레플리카님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도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이럴 땐 직접 시범을 보이는 게 최고다.

“제가 번호표를 미리 만들어 왔어요. 안에 적힌 숫자를 보지 말고 벨제뷔트님을 뺀 인형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세요.”

“번호표도 필요해?”

“룰렛 대신이에요.”

원래 룰렛을 쓰는 것이 정석이지만 똑같은 숫자가 반복될 수 있기 때문에 시간 절약 상 제비뽑기로 대체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레플리카님은 인형 네 개를 공중에 띄운 다음에 내 손에 있는 종이쪽지도 공중으로 띄운다. 그리고 번호표를 이리저리 움직여보더니 하나씩 차례대로 짝을 맞춘다.

“이제 번호를 확인하세요.”

네 개의 종이쪽지가 일제히 펴진다.

“어?”

와……. 이거 일이 재밌게 됐다. 바알님은 스페이드K, 루시퍼님은 클로버K, 피브리조님은 다이아K, 그리고 레플리카님이 스페이드A가 됐다. 카드 바꾸기 룰렛 제 3공식을 써봤는데 에이스의 주인공이 레플리카님이고 직접 대행자가 바알님으로 낙찰됐다. 우연치고는 너무나도 적절해서 절로 흥분된다. 내가 바라던 대로 됐달까? 컬러 조커인 마왕 벨제뷔트가 과연 스페이드A를 깨고 세 장의 K를 제압할 수 있을까? 아니면, 스페이드K가 용감하게 하나뿐인 에이스를 조커에게 투척할 수 있을까? 유쾌한 트럼프 인형극이 될 것 같다. 물론, 버릇없이 마왕을 이용한다며 비서들에게 잔소리 듣겠지만 그쪽에 대해선 돌부처 스킬을 마스터한지 오래다. 마왕들이 내 편인데 비서들 따위야……. 그래도 그들의 후환이 조금 두렵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