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Mutation-Kimera(리메이크)

Mutation - Kimera : 제 7 각성 ⑥

★은하수★ 2010. 12. 15. 15:54

 

“다녀 오셨어요?”

길드 가디안스의 보스 집무실에 워프가 열리자마자 제 1천왕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그녀를 맞이했다. 그런데 집무실에는 그녀를 향해 인사를 하는 자가 두 명이나 더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네.”

“심포니엄 자작가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크리시에게 들은 것이 있어 확인하러 갔었습니다.”

솔리는 평소 페이스대로 또박또박 보고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상대에게 감정과 생각을 들키지 말 것. 시아에게 배운 유일한 한 가지를 성심성의껏 지켰다.

“심포니엄 자작가? 크리세이스에게 들은 거라니…….”

시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름이 있었다.

“크루세이더의 제 11기사 알프레드 파트만. 그와 관련된 일이었어?”

“네. 크리시 덕분에 저희가 먼저 도착해서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만.”

“그래? 다행이네. 그 녀석 일은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말이지.”

최근에 알프레드 파트만이 독단적으로 어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가디안스를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길드원의 지인들을 악질적으로 괴롭히는 저질 프로젝트였다. 길드 에덴이 더욱 활개치는 바람에 잠시 프로젝트를 중단했는데, 틈을 노려서 다시 시작한 모양이었다.

“크리세이스가 정보 부대보다 빨리 알아차렸군.”

“한 번 당했었으니까요.”

민이 시아에게 A4용지를 한 장 내밀었다. 길드원의 이름과 지인의 거주지가 쌍을 이루어 아래로 죽 나열된 목록이었다. 수가 20을 넘었고 주소가 놀라우리만치 상세했다.

“설마 벌써 이만큼 당한 거야?”

“당할 예정이래요. 정보입수경로는 묻지 말아 달라더군요.”

민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알프레드 파트만 건에 있어 그의 역할은, 크리세이스가 가져온 목록을 고스란히 보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크리세이스가 절대 물어보지 말라는 분위기라서 서로 지켜야 할 사생활인 마냥 호기심조차 갖지 않았다.

“너네는 뭐 따로 들은 거 없어?”

“제가 크리시에게 들은 건 심포니엄 자작가에 대한 것뿐입니다.”

“확실히 그 때부터 이상했어. 고향에 다녀온 후로 심하게 예민해졌는데, 주의 눈치를 과하게 살피고 다닐 정도야.”

솔리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밀리엄. 그건 연 호우를 만났기 때문이야. 크리시가 연 호우랑 으르렁거리는 사이라지만, 실은 크리시가 거의 일방적으로 그에게 공포심을 가지고 있거든.”

“에에? 말도 안 돼. S프린세스가 겁을 먹는다고?”

밀리엄은 극구 부인했다. 그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연 호우에게 겁먹은 크리세이스를 그려낼 수 없었다. 절대 무리였다.

“이상… 하네요.”

민이 갑자기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모두가 순간 잊어버린 당연한 사실을 기억해냈다.

“알프레드 파트만은 미스 하갈이 그녀의 고향에서 죽였잖습니까.”

“아.”

이미 오늘 크루세이더의 츠뵐프 리터 중 2명이나 마주쳤던 시아는, 크리세이스가 가져왔다는 목록을 다시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사고회로와 기억회로를 초고속으로 풀가동했다. 머릿속의 뉴런 그물망이 곳곳에서 반짝반짝 전기 신호를 주고받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얼마든지 간단하게 가설을 여러 개 세울 수 있었다.

“알프레드 파트만의 단독 프로젝트를 이어받은 녀석이 있다. 혹은 녀석이 죽기 전에 이미 불행의 씨앗을 뿌려 놨다. 크리세이스가 녀석을 진짜로 죽이지 않았다는 일은 있을 수 없으니까 일찌감치 제쳐두지.”

시아가 신경 쓰는 기사는 오웰 슈나이더였다.-그가 사마엘에게서 프로젝트 속행을 명령받았지만, 그 명령을 무시한 것도 모자라 단독행동으로 독약을 퍼트렸다. 그것을 알게 된 사마엘이 분개했다.― 가설의 구체적인 흐름이 도미노처럼 이어졌다. 그리고 자신이 처음에 세운 굵직한 가설 두 가지가 전부 맞을 수 있다는 스토리도 짜였다. 마구마구 흘러넘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크리세이스가 그걸 어디서 얻었고 심포니엄 자작가를 뒤엎으려 했던 자가 누구였는지 보다는, 크루세이더의 무리한 견제법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 거대한 두 개 세력을 동시에 견제하겠다니 제정신이야?”

밀리엄의 표정과 말투가 오랜만에 불량아 버전으로 변했다. 솔리는 곧바로 그의 볼을 잡아당기며 응징했다.

“멋대로 열 내지 마. 냉정하게 생각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어.”

“애여아 우 이어(해결할 수 있어)?”

“당신 약혼녀는 크루세이더 안에 들어가서 제 4기사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한 대담한 스파이였어. 미묘한 내부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시아와 민이 동시에 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퉁겼다. 솔리가 아지트에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인 나머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파이로 내보낸 몸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렇게 중요한 사실을 잊었다니, 매정한 상관들이 아닌가.

“네가 보기에 크루세이더는 어떻게 나올 것 같아?”

시아는 크리세이스가 보낸 목록을 탁자면을 따라 미끄러지듯이 솔리에게 건넸다. 솔리는 자신의 이름과 심포니엄 자작가의 영지 위치가 맨 윗줄에 적혀 있는 것만 흘끗 봤다.

“알프레드 파트만이 멋대로 진행한 프로젝트입니다. 조력자 몇 명이 있는 정도였지 길드에서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사마엘 클러치는,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인 프로젝트에 고급 인력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츠뵐프 리터의 수가 10명으로 줄은 상태에서 길드 에덴을 상대해야 하는 불안한 시기이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는 무조건 버릴 겁니다. 재가동 할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러면 크리세이스가 가져온 목록은 알프레드 파트만이 죽기 전에 불씨를 뿌려놓은 곳이겠군.”

“그럴 겁니다. 알프레드 파트만이 혼자 추진했던 프로젝트이니 만큼 그가 직접 개입하지 않는 한 불씨가 커질 일은 없을 겁니다. 게다가 그는 이미 죽었으니 그가 뿌린 불씨는 자연히 사라질 겁니다.”

솔리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추측은 신빙성이 매우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말 중간중간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결론은, 이 문제는 마음 편하게 잊어도 된다는 거군요.”

민은 종이를 집어 들고 시원하게 쫙쫙 찢었다.

“크리세이스가 좀 걸리지만, 본인이 정리가 덜 된 것 같으니까 당분간 내버려둬야겠어. 아, 심포니엄 자작가에 헛걸음한 셈이지만 오랜만에 갔다 와서 기분 좋겠다?”

“네.”

솔리는 망설이지 않고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시아는 그 미소를 보고 안심했다. 강 족 때문에 신경이 곤두 선 솔리를 어떻게 달랠까 고민하던 차에 잘 됐다고 생각했다. 이건 민과 밀리엄도 뼈저리게 공감했다.

“그쪽은 크루세이더나 에덴의 바보짓에 휘말리지 않아 편하겠어.”

“종족 내전 때문에 골치라고 하셨습니다.”

“아아. 그래 맞아. 이 세상에는 종족 내전이라는 귀찮은 것도 있었지. 그래, 그런 게 있어. 이 세계에는.”

시아의 두 눈동자가 달관의 저편을 바라봤다. 악마도 내전이 심상치 않게 많아서 심포니엄 자작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새 통 악마계에 가지 않고 전해 오는 소식이 없어서 내심 그쪽이 걱정됐다. 내팽개친 후작령(후작이 다스리는 영지)이 가장 걱정이었다.

“내전…… 중이구나.”

플러스가 솔리와 같은 뱀파이어인 민이 꽤 당황스러워 했다. 혼잣말이 혼잣말답지 않게 목소리가 큰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그가 아무리 가이스 공작가와 사이가 좋지 않더라도, 동족․동문에 대한 동질감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마 자기 자신이 가장 이 아이러니한 감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뱀파이어는 고상한 종족이잖아. 상급 뱀파이어의 절대 지배능력 때문에라도 질서가 유지되지 않나?”

“아니야, 밀리엄. 그 능력 때문에 폭동이나 반역이 아주 적은 거고, 그 능력 때문에 귀족들 간의 세력 싸움이 살벌한 고요함 속에서 계속 되거든.”

솔리의 설명은 일반 마족 전반과 악마에게도 해당하는 정설이었다. 지금 악마계의 세력다툼의 중심에 있는 시아는 원하지도 않은 일에 끼어 있어야 해서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우선적으로 한숨이 나왔다.

“엘프나 드래곤이나 상하계급이 뚜렷하지 않은 종족이라 다행이야. 귀족들 간의 자긍심 싸움이니 세력 다툼이니 하는 복잡한 싸움은 딱 질색이야.”

밀리엄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생각해보니까 나도 성을 방치한 지 오래됐네. 악마계가 어찌 돌아가는지도 통 모르겠고.”

시아는 바르베리트 계에서 유일한 후작급 악마고 바르베리트를 대표하는 후작이기 때문에 지위에 걸맞은 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곳은 바르베리트 후작 한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같은 바르베리트라도 백작급 이하는 시아의 허락 없이 절대 후작의 성에 들어갈 수 없었다. 성 안에서 잡일을 하는 악마가 성 밖으로 나가는 것도 제멋대로 할 수 없었다.

악마계에서 루시퍼가 찾아오지 않는 이상 악마계의 현황을 알 기회가 거의 없고, 왕이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소환하지 않으면 악마계에 갈 일이 없다. 길드 업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아에게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한 가지라도 덜 신경 쓸 수 있는 것이야말로 ‘여유’라고 부를 수 있는 준 안전지대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키메라도 다 같은 키메라가 아니라니까. 고귀한 이름을 잇는 위치에 있으면 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챙기고 너무 정신없어.”

“밀리엄. 그거 너도 해당하는 얘기야.”

“응. 그런데 나는 보스처럼 이름의 중점에 있지 않아. 얼마든지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고.”

밀리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이름과는 상관없이, 종족 하이 엘프로서 그리고 드래곤으로서 자긍심을 지켜야한다는, 피에 녹아든 의무가 불현듯 상기되었다. 자신도 양쪽 모두를 지켜야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가벼운 것’으로 치부하면서 심적 중압감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스승 엘더가 보면 한심하다고 잔소리를 길게 할지도 모르겠다.

“오-냐. 여유롭단 말이지? 그러면 너한테 일을 몰아줘도 할 말 없겠군.”

“아니, 보스. 그건 아니지. 얘기가 어떻게 그렇게 되?”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에 모두가 웃었다. 시아도 소리 죽여 웃으며 즐거워했다.

“정말이지. ……. 좋아, 서비스다. 이 한 몸 바쳐서 삶이 복잡한 그대들을 위로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희생하겠어.”

“항상 기쁨조였으면서 새삼스럽게.”

“카앗! 보스, 정말 이럴 거야?”

밀리엄이 속수무책으로 시아에게 당하는 동안 솔리가 가장 호쾌하게 웃었다. 최근에 임무에 치이느라 웃지 못했던 만큼 이번 기회에 싹 몰아서 전부 웃어내는가 싶었다.

솔리가 소리 내어 진심으로 웃는다. 밀리엄에게 이보다 안심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솔리가 강 족의 주박을 떨쳐내고 속 편히 웃는 것이야말로, 밀리엄의 최우선 소망이니 말이다.

“심포니엄 자작가에 내전 이외 문제가 없다면 됐어. 크리세이스는 말했다시피 좀 더 지켜보고. 아, 말 나온 김에, 민.”

“네.”

“가이스 공작가에 한 번 다녀와.”

“권유가 아니고 명령인가요?”

“응. 명령이야. 정확하게는 심부름이야.”

시아는 책상 서랍 중 가장 윗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단단하게 봉해진 얇은 흰 봉투를 꺼냈다. 봉투 겉면에 검정 잉크로 휘갈겨 쓴 글씨는 단번에 읽기 까다로웠다. 하지만 민은 그 글씨체에 익숙해서 얼마든지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스승 디레스와 몇 년을 같이 지냈는데 그의 글씨를 못 알아보겠는가. 사제 지원과 세나도 알아보는 판에 민이 못 알아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스승님도 저 못지않게 가이스 공작가를 꺼리시는데 별일이네요.”

민은 봉투를 받고 의아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봉투에 적혀 있다는 글이 ‘가이스 공작 귀하’라는 정중한 어구였다.

“디레스가 가이스 공작가를 꺼리는 건 둘째 치고, 본디 드래곤이랑 뱀파이어는 교유가 있는 듯 없는 듯, 애매하게 친하면서 애매하게 대립하잖아. 아마 공작이 그걸 받으면 표정이 볼만하게 굳을 거다.”

“혹시 보스 내용 아세요?”

“응. 내가 부른대로 받아 적은 거니까.”

“보스!”

시아가 일을 제멋대로 진행시키는 데에 있어 일가견이 있다고들 한다. 이에 가장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처할 수 있는 인물은 민 밖에 없다는 것 또한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이건 본인들의 속사정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속 편한 소리다. 민이 긴 시간동안 시아와 가장 가까운 곳이 있기 때문에, 시아는 조금만 틈이 생기면 이래저래 민을 골렸다. 민이 시아의 비서가 될 것을 스스로 선언한 직후, 시아가 그에게 ‘넌 내 장난감이라고 인정한 것과 다를 바 없다’라고 진담 반 농담 반의 말을 내뱉은 적이 있다. 아마 시아는 이 말을 실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화내지 마. 심부름꾼으로 널 지목한 건 디레스야.”

“보스가 아니고요?”

“이번 일을 구상한 건 엘더고. 그러니까 너는 나랑 디레스랑 엘더가 꾸민 일을 원활하게 돕는 역할인 셈이야.”

가디안스의 보스는 적잖이 즐거워보였다. 민은 이 일이 보스의 장난이건 임무이건 상관없이 그녀의 말이라면 거역할 수 없기 때문에, 왼손 엄지와 검지로 미간을 부여잡으며 고뇌할 뿐이었다.

“보스. 나날이 사람 부려먹는 재주가 발달하고 있어.”

“아쉬워하지 마. 너도 실컷 부려먹을 테니까.”

“정중하게 거절하겠어, 보스.”

“할 수 있으면 해봐. 절대 안 하고는 못 배길 게다.”

“보스. 눈 무서워, 눈.”

블랙-레드 오드아이가 일순간 굶주린 맹수가 먹이를 발견했을 때의 빛나는 금색 눈으로 보였다. 밀리엄은 말 한 번 잘못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고 바로 꼬리를 말아내려야 했다. 보스가 진심으로 강압적으로 나오면 4천왕 중에서 가장 부자연스럽게 대처하다 못해 아무 것도 못하며 몸이 굳었다. 그가 아무리 자잘하게 까불어도 언제나 자신이 정한 선을 지키는 것도, 자신이 보스 앞에서는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기 때문이었다.

시아의 오드아이가 다시 양쪽 흑색으로 돌아가고, 솔리가 밀리엄을 데리고서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시아에게 받은 전원 전달 사항을 아지트 내에 있는 길드원들에게 일일이 전달했다. 텔레파시를 쓰면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지만, 시아가 밀리엄에게 일부러 심술을 부린 것이다.

민은 시아에게 봉투를 받았지만 가야할 곳이 가이스 공작가라서 적잖이 망설여졌다. 가이스 공작가가 민을 홀대하거나 학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키메라니까 좀 꺼릴지는 몰라도 공작이 민에게 ‘한’이라 부르는 빚을 졌기 때문에 가이스의 성을 가진 뱀파이어라면 누구도 민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다. 더욱이 민이 뱀파이어 순혈보다 더 능숙하게 힘을 사용하기 때문에 섣불리 시비 거는 것도 상상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민은 가이스 공작가에 유감이 많았다. 공작 한 명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보스. 꼭 제가 가야 하나요?”

“그건 네 스승에게 물어봐. 나도 굳이 널 보낼 생각은 없는데 디레스가 꽤 세게 고집을 부렸거든.”

시아는 새로 들어온 서류를 휘리릭 넘겨봤다. 그 안에는 시아의 손가락과 눈을 고정시킬만한 내용이 없었다. 그래서 맨 마지막까지 다 본 후에 의자 옆에 둔 상자로 던져 넣었다.

“후우-. 그 안에 쓴 내용으로 보나 말재주나 임기응변으로 보나……. 일단은 네가 적격이야. 그런데 네가 거기에서 무례하게 굴까봐 걱정이야.”

민은 울컥거리는 것도 없이 시아의 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자신의 행동패턴은 자신이 잘 아는 법이다.

그가 가이스 공작가의 성으로 들어간 적은 딱 두 번. 가이스 공작에 의해 키메라가 되던 날과 디레스의 양아들이 되고 가이스 공작가에게 의절을 선언하러 간 날이었다. 이 후 성 밖에서 가이스 계열의 뱀파이어와 공작 본인을 손에 꼽을 정도로 만난 적이 있지만, 민이 성으로 찾아가기는커녕 근처 지역에 가는 일조차 없었다.

“하아아아아-.”

민은 어쩔 줄 몰라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길드의 임무라는 분명한 명목이 있지만, 자신을 보는 곱지 않은 시선이 쫙 깔린 그곳에 가는 일이 여간해선 내키지 않았다. 차라리 그들과 싸우러 가는 것이면 훨씬 편할 것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일단은 다녀올게요. 그런데 이거 진짜 어렵네요. 최소한 여기에 적힌 내용은 가르쳐주시면 안 되나요?”

“아니야. 아무런 지식 없이 전달하고 답장을 받아오는 편이 네 신상에 좋아. 헛소리를 남발할 수도 있거든.”

“보스. 그거 엄청 무시하는 거예요.”

제 1천왕은 순간 울컥했다. 그의 지위는 길드 가디안스 내에서 보스 다음가는 2인자다. 그가 길드 내부며 길드와 얽힌 외부에 대해 보스에게 무지를 지적받을 정도로 모르는 것은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 그런데 무지해서 헛소리를 할 수 있다고 단칼에 공격받았다. 상대가 보스라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녀오면 가르쳐줄게. 그러니까 아무것도 묻지 말고, 거기서도 잡담하지 말고, 답장을 미리 보지도 말고 신속하게 돌아와.”

보스가 확고하게 명령하는 이상 그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허튼 일은, 시키기는커녕 보스가 판단 자체에서 배제한다.

민이 이때까지 보아 온 보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토를 다는 것은 일을 무사히 마치고 사정을 들은 후에 해도 충분했다.

“그러면 제가 거기서 이성을 잃지 않게 빌어주세요. 다른 이들은 다 무시할 수 있지만 공작의 머저리 아들이 시비를 걸면 꼭 응수하고 싶어지니까요.”

“한 명 박살내는 것쯤이야 나나 가이스 공작이나 애교로 봐줄 수 있어.”

“예상은 했지만 기대하지 않은 대답이네요. ……. 하아-. 일단 심부름 다녀오겠습니다.”

민은 봉투를 재킷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표정이 다소 복잡한 채 집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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