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마왕보좌록(완)

한 달 간의 마왕보좌록 : D-10 세일마글레, 거래하다?

★은하수★ 2009. 7. 3. 15:31

D-10 세일마글레, 거래하다?

[쿵쿵쿵쿵쿵쿵!]

“으야…….”

역시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하면 안 된다. 책을 읽으면서 걷다보니 앞에 계단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 떨어졌다. 온몸이 쑤신다. 이런. 어깨를 삐끗한 것 같아서 확인 차 손을 들었는데 손등에 붉은 액체가 송글송글 맺히다 못해 조만간 살을 타구 죽 흐를 기세다. 왼쪽 광대뼈는 이미 따뜻하다. 손가락으로 살짝 대보니 역시 피다.

“바보 인간.”

“인간이 떨어졌다.”

“진짜 바보 같아.”

그늘 속에 숨어 있는 하급 마족들이 비웃는다. 비웃음 당할만한 일이니까 딱히 할 말이 없다. 몸에 상처가 나는 일이야 일상생활이라 괜찮다. 지금 걱정 되는 건 내 옆에 같이 떨어져 있는 책이다. 파슈만에게서 빌린 건데 조금이라도 흠집이 났으면 어떡하나 걱정된다.

[슥]

“어?”

책을 집으려는 순간 책이 1m멀리 도망쳤다. 책이 스스로 움직였다. 이상하게 생각할 거 없다. 근처에서 시시덕거리던 하급 마족의 소행이 분명하다. 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녀석들인데 이 정도 장난쯤이야 애교다. 그런데 내 책이면 그냥 버리고 갈 텐데 파슈만 거라 반드시 저들에게서 돌려받아야 한다. 상대가 마족인 것도 껄끄러운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금 막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참이라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있을 지도 문제다. 이걸 어쩌나.

“몸이 부실한 건 어쩔 수 없구나.”

“세일마글레님.”

“조력자 등장 이라고 할까?”

세일마글레님이 나타나니까 하급 마족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그녀라고 불러야 하지만 그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는, 파슈만의 책을 주워 들고 나서 날 일으켜 세운다. 일어서자마자 통증이 장난 아니게 온갖 감각신경을 자극한다. 뼈가 여기저기 어긋나고 상처의 벌어진 살이 서로 문질러지면서 수십 군데의 통증을 생성한다. 이 시점에서 난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애써 참으려고 했지만 신음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아야야…….”

“심하다. 잠깐만.”

에메랄드빛이 몸 전체를 감싼다. 포근하면서도 시원하다.

“계단을 구른 것만으로도 이렇게 다칠 수 있구나.”

“갈빗대가 나간 적도 있는데요, 뭘.”

“몸 좀 잘 챙겨.”

“네. 감사합니다.”

덕분에 피로 때문에 뭉쳐있던 어깨 근육도 풀려서 전체적으로 가벼워진 느낌이다. 파슈만의 책을 받아들고 흠집 난 곳이 없는지 혹시 찢어지진 않았는지 살폈다. 책을 꼭 끌어안고 구른 덕분에 책은 무사하다.

“책을 많이 읽는다더니 비물교과서도 읽어?”

비물교과서구나. 창고에 있는 물건들이 상세히 나와 있는 책이 있냐고 물어봤을 때 단번에 이 책을 내밀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중요한 아이템들을 그림과 글로 자세하게 설명한 책이다. 창고에 없는 것도 있다. 아마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일무이 아이템을 정리한 책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맞았던 모양이다. 비물교과서. 어울리는 이름이다.

“어제 사파야님에게 이것저것 배워보니까 흥미로운 것들이 많더라고요. 좀 더 알고 싶어서 파슈만에게서 빌렸어요.”

“좋은 자세이긴 한데, 하나 더 알려고 하다가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 수도 있어. 아까도 떨어질 때 목뼈가 부러지면 어쩔 뻔 했어?”

“무,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네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넘어지고 굴러 떨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해서 잘못 다쳐서 즉사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남보다 적은 편이다. 통각에도 익숙해져서 웬만큼 아프지 않으면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경지에 오른 나다. 목뼈가 부러질 수 있다니, 머리는 그 가능성을 이해하고 있지만 몸은 설마 내가 그럴까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갈비뼈야 여러 번 부러져봤지만 목뼈는 부러진 적이 없다. 지금 살아 있으니까 목뼈가 부러진 적은 당연히 없었겠지만. 그러니 앞으로도 넘어진 것 때문에 목뼈가 부러질 일은 없을 거다. ……아, 정말 경각심 없는 위험한 발상이다.

어제 오후 내내 표정이 어둡던 세일마글레님은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이렇게 밖으로 나와 돌아다닌다는 건 기분이 조금이라도 풀렸다는 뜻이리라. 그러면 궁금했던 것을 물어봐도 되는 걸까? 제대로 대답해줄 거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어제 벨제뷔트님이 엘더의 축복이 필요하다고 하셨잖아요. 혹시 세일마글레님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일까요?”

내 시선을 일부러 피한다. 어제 마왕 벨제뷔트의 행동은 너무 티 났으니까 눈치 챘을 거다. 눈치 챘다는 표현을 쓸 필요도 없다.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라고 해야 맞다. 세일마글레님에게 저주를 건 장본인이 직접 저주를 풀고 싶어도 못하니까 바알님이 소유하고 있는 특별한 아이템을 노리는 거다. 그런데 바알님이라고 엘더의 축복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때를 다렸던 거다. 마왕 벨제뷔트가 세일마글레님에게서 손을 떼기를 500년 동안 기다렸다. 엘더의 축복이 회복되고도 남을 시간이다.

“세일마글레님은 아직 선택하지 못하셨나요?”

“아니야!”

그냥 찔러본 건데 반응이 바로 나타난다. 세일마글레님은 누구를 선택했을까? 이건 불필요한 질문이다. 분명 바알님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마왕 벨제뷔트에게 아직도 매어 있어서 한 번쯤 확인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뭐, 세일마글레님이 누구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누구도 따르지 않을 것인지 내 알 바 아니다. 그저 그가 예상외의 변수가 될까봐 걱정돼서 형식적으로 알아보는 것뿐이다. 아, 선우 찬필, 너도 참 이기적인 사무관이 됐어.

“마왕 바알이나 세일마글레 당신이나 서로를 배려한다고 하지만 실은 굉장히 이기적입니다. 당신들의 일방적인 배려가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사파야님의 멋진 한 방이 날아들었다. 일방적인 배려. 바알님과 세일마글레님의 지금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다. 배려라는 이름으로 감춰진 이기심. 진실과 현실에서 회피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걸맞은 말이다. 사파야님의 멋진 어휘실력에 극찬의 박수를 보낸다.

“귀댁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어요.”

“제가 몸소 깨달은 바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렇다. 사파야님도 일방적인 배려를 하는 바람에 레플리카님께 상처를 안겼었다. 사파야님이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이다. 그것이 타인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 건지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진심어린 충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알님과 세일마글레님이 자신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클 것이다.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친한 동료였던 헬하운드의 사랑하는 동생이고, 형식적으로나마 같은 아바트 길드 소속원이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저와 바알님의 관계는 그리 간단하지 않아요. 벨제뷔트님을 제외하더라도 둘만으로도 충분히 복잡하다고요.”

세일마글레님은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 안고 손으로 팔뚝을 꽉 쥐어 잡는다.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돌리고 시선을 피하면서 깊은 우수를 눈동자에 가득 머금는다. 남자가 된지 500년이나 됐지만 여자였을 적 습관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걸 남자다운 행동이니 여자다운 행동이니 나누자니 우습다. 그저 자신이 갖고 있는 습관에 불과한데 말이다. 이러니 고정관념이 무섭다고들 하는 거다.

“연인간의 애증이란 복잡하다죠?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던 저는 남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것뿐이라 두 분에 대해 왈가왈가 하지 못하겠네요.”

“인생 중에 얽히는 모든 관계 중에서 사랑관계만큼 말 많고 머리 아픈 것도 없다지 않습니까.”

“지금 누구 놀리는 거에요?”

나와 사파야님은 은근히 죽이 잘 맞다. 세일마글레님을 농락하며 구석으로 몰아세우는데도 호흡이 척척 맞다. 세일마글레님은 못난 두 생물체를 노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홱 돌린다. 뾰로통한 얼굴이 엷은 홍조를 띄운다. 조금 더 찔러보고 싶지만 그를 적으로 돌리면 내가 손해라서 여기까지 해야겠다.

“솔직히 말하면…… 바알님께서 제안하셨어요.”

세일마글레님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진다.

“남자로서 옆에 있을 건지 여자로서 옆에 있을 건지 저보고 선택하라 하셨어요. 어느 쪽이든 자신은 저를 멀리두지 않으실 거라며.”

바알님이 세일마글레님을 내칠 가능성은 0%임이 분명하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세일마글레님께 직접 표현한 건 이번이 처음인가 보다. 세일마글레님의 얼굴이 터질 것만 같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다. 분명히 바알님께 대답하지 못한 거다.

“진짜 솔직하지 못한 분들입니다.”

“동감이에요.”

빙 돌려서 진심을 표현하는 바알님이나, 선택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세일마글레님이나, 과하게 충실히 자기감정을 숨긴다. 숨기려고 노력한다. 제 3자가 보면 뻔히 티 나는데 말이다. 정말이지 이 두 분은 탐구대상으로 삼고 싶을 만큼 재미있다. 어떻게 다른 사람 속을 다 뒤집으면서 500년을 보낼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일전에 파슈만이 ‘바보라서 그래’라고 단적으로 말한 바 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여자로 돌아가실 건가요?”

“저주에 걸리면서 마력까지 봉쇄된 걸 생각하면 여자로 돌아가는 게 이득이지. 벨제뷔트님이 치근덕거리는 건 변함없으니까 더더욱.”

“그러면 고민할 필요 없으시잖아요.”

“그래도 대뜸 대답하자니… 좀…….”

간단한 대답 한 마디를 하는데도 추가 몇 백 년이 걸리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서로 눈치 보기 바쁜 바보들을 얼른 다시 엮어줄 용자 어디 없나? 이왕이면 바알님께 개겨도 다치지 않을 용자가 필요하다. 에……? 순간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스트레스가 고이고이 사뿐히 쌓여서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다.

“대책 없는 두 분은 그냥 알아서들 하시라고 둡시다. 스스로가 깨달아야지 제 3자가 껴봤자 소용없는 일입니다.”

난 사파야님의 지당한 말씀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세일마글레님은 몸을 한 번 움찔 거리다가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급히 사라졌다. 이 시점에서 누구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날 도와준 분께 무슨 실례를 저지른 거냐며 타박해도 좋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는 이미 했다. 그러니 내가 하고픈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거다.

“헬하운드가 여자로 돌아간 세일마글레를 보면 뛸 듯이 기뻐하다 못해 기절할 텐데.”

사파야님은 충실한 부하이자 대가 없이 믿었던 친구를 생각했다. 가늘게 내리 깔은 눈과 씁쓸한 미소는 사파야님의 깊은 슬픔을 보여주는 트레이드마크다. 세일마글레님을 보면 당연히 헬하운드가 떠오를 텐데, 내가 세일마글레님에게만 치중하고 있던 터라 사파야님의 가시 돋친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가 작게 중얼거리지 않았으면 정말로 아예 지나쳐버렸을 거다.

“바알님이 진실을 알고 바로 잡기위해 노력하는 중이라는 걸 알면 깊은 한이 조금은 풀릴 거에요.”

“한……. 그렇군요. 알려줄 수만 있다면 알려주고 싶습니다.”

마음 쓰지 말라는 식으로 나를 보며 생긋 웃는다. 난 그게 더 마음이 아프다. 차라리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냈으면 좋겠다. 사파야님은 너무 감정을 숨기려 한다. 거짓 표정을 드러내면 내가 그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나도 참 일찍도 물어본다. 그래도 분위기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으레 쓰는 말을 꺼냈다. 점심은 먹었는지, 다른 기사들과는 연락을 하고 있는지 등등을 물어봐도 될 텐데 너무나 상투적인 말을 자동적으로 꺼내버렸다. 분명 일부러 화제를 돌리려는 티가 났을 거다. 사파야님은 신경 쓰지 않겠지만.

“서쪽 별관에서 외팔의 질리온과 카드놀이를 하다가 오는 길입니다. 엘레나도 중간에 꼈는데 둘이서 막상막하였습니다.”

“질리온과 엘레나의 카드 실력은 저도 알죠. 불상하리만치 못한달 까요?”

“하하, 알고 계셨습니까? 네, 비슷비슷하게 못하는 자들끼리 아옹다옹하는 모습이 재밌었습니다.”

“눈에 훤히 보이네요.”

카드놀이 약자들끼리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위세를 부린다. 다 아는 사실이다. 엘레나는 질리온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고 질리온은 무자비하게 얻어맞으면서도 질리지 않고 덤벼 오른다.(알고 보니 엘레나가 30살 이상 연상이란다.) 둘이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물리적으로 맞붙기 시작하면 주변에 남아나는 게 없다. 말리는 이도 없다. 모두가 두 마족을 공기처럼 여길 뿐이다. 이제 나도 그 경지에 올랐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손에 들고 계신 책은 혹시 비물교과서입니까?”

“네, 맞아요. 파슈만에게서 빌렸어요. 알기 쉬운 표현으로 자세히 나와 있더라고요.”

책을 한 번 파르르 넘겼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여기요.”

사파야님은 책장을 한장 한장 넘겨보며 미소 짓는다. 아마 그도 이 책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파슈만이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건네주면서 필독서 중에 하나라고 했으니까 말이다. 필독서라고 해서 누구나 다 읽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지식을 갈구하는 사파야님이라면 반드시 봤을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이 책을 처음 접하던 날, 얼마나 가슴 설랬는지 모릅니다.”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니까 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오른다. 방금 전만 해도 슬픈 표정을 감추기 위해 애쓰고 있더니, 소싯적 봤던 책을 다시 접하자마자 표정이 한결 밝아진다. 가식적인 밝은 미소가 아니라 진심어린 미소를 짓고 있다. 가늘게 내리 뜬 눈이 아니라 눈동자가 밝게 빛나는 둥근 눈이다. 친구라는 이름의 가슴 속 응어리를 잠시나마 잊은 것이다.

“이쪽에 까막눈이던 저도 새 세상을 만나는 기분이었어요.”

“바로 그겁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물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있지만 이건 그야말로 별천지입니다. 실제로 보기 어려운 것들을 이런 식으로 밖에 접할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신비스러운 겁니다.”

사파야님은 내게 인간 세계의 야기를 들을 때처럼 흥분된 상태다. 뭐, 괜찮지 않나 싶다. 그간 고생했으니까 이만큼 긴장을 푸는 것쯤이야 허락될 거다. 계속 긴장하거나 슬퍼하는 등 마이너스 감정을 갖고 있으면 영혼이 조금씩, 나도 모르게 조금씩 깎여 사라진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하루 한 순간쯤은 마음을 편하게 가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