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0 비상이다! 모두 집합!
윌랜드, 세이버, 드렌필드, 플리. 4개 국가로 이루어진 세계, 체이서스에 평화로운 외교관계는 기대하기 어렵지만 이번 사건처럼 환장할 만한 비상시기는 역사상 없었을 겁니다. 전투 국가 중 하나이며 체이서스에서 최강국인 플리에서 나머지 삼국의 성전을 없애기 위해 암조직을 만들었다나요. 각 국가끼리 사이는 좋지 않아도 성전은 절대 손대지 않는 게 오랜 법도인데 그걸 어기겠다고 하는 겁니다. 물론 플리에서는 이 일을 비밀리에 추진했지만 소울의 세이버를 부수는데 실패해서 계획이 체이서스 전체에 알려져 버렸지요.
자, 자, 쉿! 이 심각한 사태에 대비해서 윌랜드, 세이버, 드렌필드의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대책 회의를 하고 있어요. 솔직히 플리의 힘이 워낙 강해서 이 삼국이 힘을 합쳐도 얼마나 대항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런데 국가의 대표라 하면 원로단이 일반적인지 않은가? 쿡, 이날 모인 대표들은 성전을 지킬 전사들이랍니다.
“이야. 세상 어느 역사에 삼국이 동맹을 맺은 기록이 있을까?”
“비이. 자구 촐싹거리면 이 역사에 기록될 자리에서 제명되는 수가 있어.”
“옙. 명심하겠습니다.”
윌랜드의 패시 일리안, 치니비 일리안 쌍둥이입니다. 패시가 말한 ‘비이’는 치니비의 애칭이고 패시만 부를 수 있어요. 윌랜드의 대표는 청 세 명인데 나머지 한 명은 저, 엑시델 크로네스테입니다. 이 역사적인 날부터 장대한 일들을 기록할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 거대 사건의 종지부 즈음에 스스로 정한 임무지만 반대하는 이가 아무도 없어서요.
“두 다리로 걷는 느낌은 언제 느껴도 이상해요.”
“불편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시죠. 제가 대신 두 다리가 되겠습니다.”
세이버의 비스 홀드와 캐스트 이피머스입니다. 비스 홀드는 너무 아름답게 생긴 성녀고 캐스트 이피머스는 생긴 거랑 다르게 성격 자체가 상당히 느끼한 왕궁기사입니다. 캐스트는 제가 좀 면식 있는 사인데 저도 그의 느끼 공격에 당할 뻔한 적이 있답니다. 이 캐스트랑 같이 세이버의 대표가 된 비스 성녀만 불쌍하지.
“그린, 일어나.”
“좀 만 더.”
“폴. 놔둬. 그린은 어제도 몬데비언이랑 한탕 했어.”
드렌필드의 폴 나이티, 그린 디미누엘, 지브릴 바운테스터입니다. 딥데어는 전투 종족이다 보니 싸움이 그들의 유희거리라는 군요. 그들의 문화에 제가 뭐라 할 순 없지요. 그런데 폴 나이티라고 하면 체이서스 전체에서 유명한 소드마스터!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패시와 치니비가 긴장을 잔뜩 했다는 잡담 한 구절 추가합니다.
체이서스의 영웅 아닌 영웅들 소개를 이쯤 하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의장이니 그런 거 없이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서 참석한 대표 회의입니다.(아더 왕의 원탁의 기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쉽겠네요.)
“아무리 힘만 믿고 설쳐대는 녀석들이라지만 이번 일은 그냥 그들의 본성을 따라 멋대로 휘젓는 건 아니야. 답지 않게 치밀하고 조직적이랄까.”
상시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는 지브릴이 플리의 행각에 대해 짧은 평을 했습니다. 이 평에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 역시, 몬데비언의 성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플리에서 작당하고 소울의 세이버를 노렸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제 귀를 의심했었거든요.
“몬데비언의 신체적 특성 상 소울의 세이버에 접근하기란 웬만한 각오 아니면 힘들긴 하지.”
“그래서 저희가 더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패시는 오른손 검지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그의 훌륭한 두뇌를 회전시키는데 캐스트가 예의바른 말투로 패시의 말을 받았습니다. 치니비였다면 그 똑같은 말을 촐싹거리며 말했을 텐데, 캐스트는 역시나 왕궁기사의 품격과 타고난 호스트 필로 소화하더군요.
“고전 마법을 쓸 수 있는 종족이라면 소울과 딥데어인데 몬데비언에서는 가뭄에 콩 나듯 마법사가 나타나지?”
“응. 고전 마법이 완전히 불가능한 종족은 우리 뉴노멀뿐이야.”
“덕분에 체이서스에서 소드마스터가 가장 많이 배출되잖아. 나랑 패시처럼.”
잠깐 저희끼리의 대화가 있었는데, 대화에서처럼 몬데비언은 마법사가 아주 드문 종족입니다. 그들이 소울의 세이버에 한 명이 아닌 정예대 몇 명이 일제히 접근하려면 마법사의 도움이 필히 필요합니다. 뉴노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죠.
“그런데 플리 출신 마법사는 지금 알려진 자가 없어요. 마법사가 극소수로 배출되는 만큼 유명도가 높은데 그런 정보가 없어서 더 어려워요.”
비스는 성녀라서 타 족의 마법사와 신관에 대해 꿰고 있습니다. 체이서스 전체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성녀다 보니 그녀의 정보력이며 능력은 신용도 자체입니다. 그래서 비스 성녀의 발언 때문에 회의장이 고민의 강을 따라 흘러가 버렸습니다. 그걸 제대로 가로 막은 것이 막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그린이었습니다.
“그 녀석들이 어떻게 접근했는가는 나중에 천천히 알아내도 돼. 지금 시급한 건 녀석들의 다음 습격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어떤 식으로 삼국이 연합을 유지할 것인 가야.”
현실을 중시하고 현실의 흐름을 제일 잘 타는 그린다운 말이었습니다. 그린 역시 그의 유명세 덕에 그의 말은 사람들에게 거의 절대적 진ㄹ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린의 말이라면 그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회의장의 분위기도 순간적으로 그린의 주도로 바뀌었습니다.
“삼국 연합이라면 1국에 몬데비언이 나타났을 때 타 2국에서 바로 소식을 듣고, 바로 현장에 갈 수 있어야 해.”
그린은 회의의 방향을 잡아줬습니다.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말했던 막무가내 회의가 드디어 회의답게 진행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그게 우선인 건 맞지. 소식을 전하는 건 텔레파시가 가능한 사람을 쓰면 되고 현장으로의 이동은 텔레포트를 사용하면 되지. 뉴노멀에게 불가능하단 게 문제야.”
곧바로 쌈박한 정답을 내놓는 패시였습니다.
“연합관계니까 소울이나 딥데어 중 한명이 윌랜드에 상주해도 괜찮을 거 아냐.”
폴이 씩 웃으면서 패시의 문제 제기를 풀었습니다. 자신이 그 한명이 되겠다는 투로 말이죠. 그때 폴 빼고 아무나 다 괜찮다고 했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개인적으로 트레져 헌터로서 사이가 깔끔하지 않았거든요.
“폴이 그 일을 한다면 드렌필드에선 동맹국 윌랜드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만큼 의무를 다한 셈이네.”
“겨우 그 정도의 일로 동맹 관계의 신뢰를 굳히려 하다니. 비양심적인 거 아닙니까?”
캐스트가 지브릴의 말에 부드러운 어투로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순간 지브릴의 붉은 눈이 캐스트를 노려봤는데 제 양쪽 팔뚝에 닭살이 쫙 돋는 것 같았습니다.
“폴, 세이버에서 윌랜드를 지원해 준다니까 우린 플리랑 최전방에서 싸우기만 하면 된데.”
“우리 윌랜드에서는 평화 국가, 전투 국가를 떠나서 플리에 대항할 거야. 드렌필드에게 최전방을 다 맡기지 않을 거라고.”
“역시 유명한 소드마스터는 뭔가 다르군.”
폴은 이때부터 패시에게 눈독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파시야, 세계적인 소드마스터가 자신을 라이벌로 찍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리가 없었겠지만, 만약 눈치 챘다면 폴과 오랫동안 같이 활동하지 못했을 겁니다. 알고 지낸다는 것 자체가 황송한 일이라 직접 말했으니 말입니다.
“세이버에서 우릴 달갑지 않게 보는데 그렇게 나설 필요 있어?”
“난 그저 윌랜드 출신의 소드마스터의 실력을 알고 싶은 것뿐이야. 그러니까 너랑 지브릴이 알아서 외교 사절 노릇 좀 해.”
이 멋대로 막나가는 성격은 어디서든 제어불가인지 지브릴과 그린이 토를 달거나 트집을 잡지 못했습니다. 못했다기 보다는 안 했다는 쪽이 정확하겠네요.
“저희가 점점 고립되는 것 같은데 이피어스 기사의 뜻은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아주세요. 그리고 소울족이 지상에서 두 다리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 돼 있으니 딥데어족에서 뉴노멀족 분들을 도와주신다면 저희가 감사할 일이죠.”
비스 성녀가 조금은 격앙된 분위기를 진정시켰습니다. 분쟁을 막고 평화를 수호하는 성녀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캐스트나 지브릴은 겉으론 보이지 않았지만 비스 성녀의 말에 겸연쩍어 하는 것이 분위기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비스 성녀의 말이 조금 모순적인 게, 소울족은 원래 신체특성상 바다에서 살고 몇몇 특수한 이들만 마법을 통해 일정 시간 동안 육지에서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에 체이서스의 네 종족 중 가장 고립적인 종족입니다. 원래 고립 종족인데 지금 와서 고립되는 것 같다니요. 솔직히 세이버와 동맹을 맺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의심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때부터 비스 성녀를 불신했다는 건 아닙니다.
“폴이 윌랜드를 도와준다면 서로 연락하고 이동하는 문제는 해결됐다고 보자. 하지만 윌랜드와 세이버에서는 또 다른 준비를 해야 해.”
그린이 또 다른 논점을 제시했습니다. 거의 회의를 주도해 가는 의장 같았습니다. 그린 덕분에 회의가 정확하고 분명하게 속행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평등 회의에서 그린이 ‘장’같은 말과 행동을 해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윌랜드와 세이버라니? 드렌필드는 할 필요 없는 준비가 있다는 거야?”
[우잉 우잉]
치니비의 버릇 중 하나, 말하면서 물이 든 유리컵의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소리 내기가 시작됐습니다. 가끔 물 높이가 다른 컵 여러 개로 연주를 하는 건 들어줄 만한데 하나 가지고 내는 소리는 소음이란 말입니다.
“그만 해.”
“남이 사.”
치니비는 어째서 제 말을 하나도 듣지 않을까요?
“우리야 전투 종족이니 몬데비언족 녀석들과 1대 1로 맞붙을 수 있지만 윌랜드와 세이버는 그게 힘들잖아. 혹시라도 정예대원이 자리를 비웠을 때 습격을 받으면 시간을 벌 수 있는 일정 수 이상의 군대가 따로 필요해.”
그린이 자세하게 설명하자 치니비를 포함해서 윌랜드와 세이버의 대표들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평화 국가에게는 평화 시에도 군대는 필수로 있어야 합니다. 싸울 줄 아는 자들이 얼마 안 되고 그 중에서도 제대로 쓸 만한 이가 극소수니 시간 벌이나 방패 거리로라도 군대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플리에서 무서운 계획을 수행 중인 비상시에는 더욱 군대의 수를 늘려야 갰지요. 성전 근처에 특히 많이 포진해야죠. 이 일을 회의가 끝나자마자 각 평화 국가에서 곧바로 실행에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플리에서 소수 정예를 뽑아서 일을 추진하고 있지만 혹시라도 대대적으로 움직이면 어디든 한 국가가 초토화 되는 건 시간문제야.”
그야말로 악질적인 가정입니다. 그래도 현실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이 당시 플리의 움직임은 패시의 가정까지 커질 기미를 보였기 때문에 모든 대표들이 다시금 사태의 심각성을 머리에 각인하게 됐습니다.
“솔직히 그때는 어느 국가든 군대가 있어봤자 소용이 없겠군요.”
“하지만, 이피어스 기사. 그건 최악의 경우니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죠.”
“제가 군대를 부정하려는 게 아닙니다, 성녀님.”
캐스트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을 했었으니까요. 전투 국가 드렌필드라 해도 플리에서 전 국민이 한꺼번에 몰려오면 영락없이 성전을 뺏기고 한 순간에 초토화가 될 겁니다. 어떤 순서로 침략을 하든 플리가 전체로 움직일 때면 세 국가가 모조리 멸망하는 건 시간문제일 지도 모릅니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시기가 시기이니 만큼 저절로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플리에게 반격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급한 불부터 끄는 게 우선이야.”
소울족이 자기들끼리 얘기를 하고 있자 지브릴이 ‘만약’이 아닌 ‘지금’을 던지며 둘을 회의에 집중시켰습니다.
[우잉 우잉]
“그 말대로라면 바보 같은 회의는 그만 하고 각자 자리로 돌아가서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야? 사전 모의나 사전 준비도 좋지만 전장에서는 상황에 따른 즉흥력이 제일 중요하다고.”
“치니비 일리안이랬지? 패시하고 쌍둥이면서 사고나 말은 전혀 다르군.”
“흥, 굳이 일일이 닮을 필요 없잖아.”
평생을 패시와 비교 받아 온 치니비였기에 조금은 악의가 섞인 폴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일리안 쌍둥이는 둘 다 소드마스터인데도 성격이나 전술 등에서 패시가 우세한 터라 치니비가 빛을 발하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치니비의 성격이 좀 비뚤어진 것 같지만 그래도 실력 있는 소드마스터라는 건 확실합니다.
“폴. 네 말이 지나쳤어. 치니비의 말대로 지금은 동맹을 맺은 걸로 됐지, 이것저것 머리 굴리기보다 행동을 우선할 때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드렌필드의 대표 중에서 지브릴이 가장 나이가 많습니다.(딥데어족의 평균 수명은 특별히 알려지거나 정해진 바가 없지만) 지브릴이 드렌필드에서 권력층에 속한다고 하니 폴과 그린이 얌전히 복종할 만합니다.
“저희는 지상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회의가 해산될 기미를 보이자 캐스트가 비스 성녀를 에스코트하며 가장 먼저 자리를 떴습니다.
“그러면 나는 윌랜드의 뉴노멀 분들과 같이 가야지. 드렌필드는 댁들이 잘 해봐.”
벌써부터 폴이 일리안 쌍둥이에게 친하게 구는데, 저는 이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습니다. 아무래도 전 폴하고는 동료 궁합이 꽝이란 말입니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성전수호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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