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는 무덤덤한 얼굴 그대로 지상으로 내려갔다. 오리지널로 변하면서 육체가 두꺼운 사슬과 질긴 밧줄로 묶이고 검, 대못 등이 몸을 관통하며 사정없이 꽂혔다. 그 주박은 시아가 잠시 눈을 감은 5초 사이에 승화되어 사라졌다. (작성자 주 : 구속체를 얼마나 빨리 벗을 수 있는가도 키메라의 질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다. 보통 키메라라면 몇 십 분을 그대로 있어야 했을 것이다.)
“길 한복판에서 변해도 돼?”
“지금 어수선해서 날 신경 쓰는 인간은 없어.”
그러고 보니 지금 시아는 사람들의 시선이 덜 집중되는 곳이 아니라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 오리지널로 변했다. 주변의 건물은 근처에서 전해진 진동 때문에 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지진에 의한 외벽 균열, 날아든 파편에 의한 유리창 파손 등 자잘한 것들이 시선을 옮기는 족족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자신의 집 혹은 가게, 사무실 등을 손보느라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후작이 인간으로 돌아가면 내가 곤란하잖아. 이런 곳에, 그것도 대낮에 악마가 있는 건 아주 위험하니까.”
루시퍼는 검은 날개를 마법으로 가리고 겉모습을 인간과 흡사하도록 변형했다. 그래봤자 꼬리를 감추고 송곳니와 손톱 길이를 줄인 것에 불과했다. 피부색이나 눈동자색 등은 위화감이 느껴질 텐데도 그대로 뒀다. ‘공작급 악마니까 예의를 갖추고 있다. 그러니 인간의 기호에 맞춰주겠다. 하지만 공작급 악마다. 그러니 인간에 완전히 맞출 필요는 없다.’ 대강 설명하자면 이런 식이다.
“인간의 군경이 순대지 않는 3대 종족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악마야. 뭐, 간 큰 무모한 놈들은 무턱대고 덤벼들긴 하지만.”
민이 왕족 제 2별장으로 보낸 지휘관은 졸지에 ‘간 큰 무모한 놈’이 됐다.
“귀족급 악마한테 손대는 인간 중에 제대로 된 녀석은 드물지.”
“악마하고 제대로 맞장 뜰 수 있는 인간 순종은 인간문화재로 고이고이 기록에 남을 거야. 역사에 길이 남을 전사가 돼 봤자 다들 증거 없는 전설로 치부할 텐데 말이지.”
“와-. 역시 냉정해, 냉정해.”
시아는 목적지 없이 대로를 따라 걸었고 루시퍼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간혹 간판이 떨어져있거나 쓰러져 있으면 마법으로 원상 복귀했다. 물론 수리가 아니라 위치만 그대로 되돌리는 것뿐이다. 맨홀 뚜껑이 파손되어 빠질 위험이 있는 곳은 간단한 보호 마법으로 임시 안전 처리를 했다. 그리고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다친 들 고양이는 온전히 치료해줬다.
루시퍼는 드세고 잔혹한 바르베리트-진 후작이 인간 순종이던 시절에는 착하고 따뜻한 어린 소녀였다는 것을 새삼스레 떠올렸다. 선대 바르베리트 후작이 그녀에게 여러 가지를 남기고 사라지면서, 그녀는 악마보다 더 감정과 본능에 충실한 전사가 됐다. 절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철두철미한 모습에 익숙해졌는데, 옛 모습이 겹쳐 보이니까 가슴 한켠이 아파왔다. 그가 그녀에게서 옛 모습을, 원래의 그녀를 빼앗은 게 아닐까하는 죄책감을 저릿하게 느꼈다.
“언제쯤 용건을 말할 거야? 빨리 아지트로 돌아가지 않으면 민이 데리러 나올 거야.”
시아가 갑자기 뒤로 돌았다.
“으응?”
루시퍼는 상당히 당황해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탈리스만이 시아의 시선을 끌었다. 곧바로 표정이 확 구겨졌다. 인간의 피로 가득 찬 다이아몬드가 불길한 마력을 스멀스멀 풍기는 것이었다. 민의 흡혈본능을 자극할 만큼 피 냄새도 진했다.
“내가 만든 거 아니야.”
루시퍼가 선방했다. 안 그래도 시아가 뼈마디 소리를 우드득우드득 시원하게 내면서 주먹을 다듬고 있었다.
“크루세이더에서 새로 만든 무기야. 몰래 빼온 거라고.”
“그 녀석들은 이 와중에 또 뭔 꿍꿍이래?”
“에덴 때문에 자기네 키메라 군단에 뚫린 구멍을 이걸로 메우겠대.”
“뭐?”
웬만해서는 나오지 않는 앙칼진 목소리였다. 포커페이스를 버리고 오만상을 쓰며 불쾌한 감정을 그대로 내보였다.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무서워서, 루시퍼는 계속 말해도 되나 머뭇거렸다. 시아의 화를 직접 입는 건 무조건 사절이었다.
“잔머리 굴려서 일 벌이는 데는 크루세이더가 최고라니까. 에덴 이상의 황당한 쇼를 준비하는 거 아냐?”
“틀-리지 않아.”
시아 앞에서는 숨기는 것도 거짓말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들켰을 때 몇 배로 보복당하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지만, 그녀의 차가운 눈이 진실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여서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은 공작급 악마고, 눈앞에 있는 인간 여자 아이는 각성해야만 후작급 악마인데, 아니, 각성해도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데도 그녀를 대하는 것이 두려웠다. 혹시 자신은 공작‘급’이고 여자 아이는 ‘후작’이라서? 대공작 후보라서? 이도저도 아니라 순수하게 여자 아이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그를 옥죄였다. 타고난 카리스마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후-. 그 탈리스만으로 뭘 할 심산이지?”
시아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보스의 포커페이스로 돌아갔다. 어조도 낮아졌다.
“변종 사업의 확장이랄까…… 에덴이랑 비슷한 장난질이랄까…….”
“제대로 말해.”
“정보료는 선금이야.”
“이미 잔뜩 쫄아서 제정신이 아닌 주제에 무슨 선금 타령이야.”
루시퍼는 자존심이 구겨졌지만 그 이상으로 기가 눌려서 반박할 수 없었다. 알아낸 모든 것을 그냥 얌전히 하나도 남김없이 풀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방금 전까지 에덴의 몰상식한 짓거리와 페라이의 뜬금없는 등장 때문에 시아의 심기가 아주 많이 불편한 상태다. 이럴 땐 까불지 말고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루시퍼의 생활 철학이 머릿속에서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크루세이더가 키메라화 독약에 이어 좀비화 독약에도 손대기 시작했어. 금기의 끝을 볼 작정이야. 이 탈리스만은 인간 순종 전용 ‘좀비 쇱퍼(Zombi Schöpfer : 좀비 메이커)’라고, 아직 개발 중이라서 탈리스만 하나에 좀비 하나를 만들 수 있어. 다이아몬드 안에 있는 피는, 죽은 지 24시간이 안 된 인간의 사체에서 피를 한 방울씩 모아 99명분을 채운 거야. 그리고 좀비화 독약 한 방울로 마무리 했다고 해.”
“가장 고전적인 자주식 좀비화 주술이군.”
시아도 익힐 알고 있는 방법이었다.
죽은 시체가 되살아나는 언데드 마물 좀비는 키메라처럼 인위적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실은 지극히 자연적인 존재다. 그리고 존재해서는 안 될 금단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좀비를 제거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나 좀비를 만드는 일은 시대불문 장소불문 종족불문 절대 금기다. 그럼에도 어둠 속에서 금기를 행하는 이가 있기 마련. 좀비 연구는 고대부터 끊이지 않았다. 가장 흔하면서 확실한 방법은 웬만한 지식층 인재들은 다 알고 있다. 단순히 알고 있는 건 죄가 아니나, 호기심 때문에 한 번이라도 좀비를 완성하면 죄가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좀비든 이미 살아 움직이는 좀비를 모아서 다스리는 건 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좀비란 자연적으로 발생할 때도 최적의 조건 속에서 우연히 생겨난다. 인위적으로 만들려면 그 이상의 정성이 필요하다. 크루세이더가 응용을 시도하고 있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 역시 귀찮으리만치 손이 많이 간다. 만들고 싶은 좀비의 종족 순종이 죽은 지 24시간이 안 된 상태로 99개체가 필요하다. 일단 좀비를 만들면 비정상적인 체력과 생명력을 갖기 때문에 희생된 99명 이상의 이득을 얻을 수 있다. 대략적으로 좀비 하나당 해당 종족 순종 444개체의 몫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희생물의 4~5배 되는 이득을 본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하튼, 99개체에서 피를 한 방울씩 채취하고 고대 연금술사들의 최고 업적이라 칭송받는 비약 한 방울과 고루 섞는다. 이러고 보면, 피 한 방울을 얻기 위해 생명을 뺏어야만 하는 것도 웃긴 일이고, 가장 위대한 비약이 좀비화 독약으로 전락한 것도 웃긴 일이다. 마지막으로, 실수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완성된 액체를 반드시 ‘살아 있는’ 해당 종족에게 ‘먹여야’ 한다는 것이다. 죽은 자가 좀비가 되어 되살아나는 대자연의 법칙이 깨지는 순간이다. 산 채로 좀비가 되는 것이다.
“크루세이더 녀석들, 순종을 억지로 키메라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 좀비까지 만들어? 점점 타락 선을 타는군.”
키메라 생성 자체는 잘못되지 않았다. 강제 양산과 광기 투여가 문제였을 뿐이다. 그런데 좀비 생성은, 앞서 말했듯이, 그 자체가 죄악이다. 시아는 안 해도 되는 짓을 자청하는 크루세이더를 향해 조소를 날렸다.
“에덴이 키메라를 몰아 죽이는 거에 반발해서 순종 몰아 죽이기를 하는 게 아닐까?”
루시퍼의 말이 상당히 일리 있었다. 키메라만의 천국을 꿈꾸는 크루세이더의 입장에서 에덴의 속칭 ‘살덩어리 양성 사업’은 최악의 사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원래 초기의 길드란, 소수 종족 키메라가 살아남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 최초의 길드 에덴도 처음엔 키메라만 길드원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이야 순종들도 자기들만의 길드를 만들고, 가디안스처럼 혼합된 길드도 상당수다. 그래도 ‘길드’하면 ‘키메라’가 자동으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길드의 시조가 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조가 본성을 잃고 키메라 죽이기에 앞장서고 있다. 통탈할 일이다.
“탈리스만은 그저 휴대하기 편하기 때문에 만든 건 아닌 것 같은데?”
“역시 후작 나으리. 눈치가 빨라. 탈리스마에 들어있는 약을 먹은 좀비는, 탈리스만의 주인을 제 주인으로 인식하고 충실한 시종이 된다고 해. 좀비 지배 마법을 쓸 필요 없이 편하게 좀비를 거느릴 수 있게 특화한 거야.”
“이게 시험용이라면, 녀석들의 목적은 탈리스만 하나로 좀비 수 개를 지배하는 거군.”
“아마도 그러겠지.”
길드 가디안스의 보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녀와 가디안스가 크루세이더를 견제하는 것은, 엄연히 말하면, 그들이 키메라를 강제 양성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만든 키메라화 독약이 부작용이 강하기 때문이다. 키메라를 폭주시키고 자멸하도록 유도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크루세이더는 일부러 이 부작용을 이용해서 자살 폭탄 테러와 흡사한 사건을 곳곳에 일으켜 왔다. 가디안스가 막으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좀비화 독약까지 견제할 필요가 있을까? 선천적으로 좀비가 되지 않는 종족이 있는데, 천상계 종족, 정신계(무형체) 종족, 그리고 키메라다. 순종을 강제로 키메라로 만들어 폭주를 유도하는 건 원래 가디안스가 막고자 했던 일. 즉, 키메라 보호다. 그러니 순종을 좀비로 만드는 것까지 견제할 필요는 없다. 단순히 크루세이더가 벌이는 사업이라서 견제해야 한다는 이론은 유치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크루세이더가 좀비를 앞세워 덤벼든다면 분명 성가실 것이다. 어디까지나 성가실 뿐이지, 가디안스에서 좀비 하나 처치 못하는 얼간이는 없다. 과연 좀비화 독약에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크루세이더를 몰아 붙여야 할까. 결론은 이미 나왔다.
“뭐, 녀석들이 좀비로 군대를 만들든 뭐하든, 우리랑 상관없잖아.”
“그렇게 되나?”
루시퍼는 시아에게 수긍했다. 좀비화 독약은 가디안스에게 새로운 정보일 분이지 자극제가 되지는 못했다.
“금기를 깬 그들을 벌하는 건 다른 누군가가 하겠지. 우리가 할 일은 아니야.”
“다른 누군가……. 신? 신이 부활하면 크루세이더는 바로 사형대에 오르는 건가?”
“더 이상 신이 나타날 일이 없단 걸 알면서, 그런 재미없는 농담을 하다니, 어지간히 심심한가보네.”
시아는 굉장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적당히 까불고 눈앞에서 사라지라는 뜻일까? 공작급 악마가 품위 없는 얼굴로 지나치게 편하게 웃고 떠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옆 건물 2층에서 남작급 악마가 몰래 쳐다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시아가 아닌 다른 악마를 대공작으로 추대하는 자였다. 대공작 후보와 주변 인사의 행동거지를 조사하여 흠을 헐뜯으려는 것이었다. 시아는 대공작 자리에 관심 없지만, 자신에 대한 소문으로 악마계가 조금이라도 시끄러워지면 그녀를 지지하는 공작들의 잔소리를 듣게 된다. 그것이 귀찮아서라도 점잖은 척 고상한 척 겉모양새를 바람직하게 유지해야 했다. 세상만사 굴러가는 대로 편히 사는 것이 삶의 모토인 루시퍼는-그럼에도 뒤에서 조종하는 중상모략 실력에서 악마계 최고로 군림하고 있는- 일부러 숨어있는 남작급 악마를 곁눈질로 응시했다. 그가 잔뜩 긴장한 채 커튼 사이로 얼굴만 조금 내미는 모습이 루시퍼의 장난기를 자극했다.
“심심하긴. 돌아가면 일투성이인걸? 잠깐 콧바람 쇠로 나온 거야.”
“나도 바쁘니까 얼른 가.”
남작급 악마가 먼저 악마계로 돌아갔다. 루시퍼는 피식 웃고 나서, 시아의 오른손을 슬며시 잡고 검지에 끼워져 있는 사안의 반지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못된 꼬맹이를 혼내주러 가겠습니다.”
짓궂은 표정에 짓궂은 말투. 시아는 그 악마가 루시퍼 손에 어떻게 얼마나 농락당할 지 눈에 선했다. 그래도 우러러봐야 마땅할 상급 악마를 훔쳐본 괘씸한 하급 악마(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나눈 상·하급)를 동정하지 않았다.
“내 주위엔 피곤한 녀석들 뿐인가.”
시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아지트로 돌아가기 위해 오른쪽으로 몸을 틀자마자 우뚝 멈췄다.
“오늘… 무슨…… 날이야?”
운명의 장난치고는 가혹한 만남이었다.
“시아야.”
“엄……마.”
왕성을 중심으로 정 반대 도시에 살았더라면 정말 기막힌 우연이겠지만, 그녀의 부모가 사는 집과 가디안스의 아지트는 같은 도시에 있다. 하지만 집은 도시의 남동쪽 가장 끝이고 아지트는 북서쪽 가장 끝이다. 그래서 여간해선 외출을 안 하는 어머니와 아지트 근처에서 만날 가능성은 적다. 키메라라면 질색을 하는 어머니를 아지트 근처 동네에서 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시아는 순간적으로 ‘헉!’하고 오른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크게 실수했다. 어머니의 부름에 응하지 말았어야 했다. 모르는 척 지나갔어야 했다. -그래야 했다.
“시아야.”
<민아. 빨리 와.>
그녀의 어머니가 반가우면서도 꺼리는 듯한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올 때, 그녀는 매정하게도 그녀의 비서를 서둘러 불렀다. 그녀는 웃지 않았다. 더 이상 당신의 딸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오드아이를 드러내며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잘…… 지내나 보구나…….”
한 때 ‘엄마’라고 다정하게 불렀던 여성이 오드아이를 보자마자 움직임을 멈췄다. 마침 시아 옆에 민이 나타났다. 그는 한 눈에 상황을 파악했다. 시아와 그녀의 어머니 사이에 서서 시아와 마주봤다. 그녀의 어머니를 그녀의 시야 밖으로 밀어내야 했다. 서로 만났을 때 정신적 착란 현상을 일으키는 건, 의외로 시아 쪽이었다. 거부당하고 버림받았다는 거부감이 인간으로서의 그녀의 육신을 한 번 죽였다. 머리로는 키메라가 된 순간부터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때가 되니 몸이 격렬하게 괴로워했다. 며칠간 악마로서 악마계에서 모든 것을 잊고 지내야 할 정도로 상태가 불량해졌었다. 민은 그녀를 돌보면서 다신 그녀가 가족들과 만나지 못하게 할 것을 맹세했다.
“리아랑 호아가 학교에 몇 번이나 찾아갔는데 한 번도 못 만났다고 아쉬워하더라.”
시아를 지키기 위한 민의 공로였다.
“배 아파 낳은 딸이잖아. 누가…… 여기에 오면 볼 수 있을 거라고 하더라.”
“멈춰!”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어머니의 손동작을 정지시켰다. 두 손이 갈색 가죽 파우치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그 때, 시아와 민의 시선은 반사적으로 소리의 소재지로 향했다.
“누가 당신에게 이 약을 줬습니까?”
상공에 떠 있던 솔리가 매처럼 재빠르게 날아와서 어머니의 손에 잡힌 엄지만한 약병을 낚아챘다. 짙은 푸른색 유리병에 크림슨 코르크. 기프테 폰 크로이추크였다.
“강 솔리?”
“당신 이게 무슨 약인지 알고 있습니까?”
지금 솔리에게 보스는 뒷전이었다. 자작급 뱀파이어의 수려한 외모가 전사로서의 오로라를 풍기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시아의 어머니는 갑자기 달려든 뱀파이어 여성을 보고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보스. 여긴 제게 맡기고 아지트로 돌아가세요. 스승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시아는 전신의 근육이 굳는 와중에 약병을 응시하며 망설였다. 하루 안에 크루세이더의 상품을 전부 구경하게 되다니, 하루 안에 뜬금없는 만남을 수차례 가지다니, 내장이 뒤틀리고 한 바탕 입 밖으로 쏟아내고픈 심정이었다. 하지만 한 때 ‘엄마’라고 불렀던 여인이, 자신에게 이 육신을 준 여인이 문제의 약을 가지고 있다.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역시 피는 진하기 때문에? 크루세이더의 독을 견제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시아는 자신을 부축해 준 민을 조심스레 밀쳤다.
“솔리를 이리 불러.”
근육 경직 현상 때문에 그녀가 솔리에게 갈 수 없었다.
“보스.”
“얼른 솔리 불러. 저 아줌마, 스릴러엔 쥐약이란 말이야.”
“아, 네. 강 솔리!”
솔리가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시아와 민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뵙니다, 보스 그리고 캡틴.”
반가움이 흠뻑 묻어난, 어린 아이 같은, 설렘이 한 가득 담긴 인사였다. 전사의 오로라가 사라지고 자신의 매력을 돋보이는 우아하고도 발랄한 오로라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시아의 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주저앉았다. 다리의 힘이 풀린 것이다.
“솔리야. 그 약, 나한테 줄래?”
솔리는 고분고분 시아의 곁으로 갔다. 근육 경직이 풀리지 않는 시아 대신에 민이 약병을 받았다.
“이봐요, 거기 아줌마.”
시아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시선을 약병에 두면서 어머니를 불렀다.
“이거 마시면 키메라로 변하고, 미쳐 날뛰고, 내 손에 죽어. 내가 하는 일이 이 약 먹고 미친놈들 제거하는 아주 더러운 일이거든.”
어머니에게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발작이 일어났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뇌까지 터질 것 같았다. 머리에서 맥박이 느껴질 즈음에, 시각과 청각이 노이즈를 일으켰다. 자신을 부축해주고 있는 민에게 최대한 의지했다.
“그 사람이 그걸 네 앞에서 마시면……, 다시 엄마라고 불러줄 거라고…….”
살짝 충격을 받아서 목소리가 떨렸다. 겨우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시아는 그녀의 목소리가 고막에 닿자마자 몸을 파르르 떨며 괴로워했다. 솔리는 시아가 가족들에게 정체를 들켰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보스가 왜 이리 약한 모습을 보이는지 걱정이 차곡차곡 쌓였다.
“마담.”
민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리고 시아가 조금은 편할 수 있게-공주님 안기로- 안아들었다.
“보스의 말씀대로 매우 위험한 약입니다. 누구에게 받으셨습니까?”
“그게…… 인간으로 변한 드래곤이었는데…….”
“알프레드 파트만.”
“네! 그 이름이었어요.”
중간에 끼어든 솔리의 직구를 시아의 어머니가 제대로 홈런을 때렸다. 솔리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고개를 왼쪽으로 홱 돌렸다.
길드 크루세이더의 츠뵐프 리터 중 데어 엘프테(der Elfte : 11번째-제 11기사), 알프레드 파트만. 인간- 골드 드래곤 키메라다. 길드 에덴 때문에 크루세이더 전체가 마비 상태일 때도 단독 행동으로 기프테 폰 크로이추크를 성공적으로 유포한 악덕 암흑 상인이다. 솔리는 츠뵐프 리터의 현황을 조사하던 중에 알프레드가 가디안스의 인맥을 들쑤시고 다닌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을 시아에게 직접 알리기 위해 아지트로 향하다가 기프테 폰 크로이추크를 가진 시아의 어머니를 만난 것이다. 내키면 언제든 돌아와도 좋다는 보스의 전언이 최근에 있었기에, 다른 길드원들의 반응은 생각하지도 않고, 크루세이더 쪽 일도 완전히 내팽개치고 홀연히, 무작정 찾아온 건 조금 위험하긴 하나, 그녀다운 행동이었다.
“그 자는 우리 보스의 적입니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는 놈이죠.”
솔리의 목소리에 살기가 깃들었다. 그 살기를 민이 가만히 진정시켰다.
“보스를 아지트에 모시고 갔다 올 테니 내가 올 때까지 저 분 곁에 있어줄래?”
“Ja, mein Kapitän."
솔리는 민의 미소에 바로 감화되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냉정하고 잔혹한 뱀파이어 전사로 알려져 있지만, 시아와 민 앞에서는 듬직하면서도 얌전한, 말 잘 듣는 충견이 된다. 이처럼 보스와 캡틴이라고 하면 죽고 못하는 그녀가 용케도 크루세이더에서 버텼다. 대견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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