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9 멀리 외출한 이유
주가 제 1성에 간 틈을 타 오늘도 몰래 외출을 시도했다. 아니, 외출 중이다. 어제는 무작정 나간 거였지만 오늘을 목적지가 있다. 하지만 해무사에서 먼 곳이라 자와 같이 가는 중이다. 게다가 거기는 기에게 들킬 가능성이 큰 곳이라 자의 보호가 절실하기도 하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보디가드.
“산을 내려온 것 까지는 좋은데 나중에 어떻게 올라가려고?”
“어떻게든 되겠지.”
나도 자가 걱정하는 부분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될 대로 되라지 식이지만 영 몸이 안 따라주면 자에게 부축해 달라고 해야지.
“잠깐.”
자가 내 팔을 잡아 당겼다.
“이 산 자체에 결계가 있기 때문에 네가 안전하게 숨어 있었던 거야.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한 발 자국만 앞으로 나가면 바로 빙황과 백호에게 걸린다고.”
하긴. 자의 말대로다. 혈이 봉인 되서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성수를 팔팔한 성수 둘이 여태껏 찾아내지 못하거나, 찾아내도 쉽게 습격하지 못한 건 산의 결계와 절의 결계, 성의 결계가 모두 견고하기 때문이다. 최전방인 산의 경계를 나가면 정말로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이다.
“내가 그거 하나 생각하지 않고 밖으로 나온 줄 알아?”
“내가 따라가도 상대가 성수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단 말이야.”
“없는 것 보다 낫지.”
자의 손에서 팔을 쉽게 빼내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산의 결계에서 주저 없이 빠져나왔다. 결계가 눈에 보이는 건 아니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다. 결계의 위치뿐만 아니라 강도까지 알 수 있다. 내 감각이 점점 성장하긴 하나보다. (성수들의 성은 그 안에 있기만 해도 다친 곳과 기력이 회복되고 정신 집중․수양이 된다고 한다.)
“역대 현무 중에서 가장 제멋대로인 현무일 거야.”
내가 내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면 수호령으로 되돌려 주겠다는 약속 때문인지 자는 내 뒤를 따라온다.
어제 날 놀리는 투로 이상한 존댓말을 쓰던 자는 내가 성으로 돌아가기 직전부터 반말을 쓰고 있다. 선대 현무의 자식이고, 현대 현무지만 기억과 혈이 봉인 당했으니까 자기는 현무라고 인정할 수 없다 한다. 말은 그렇게 해도 딴에는 현무라 생각하는지 잘만 쫓아온다. 이런 걸 보고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하는 거겠지.
“어째서 빙황이 시킨 일을 하려는 거야? 현무는 굳이 귀신 성불 같은 잡일을 할 필요가 없어.”
“세상일에 잡일은 없어.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면 잡일이라고 부를 수 없는 거야.”
지금 나는 기와 두 번째로 찾아낸 귀신, 할머니를 만나러 가고 있다. 할머니를 달래서 성불시키라는 기의 숙제는 이제 숙제라는 의무에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되었다.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에 할머니의 모습이 걸려 있고, 은연중에 할머니가 신경 쓰인다.
“좋아. 아직은 빙황의 제자라고 치자. 하지만 봉인이 풀리고 하나의 성수가 되었을 때는?”
자는 내 마음을 읽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수호령들은 나를 ‘현무님, 현무님.’하면서 자신들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대하고 있다. 그런데 난 그게 너무 거북스럽다. 힘 하나 제대로 쓸 줄 모르는 평범한 인간인데 진짜 성수처럼 취급당하고 싶지 않다.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한데 타인에게 대접 받는 건, 잘은 모르겠지만 부끄러운 일이다. 자는… 오랜 세월을 살아와서 그런지 타인의 마을을 읽는 게 날카롭다.
“성수가 된 후에 내 눈에 보이고, 내가 아는 것만큼 행동할 거야. 현무의 일이 성수 처형이라며. 그렇다면 나와 반대되는 성수들을 내 손으로 죽여도 죄책감을 없을 테니까. 기도 그 중 하나가 되겠지.”
기가 죽으면 기가 내 준 숙제도 없는 것이 된다. 그 다음에는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할머니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상황에 따라 충분히 변할 수 있다. 성수, 하나의 당당한 성수가 되면 일의 우선순위가 확실해 질 테니 말이다.
“제멋대로긴 해도 좋은 성수가 될 거야.”
저 말을 칭찬으로 들어도 되는 걸까? 자가 뒤에 있기 때문에 표정을 알 수 없지만 말투는 아까보다 좀 부드럽다. 그런데 성수를 죽이겠다는데 좋은 성수가 될 거라니, 뭔가 이상해.
……이건, 기? 아니, 성도 같이야. 으음. 우연히 이 근처에 있었던 건가? 아니면 지금 내 쪽으로 오는 중? 지금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자. 빙황과 백호가 지금 어디쯤에 있어? 여기로 오는 중인 거야?”
“확실히 이쪽을 향하고 있어. 인간형이 아니라 소수형(小獸形)이길 바래야지.”
자의 말대로 기와 성이 작은 새, 새끼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면 한다. 능력도 별로 없고 몸집이 자그만 상태라 만난다고 해도 그들을 멀리 내던져 버리고 도망칠 수 있다. 산으로 다시 돌아가도 저들이 산의 결계와 절의 결계 정도는 쉽게 통과할 게 뻔하다. 이럴 땐 인파 속에 들어가는 게 최고다. 내가 어디 있는지 알아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말짱 꽝이니까. 아니, 그래도 기는 날 수 있으니까 날 빨리 찾을 수 있을 거다.
“읏.”
좀 빠른 걸음으로 막 걸었더니 심장이 콱 조이는… 제길. 12월 한 달 동안은 죽기 전까지 병원에서 살아야 한다고 하더니만, 몸 상태가 머리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차차 나빠지고 있다. 그러니 뛰는 건 죽어도 안 된다. 그래서 경보로 걸은 건데 꼴이 말이 아니다.
“제에길.”
걸음을 멈추면 안 된다. 가야 한다. 중도 하차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 가려고 했던 길은 가야하고, 하려고 했던 일은 해야 한다. ……이거 뭔가 스스로에게 모순된 말 같잖아. 이미 기의 제자에서 중도 하차했는데 지금 이 일을 끝까지 하려는 거 우스운 일이다.
“무리하지 마. 도착하기 전에 쓰러져 버릴 지도 몰라.”
“응. 그럴 지도… 몰라. 하지만…… 죽어도 빙황과 백호에게… 잡히지 않을 거야.”
“벌써 숩도 제대로 못 수잖아. 역대 현무 중에서 가장 병약한 현무일 거야.”
아마 가장 병약한 현무가 맞을 것이다. 물론 한 성수에 의해 그렇게 된 거라 억울하지만. 자가 옆에서 받쳐주는 것 덕분에 좀 편하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남이 보면 좀 어정쩡한 자세지만 내 모습을 염두 할 현대인은 이 길 위에 없다. 내가 그냥 이 길바닥에 쓰러져도 구급차를 불러줄 현대인은 없을 것이다. 한 시간 안에 그런 사람이 한 명 나올까? 순찰 중인 경찰 외에 날 도와줄 사람이 얼마나 빨리 나타날까? 길바닥 위에서 산송장 신세가 되느니 악으로 깡으로 버티며 서 있는 게 몇 천 배 더 났다.
언제 부턴가 기와 성의 낌새가 사라졌다.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는데 평소만큼 수의 귀신과 유령, 그리고 산사람이 다닐 뿐이다. 특별히 다를 게 없다.
“왜 사라진 거지?”
“방금 전에 갑자기 방향을 바꿔버리던 걸? …좀 앉았다 가는 게 어때?”
“주변을 봐. 앉아서 쉴 만한 데가 보여? 여긴 산이 아니라서 아무데나 앉아 쉬지 못해. 그냥 천천히 걷자.”
자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주변에 기와 성이 없다니까 좀 천천히 가도 괜찮을 거다. 그런데 뭔가 찜찜해서 계속 주변을 곁눈질하게 된다. 몸 상태가 안 좋으니까 기분도 같이 불편해져서 그런가 보다. 하지만 심장이 아팠을 때와는 또 다르게 콩닥거리고 위가 쓸데없이 씰룩거리며 묘한 통증을 낸다. 하…… 신경 쓰지 말자. 괜한 과민반응이다. 혼자 긴장해서 이러는 거다.
“주, 주작!”
으에…… 갑자기 찰싹 달라붙으면 중심을 잡기 어렵잖아. 자가 이렇게까지 놀랠만한 위인이…… 주작 문! 이번에 내 몸뚱이를 자극하는 기운은 주작의 것이다. 그리고 그와 다른 기운이 주작과 같이 있다. 주작이 근처에 있는 거라면 별로 걱정할 게 없…… 있구나. 성에 얌전히 있으라고 했는데 이렇게 나와 있으니.
“지희야!”
내 이름을 이토록 반갑게 부르면서 날 정면에서 대담하게 끌어안는 동안의 중년 남성은 약간 덜 떨어진 사고의 소유자인 아빠 밖에 없다. 회사에 가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대낮에 길 위에서 남세스런 짓을 하는 건 또 뭐고!
“자네는… ‘자’. 맞지?”
“청룡 지께서 이 근처에 계셨군요.”
잠시 아빠 때문에 이마에 교차로를 만들었다가 금방 풀어버렸다. 내 귀가 지금 심오하고 수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말이지.
“자, 아바를 알아? 가 아니잖아. 아빠, 자가 보여?”
또, 저 순진하게 방글방글 웃는 얼굴. 순간적으로 지나간 자의 말에 의하면 아빠가 성수 청롱이라는 건데, 정말로 아빠가 청룡이 맞는 거야? 자룡이 내게 건 봉인을 풀 수 있는 게 청룡이라고 하던데, 그리고 기가 나랑 같이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내버려 둔 건 또 뭐야. 아빠는 귀신은커녕 헛것도 안 보고 산다고. 아, 정말 돌아버리겠네.
“현무 정님. 부친게서는 청룡 지님이 맞으십니다.”
“문인……. 아, 안녕하세요. 주작 문.”
아빠의 오른쪽 뒤에 주작의 제자 문인이 붉은 종달새를 소중하게 안은 채 서 있었다. 그 붉은 종달새가 주작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성수들은 미니 사이즈 일 때 확실히 귀엽구나. 아읏! 지금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란 말이다.
“주변 이목도 있고, 해무사에 가서 얘기하자. 아빠가 대 얘기해 줄게.”
그렇게까지 환하게 웃으면서 말하면 따로 뭐라 말하기 어렵잖아. 뭐, 이해 못할 상황은 아니다. 그동안 계속 수상쩍도록 이상한 일의 연속이었으니까 앞으로는 절대 놀라지 말자. 그래, 놀라서도, 이상하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왜 아빠 뒤에 그 할머니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이는 거지?
“지희야. 황룡하고 눈을 마주치지 마. 기가 너에게 황룡의 모습을 보여준 것 같구나. …현무 정에게 동정심을 산 황룡 채(彩)는 정말 불쌍한 성수구나. 이미 미쳐버린 왕이여, 당신을 동정하고 싶지 않소. 이제 돌아가 주시지 않겠소? 이 어린 현무는 자룡 예 때문에 생사의 경계에 놓여 있는 안타가운 재목이오. 이미 쓸모를 잃고 미쳐버린 당신과는 격이 다르니 당신의 쓸모없는 유희 속에 끌어들이지 마시오.”
이게 정말 아빠야? 진지한 얼굴과 예리한 눈매. 평소의 아빠에게서는 절대로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나와 마주보고 있으면서 누군가를 향해 조용하면서 무게 있는 투로 말하는데 저절로 마른 침을 삼키게 된다. 도대체 누구한테 말하는 거지? 이 근처에 나를 노리는 다른 성수가 숨어 있는 걸까? 음, 아까 기와 성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서 가 버린 건 아빠와 문 때문인 게 확실하다. 아니면 이유 없이 나를 내버려두지 않을 거다.
“가자.”
“으, 응.”
아빠가 멋대로 끌고 가듯이 하는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본 게 헛 거였나 보다. 지박령인 할머니가 여기에 있을 리가 없잖아.
“멋대로 성에서 나오다니, 흥. 배짱도 좋군. 우리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어쩔 뻔 했어?”
문은 산의 경계에 들어가자마자 잔소리를 시작한다. 새는 이렇게 다 잔소리꾼인가? 휴. 문의 잔소리는 이유 있는 거니까. 문의 말대로 아빠와 문이 좀만 더 늦었더라면 기와 성을 만났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인간형으로는 절대 돌아다니지 못했을 거다. 워낙 특이한 모습……. 기와 성이 인간형일 때는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지. 특별한 주술을 써야만 사람들이 알 수 있다고 하니까. 어…… 그러면 인간형일 수도 있었다는 거구나. 제길, 뭐가 이래. 짜고 치는 고스톱? 각본 있는 스포츠 뉴스? 뭐가 닥 들어맞으면서도 묘하게 꼬이는 듯한 전개는 정말이지 싫다.
“수호령이신가요?”
“네, 네? 아뇨.”
그러고 보니까 자가 아까부터 몸을 떨면서 뒤로 좀 떨어져 따라오고 있다. 문인은 그저 자의 모습과 나랑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가 수호령이라 생각했나 보다. 자의 사정은 모르니 그럴 만하지.
“문인, 자는 내 보디가드에요. 자, 너무 그렇게 떨지마. 널 해코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넌 내가 시킨 대로 충실히 했잖아.”
아빠나 문이 자신을 해코지 할까봐 저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은데, 만약 내 두 눈이 시퍼렇게 떠 있는데도 아빠나 문이 그런 짓을 한다면 내가 용서하지 않을 것다. 정식 현무는 아니지만 그래도 임시 주인 정도는 되니까. 아니지, 고용주라고.
“지희야, 걸을 만 해?”
“응? 아니, 전혀.”
“그러면 지렁이만큼 천천히 가야겠네.”
아빠는 멈춰 서더니 1초에 한 걸음씩 걷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마저도 이렇게 어이없는 장난을 칠 수 있다니 아빠 성격은 정말 별나다. 이런 아빠가 진짜 청룡이라면 내가 아는 성수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성수일 거다. 뭐, 아까는 정말 성수 같았지만.
세상일이란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를 일이다. 이런 건 절대 일어날 수 없다고,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열심히 떠들었던 것들이 눈앞에서 그대로 실현될 때 세상은 넓고 신비하구나라고 다시 느끼게 된다. 처음에는 바보 같다고, 어처구니없다고 손가락질 받던 허구와 공상이 나중에는 현실에서 생활에 밀접한 뭔가가 되는 경우가 많다. 자기 발가락으로 자기 눈알을 뽑을 수 있다는 저급한 바보 이야기는 빼고 말이다.
세상에는 진심으로 신기한 것들이 많다. 이 세상 어느 구석에 존재하고 있는 희귀한 것들은 세상 모든 이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아리송한 외모에 비밀스런 분위기가 이목을 끄는 것이다. 세상에 파다하게 퍼져있고 보편적인 일상생활에 딱딱 맞다 해도 사람들이 외면해 버리면 그건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일)가 되어 버린다. 사람들은 이처럼 진귀하고 희귀한 것에 더욱 관심을 쏟는 법이다. 아마도 자신들이 흔하고 평범해서일 것이다. 자신들이 그 평범함 때문에 곧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가 될 거라는 사실을 잊은 채 말이다.
살아 있는 것들은 언제쯤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고민하고 자신이 살아 있는 이유를 찾을까? 자기가 자기에게 내린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면(어차피 쉽게 대답하지 못하지만) 회의감에 젖을 수도 있고 낙천적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크나큰 자기비판에만 바지지 않는다면 그런 질문쯤이야 나이 먹고 늙어가면서 천천히 답을 찾아도 사는 데 지장 없을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죽지 직전에 자신을 알게 된다. 하지만 도중에 제 목숨을 끊어 버리면 절대로 자기를 알 수 없다. 세상이나 자기 자신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고, 모두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데 왜 소수의 사람들은 그거에 대해서 자신을 비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아무 것도 모른다고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닌데 말이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귀신성불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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