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 인과응보의 이유
“정말로 혼자 나오는군.”
기가 속으로 염려하면서 겉으론 자신만만하게 말한 것처럼 성이 약속 장소로 오고 있다. 주변에 그 누구의 기척도 없다. 나와 기, 여기로 오고 있는 성 뿐이다. 성은 내가 친 주술 때문에 일정 범위 안에 들어오지 않는 이상 내 기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느낀 순간 성수처형관의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걸린 것이므로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싸움에 기꺼이 응해야 한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내 덫 아래에 기의 덫도 깔려있다. 암문으로 깐 주술인데 이 역시 기만 할 수 있는 것이라 성이 날뛰어봤자 두 덫을 다 깰 수 없을 거다. 그 안에 우리가 가차 없이 죽여 버릴 테니 말이다.
“제 이름과 지위 그리고 자존심에 걸고서라도 혼자 오는 거겠지.”
내가 성이라도 혼자 행동할 거다. 자신이 한 말에 책임지는 것이 지위 높은 이일수록 당연해 지는 일이니 탐탁지 않아도 억지로 지키려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일은 상대가 성이라서 가능한 작전이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디 소속이든 다른 성수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빨리 끝내야 해.”
“내 덫 안에선 터지고 날아가도 덫 밖에서는 전혀 알 수 없으니까 괜찮아.”
성수처형이 공개적인 일이지만 간혹 쥐도 새도 모르게 해야 할 때도 있다. ‘현무=성수처형관=왕의 자객’이라는 공식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걸 증명하는 것이 우리 발밑에 깐 덫, 암실척쇄(暗室斥鎖)다.
“덫을 유지하면서 성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겠어?”
아직 내 실력에 주술의 복합사용은 무리다. 하지만 특수 몇 가지 주술은 복합적 사용에 전혀 개의치 않은 것도 있다. 안 그러면 내가 어떻게 자신 있게 이 덫을 깔 수 있겠느냔 말이지. 열심히 기고 날고 해도 상관없다.
“나 걱정할 겨를 있으면 성 앞에서 기죽지 않게 자기 최면이나 걸지?”
“누가 기죽는다고! 자꾸 그런 식으로 굴 거야?”
화내도 화내는 것 같지 않은 사람 있다고 기가 그 부류다. 언성만 열심히 높이지 실질적으로 ‘무서움’이 빠져 있다. 소리 지르는 건 누가 못하냐고. 그저 큰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는 것뿐이지 그 후는 뭐라 하던 파리 날개 비비는 소리 수준이다.
기가 성에게 붙잡혀 이리저리 휘둘린 세월이 만만한 햇수가 아니다. 그 때문에 기는 성에게 본능적으로 상처를 입힐 수 없다. 상대적으로 어린 마음에 말로 열심히 대들 수야 있지만 검을 들이대거나 공격적 주술은 쉽게 못한다. 어렵게라도 못할 수 있다. 그러니 기에게서 후방 도움을 받는 걸로 만족하고 내가 성의 목을 쳐야 한다. 꼭 목을 칠 게 아니라 심장을 찔러도…… 맙소사, 혼자 말장난할 때가 아니잖아.
“왔다.”
드디어 성이 내 덫에 들어왔다. 반경 500m의 큼직한 덫이다. 이리저리 뛰어다니기에 부족함 없는 공간이다. 몸뚱이가 불량인 내게는 터무니없이 큰 규모지만 죽음을 피하기 위해 발버둥칠 성에게는 적당한 크기일 것이다.
“성이 멈췄는데?”
“내 기를 느끼고 당황했나 보지.”
암실척쇄에 들어오기만 하면 대기에 가득히 깔려 있는 내 기를 느낄 수 있다. 성이라면 이게 암실척쇄라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자, 이제 어떡할 거지? 너무 오래 생각해도 좋지 않다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얼른 볼 장 보잔 말이지. 죄인 백호 성.
[휘휘휘이익, 쾅!]
이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시원한 공격이 들어왔다. 공격 크기를 보아 하니 인간형인 것 같다.
“한 쪽이 죽을 때까지… 였지?”
“겁먹은 거야? 이 한 발에?”
“설마.”
이제 차근차근 성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성의 인간형은 처음 본다. 키가 아빠보다 큰 걸? 아, 아빠가 작은 키였구나. 뭔가 답지 않게 길게 땋아 내린 머리가 시선을 끈다. 세세하게 꼬집으면 그렇지 않은데 전체적으로 호전적 분위기를 풍긴다. 저돌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문처럼 지능형 돌진도 아니다. 끊고 맺는 게 확실한 호전형이 딱 맞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겨우 성수처형관이란 이름으로 날 죽이려는 건가? 꼬마 현무.”
저 꼬마 소리는 이제 귀에 딱지 앉다 못해 무감각이 돼버렸다.
“왕의 명령이라면 얌전히 죽어줄 건가요?”
내가 생각해도 참 천연덕스럽다. 우식지도 않는 말이다. 어느 한 쪽도 여유 부릴 수 없는 상황에서 짧은 대담을 아쉽지만 마쳐야겠지.
“그 현무검은 주인의 의사를 너무 잘 반영하는군.”
“전 그렇게 어려운 말은 못 알아듣거든요.”
[쿠광!]
역시 손의 감각이 별로다. 보호막을 금조차 내지 못했다. 어차피 위협조로 날린 거니까. 그래도 면상 쪽에 날린 건데 좀 더 세게 날릴걸.
[콰광!]
“시간 끌면 안 돼. 최대한 빨리 끝내야지.”
정말 기가 성한테 공격한 거야? 이거 이거 발전이라 말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상대가 상대이거니와 내 몸 상태를 봐서 빨리 끝내는 쪽이 좋지. 서로 실력은 이미 잘 알고 있겠다, 탐색전은 이걸로 끝내고 바로 그 주술들을 써야겠다. 기의 눈치를 보아하니 나와 같은 생각인가 보다. 의견이 일치한다면 주저할 거 없다.
“죄압(罪壓).”
죄압. 왕에게만 허락된 주술. 태생적으로 ‘왕’을 달고 난 기는 당연히 죄압을 쓸 수 있다. 정한 목표물이 그의 죄량에 따라 중력을 받는 주술로 중죄인에게 주로 쓴다고 한다. 기가 주저 없이 성에게 이런 대담한 주술을 쓸 줄이야, 다시 한 번 놀란다.
“이, 이 녀석들.”
성이 양손으로 땅을 짚고 엎드려 있는데다가 그 땅이 살짝 밑으로 꺼졌다. 죄압 상태에서 내 주술로 성을 공격할 수는 없다. 서로 타이밍을 맞춰서 주술을 풀고, 새 주술을 걸고 해야 한다.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기와 호흡 맞추는 것쯤이야 아빠랑 맞추는 것 보다 쉽다.
“크아아앙!”
“으읏.”
맙소사. 본체로 변하면서 죄압에서 벗어나다니…….
“괜찮아?”
“응. 역시 성이랄까? 나도 본체로 변해야겠어.”
“가만히 있어.”
“뭐?”
성이 기의 주술은 풀었지만 내 덫은 건재하고 기의 암문 속 주술로 대기 중이다. 그리고 내 덫 안인 이상 내 주술은 평소보다 훨씬 더 잘 걸린다. 워낙 특권이 많은 성수다보니 특이한 주술 몇 가지가 가능한 거다. 이게 그 중 하나다.
“형형(刑形).”
암실척쇄 내에서만 가능한 주술이다. 상대를 억지로 인간형 혹은 소수형으로 만드는 데 성은 그 힘이 강해서 소수형까진 변하지 않는다. 인간형으로 만드는 데도 힘이 꽤나 소모된다.
“몇 번이고 변해 보라지.”
성은 당황한 모습이 역력하다. 내게 맡겨진 처형감인데 내가 맘대로 못하면 어쩌는가. 자, 죽기 전에 발악하는 건 좋은데 권장하지는 않겠어. …제가 그 목숨 가져가기 쉽게 동참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답니다. 꼭 협조해 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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