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 조 빼고 모두 곤히 자는 밤이 다 지났다. 언제나 그렇듯이 해가 뜨고 아침이 됐다. 새가 지저귀고 눈부신 햇살이 창문을 넘어 들어온다는 상투적인 표현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다. 해가 뜨기 직전에 돌아와서 한 시간 쯤 잤으려나? 오리지널로 돌아간 시아는 집무실에서 식빵 세 조각으로 아침 식사를 끝냈다. 타고난 슈퍼 체력 덕분에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다.
“보스. 아침밥은 꼭 드셔야 해요.”
“먹었잖아.”
시아는 새로 들어온 서류를 보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침마다 있는 일상적인 일이 됐다. 그 다음 대사는 ‘제가 챙겨드린 아침 좀 한 번이라도 드시면 안 돼요?’일 것이다.
“제가 챙겨드린 아침 좀 한 번이라도 드시면 안 돼요?”
봐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지 않은가.
“화타에게서 새로운 소식은 없고?”
“보스……. 네. 아직까지는 없어요.”
민의 보스 고집 꺾기는 오늘도 실패였다. 언제나 자신이 편한 방향으로 화제를 바꾸기 때문에 그녀에게 끝까지 따지고 들어가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어쩌면 ‘보스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라는 인식이 깊이 박혀 있어서 쉽게 물러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아는 열일곱 개의 서류를 빠짐없이 다 살펴본 후에 두 부류로 나눴다. 오른쪽의 열세 개는 에덴이 개발한 약 때문에 고깃덩어리 괴물이 된 키메라에 관한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 발견했는지, 발견 당시의 생사여부와 주변의 피해 정도 및 화타에게 인수할 때까지의 과정이 사진과 함께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나머지 왼쪽의 네 개는 길드 가디안스의 영역 내에서 조사된 일반 사항이었다. 시장 거래 현황, 치안 현황, 근처 타 길드의 현황, 그리고 영역 내 키메라의 현황이 각각의 내용이었다. 그 중에서 시아의 관심을 잡아 끈 것은 가장 위에 올려놓은 영역 내 키메라의 현황에 대해서 쓴 보고서였다.
키메라의 수가 전체 이성 감성이 있는 다세포 동물의 0.01%정도라서 길드 가디안스의 영역 내에 살고 있는 키메라를 파악하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었다. 쉽게 말하면, 정기적으로 키메라 인구 조사를 하는 것이다. 인간계 에졸로페 황국의 어떤 도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주민이 인간 순종이고, 적게 다른 종족 순종이 살며, 드물게 키메라가 있었다. 그러한 고로 소수의 인구만 파악하는 일이라 일 년에 두 번씩, 인구 조사치고는 자주 할 수 있었다. 키메라끼리는 서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수색·정보 부대만으로도 충분한 업무였다.
재밌는 것은 봄, 가을에 정기적으로 총괄 조사를 하지만 특별한 사건이 터지면 그에 맞춰서 특별 조사도 한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올라온 보고서가 바로 특별 조사의 결과물이었다. 길드 가디안스의 영역 내에 존재하는 키메라 중에서 장작 550개체가 실종됐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550개체면 영역 내 키메라 수의 근 절반이었다. 키메라가 대폭 사라진 것이었다. 그 중에는 70개체 규모의 키메라 상인 길드도 있었다. 그 길드가 시장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한 시장의 상인 전원이 통째로 행방불명 됐다는 말이다. 또한 자신이 키메라라는 사실을 숨기고 일반 가정집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는 이들도 550개체의 리스트에 포함 되어 있었다. 당연히 인간의 치안 기구에 수많은 실종 신고가 접수된 상태였다.
“이거 읽어봤어?”
시아는 민에게 문제의 서류를 내밀었다. 민은 앞에 한두 장만 넘겨보다가 다시 시아에게 돌려줬다.
“읽어봤어요. 여태껏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정보 부대가 각별히 신경 쓰는 중이더라고요.”
“결론은 결국 하나로 나오겠지.”
“네. 그들은 길드 에덴에서 만든 약 때문에 괴물이 됐다. 이렇게 결론을 미리 짓고 조사 중이래요.”
수 개체의 키메라가 뒤섞인 흉측한 괴물이 나돌아 다니는 시점에서 다수의 키메라가 실종됐다는 것은 뻔히 보이는 인과관계였다. 그런데 시아와 민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단지 그 관계가 아니었다. 정보 부대에서 더 철저하게 조사 중인 이유도 ‘인과관계’ 보다는 ‘수’ 때문이었다. 실종된 키메라들이 살덩어리 괴물이 됐다는 인과관계적 사실도 중요하지만 지금 초점을 둬야할 부분은…….
“수가 맞지 않아.”
길드 가디안스의 진 보스의 말 대로다.
“붙어있는 머리수를 세면 살덩어리에 몇 놈이 섞였는지 알 수 있어. 처음에 발견한 놈이랑 네가 죽인 녀석까지 합치면 219밖에 되지 않아. 나머지 양 330은 어디 갔을까나.”
그녀가 말한 것처럼 실종된 키메라의 수와 발견된 살덩어리의 머리수가 일치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이가 심했다. 앞으로 더 많은 괴물이 나타날 것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됐다.
“괴물을 양성 중인 길드 에덴의 아지트에 있을 수도 있고, 영역 내 어딘가나 영역 외 가까운 어드메에 숨어있겠죠.”
“그런 뻔한 얘길 묻는 게 아니야. 내가 알고 싶은 건 막연히 추측할 수 있는 추상적인 위치가 아니라 정확한 위치야. 약은 1년 전부터 나돌아 다녔는데 괴물은 지금에서야 나오고 있고, 실종신고도 최근 며칠서부터 있었어. 550이 어디 적은 수야? 근데 거의 동시에 한꺼번에 사라졌잖아. 피리 부는 사나이라도 나타난 것처럼 말이지.”
시아는 무표정 속에서 눈만큼은 날카로웠다. 힘 있는 눈매에 눈동자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번뜩였다.
“그러면 길드 에덴이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되고, 약이 피리가 되는 건가요?”
“응. 그리고 그 목적지, 키메라들이나 괴물들을 숨긴 장소를 알 수 없다는 것도 딱 맞잖아.”
“에덴의 아지트에서 양성 실험을 하고 있으니까 그곳을 중심으로 조사해봐야겠군요.”
“특별한 원거리 이동 장치가 없다는 전제를 깔면 그렇지. 뭐, 그 에덴이 귀찮은 짓을 할 리 없으니까 제쳐도 될 것 같고.”
만약의 경우도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가능성이 희미한 만약이라면 보류해도 좋을 것이다. 여하튼 시아는 길드 에덴의 비인도적인 짓거리에 단단히 화가 났다.
[똑똑]
“들어와.”
제 2천왕 디레스였다. 그의 손에는 새로운 보고서 세 부가 있었다.
“새로운 정보라도 있어?”
시아는 손을 내밀어 디레스가 가져온 서류를 받았다. 휘리릭 넘겨본 즉, 두 개는 추가로 발견한 괴물에 관한 것이었고 나머지 한 개는 길드 가디안스의 영역 외에서 일어난 피해 현황이었다. 길드 에덴의 몹쓸 행각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도 여러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그것들도 다 최근 이틀 내지 사흘 사이에 일어났다.
“사마엘 녀석도 깨나 골치 아프겠군.”
길드 크루세이더도 타격을 받았다. 길드원이 2000명을 육박하는 지라 손이 안 닿는 말단이 에덴이 만든 약에 당한 모양이었다. 길드 크루세이더가 만든 독이 다른 길드를 송두리째 엎어버릴 수 있으니 길드 에덴이 만든 약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네 길드에는 절대 퍼뜨리지 않고 밖으로 유통시키니 당연한 일이다. 약이란 특성상 유통 과정이 오묘하기 때문에-암거래 중에서도 암거래- 최고의 길드 크루세이더라도 길드 에덴의 기습에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크루세이더도 에덴에게 한 방 먹었군요.”
시아 다음에 민이 새로운 서류를 훑어봤다.
“뒷골목에서 떠돌아다니는 키메라나 힘없는 길드가 당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크루세이더는 좀 의외야.”
디레스는 시아를 보면서 양손을 허리에 두고 콧김을 길게 내쉬었다. 이에 시아는 까지 낀 양손을 머리 뒤로 대고,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렸다.
“글쎄. 크루세이더는 키메라만 보였다하면 회유하든 협박하든 해서 길드에 가입시키잖아. 말단 길드원이면 포장지는 크루세이더라도 내용물은 전혀 아닌 경우가 다분해. 에덴이 만든 약에 당하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듣고 보니 그렇군.”
“개인적으로 하는 말인데, 크루세이더는 숫자 좀 줄어도 괜찮아. 터무니없이 크다고.”
민과 디레스가 큭큭 하며 웃었다. 과연 보스다운, 실로 말 되는 말이었다.
“그쪽도 미스터 구처럼 약을 알아내려고 온갖 노력을 하고 있겠죠.”
“그러고 보니까 화타 녀석, 잘 안 풀리는지 신경이 극도로 예민하던데?”
“헤……. 한 번 중간 점검차 가 볼까?”
“참으세요, 보스.”
“보스도 일 많잖아.”
두 명의 천왕이 동시에 그녀를 말렸다. 하지만 순순히 들을 시아가 아니었다.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신입 환영회를 여니까 각별히 신경 좀 써줘. 한 시간만 나갔다 올게.”
“보스!”
“바이바이.”
시아는 텔레포트를 사용하여 유유히 사라졌다. 민은 시아를 붙잡으려고 다급히 손을 뻗었지만 헛스윙만 했다. 옷자락도 스치지 못한 손을 바들바들 떨더니 주먹을 꼭 쥐고 책상을 힘껏 내리쳤다.
“보스잖아. 어련하겠어?”
디레스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머리에서 김이 폴폴 나는 민의 머리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었다. 민도 보스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민은 이럴 때일수록 휴가 격하게 그리웠다. 그를 비밀리에 만날 때마다 보스의 명령을 무시하고 그를 아지트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길드 가디안스에서 가장 보스를 잘 꿰뚫어본다는 제 1천왕도 지금 이렇게 곤욕을 치르고 있다.
“그래도 일이 풀리지 않아서 폭주하는 화타를 진정시킬 수 있는 건 보스뿐이니까 그냥 눈감아 주자고.”
“원정 가신다는 분이 준비는 하나도 안 하시고…….”
민은 이를 악 물고 미간을 찌푸리며 화내다가 금방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두 입술은 굳게 다물고 얼굴 위 어느 곳에도 주름이 없었다. 눈만큼은 그의 플러스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듯이 날카로웠다. 모두가 잘 아는 굴지의 냉철한 제 1천왕 류 민의 모습이었다.
“보스 앞에서는 평범한 남자애 같은데 보스만 없으면 타고난 싸움꾼 같아.”
민의 스승, 디레스는 제자의 급변화에 안타까워했다. 보스 앞에서만 보이는 모습을 평소에도 그대로 내보이면 인간미 있어 보일 텐데, 보스 외에는 마음을 열지 않으니 그것이 걱정이었다. 솔직히, 마음을 열지 않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가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나름대로 민이 보스만을 위해 드러내는 일종의 서비스일지도 모른다.
“과묵하면서 냉철하게 꿰뚫어보는 남자가 카리스마 있다지만 항상 그러고 있으면 피곤하지 않아?”
“몇 년을 이렇게 살았으니까 괜찮아요.”
“하긴. 보스 앞에서는 활달하게 있으니까, 그것만 해도 대단히 발전한 거지.”
디레스는 자신의 말에 자신이 납득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민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다음에 민의 짧은 한숨이 이어졌다.
“보스 앞에서 일부러 방긋 웃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학교에서도 타인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일부러 활짝 웃고 다닌다고요.”
무뚝둑한 표정과 육식 동물과 같은 눈을 타고난 이에게 입가에 미소를 유지하는 일은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어려운 법이다. 안면 근육이 굳은 것처럼 표정 변화가 아-주 드문 이에게 웃음이란, 미소란 그 자체가 곤욕인 것이었다. 시아가 간혹 가다가 민의 표정을 보고 아이가 발전했다며 놀라워하는데 그게 다 가면을 덧쓴 연극이었다. 물론 시아도 알고 있다. 민의 미소가 진심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저 아이가 세상 사는 법 좀 체득했구나 하고 기특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매일 웃고 다니는 밀리엄과는 정반대구나.”
“그 얘기는 정말 딱지 않도록 들었어요.”
민은 시아가 처리를 끝낸 서류를 차곡차곡 정리했다. 그리고 회전의자의 등받이에 걸려있는 모포를 거둬서 반듯하게 접었다. 아지트 내에 보스 개인 방이 따로 있는데도 계속 집무실에서 자는 시아였다. 그는 회전의자의 옆에 있는 작은 나무 의자에 모포를 올려놨다.
“오늘도 거의 못 주무시겠네.”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민은 시아의 충직한 부하이자 비서다. 시아가 잠들기 전에 자지 않고 시아가 깨기 전에 일어난다. 후자는 지키기 어렵다. 워낙 일어나는 시간이 불규칙 적이라서 시아가 일어난 기척이 느껴지면 그 때 맞춰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전자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도 시아 만만치 않게 육체 상태가 좋아서 일반 인간이면 수면부족으로 쓰러질 정도인데도 멀쩡하게 깨어있다.
“특별한 일 없으면 차라도 드실래요? 보스가 오실 때까지 한가하거든요.”
“주변 마시지. 그런데 네 집무실은 안 가는 거냐? 먼지가 뽀얗게 쌓이겠어.”
“제 집무실로 찾아올 만한 녀석들은 대부분 밖으로 나가 있고, 특성상 연락뿐만 아니라 보고까지 텔레파시로 하니까요. 그래도 청소는 매일 하니까 먼지 쌓일 일은 없어요.”
민은 디레스와 사소한 말을 주고받으면서 마법으로 커피포트에 물을 채웠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물을 끓였다. 커피 잔에 어제 갈아 논 원두 커피를 세 스푼 넣고 끓인 물을 부은 다음에 각설탕 하나를 넣었다. 각설탕이 다 녹을 때까지 티스푼으로 천천히 저은 다음에 조그만 기름병을 집어 색을 확인했다. 라벤더 기름이 들어있는 병이었다. 뚜껑을 열자 스포이트처럼 생긴 좁고 긴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민은 라벤더 기름을 조심스럽게 한 방울 떨어트리고 커피 잔을 컵받침과 같이 쟁반에 올려놨다. 커피 잔은 단 하나. 보스 외 누구 앞에서도 먹거나 마시지 않는 습성이 여기서도 드러났다. 애석하게도 디레스는 그의 스승이자 양아버지인데도 불구하고 보스가 없으면 그의 긴장 풀린 모습을 전혀 보지 못했다.
“아, 라벤더군.”
디레스는 찻잔을 받자마자 딱 한 방울 들어간 향을 알아 맞혔다. 그리고 이미 익숙하기 때문에 민에게 찻잔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지적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와 마주보며 앉아서 그가 내준 커피를 마실 뿐이었다.
“지원이를 특수전투 부대에 넣고 싶다면서?”
“넣고 싶은 게 아니라 넣을 겁니다.”
민은 공격 부문에서 탁월하게 발달하고 선천적으로 우수한 지원의 육체가 심히 탐났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반드시 살아남을 만한 끈질긴 생명력까지 겸비하고 있어서 가치가 더욱 높았다. 게다가 모두가 혀를 내두를 만큼 보스에게 푹 빠져있는 보스 맹신자였다. 특수전투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솔아와 잘 통할 것이다. 개인플레이를 하는 암살 부대에 비해 팀플레이가 특히나 중요한 특수전투 부대에서, 팀원 간의 원만한 의사소통은 필수였다. 이토록 지원은 아주 오랜만에 나온 특수전투 부대 적합자였다.
“밀리엄이 탐내고 있는데도?”
“그쪽은 미스터 피스크께서 충원해 주시잖아요. 그리고 이미 보스께 말씀드렸어요. 전 대원이 오늘 중에 아지트로 돌아오니까 그 때 강 군을 소개할 겁니다.”
신입 환영회 소식이 전해지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아지트로 모여야 한다. 민은 이걸 이용할 생각이었다. 민이 이토록 욕심을 내는 모습이 신선했던 터라 디레스는 살짝 미소 지으며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어차피, 민이 이렇게 강하게 나오지 않아도 지원을 민에게 보낼 생각이었다. 그가 봐도 지원은 특수전투 부대에 어울렸던 것이다.
“정식으로 대원이 되면 잘 챙겨줘. 네 부하기도 하지만 사제이기도 하니까.”
“사적으로 시간이 나면 그 점 생각해 보겠어요. 하지만 다른 때는 엄연히 캡틴과 부하에요.”
“지원이는 스승인 날 제치고 보스 다음으로 널 존경한다고. 기대치에 부응 좀 해줘.”
“제가 그보다 강하기 때문에 멋대로 우상화 한 거에 불과해요. 특수전투 부대의 대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다보면 현실을 직시할 거에요. 제 1천왕 류 민이 4천왕이 된 건 우연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거에요.”
원래 카리스마 있고 침착한 표정이나 좀 더 진지한 얼굴로 변했다. 최근 자신의 위치에 회의감을 갖는가 싶더니 정말로 스스로를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자아 정체성에 혼란이 올만한 나이긴 하나, 천하의 류 민에게도 그런 것이 닥칠 줄은 몰랐다. 아니면, 다른 인위적인 이유에서일까? 그는 왠지 모르게 자신이 제 1천왕이라는 사실이 부담스러워졌다. 처음 4천왕을 정할 때보다 더 부담감이 늘어났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가 더 잘 어울린다고, 그 이는 누구여야 한다고까지 생각했다.
“글쎄. 난 생각이 다른데. 특수전투 부대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자신의 캡틴이 얼마나 대단한지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으니까 더욱 심취할걸? 그 녀석, 레스나 다른 시간 널럴한 녀석들에게 보스랑 네 얘기를 들을 때면 아주 눈에서 별이 쏟아져 나올 만큼 반짝반짝 거린다고.”
민은 디레스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지만 고개를 들어 그와 마주보지 못했다. 눈을 내리깔고 자기 앞에 내려놓은 쟁반만 쳐다봤다.
“네가 요행으로 제 1천왕이 됐다는 얘길 밖에 나가서 해 봐. 그럴 리 없다고, 농담 하냐고, 이런 반응들일 게야. 누구보다도 제 1천왕에 걸맞은 인재야. 보스가 심혈을 기울여서 고르고 누구나가 다 찬성했어. 그 사실을 잊어선 안 돼. 보스가 널 지목했다는 건 널 그만큼 믿고 있다는 뜻이야. 그런데 우연히 4천왕이 됐다니. 그건 보스의 마음을 짓밟는 것과 다를 게 없어.”
꽤 거친 타이름이었다. 보스의 존재 자체가 민이 숨 쉬며 살아 있는 이유고, 민의 행동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약점이었다. 디레스는 그것을 교묘하게 사용하여 약해진 민의 마음을 확실하게 자극했다. 그것이 효과를 봤다.
“어느 날, 제 1천와에 어울리는 인재가 나타나고, 보스도 그걸 인정하시면, 제가 그 자에게 자리를 넘겨줘도 보스는 절 나쁘고 생각하지 않겠죠?”
“보스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멋대로 넘겨주면 죽을 때까지 미워할지도 몰라. 솔직히 우리 보스, 그렇게 유들유들하고 쾌활한 인물이 아니잖아. 고집 세고 포커페이스 기본 50cm를 자랑하고, 잔혹하고 또 철저하지. 유독 몇몇에게만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준다고. 그런데 그 특권을 스스로 버리겠다면 난 무조건 널 말릴 거다.”
디레스의 말은 민의 가슴을 푹 찔러 들어갔다. 민은 보스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디레스의 말이 백번 옳다는 사실을 절대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민도 솔아나 지원 만만치 않은 보스 추종자다. 보스에게 미움을 사는 것은 삶의 빛을 잃는 것과도 같았다. 자신이 제 1천왕이어야 하는 이유를 아직 납득하지 못하지만 보스의 미움을 사느니 그냥 지금 이대로 있는 편이 몇 배 낫겠다고 생각했다.
“보스와 늘 같이 있으면서 보스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보스의 사소한 습관까지 알아보고, 보스의 물건에 손댈 수 있는 건 너 밖에 없어. 보스가 그것들을 허락한 자가 너 뿐이라는 거야. 그것만으로도 앞으로 계속 제 1천왕이어야 하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아?”
디레스의 회유책이 점점 부드러워졌다. 첫 방이 상당히 격했기 때문에 이미 민의 귀는 디레스를 향해 활짝 열려있었다. 때문에 디레스가 논리적으로 억지스러운 말을 해도 민에게는 거름망 없이 고스란히 머리에 들어갔다. 그의 말이 다 맞는 것처럼 들렸다.
“뭐, 그래도 조금 마음이 놓이네.”
“네?”
“내가 스승으로서 네게 뭔가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말이야. 제자가 너무 잘난 나머지 내가 키웠다고 할 수 없었거든.”
형식적으로 디레스와 민은 사제지간이다. 하지만 민의 습득 속도가 너무 빨라서 디레스가 그를 담당한 기간이 극히 짧았다. 그건 최근에 새로 맡은 지원과 세나도 그렇다. 대항인 건 세나가 디레스의 아래에 들어갈 예정이라 좀 더 신경 써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디레스는 남모르게 회의감을 갖고 있었다. 제 1천왕의 스승이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버거웠다. 스승과 제자라고 부르기엔 심히 짧은 기간. 민이 스스로 제 1천왕이라는 사실에 회의감을 갖고 있을 때 디레스는 민에게서 ‘스승님’이라 불리는 사실에 회의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전투 기술을 가르치고 배워야만 사제지간인가요? 여태껏 스승님께 많은 조언을 구했고 훌륭한 조언을 얻었어요.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줄곧 스승님께 많은 것을 배우는 중이에요.”
민은 진심으로 아주 진지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디레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지금까지 가져왔던 감사의 마음을 막힘없이 술술 말로 표현했다. 항상 느꼈던 것이니 더듬거릴 필요가 없었다.
“하-. 그래. 너나 나나, 둘다 할 필요도 없는 고민을 안고 산 모양이다.”
디레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의 커피 잔은 이미 다 비운지 오래지만 여전히 그의 손에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가벼워지자 커피 잔은 제자리-컵받침 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가끔 이렇게 터놓고 얘기하는 것도 좋은데 말이지. 둘 다 너무 바빠서 탈이야. 솔직히 말해서 스승이기 전에 너 양아버지잖아. 부자지간에 돈독한 시간이 이리 없어서야 원.”
부자지간이라는 말에 민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직 아버지라고 제대로 부른 적이 없어서 그 단어가 새삼 낯 뜨거웠다. 민이 줄곧 스승님, 스승님하고 부르니까 두 사람이 양아버지, 양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길드원이 거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시아마저 새까맣게 잊고 있을 지도 모른다.
“보스께서 제게 내린 지령이 완료되면 지금보다 조금 여유로워 질 거에요. 그 때 틈틈이 놀러갈게요.”
“아직도 그 비밀 지령을 수행하고 있었어? 나 참. 보스는 대체 뭘 꾸미는 거야?”
디레스는 왼팔을 팔걸이에 걸치고 상체를 왼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였다. 2년 동안 민을 정신없이 바쁘게 몰아세운 그 지령이 상당히 궁금했다. 하지만 보스가 드러낼 수 없는 일이라고 철저하게 못 받아둔 터라 민에게도 캐물을 수 없었다.
“조만간 끝나요. 전에는 끝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조금씩 끝날 기미가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면 다행이고.”
이쯤에서 눈치 챘는가? 아니면 일찍 알아차렸는가? 민이 시아에게 받았다는 비밀 지령은 다름 아닌 휴와의 접촉이었다. 정기적으로 휴와 접촉하여 정보를 받아올 것. 이것이 민에게 내려진 극비 임무였다. 가끔 시아가 동행하기도 하지만 그건 시아가 길드원들의 눈을 피해 움직일 수 있을 때뿐이었다. 보스가 갑자기 자리를 비우면 금방 눈에 띠고 길드가 발칵 뒤집히기 때문에, 행동 패턴 자체가 비밀리에 움직이는 부류인 민에게 대신 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디레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끝을 흐렸다. 옛날 일을 잠시 생각한 듯 했다.
“지원이와 세나를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너는 보자마자 양자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을까?”
민도 폐허에서 디레스가 거둔 소년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아지트로 데려오지 않았다. 레어에서 정성껏 돌봐주고 일방적으로 양자관계를 맺었다. 민이 아지트에 와서 시아와 대판 뜬 건 그 후의 일이었다.
“귀염성도 없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상처만 잔뜩 입은 소년이 어디가 끌리셨어요?”
“그런 식으로 반문하면 진짜 할 말 없어지잖아.”
“저는… 그 때 스승님에게서, 친아버지의 모습을 봤어요. 성격이며 말투가 너무 비슷했으니까요. 그래서 초면에도 잘 따랐던 걸지도 몰라요.”
“처음 듣는 얘긴데?”
“부끄럽게시리 어떻게 말해요?”
표정 변화가 미세하지만 민은 확실히 부끄러워했다. 디레스는 민의 마음을 듣는 일이 처음이라 귀를 쫑긋 세우고 토씨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지금은…… 스승님은 스승님이니까, 아니 친아버지의 그림자에 겹쳐 보이지 않아요. 제대로 옛 일을 극복하고 현실을 바로 볼 수 있게 된 걸지도 모르죠. 으음…… 좀 거창한 것 같지만, 그러니까…… 스승님이 지금의 아… 버지로, 제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아버지’라고 부른 민도, ‘아버지’라고 들은 디레스도 모두 심장이 격하게 두근거렸다. 직접 ‘아버지’라고 부른 건 아니지만 민에게서 그 단어가 튀어나온 건 처음이었다. 디레스에게는 감동 그 자체였다.
“아버지라고 생각하다니. 난 엄연히 네 아버지고, 넌 내 아들이야. 생각하고 뭐 할 것도 없어.”
디레스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디레스의 체온을 직접 느끼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 두 사람이 서로 부자지간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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