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1. 이것은 PandoraHearts(판도라하츠) 팬소설입니다!
2. 나름 글렌 바스커빌과 레이시 커플링이랄까요? 레이시가 실존했던 여성이라 가정하고 쓴 소설입니다.
3. 팬소설에는 너무나 실력이 미약한 저인지라 졸작이 싫다 하신 분은 ‘뒤로’퍼튼이나 ‘백스페이스’를 살포시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4. 타 사이트에서 장편 판타지 두 작품을 동시 연재하는 관계로 연재 속도가 늦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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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향기가 진하게 풍기는 정원에 검은 정장 위에 칠흑에 가까운 검은 망토를 걸친 사내가 서있었다. 새빨간 장미가 그를 향해 피어있는 장미 정원. 분수도, 티 테이블도 없는 그곳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과 잘 다듬어진 장미 화단이 전부다. 바스커빌 가의 장미 정원은 이토록 단조롭다. 붉은 장미의 진한 향기에 현기증이 날 법 하건만, 당주 글렌 바스커빌은 먼 곳을 응시하며 조용히 서있을 뿐이다. 하늘에 구름이 떠다니고, 그 중 한 덩어리가 태양을 지나칠 때, 글렌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가 다시 밝아진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햇빛 때문에 눈을 가늘게 떴다. 고개를 숙이니 그에 맞춰 실바람이 불고, 장미 향기가 콧속으로 스며들어, 답답한 머릿속을 조금 개운하게 풀어줬다.
“여긴…… 어딘가요?”
연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흑장발의 아가씨가, 그의 왼쪽에 있는 장미화단 건너에서 가만히 서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글렌은 평소에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건만, 바스커빌 가의 저택에 외부인이 들어와 있는 것에 놀라고, 세상에 장미보다 더 빛나게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는 사실에 놀란 나머지 넋을 잃고 말았다. 그녀 주변에 있는 장미가 전부 무색해질 만큼 그녀에게서 빛이 났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어비스 월드에 있었는데…….”
그녀는 점점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급기야 붉은 눈동자 아래로 투명한 눈물 구슬이 아롱아롱 맺혔다. 두 손으로 주먹을 꼭 쥐고 가슴 높이로 들어 올리더니 가운데로 살포시 모으며 겁먹은 병아리처럼 떨었다. 눈물이 흘러내릴락 말락 아슬아슬하게 속눈썹에 매달려 있었다.
글렌은 난생 처음 느끼는 두근거림 때문에 쉬이 진정하지 못했다. 망토의 매무새를 고쳐보고, 헛기침도 해봤다. 그런데 그녀를 다시 볼 때마다 심장 박동이 재차 빨라지고 빨라지고, 강해지고 강해졌다. 설렘. 그것은 난생 처음 겪는 느낌이지만 가히 나쁘지 않았다.
“아가씨.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겨우 두근거림에 익숙해지고, 가까스로 그녀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그는 최대한 온화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대했다.
“거울방에 있었는데, 분명 거울방이었어요.”
비 맞은 강아지처럼 오들오들 떠는 아가씨. 글렌은 주변을 둘러봤다. 수상한 기척은 고사하고 그녀가 지나다닌 흔적조차 없었다.
“거울방이라니, 그러면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겁니까?”
“모르겠어요. ……. 체셔. 그래, 체셔. 그는 어디 있지요? 분명히 옆에 있었는데……. 그가 길을 잃은 건가요, 아니면 제가 잃은 건가요?”
그녀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워했다. 가슴에 바짝 붙인 주먹 쥔 두 손은 더 힘이 들어가고, 가까스로 속눈썹에 걸려있던 눈물은 결국 흰 피부를 따라 미끄러지듯이 흘러내렸다.
글렌은 당황스러웠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위로해주고 싶지만, 그녀는 허리 높이까지 오는 장미화단 건너에 있었다. 그것을 넘어가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지만, 근엄한 귀족 체면에 지금 같은 상황에서 억지로 꾸역꾸역 넘어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넘어간다 할지라도, 그의 몸은 날렵하지 않아서 자세가 상당히 어정쩡하고 깨나 시간일 걸릴 것이다. 그야말로 혼란과 불안함 때문에 울고 있는 아가씨에게 실례다. 장미화단 끄트머리까지 걸어가서 빙-돌아간다? 어느 쪽으로 돌아가나 최소한 200m를 더 가서 다시 그녀를 향해 200m를 가야하는데, 400m를 걷는 동안 여성을 혼자 울게 놔두는 실례를 저지르게 된다. 글렌은 여자 형제도 없고 사교계에 얼굴을 비치는 일도 거의 없어서,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막막했다. 지금 당장 가까이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혼자 울게 둘 수도 없고,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는 것 같으면서도 이리저리 방법을 궁리했다. 우는 모습을 보니 차마 입도 잘 안 떨어졌다. 그래도 그녀를 혼자 울게 두고 가버린다거나,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거울방에서 체셔라는 분과 같이 있었습니까?”
“네.”
그녀는 소매를 눈물을 닦고 훌쩍였다. 모르는 곳에 혼자라는 생각 때문인지 몸이 전체적으로 경직됐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낯선 이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글렌 자체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낯설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 자체가 혼란스러워서 자신에게 잘해주려는 그를 가깝게 대하지 못할 뿐이었다.
“혹시 어디의 거울방인지 아십니까?”
글렌은 평소엔 짓지 않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대했다. 붉은 망토를 걸치고 다니는 백성들(바스커빌 가의 백성 혹은 어비스의 사자)이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진귀한 따뜻함이었다. 분명 바스커빌 가의 당주에게 해당하지 않는 수식어지만, 누구도 부정하지 못 할 정도로 그와 잘 어울렸다. 아마 글렌은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인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더더욱 재미있는 건, 타인에게 흥미 따위 갖지 않는 그가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체셔가…… 어비스 월드의 거울방이라고 했어요.”
좀체 진정이 되지 않아서 말하는 중간중간 훌쩍거렸다. 그런데 한참동안 글렌의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모르세요?’라는 표정으로 가까스로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빙그레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것은 만든 표정이었다. 글렌은 ‘어비스’가 언급되자마자 무서우리만치 즉각 미간을 좁히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상태로 빠르게 뭔가를 생각하고는 그녀와 눈이 마주칠 즈음에 가짜 표정을 만들었다.
“어비스에서 오신 손님이었군요. 그곳은 제가 잘 아는 곳입니다.”
“정말인가요? 저, 체셔에게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밝아진 듯 하면서도 아직 침울했다. 그녀는 화단에 바짝 붙어서 그의 눈을 뚫어지도록 간절히 응시했다.
“물론입니다. 다만…….”
그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조심스레 피하며 뜸을 들였다. 그 사이에 그녀의 눈에 간절함이 몇 배로 불어났다.
“어비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곳입니다. 그래서 한 번 문이 열렸다 닫히면 다시 열릴 때까지 몇 년의 시간이 걸립니다.”
“며, 몇 년……. 얼마나 걸리나요?”
“어비스의 의지가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어비스의 문이 한 번 개폐할 때마다 방대한 양의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에 최소한 3년 있어야 다음에 문을 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글렌은 사뭇 진지하게 거짓을 설명했다. 그가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그녀를 곁에 두고 싶도록 그의 마음을 빼앗은 아리따운 아가씨는, 아는 것이 전혀 없고 지나치게 순수해서 그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리고 실망의 기색을 그대로 드러냈다.
“저도 어비스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이곳에 사는 저에게 있어 어비스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가보고픈 마음에 어비스로 가는 방법을 연구 중입니다. 믿음직스런 동료들이 제게 많은 정보를 주고 있어 생각보다 수월하답니다.”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어비스의 의지를 거슬러 내가 당신을 어비스로 보내줄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세상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흑장발의 아가씨는, 한 번 더 잠시라도 생각할 겨를 없이, 그의 말에 넘어가버렸다. 그 증거로,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고 싶다는 듯이 간절하고도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냈다.
“정말 체셔에게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네. 어비스로 통하는 문을 열 수 있습니다. 물론 이론상의 이야기입니다. 아직도 지식이 부족해서 실제로 해 볼 수 없습니다만, 문이 스스로 열리기 전에 반드시 제가 먼저 열겁니다.”
사람들을 선동하듯이 강렬하게 외치는 것도 아니고, 웅변이나 호소하듯이 목소리에 힘이 실린 것도 아니었다. 전문가와 같은 신뢰성이나 설득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더욱 절묘한 건, 그녀가 오늘 그를 처음 만났다는 것이다. 어디서 마주친 적도 없고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고 멀찍이에서 모습을 본 적도 없고 다른 이에게서 전해들은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의 말은 그녀에게 무한한 믿음과 기대를 안겨줬다. 그녀는 무심코 그의 말이 무조건 맞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따른 신처럼 그를 믿었다.
“그 때까지 머물 곳이 없다면 당분간 제 저택에서 지내시겠습니까?”
“그래도 괜찮은가요?”
“물론입니다.”
“정말 친절한 분이세요.”
의심일랑 할 줄 모르는 순수한 아가씨. 눈물로 촉촉히 젖어있던 눈가는 어느새 물기를 찾아볼 수 없도록 말랐다. 그녀는 입고 있는 연노란색 드레스에 어울리는 미소를, 수줍어하면서도 화사하게 지어보였다.
그 미소에, 잠잠해졌던 글렌의 심장이 미친 말이 질주할 때의 발굽소리처럼 요란한 고동을 일으켰다. 가슴에 손을 대지 않아도 심장이 얼마나 격하게 뛰는지 알 수 있었다. 육체가 심장 그 자체인 것처럼 몸으로 직접 두근거림을 느꼈다. 주변에 여자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메이드에서부터 사교계의 마담까지 많은 여자를 봐왔다.(어울린 적은 없지만 보는 건 많이 했다.) 그녀들의 미소며 갖가지 표정도 봐왔다. 그런데 이토록 그의 심장을 흥분시키는 이는 전혀 없었다. 어비스에서 예고 없이 나타난 아리따운 여성만이 그의 이성과 감정을 양 손에 하나씩 쥐고 세차게 흔들었다. 그는, 이렇게 자제 못하는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봐도 신기했다.
“어비스의 문을 통과하는 일이 비교적 피곤한데 저택에 들어가서 쉬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글렌은 무도회에서 여성을 에스코트하기 전에 춤을 청하듯이 정중하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그녀도 양 손으로 드레스를 살짝 들고 허리를 숙였다.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였다. 교육을 작 받은 귀족가 영양 티가 제법 났다. 글렌은 높은 장미화단을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모습 때문에 ‘풉’하고 웃어버렸다.
“어쩌죠? 이 화단 때문에 제대로 에스코트를 못하게 됐습니다.”
“에스코트? 아, 손잡고 다니는 거 말이죠? 왜요? 이 위로 팔을 뻗으면 할 수 있잖아요. 체셔랑은 어디서든 어떻게든 항상 손을 잡았어요.”
그녀는 너무 수선스럽지 않은 정도로 발랄하게 생긋 웃었다. 아직 옹알이를 하는 어린 아이가 방긋 웃을 때 짓는 그 표정과 매우 흡사했다. 글렌은 노림수 없이 꾸미지 않은 순수한 그 미소가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그가 그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의 눈빛에 뚜렷이 표가 났다. 그녀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는 망토 속에서 오른손을 꺼내 그녀를 향해 화단 위로 자연스럽게 내밀었다.
“그러면 저택까지 손을 잡고 가실까요?”
“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선뜻 잡았다. 남성의 손 위에 여성의 손을 살짝 얹는 사교계 에스코트가 아니라, 가까운 신체접촉이 부끄럽고 어설픈 커플처럼 손가락 부분만 슬쩍 겹쳐 맞댔다. 꼭 마주 잡을 수도 있지만, 글렌은 아직 한참 이르다며 자신을 자제시켰다.
장미정원을 거니는 내내 그녀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 눈웃음 지었다. 그와 어울려, 입가에는 시종일관 단아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주위를 둘러볼 때도 방정맞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산수를 감상하는 선비처럼 느긋하게 눈앞에 흐르는 풍경을 음미했다. 글렌은 이런 그녀의 고요한 아름다움에서 신비로운 마력을 느꼈다. 그 어떤 귀족가 영양이 아무리 교육을 잘 받았어도, 그녀와 같은 분위기를 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가진 화사한 듯 단아한 듯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때론 화사하고 때론 단아하게 때에 맞는 분위기를 단지 표정과 몸짓만으로 연출하는 성향은, 타고 났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아직 자기소개를 못했네요. 전 레이시예요. 그런데 모두 저를 ‘어비스에 한 명 뿐인 인간’이라고 불러요.”
정원을 지나 저택의 문 앞에 도착했다. 흑장발의 아가씨는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멈춰서더니, 글렌의 심장을 간지럽히는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줬다. 걷는 내내 침묵이더니 불현듯 내뱉는 말이 이것이었다.
글렌 역시 신사로서 그녀의 말에 대응했다.
“저는 글렌 바스커빌입니다. 바스커빌가의 저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프라우라인 레이시(Fräulein Lacie : 레이시 양).”
그는 자신의 오른손과 맞닿아있는 그녀의 왼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서 손등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손등 키스. 그것은 상대 여성에 대한 존경심과 진실함을 담은 예우였다. 바스커빌가의 당주에게서 손등 키스를 받은 여성은 아마 현 국왕의 비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흑장발의 신비로운 아가씨, 레이시가 처음 만난 날, 통성명을 하는 자리에서 그것을 받아냈다. 만약 그녀가 사교계 여성이라면, 이 사실을 두고두고 뻐기고 다닐 만한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손등 키스를 모르는 순진한 레이시는 양 볼이 붉게 물들 뿐이었다. ‘입맞춤’의 뜻을 모르면서도, 손등 키스 한 번에 본능적으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글렌은 그녀가 수줍어하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모든 충동을 억누르고 손등 키스에서 그친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했다. 그녀의 손을 잡은 오른손 대신, 망토 속에 숨긴 왼손을 손톱 때문에 손바닥에 피가 맺힐 만큼 세게 주먹 쥐었다. 그리고 인자한 표정을 짓느라 애먹으면서도 그녀를 바라보는 애틋한 눈빛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
문 너머 저택 안에서 사용인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글렌은 문을 열기 전에 레이시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귀에 한 마디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손잡고 있을 테니까 무서워하지 말아요.”
장미정원에 있을 때부터 슬그머니 걸쳐 잡았던 손. 그는 좀 더 바짝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맥박이 희미하게 그녀에게 전달됐다. 그녀는 체셔의 과보호 덕분에 손을 잡고 다니는 일이 익숙한데도, 그의 체온이 더 가깝게 느껴지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콩닥거렸다. 아주 가까이에서 귓바퀴를 자극하는 그의 목소리와 숨결 때문에 머릿속이 아찔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런지 알 수 없었다.
“혹시 긴장했습니까? 걱정 말아요. 졸대 손 놓지 않을 겁니다.”
다시 한 번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꼭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맥박은, 그의 것도 그녀의 것도 모두 빨랐다. 누가 이렇게 고동치는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두 사람의 맥박이 빠른 속도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일치했다. 마주 잡은 손과 귀에 닿을 듯 말 듯한 숨결은 마법의 준비 단계.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이는 약속의 말은 마법의 주문. 레이시는 이 순간부터 글렌의 마법에 걸렸다. 어느 샌가 그녀의 왼손에도 힘이 들어가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가 원해서가 아니라, 주문을 듣는 순간 그의 마법에 걸려, 그가 원하는 대로 그녀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이 닿을 듯 말 듯 아주 가까워졌다.
글렌은 레이시에게 마법을 건 것으로 만족했다. 왼팔로 그녀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을 수 있는 거리인데도, 이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망토 속에서 왼팔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니까 겁먹지 말고, 내 손 놓고서 도망가지 말아 줘요.”
문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기 직전에 마지막 주문을 걸었다. 레이시는 수줍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글렌은 세 번의 주문으로 레이시의 머리와 가슴에 ‘글렌 바스커빌’을 새겨 넣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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