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가디안스는 보스와 4천왕을 중심으로 하는 시스템이 겨우 정착되었을 뿐, 4천왕 휘하 직속 특별부대는 그로부터 반 년 뒤에 생겼으니 길드원 총 수가 지금의 3할 정도였다. 보스 시아는 중학교에 막 진학했는데 거기서 민을 찾아냈다. 2단계로 각성하는 중에 폭주한 그를 주먹으로 때려눕히고 아지트까지 끌고 온 것이 그들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뱀파이어 가이스 공작가의 성에서 가출한 양자이자 7남7녀 중 막내를 납치하다시피 데려오고 두 달 후, 발푸르기스의 밤이 됐다.
“휴, 디레스. 나 발푸르기스의 밤은 처음이야!”
신휴는 당시 제1천왕으로 1년 반 전 크루세이더와의 대전투에서 행방불명되었다. 생사가 불분명한 채 반 년이 계속되자 시아는 4천왕을 통째로 개편하고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민은 시아에게 납치된 후 바로 휴에게 맡겨져 본의 아니게 그의 제자가 되었다. 참고로 디레스는 변함없이 제2천왕이다.
“보스. 대부께서 보여주셨을 텐데요.”
휴는 어린 보스와 제자가 복잡한 시가지에서 미아가 되지 않도록 한 쪽에 한 명씩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중학생들을 7살 이하 어린애 취급하는 건 길드 내에서 휴가 유일했다. 하지만 실컷 들뜬 시아를 보니 휴의 걱정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휴먼족 꼬꼬마가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석했다간 1분도 안 돼서 시체가 될 거라고 별장에서 꼼짝도 못하게 하셨어. 대신 이런저런 마법을 보여주셨으니까 세상모르는 꼬꼬마는 즐거울 뿐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꼬꼬마 딸을 상대로 ‘시체가 되니까 안 돼’라니, 너무 하잖아?”
“그분다운데요?”
당시 시아는 재잘재잘 발랄한 소녀였다. 제4각성까지 마치고 제5각성을 코앞에 둔 무시무시한 키메라면서도 모두에게 다정다감하며 붙임성 있는 어린 보스였다. 특히 제1천왕 휴는 죽은 대부 레리 바르베리트와 일찍이 교류가 있던 자로, 시아가 정신적으로 제일 의지하는 인물이었다. 대부와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기도 했지만 대부처럼 한없이 자상하고 리더십이 강해서 자연스럽게 그와 친해졌다. 레리의 친구로서 꼬꼬마 시아와 가장 먼저 지인이 됐다고 자부하는 디레스가 질투할 정도였다.
“보스. 걷기만 해서야 작은 키에 뭐가 보여?”
디레스가 시아의 허리를 잡고 높이 들어올렸다.
“이왕이면 목마 태워줘. 디레스는 몸이 튼튼하니까 중학생 몸무게 정도 별 거 아니지?”
“아무렴.”
그는 기꺼이 시아를 어깨 위에 앉혔다. 그리고 시아가 균형 잡기 쉽도록 다리를 살포시 잡았다. 시아는 꾸물꾸물 몸을 뒤척이며 편한 자세를 잡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음. 뭔가 어색한데?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가디안스를 만들고 처음이니까. 그 전엔 실컷 이러고 돌아다녔지.”
“맞아. 졸리면 레리 아빠한테 업혀서 자고, 여행 가서 구경할 때면 디레스의 목마가 최고였는걸. 지금도 시야가 탁 트여서 좋아.”
“그거 다행이네.”
시아는 어릴 적으로 돌아간 것 마냥 평소보다 더 기운이 넘쳤다. 휴와 디레스는 알게 모르게 안심하는 듯했다. 크루세이더가 없던 시기였지만 시의 기사를 자칭하는 무법자들이 잔류하던 시기라 꼬마 보스가 심기 불편한 나날을 보냈었다. 약 20년간 세상을 파헤친 그들이 레리 바르베리트를 타깃으로 삼으면서 시아가 키메라가 되고 곧이어 길드 가디안스가 창설되었다. 실력자 집단이고 원체 레리 및 시아의 지인들로 구성되어서 첫 번째 목표를 자연스럽게 신의 기사 완전소멸로 세웠다. 목적완수까지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남았다.
“저거 신설 길드 가디안스의 휴먼족 계집 아니야?”
“입 조심해. 저래 뵈도 제4단계까지 각성했대.”
“저런 꼬마가?”
“장수하는 종족들한테 14살은 꼬마구나.”
주변 마족들의 대화를 고스란히 들은 시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지만 보스는 강하잖아요.”
민이 외출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시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휴, 디레스, 들었어? 민이 처음으로 날 칭찬해줬어.”
“네, 들었어요.”
“엄청난 발전이군.”
“우와―. 오늘은 정말 최고야.”
민이 얼굴을 붉히고 휴에게 딱 달라붙건 말건 시아는 박수까지 치며 즐거워했다. 휴는 차츰 세상에 마음을 열어가는 제자를 대견스러워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휴먼족 구역에서 평화롭게 살던 10살 소년이 갑자기 나이트메어의 습격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영문 모른 채 뱀파이어의 손에 이끌려 가이스 공작가에 들어가고, 어째서인지 그들의 마음에 들어 막내아들로서 양자가 됐는데, 별안간 키메라가 되어야 했다. 시아와 마찬가지로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양부의 심장을 먹어 끔찍한 고통을 이겨내면서.
지금의 공작은 맏형이다. 그는 아버지 못지않게 민을 끔찍이 아꼈다. 하지만 민이 형제들에게 붙잡혀 억지로 아버지의 심장을 먹어야했던 정신적 상처를 보듬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시아에게 ‘민이 어른이 되면 돌려주마’라는 짧은 서신을 받았을 때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의지로 대부의 심장을 먹고 키메라가 되어 대부의 의지를 잇고 있다는 이야기는 상급 마족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퍼져 그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디안스의 아지트에 사신으로 다녀온 동생들의 말에 의하면 민의 스승이 쿼터엘프-소드(마족 중에서도 최상위급 마족) 키메라란다. 소름끼치도록 기쁜 일이었다. 그래서 한 달에 한두 번 본가로 돌아와 얼굴을 비치는 조건으로 민을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그런데요, 보스.”
민이 다시 말을 꺼냈다.
“보스도 제4단계, 스승님도 제4단계까지 각성했는데 보스가 더 강하니까 보스인 거죠?”
“몰라.”
시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그녀 대신 민의 의문을 풀어준 건 휴였다.
“보스와 직접 힘을 맞댄 적은 없지만 보스가 더 강한 건 확실하답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상대를 가늠할 수 있게 되거든요. 제4단계 상태의 보스를 봤을 때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우러러 봤어요.”
“그건 나도. 오래 묵은 드래곤을 봐도 느끼지 못한 경외감이 온몸에 전기가 통하듯 장난 아니었어.”
디레스까지 거들자 시아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그의 머리를 손끝으로 가볍게 투닥투닥 두드렸다.
“내 목표는 제5단계 각성이야. 누구도 나의 소중한 이들을 해코지 할 수 없게, 모두를 지키기 위해 최고가 될 거라고.”
“귀에 딱지 않도록 들었어.”
“무리는 금물이에요.”
시아가 각성 단계를 밟으면서 전혀 폭주 없이 깔끔하게 한 번에 상위 각성을 마친 과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시간을 들여 지긋이 성장한 것도 아니고 단 2년 만에 여기까지 성장했다. 휴와 디레스는 그녀의 급성장이 나중에 안 좋은 영향으로 돌아올까봐 제5각성을 말리고 있다. 시아 스스로도 제5각성 도중에 폭주할 것을 염려해 자제하고 있지만 조바심을 아주 버릴 순 없었다.
“민도 2단계에 진입도 못하다가 벌써 3단계까지 각성했잖아. 초스피드라고.”
“아니에요. 어제 3단계 실패했어요.”
민은 당황하며 부정했다. 휴는 그를 귀엽다는 듯이 내려다봤다.
“아직 2단계에요, 보스.”
“어? 그래? 3단계 도전을 3단계 성공으로 잘못 들었나?”
시아는 아쉬워하는 듯했지만 상위 각성 실패는 키메라라면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대단치 않게 여기고 이쯤에서 가볍게 이 화제를 멈췄다. 마침 시야에 화려한 색으로 물들인 망토 무리가 들어왔다. 퍼레이드를 즐기는 묘인족이었다.
“격투종족도 오는구나.”
말은 이렇게 중얼거렸지만 일부가 키메라라는 것이 눈에 보였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리니 다크엘프와 스프라이트가 노상 주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둘 다 순종인데 특히 스프라이트가 계약자 없이 당당하게 물질계에 나와 있는 것이 신기했다. 발푸르기스의 밤이기에 가능한 특별한 사치였다.
또 다른 곳에서는 라미아 세 명이 어린 마족 관객들 앞에서 불 쇼를 하고 있었다. 마법을 적절히 섞은 형형색색의 불꽃이 옅은 바람을 타고 라미아들을 휘감았다. 마족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워했다. 그 불꽃에서 나비 모양이나 사슴 모양이 터져 나올 때면 함성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드래곤 머리탈을 뒤집어 쓴 켄타우루스도 보였고, 고급 와인이 아닌 투박한 술병을 쥐고 호탕하게 웃는 뱀파이어는 아주 진귀한 모습이었다. 웨어울프를 발판 삼아 공중곡예를 부리는 날렵한 엘프들이며, 신의 눈을 피해야 하는 타락천사, 모두와 어울리기 쉽도록 휴먼족과 비슷한 모습을 했으나 특유의 마력을 숨기지 않은 드래곤 등등 조금만 눈을 돌리면 평소엔 접하기 아주 어려운 그들의 또 다른 모습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시아는 이 별세계가 점점 사랑스럽게 보였다.
“보스, 민. 성장기 아이들이라면 지금쯤 배고플 텐데 설마 눈치 못 챌 정도로 즐거운가요?”
“아.”
시아와 민은 동시에 자신의 배에손을 얹었다. 확실히 거기가 있었다. 의식하고 나니 점점 심해졌다.
“디레스, 내려줘.”
시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둘러봤지만 가게에 들어가기엔 무리 같았다. 거리가 인파로 넘쳐나는데 가게에 빈자리가 있을 턱이 없다.
“저쪽이 그나마 한가해 보이니 잠깐 기다려주세요. 축제니까 노점 간식거리로 배를 채우는 것도 즐거움이죠.”
“응. 다녀와.”
휴와 디레스가 음식을 사러 간 사이에 시아와 민은 인파가 적은 곳으로 몸을 피했다. 용케 다른 이와 부딪히지 않고 한숨 돌릴 수 있는 곳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새삼…… 대단하네요.”
민의 흐릿한 눈동자에는 타인은 그저 타인으로밖에 안 보인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어떤 기분일까? 하지만 시아는 묻지 않았다.
“리아와 호아에겐 인생 첫 발푸르기스의 밤인데, 역시 휴먼족 순종에게 여기는 위험하겠어.”
“네?”
“내 친동생들. 이렇게 시끌벅적한 축제 좋아하거든.”
“동생…….”
민은 가이스 공작가의 여섯 형님들과 일곱 누님들을 떠올렸다. 키메라가 된 후 줄곧 피해왔던 형제들. 그렇게 친했는데 그들이 자신에게 한 일을 ‘배신’이라 여기고 일방적으로 마음을 닫아버렸다.
“한 달에 한두 번 본가에 돌아간다는 약속. 안 지키고 있지?”
“보스께서 일방적으로 정하셨잖아요.”
“보스 명령을 지나가는 개 소리로 여기는 길드원은 필요 없어.”
“그런 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아.”
시아는 오른손에 푸른 불꽃을 왼손에 검은 불꽃을 만들어 저글링 하듯이 허공에 던지며 놀기 시작했다.
“민. 그 때 형제들이 전대 공작의 몸에 손을 댔어? 분명 형제들이 네게 심장을 먹였어도 선대 공작이 직접 꺼내지 않았을까? 누구보다 널 아끼는 그가, 전쟁 중에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약하디 약한 막내를 걱정하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죽어서도 지키고 싶은 마음에 유품을 남긴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민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더니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나도 레리 아빠의 심장을 먹고 온몸이 끊어지는 고통을 견디며 키메라가 됐어. 레리 아빠가 ‘살아라’라고 말하면서 심장을 꺼내줬단 말이야. 죽을 수 없었어. 억지로 씹고 삼키고 버텼어.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미 레리 아빠의 몸은 소멸됐고 난 혼자였어. 디레스와 엘더가 뒤늦게 왔지만 이미 혼자 다 울고 한자 다 받아들인 후였어. 너는? 같이 울어줄 사람들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그들을 탓하고 도망쳤어. 그들과 현실을 이해하는 건 둘째 치고, 마주 보는 것조차 거부했어.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남 탓만 하는 겁쟁이가 앞으로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반쯤 호기심에 널 데려왔는데, 변하질 않아. 끝없는 제자리걸음. 이래서는 공작가에 있든 가디안스에 있든 별 차이 없잖아.”
시아는 민을 일방적으로 데리고 온 후 한 번도 간섭하지 않았다. 휴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도 관찰만 했다. 지독하게 성실한 모범생이면서 묘한 구석에서 결벽증처럼 고집을 부리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휴에게 마음을 여는데 한 달, 길드원 모두에게 마음을 여는데 또 한 달. 바로 지금에서야 ‘류민’이라는 길드원이 가디안스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방관만 하던 시아가 드디어 민에게 그를 데려온 이유를 터놓았다.
민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기만 했다. 눈물의 의미를 본인도 모를 것이다. 슬픔과 아픔과 후회와 죄의식이 뒤섞인 투명한 물방울이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온 응어리만큼 한없이 한없이 넘쳤다.
“어제 공작가에서 여자 중 셋째? 아무튼 누님들 중 한 명이 왔었어. 훈련실을 몰래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더라. 귀여운 막내 동생이 보고 싶어 왔으면서 자기를 보면 외면하고 도망칠까봐 그냥 그렇게 보기만 했어. 자식 버린 어미가 자식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다 민망하더라.”
시아의 손은 어느새 장난을 멈추고 바지 주머니에 푹 들어가 있었다. 약간 화난 듯 안쓰러운 듯. 웃옷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어도 계속 우는 민을 내려다보니 괜히 뭉클해져서 고개를 휙 돌렸다.
침묵이 이어지는 시간이 길어졌다. 결국 휴와 디레스가 돌아왔다.
“이런…….”
휴가 디레스에게 음식을 죄 맡기고 소매로 민의 눈물을 닦아줬다.
“보―스―. 남자를 울리는 여자라니.”
“보스로서 설교를 했을 뿐이야.”
“하필 축제 중에?”
시아는 꼬치구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입 안을 가득 채우는 것으로 묵비권을 행사했다.
“보스. 뭘 어떻게 하셨어요?”
“흥. 내가 폼으로 보스야?”
비슷하지만 비슷하지 않은 둘, 시아와 민만의 교감을 어찌 제3자에게 설명할 수 있으랴. 시아는 시시콜콜 묻지 말라는 식으로 간부들의 호기심을 봉쇄했다.
“민군. 보스가 잔소리를 했어도 무리하면서 따르지 않아도 돼요.”
“휴, 너, 은근슬쩍 무시발언!”
[뻑!]
시아는 휴의 허벅지를 힘껏 걷어찼다.
“항상 그런 식이니까 이놈이 본가에 안 가고 버텼던 거야! 하……. 엘더한테 맡길 걸 그랬어.”
당시 제3천왕이던 엘더 피스크(실버 드래곤 순종, 은룡왕)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민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은룡왕으로서 동족 전사들 훈련을 지휘하고, 가디안스의 제3천왕으로서 한창 활약 중인 길드원들을 험하게 훈련시키며, 전투 특화 아카데미에서 가장 지독한 교관으로도 유명하기 때문에, 아직 수련생 입장인 민은 엘더와 마주칠 때마다 그의 명성과 기에 눌려 자동으로 몸을 피했다. 바퀴벌레가 사람이 근접했단 걸 눈치 챈 순간에 놀라운 반사 신경을 발휘하여 순식간에 도망치는 것과 필적할 정도다.
“전 지금 스승님이 좋아요. 보스, 앞으로 약속 잘 지킬게요. 피스크 어르신은… 제발…….”
민은 휴의 팔을 꽉 잡고 곤란해 마지 못하는 표정을 한껏 내보였다.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디레스가 포효하듯이 뱃속에서부터 소리를 끌어올려 시원스레 웃었다. 그리곤 입을 양 옆으로 최대한 당겨 익살스런 미소를 얼굴에 굳힌 채 아직 따끈따끈한 토스트를 민에게 내밀었다. 민은 당황스러워 하며 얼떨결에 받았다.
“감정을 드러낼 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드러내지 않았던 거군. 봐. 솔직하니까 얼마나 좋아.”
“본의 아니게 좋은 구경했어.”
“내 말이 그 말이야, 보스.”
실은 시아도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입을 확 틀어막으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지금은 진정됐다지만 능글능글 미소는 여전했다.
“보, 보스.”
“오해 마. 아까는 진짜로 혼낸 거니까. 네 반응은 예상 외 수확인 셈이야.”
“수확…….”
“뭐, 이렇게 재미난 녀석이라면 가끔 놀려먹는 것도 괜찮겠지. 앞으로 고생할 거다, 류민.”
시아의 선전포고에 민은 반걸음씩 쭈뼛쭈뼛 뒷걸음질 쳤다. 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제자가 조금씩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스승으로서 보람을 느끼는 것들 중 하나였다.
“부끄러워 마. 오늘은 축제라고. 평소와 전혀 다른 자신을 내보이며 마음껏 늘기는 날이란 말이지. 크하하핫!”
“이, 이게 어딜 봐서 부끄러워 하는…….”
“아무렴 어때. 이야― 축제는 역시 즐거워야 해.”
민의 난감해하는 표정이 한층 더 짙어졌다. 디레스는 상황과 조금 어긋난 말을 늘여놓았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이 거리에서 상상 이상의 즐거움을 갈구하고 실현하는 발푸르기스의 밤이다. 줄곧 무표정이던 민이 감정을 드러냈다는 예상외의 즐거움은 발푸르기스의 밤이기에 이루어진 기적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 디레스가 전하고자 했던 진짜 의미였다.
“자, 자. 여기까지. 민군. 다 먹고 나면 선물을 보러 가죠. 형제가 많은 만큼 잔뜩 고민해야 할 거예요.”
“다들 어엿한 어른인데 노점에서 산 것들이 선물 같겠어?”
“엑서스엘 시. 현실에 찌든 피폐한 정신을 민군에게 전염시키지 말아주세요.”
휴의 단호하면서 묵직한 한 방이 디레스에게 제대로 먹혔다. 디레스는 툴툴 거리며 바비큐를 큼지막이 뜯어먹었다.
“아아, 발푸르기스의 밤은 참 좋아.”
시아도 두 번째 꼬치를 야금야금 먹었다. 조금 전에 민에게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던 자신을 잊은 듯 지금의 이 분위기를 즐겼다. 민의 표정 역시 한 꺼풀 벗은 듯 시원해보였다. 아직은 어색한 부분도 있지만 앞으로의 그가 기대되는 미숙함이기에 그 어색한 미소에 가치가 있었다.
야식으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다시 인파를 헤치며 성스러운 축제에 몸을 맡겼다. 축제의 화려함과 쇼와 곳곳에서 만발하는 마법도 볼만 했지만 축제에 참가한 이들 자체도 훌륭한 볼거리라서 질릴 틈이 없었다.
민은 도중에 눈에 띄는 물건이 있으면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하나씩 샀다. 형제들이 성격이며 기호가 제각각인 게 당연하다고 인정하지만 이럴 땐 성가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사이가 좋았던 그 때, 생일 선물을 고민하던 자신을 되돌아보며 하나씩 즐겁게 골랐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다지도 형제들을 조아하면서 왜 피했을까. 피가 통하지 않아도, 지금은 같은 피가 흐르는 셈이지만, 혈연 못지않은 유대와 애정이 분명 있는데 왜 어리석은 길을 골랐을까. 두 팔에 안은 선물이 늘어날 때마다 심장이 저릿하는 아픔도 알게 모르게 짙어졌다.
“스승님, 스승님.”
시아가 디레스의 어깨 위에서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켄타우루스와 낭인족 서커스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을 때, 민인 조용히 휴의 윗옷 밑단을 잡아당겼다. 휴는 살짝 허리를 숙여 귀를 민의 입 높이에 맞췄다.
“보스께 보답하고 싶어요.”
중요한 것을 결심한 것 같으면서도 담담한 표정이었다. 휴는 가볍게 미소를 짓고 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스의 말을 귀 뿐만 아니라 가슴으로도 듣게 됐군요. 아무튼 타인을 쥐락펴락 하는 건 우리 보스만한 자가 없다니까요.”
“그런데…….”
“보스는 자신의 왼쪽 눈과 꼭 닮은 깊은 붉은 색을 좋아한답니다.”
“아……!”
민은 뭔가 생각난 듯이 뒤를 휙 돌아봤다.
“다녀오세요.”
휴는 민의 등을 슬쩍 밀었다. 민은 스승과 눈을 한 번 마주치더니 곧바로 인파 속으로 꼬물꼬물 파고들었다.
형제들에게 줄 선물이 담긴 종이봉투가 민의 품속에서 찢어질 듯 말 듯 꾸깃꾸깃했다. 그래도 민은 무엇 하나 잃어버리지 않도록 두 팔에 힘을 주고 선물꾸러미를 지켰다. 한 번 지나쳤던 노점상에 도착하자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 팔찌 주세요.”
자그만 다홍색 조개가 꽃 모양으로 엮이고 사이사이에 붉은 산호로 색을 맞춘 아기자기한 팔찌였다. 처음 지나쳤을 때 우연히 눈에 들어왔지만 형제들 중에 이걸 찰 만한 이가 없어서 바로 무시했었다. 그런데 휴에게 시아에 대해 듣는 순간 이게 바로 떠올랐다. 시아가 목걸이나 피어싱은 곧잘 다양하게 갖추는 편이지만, 팔찌를 한 모습은 기억에 없어 조금 불안했다. 하지만 역시 이 팔찌가 가장 좋았다.
“휴먼족이다.”
“휴먼족 주제에 발푸르기스의 밤에 왔어.”
노점상 주인의 등 뒤에서 반시가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불행과 죽음을 끌어들이는 어둠 속 요정들이 민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죄송해요. 뱀파이어가에서 자란 터라 웬만해선 끄떡없어요.”
민은 셔츠 옷깃을 살짝 젖혀서 쇄골 바로 위에 새긴 가이스 문장을 보였다. 뱀파이어의 유명한 7대 가문 중 단연 최고라는 가이스 공작가인데 어둠 속 요정이 못 알아보겠는가. 반시들은 민의 주변을 에워싸다가 문장을 보자마자 노점상 주인 등 뒤로 쏙 숨었다.
“휴먼족이면서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가할 만하군. 그래도 혼자 나돌아다니는 건 좋지 않아.”
노점상 주인은 팔찌를 작은 종이봉투에 담아 건네주다가 민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하지만 민은 아무렇지 않았다.
“미성년자가 늦은 시간에 혼자면 아무리 마족이라도 이상하잖아요?”
“보호자 동반이라는 건가?”
“후작급 악마, 소드, 레드 드래곤. 저쪽에서 서커스를 구경하고 있어요.”
반시 하나가 잽싸게 움직였다. 민은 붙잡힌 팔을 끌어당겨 노점상 주인을 제 가까이로 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무겁게 속삭였다.
“반시 따위가 뭘 알겠어요. 나와 같은 키메라면서 저급 요정의 눈으로 정보를 모으나요? 분명히 내 일행을 못 찾을 거예요. 괜한 수고 들이지 말고 그 팔찌 주세요.”
“꼬마. 자기 정체와 일행 정보를 쉽게 발설하는 거 좋지 않아.”
기분 나쁘리만치 새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음흉하게 웃고 있단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민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차피 우리 구역이라 이미 다들 아는데요? 당신, 여기 처음이죠?”
질릴 정도로 담담한 반응이 통했다. 노점상 주인은 민을 놓고 팔찌를 건넸다. 민은 작은 종이봉투를 받고 그 손에 돈을 얹었다.
“거짓말쟁이에게 팔 물건은 없다!”
돌아온 반시가 민의 손에서 선물을 가로챘다.
[딱!]
노점상 주인은 곧바로 주먹으로 그 반시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리고 민에게 상품을 돌려줬다. 그 반시는 키익키익 쇠 긁는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지만 다른 반시들에게 제지당했다. 귓속말로 민도 키메라라는 사실을 듣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충실한 사역마들이네요.”
“꼬마한테 칭찬받아 봤자 기쁘지 않아. 얼른 일행한테나 돌아가. 조만간…… 그래, 어리지만 훌륭한 후작께 전해. 조만간 이름 없는 바보들이 나이트메어를 구름떼처럼 이끌고 올 거라고.”
노점상 주인은 이곳이 길드 가디안스의 구역임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리지널 쪽인지 플러스 쪽인지 알 수 없지만, 민이 파악한 기척으로는 분명히 악마다. 시아와 비교해선 안 되는, 귀족 축엔 낄 수 없는 하급. 그러나 비교적 감정과 본능을 잘 통제하는 느낌이었다.
“발푸르기스의 밤은 온갖 장난이 용서되는 날인데요?”
“왜 미리 가르쳐주느냐……. 글쎄. 변덕일지도.”
민은 의아해 했지만 그에게 꾸벅 인사하고 돌아갔다.
시아와 디레스는 여전히 서커스 삼매경이었다. 민은 잘 다녀왔냐는 휴의 말을 듣지 못할 정도로 노점상 주인의 말을 진지하게 되풀었다.
“응? 민, 얼굴 이상해.”
시아가 디레스에게서 내려와 양손으로 민의 두 뺨을 감싸 잡고 빤히 쳐다봤다. 민은 정신을 차리고 시아를 비롯 모두를 한 번씩 쳐다봤다.
“무슨 일인가요?”
휴는 민을 혼자 보냈던 걸 살짝 후회했다. 민은 스승의 표정을 읽어내고 고개를 가로 저으며 자신은 괜찮다는 걸 표시했다.
“보스. 선물 사다가 어떤 하급악마를 만났는데요, 조만간 이름 없는 바보들이 나이트메어를 구름떼처럼 데려올 거라고 했어요.”
구체적인 ‘언제(방금 전)’와 ‘무엇(보스에게 줄 선물)’을 숨긴 채 노점상 주인의 말을 전했다. 민은 몇 번 생각해도 의아한 말을, 시아는 바로 알아들었다.
“흐음―. 그래?”
“뭔 말이야?”
디레스와 휴는 민과 같았다.
“악마계에서 ‘이름 없는 바보’라고 하면 이성과 지성이 전혀 없는 짐승만도 못한 최하급악마를 뜻해. 가끔 일반 하급악마를 무시할 때 쓰기도 하고. 나이트메어를 부릴 정도면 평범―한 하급악마겠지. 그런데 발푸르기스의 밤이잖아?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지나치게 성가신 일을 벌일 바보가…… 있을 수도 있겠다.”
시아는 별 일 아닌 것처럼 지나가려다가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발푸르기스의 밤이기 때문에 고삐 풀린 망아지가 활개치고 다닐 것이리라. 그래도 모든 짓궂은 장난이 용서되고 용서해줘야 하는 성스러운 축제니까 별 수 없다는 듯이 도로 미간에서 힘을 풀었다.
“그 하급악마가 그것만 말했어?”
“네. 이것만.”
“민한테? 나한테?”
“아, 보스께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시아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시끌벅적한 이곳에서 무엇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일부러 예고할 정도의 일이면 모두의 시선을 끌어 모을 만한 큼지막한 일이거나 아주 어처구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은근히 기대됐다.
“보스. 오늘은 포커페이스 휴업?”
“왜?”
“엄청 즐거워하는 얼굴이야.”
“축제라서 그래.”
디레스는 ‘꿍꿍이가 있는 영악한 얼굴이야’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휴와 민도 약간 불안해했으나 어떤 말도 드러내지 않았다. 축제가 아니었어도 지금처럼 들뜬 보스를 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되돌아올 질책과 불만을 능숙하게 받아칠 자신이 없다고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저 뒤처리를 미리 각오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익숙한 흐름이거늘 지금 이렇게 언급하는 게 새삼스러울 정도다.
“민. 괜히 휘말리지 않게 미리 변해 있어. 나랑 휴는 이대로도 플러스의 능력을 끌어낼 수 있지만 넌 아니잖아.”
시아가 경고한 시점에 이미 디레스와 휴도 꺼림칙한 기척을 읽었다. 워낙 분위기가 한창이라 일부러 주변을 경계하지 않고서야, 희미하나 점점 짙어지는 이것을 눈치 챌 수 없을 것이다. 분명 축제에 참가한 이들에게 훌륭한 기습을 선사할 수 있으리.
민은 수갑과 완갑을 끊고 뱀파이어로 변했다. 아무리 주변이 북적거려도 키메라의 각성에 눈을 두는 이가 없었다. 아니, 하나 있었다.
“진짜로 키메라잖아.”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반시가 민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뭐야, 이건.”
“이리 와.”
디레스의 손이 닿기 전에 새하얀 가면을 쓴 하급악마가 그 반시를 불러들였다. 시아는 초점이 미세하게 흔들린 민의 눈을 보고, 그가 민이 말한 하급악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물론 그가 키메라라는 사실도.
그는 시아 일행에게 다가간 후 시아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어리석은 자들의 유흥을 부디 자비롭게 용서해 주시기를.”
“성스러운 발푸르기스의 밤에 불필요한 말이군.”
그가 허리를 펴고 시아와 마주 봤을 땐 이지 제2단계로 각성한 그녀가 있었다. 휴도 가법게 제2단계로 각성했다. 후작급 악마와 소드, 레드 드래곤, 공작급 뱀파이어라니, 새하얀 가면이 아니었으면 긴장으로 웃기게 굳은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을 것이다.
“감히 우러러볼 수 없는 분들이 한 자리에, 역시 발푸르기스의 밤은 대단합니다.”
짙은 분장으로 진짜 얼굴을 감추는 피에로처럼, 목소리는 감쪽같았다. 전혀 긴장을 읽어낼 수 없었다. 새하얀 가면이 폼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멋들어진 배우처럼 대담하게 그들과 마주했다.
“네놈 동료들이 뭔 일을 벌일지 모르지만 도를 넘기지 말라 해.”
“동료 아닙니다.”
예상외의 대답에 디레스의 눈썹이 움찔 거렸다.
“그저 여기로 넘어오기 전에 엿들어 버린 사실을 모두와 공유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시아는 그냥 지나칠 법한 말을 잘도 잡아냈다. 그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모―두―라―. 기껏 준비한 서브라이즈를 방해하는 너도 상당히 짓궂어.”
그렇다. 이 하급악마는 물건을 사준 고마운 손님들에게 답례로 정보를 흘렸던 것이다. 이 거리에서 하급악마와 나이트메어들의 깜짝 쇼를 대비하는 자들이 이미, 소문처럼 전해들을 이들까지 포함해, 수가 꽤 됐다.
[히히히히힝!]
긴 갈기를 휘날리는 말 형상의 검은 영체가 서쪽 하늘에서 떼 지어 날아왔다. 중간 중간 하급악마도 보였다.
“장관인데?”
시아는 적잖이 감탄했다.
검은 말의 모습을 한 나이트메어들은 하나 둘 무리에서 벗어나 지상으로 급강하했다. 저공비행으로 인파 사이사이를 거칠게 헤집으며 비명과 웃음소리를 고루 끌어냈다. 여섯 하고도 또 여섯, 열둘의 하급악마들은 상공에서 지휘하듯 양 팔을 흔들며 나이트메어의 움직임을 조종했다.
나이트메어를 피하느라 서로 부딪히는 이들, 들러붙은 나이트메어를 떼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 그저 즐겁게 구경하는 이들, 마냥 겁먹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이들, 나이트메어 위에 올라 타 로데오를 하는 이들― 야단법석, 아수라장. 이 말이 딱 어울리는 풍경이 거리에 가득 찼다.
“이거 괜찮은데?”
“보스, 놀아 타지 마.”
“걱정 마. 품위 없는 짓은 안 해.”
시아는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는 온몸에서 강하게 한 번 마력을 방출했다. 그러자 나이트메어들이 바람에 휩쓸리듯 아주 가볍게 하급악마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까지 밀려 올라갔다. 이 때문에 주변 모두가 시아의 존재를 알게 됐다.
“가디안스의 보스잖아.”
“히야―. 시원하게 한 건 해주는군.”
“이 다음이 볼거리지.”
모두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보스 뭘 하시려고요?” “약간의 잡기술?”
시아는 민의 궁금증을 바로 풀어줬다.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리더니 허공에 검지로 가로로 길게 선을 그었다.
“와―!”
일제히 탄성이 터졌다. 휘파람 소리도 드물게 들렸다.
검정 일색이던 나이트메어들이 오색찬란 형형색색으로 빛났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사방팔방 무질서하게 뜀박질 했지만 일정 높이 아래로는 절대 내려올 수 없었다. 높은 허공에서만 곱게 염색한 자태를 휘날려야 했다.
“보스, 제법이야.”
디레스가 양 엄지를 팟 하고 치켜 올렸다.
“그런데 저기 보이는 검정색이 눈에 거슬리네요.”
“그치?”
휴의 지적을 기다렸다는 듯이 시아는 한 번 더 허공에 선을 그었다. 열두 하급악마들도 꽃단장 당했다. 꽃분홍 악마, 쪽빛 악마, 치자색 악마 등등 그들도 당황해선 나이트메어들처럼 우왕좌왕 날아다녔다.
지상의 모두는 즐거워했다. 탄성과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더불어 불꽃을 쏘아 올려 분위기를 더 더 끌어 올리는 이도 있었다. 곧이어 하늘 풍경에 맞춰 경쾌한 음악이 시작됐고, 너나 할 것 없이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췄다. 말 그대로 화려한 축제가 됐다.
시아는 이제 두 팔 모두 하늘 높이 뻗어서 즐거운 음악에 어울리도록 지휘를 시작했다. 하급악마 및 나이트메어들은 놀이동산의 회전목마나 관람차, 꼬마열차 등과 같은 배열로 줄 맞춰 움직였다. 색이 겹치지 않게 신경 쓰는 것은 물론 간격까지 맞췄다. 모두를 겁주는 존재들이 졸지에 아기자기한 분위기로 변해버리자 가장 반기는 건 어린 아이들이었다. 저 말에 타고 싶다는 목소리가 멀찍이서 희미하게 들리기도 했다.
“이거 괜히 술이 당기는데?”
“그 마음 모르는 건 아니지만 참으세요, 엑서스엘 씨.”
디레스는 휴에게서 예상한 대답이 나오자 케득케득 웃었다. 그러다가 팔짱을 끼고 몸에서 편하게 힘을 빼며 살짝 쳐진 자세를 취했다. 곧이어 주변 분위기를 돋우는 음악에 맞춰 휘파람을 불었다.
갑자기 벌어진 쇼에 슬슬 흥미가 떨어져 갈 쯤 시아는 불쌍하게도 자신한테 실컷 휘둘린 하급악마들과 나이트메어들을 풀어줬다. 그들은 원래 색을 찾고 퇴로가 열리자 곧바로 도망쳤다. 거리의 모두는 이미 제각기 다른 유희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밤하늘에 다시 보름달이 훤히 보이는 것만 잠깐 신경 쓰고 말았다.
“재밌었어.”
얼마나 만족스러웠는지 얼굴에 미소가 만발했다.
“소문만으로는 진실을 가늠할 수 없다더니, 이렇게 유쾌한 분이 보스라면 길드 가디안스는 제법 괜찮은 곳이겠습니다.”
새하얀 가면을 쓴 하급악마가 가면 안쪽에서 웃음을 겨우 참고 있었다. 저와 같은 급인 녀석들이 어떻게 일을 벌일지 기대하면서도, 하필이면 일을 벌일 곳을 수호하는 베르베리트 후작이 어떻게 반응할지 은근히 궁금했었는데, 완전히 의외의 유희가 전개되어 처음에는 넋이 빠졌었다. 당연히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이용해서 그들을 지상에 묶어 위엄을 보일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한 것이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실로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멋지게 농락했다.
“가입 희망자라고 다 받아주지 않아.”
“오리지널은 모시다시피 악마, 플러스는 드래이크입니다. 불의 정령왕께 은혜를 입은 덕분에 키메라가 되었습니다.”
“이야― 보통 이프리트(불의 중급정령)에서 멈출 텐데 파이어 드래이크(불의 상급정령)에 도달했다고? 상성이 좋았군.”
시아는 이 자를 처음 봤을 때부터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단호하게 거절하지 않았다. 아무리 제1천왕과 제2천왕이 함께라서 형식상 인재검사를 할 필요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사슬까지는 부작용 없이 끊을 수 있습니다.”
“증명해봐.”
“여기서 말입니까?”
“오늘은 발푸르기스의 밤. 여기는 키메라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곳. 눈치 볼 이유 어디에도 없지.”
이 한 마디가 그의 가슴에 곧장 와 닿았다. ―이 분과 함께라면 무서울 것 하나 없겠구나.― 그는 한쪽 무릎만 바닥에 닿도록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새하얀 가면을 벗어 발 앞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한 번의 심호흡. 그러자 그의 손목에선 수갑이, 서로 가깝게 붙은 두 팔에는 완갑이, 그의 머리부터 발목까지는 굵은 사슬이 생겨 그를 구속했다. 제3단계로 각성하기 위한 세 종류의 구속체가 용서 없이 죄어들었다.
“민 군. 잘 봐두세요. 제2단계와 제3단계 사이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우리가 제3단계 이상 각성한 자만 받는 소수정예집단인 이유가 여기에 있답니다.”
휴는 민의 뒤에 서서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단단하게 잡았다. 물론 휴가 직접 제3단계로 각성하는 모습을 보여줬었지만 원래 제4단계까지 가능하기 때문에 제3단계 각성의 고난을 제대로 보여주지는 못했다. 다른 길드원들은 손이 부족한 길드 사정 때문에 민의 훈련에 어울리기 어려웠다. 게다가 각성 자체가 상당한 부담을 요구하기 때문에 단순히 보여주기 위해 각성하는 건 역시나 피하고 싶을 것이다.
“휘유―. 제대로 된 드래이크야.”
디레스가 휘파람과 함께 박수를 보냈다.
날개가 없는 레드 드래곤의 형상으로 전신이 순수한 불꽃에 휩싸인 불의 상급정령이 위풍당당하게 나타났다. 주변을 생각해서 크기를 많이 압축했기 때문에, 지금 휴먼족과 비슷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디레스와 키가 같았다.
[후욱―]
시아의 기습 발차기를 단지 반 발짝 뒤로 물러나 상체를 젖히는 것으로 깔끔하게 피했다.
“반사 신경은 그럭저럭……. 주변이 바글바글해서 더는 안 되겠고, 일단 아지트로 가자. 거기서 플릿하고 붙여보면 볼만 할 거야.”
“왜 하필 플릿이야?”
“내 맘.”
플릿 엑서스엘. 디레스의 남동생이다.
다시 하급악마로 돌아간 그는 구속체가 사라지기까지 십 몇 초 기다린 후 새하얀 가면을 집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런데 시아가 잽싸게 가로챘다.
“불의 정령왕의 은혜를 받는 중에 얼굴 반이 날아간 거야? 아니면 악마계에서?”
“사적인 걸 쉽게 물어보십니다.”
“그저 이 가면이 마음에 안 들어서. 드래이크잖아. 좀 더 센스 있는 가면을 고르라고.”
플러스가 됐을 때는 원기 왕성한 불꽃으로 얼굴의 오른쪽 반쪽을 가리고 있었다. 왼쪽 눈만 부리부리한 것이 위압감이 있어서 적을 상대할 때는 꽤 먹힐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시아에게서 새하얀 가면을 받아 다시 얼굴을 가렸다. 그의 등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반시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얌전해졌다. 시아와 민의 묘한 시선을 뒤늦게 눈치 채곤 다시 허둥거렸지만. 마치 다섯 난쟁이의 무언극을 보는 것 같았다.
“자, 길드 가디안스에 들어온 걸 환영해. 소로이네 후작의 낙인을 가진 유능한 청년.”
시아는 자신이 괜히 바르베리트 후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처연하게 내보였다. 그녀의 여유 넘치는 미소를 보며 그가 당황스러워 하는 건 당연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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