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 대나무에 꽃이 피는 이유
아침에 뜬금없이 공작이 찾아와 영토를 구경하고 싶지 않냐고 했다. 성수는 죽으면 령이 소멸해 버려서 살아 있을 때 봐두지 않으면 영영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오늘, 내일하며 연명하는 이 목숨. 공작이 내게 그런 말을 한 걸 보니 정말 오늘, 내일 중에 사라져 버리는가 보다. 내가 직접 명부를 보는 것을 거절했으니 차마 수명이 언제 다하는 지 말해주지는 못하고 이런 식으로 내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거라 생각한다.
지상계와 천계도 못 가본 곳 천지인데 영토를 보지 못했다고 한 될 건 없을 거다. 죽기 전에 일부러 이것저것 떠안고 죽는 건 미련한 짓이다. 갖고 있는 걸 하나 둘 훌훌 털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이 세상과 작별 인사를 나눠도 모자를 판에 ‘조금이라도 더’라는 욕심은 정말 과한 욕심이다. 뭐, 내 생각과 다른 이도 있겠지만 난 그렇다는 것뿐이다. 죽을 때는 최대한 가볍고 편안하게. 이게 죽음에 대한 내 이상향이다. 이상향이라고 하니까 역양이 조금 애매하나 상관없지 않을까 싶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관점이니 말이다.
기를 처음 만나서 지금가지 근 한 달 동안 내 삶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거짓 속에서 진실을 찾기도 하고 전실 속에서 ‘차라리 거짓’을 바라기도 했다. 변화란 직접 당하고 느끼는 이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변화에 대해 조금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바가 긍정적으로 보는 것보다 많은 것이다. 100년도 제대로 못 사는 인간이 그런데 수백 년 사는 성수는 오죽할까. 세상이 수십 번 바뀌니 변화가 두려운 건 당연할 것이다. ‘변화’는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질 수 없는 것이다. 늘 새로운 게 기존의 사고를 뛰어넘는데 익숙해질 리가 없다.
그런데 지금은 지상계의 인간들에게서가 아니라 천계 성수들에게서 큰 변화가 일어났고 또 일어나는 중이다. 그래서 성수계 전체가 전례 없던 혼란 상태가 돼 버린 것이다. 차대왕이 금단아로 태어나고 현 왕이 미친 것에 모자라 자취를 감춰버렸다. 왕의 계승과 성수계 존속 문제를 둘러싸고 개천파와 수천파로 갈려 오랜 시간 싸움을 진행했다. 성수 ‘현무’의 죽음과 새 ‘현무’의 각성이 새 전환점이 되어 분파 싸움이 가속화 되는 중에 왕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제 왕이 종결에 집중하고 있다. 지상계 인간들의 전쟁도 대책 없지만 본이 돼야 할 성수들도 그 전쟁이 대책 없긴 마찬가지다. 작은 한 가지에 흔들리고 무너지고 뒤바뀐다. 종족이 무엇이던 간에 변하지 않는 모습인 것 같다.
200년에 가까운 성수계의 전쟁 중에 막상 희생된 성수는 ‘현무’와 ‘백호’ 밖에 없다. 그 중에 현무는 희, 정. 이렇게 둘이 희생된다. 전대 현무, 나의 어머니, 현무 희는 나에게 겨우 현무의 의지를 넘겨주고 자룡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셨다. 현대 현무, 나, 현무 정은 자룡의 저주로 시한부 삶을 살아야 했지만 마지막 한 달을 정말 알차게 살았다. 더 이상 살지 못해도, 평화를 되찾은 성수계를 보지 못해도, 왕이 된 기를 보지 못해도 전혀 아쉬울 것 없을 만큼 열심히 살았다. 물론 심장, 온몸의 근육에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고통에 괴로울 때도 있었지만 인생에서 겪어야 할 고통이라 생각하며 견뎌냈다. 누구든 살면서 죽고 싶을 만큼의 슬픔과 괴로움을 느끼고 그에 따라 고통을 받는다. 그걸 하나하나 넘길 때마다 그만큼 성장하는 거라면 아프다고, 힘들다고 불평만 할 건 아니라고 본다. 뭐,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위안할 수도 있을 거다.
지금 황룡이 수천파 성수들을 회유해 본 자리로 모으고 있다. 금봉만 끝까지 맞서고 있다는데, 금봉은 처음부터 황룡과 감정이 안 좋았으니 회유될 리가 없다. 성이 어째서 끝가지 수천파를 고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금봉이 얼마나 자신의 사상을 열심히 타 성수들에게 심었는지를 알 수 있다. 금봉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희생되고 나서야 이 분쟁이 끝날 것이다. 기가 정식으로 왕좌에 앉기 까지 또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그건 기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으니 언급하지 않으련다.
좀 흥미로운 건 황룡이 성수들을 총 동원해서 날 찾고 있다는 거다. 이제 금봉만 잡으면 되니까 많이 여유로워진 모양이다. 목숨이 다 된 성수를 전력으로 찾으시다니 황송하기 이를 데 없으나 쓸데없는 짓이다. 성을 죽이고, 아버지 청룡 지의 성에서 잠깐 동안 쉬다가, 과거 희금 현재 채강의 집에서 잠시 담소를 즐기다가, 천계와 지상계의 현무 성들을 둘러보다가, 각성 전에 다니던 학교를 둘러보다가, 지금 엄마와 나만 아는 숲에서 암실척쇄를 치고 주변 경치를 감상하고 있다. 물론 이 글도 전부 여기서 쓰고 있는 것이다. 믿든 안 믿든 그건 자신에게 맡기겠다. 분명한 건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통증 한 번 없었다는 거다.
사람은 죽기 전에 가장 활기 넘치고, 아팠을 땐 못했던 일들을 척척 해낸다 한다. 어디에 비유하면 가장 쉬울까. 지금 내가 이렇게 건강한 것 마냥 다니고 태평스럽게 글을 쓰고 있는 것 모두 이에 비유하면 딱 맞을 것이다.
한 가지 묻겠다. 대나무의 꽃을 본 적이 있는가? 대나무의 꽃을 보면 그 사람에게 대단한 행운이 찾아온다고 한다. 대나무가 절대 한 그루만 자라지 않고 군락을 이룬다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몰랐다면 지금 알게 된 셈 치고, 그 대나무가 꽃을 필 때는 일제히 한 번에 핀다는 건 아는 이가 드물 것이다. 대나무 꽃을 본 다음에 그 자리에 가보면 대나무를 한 그루도 볼 수 없다. 그건 대나무가 죽기 직전에 있는 힘을 다해 딱 한 번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다년초 대나무의 꽃이 언제 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대나무 꽃을 보면 행운이 온다 하는데, 그 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그 순간은 모를 거다. 그저 꽃을 보고 감탄사를 내던지고 뒤늦게 대나무가 사라진 걸 깨닫는다. 대나무의 꽃이 꼭 아름답고 경이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그래도 대나무에게 있어 자신의 꽃은 평생의 보람이고 살았었다는 증거니까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다.
암실척쇄 근처로 어떤 성수가 오고 있다. 내가 모르는 성수가 태반이니 어떤 성수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암실척쇄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주술을 거두고 또 자리를 옳겨야겠다. 글쎄, 내가 떠나고 저 성수가 이 글을 발견하면 성수계로 전달될 테고 발견하지 못하면 이대로 이 글도 나처럼 조용히 사라질 수 있을 거다. 내가 어디서 죽을 지는 나모 모른다. 언제 어디서 령이 소멸될지, 육신이 썩어갈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죽은 후’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데 감히 예측해서 여기에 쓸 수는 없다. 이젠 정말 자리를 떠야겠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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