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7 전망대, 그 아래에!
요새에서 원로회 회의장을 지켜본 건 그들의 황당한 돌발 행위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저 녀석들이 왜 황도를 공격하는 거야?”
폴이 모두를 모으더니 황도로 안내했습니다.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수도가 외곽은 이미 심판단에게 먹힌 상태였습니다.
“쟤네는 성전만 부수는 거 아니었나?”
“이야. 치열한데.”
딥데어족이기 때문에 심판단과 맞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비스 성녀가 보호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심판단이 더 유리했습니다. 말이 황도지 속빈 황제 인형이 얼마나 백성들을 이끌 수 있겠습니까. 딥데어족은 중구난방으로 몸을 내던졌습니다.
황도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전망대에서 심판단의 움직임을 관찰했습니다. 심판단 전원이 가담한 듯 수도 상당하고 기세도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이물질이 껴있었습니다.
“엘데른 백작이 미친 듯이 동족의 피를 모는군.”
지브릴이 비스 성녀에게 굽실거린 순혈 간신배를 찾아냈습니다.
의아스러운 건 드렌필드의 대표, 딥데어족 두 분이 모두 경기를 관람하듯 내려다 볼 뿐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겁니다. 심판단이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전망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폴. 우릴 왜 데려온 거야?”
“싸움 구경. 불구경 다음으로 재밌는 게 싸움 구경이잖아.”
폴은 흑표범 형상의 조각상에 올라타서 동족이 심판단을 얼마나 잘 막아내는지 구경했습니다.
“지브릴, 저들을 그냥 둬도 되겠어?”
윌랜드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침입자가 나타나면 기꺼이 동족을 도와줍니다. 그래서 패시가 아무렇지 않게 땅 위의 혼란한 사태를 구경하는 지브릴에게 확인 차 물어봤습니다. 폴은 제 3자라 할 수 있지만 지브릴은 엄연한 원로니까요.
“저기에 끼면 심판단이 아니라 우리 동족 손에 죽을 수도 있어. 전투 민족에겐 자기 싸움에 끼어드는 녀석을 극도로 싫어하는 공통적인 성질이 잠재돼있거든. 우리쪽 표현을 빌리자면 쓸데없는 참견을 하면 안 돼.”
지브릴의 말을 이해하긴 했지만 역시 가만히 보고만 있자니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괜찮아, 아가씨. 황도는 무너지지 않아. 여기는 황제에게서 법률, 세금을 면제받은 특별한 길드들이 모여 사는 도시니까.”
폴은 몸이 작아져도 말투는 여전했습니다. 그 녀석이 그 녀석이니까 습관이 바뀔 리 없겠죠. 하지만 하나 못하는 게 있다면 제 머리를 쓰다듬지 못합니다. 손이 닿지 않는데 할 수가 없죠. 간혹 할 수 있는 경우도 생기지만 잡담이니까 그만 두겠습니다.
“여기 황제도 어둠의 실험에 투자를 했나?”
킬 씨가 폴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그런 머리가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러면 저들이 여기를 쑥대밭으로 만드려는 이유가 없잖아.”
“뭐, 겉으론 그렇게 보이니까.”
폴이 배시시 웃었습니다. 숨기고 있는 게 뭘까 궁금증이 올라갈수록 창자가 강하게 꿈틀거렸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약았군.”
웃었습니다! 표정일랑 무표정 하나밖에 없을 것 같은 혈안왕이 웃었습니다. 웃긴 상황도 아니고 웃기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좋은 말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웃었습니다.
“누가? 내가? 에이. 형도 참. 어린 꼬마한테 약았다니 너무하잖아.”
어디서 그런 천진난만한 표정을……. 치니비가 순진하게 웃을 때보다 훨씬 귀여운 얼굴로 상큼한 미소를 꽃피웠습니다. 일단 외모가 영락없는 어린애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점수를 크게 따는 듯 했습니다. 그래도 폴이 그렇게 받아치니까 꿈틀거리던 창자가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텔러. 뭔가 알고 있구나.”
“언뜻 들은 게 있어. 하프 데몬 생성 실험을 한 곳이 드렌필드에 있다고. 하프 데몬은 밖으로 방사되기 전에 실험에 관한 모든 기억을 은폐 당하는지 누구 하나 실험실의 위치를 알지 못해. 그런데 비스 성녀가 간부 중 몇 명과 상의하는 걸 엿들었는데 드렌필드에 실험실이 있다는 것 같았어.”
혈안왕은 티에게 고분고분 아는 것을 모두 말했습니다. 이것이 사이가 틀어지기 전의 형제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실험실이 이 황도에 있다는 거야?”
“녀석들의 움직임을 잘 봐.”
지브릴이 팔짱낀 채 턱으로 밖을 가리켰습니다. 전 계속 심판단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달리 눈에 띠는 건 없었습니다.
“동선을 봐야지. 싸움 솜씨를 보면 어쩌잔 거야?”
이마에 혈관이 돌출됐습니다. 드렌필드로 온 후부터 줄곧 저기압이더니 잡일에도 금방 화가 표출됐습니다.
“하? 혈안왕의 말대로야. 폴, 약았어.”
패시도 심판단이 어디를 향하는지 눈치 챘습니다. 저와 캐스트, 슈볼츠아웃 가의 두 형들도 알아차렸는데 치니비 혼자 갈피를 못 잡고 헤맸습니다. 머리 위에서 물음표가 무수히 쏟아져 나왔습니다.
“뭐? 어디? 실험실이 어디란 거야?”
“잘 봐. 놈들이 이 전망대를 향해 오고 있잖아. 딥데어족에게 막혀서 느리긴 하지만 착실하게 여기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고.”
혈안왕이 치니비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반대쪽 손으로 심판단의 동선을 가리키며 친절하게 설명해줬습니다.
“아, 그렇구나. ……가 아니잖아, 지금.”
“엇박자 실력이 출중하군. 어떻게 소드마스터가 됐나 몰라.”
“놀리지 말어.”
치니비와 혈안왕은 잘 붙어 있는다 싶더니 완전히 친해졌습니다. 둘 다 속 편한 성격이라 쉽게 어울린 듯 했습니다. 실제로 혈안왕이 치니비보다 네 살 위인데, 나이를 모른다 쳐도 한 눈에 형·동생 사이로 보였습니다. 혈안왕은 무서운 이미지로 굳어져 있는데 의외로 자기 사람에겐 친근하게 잘 대해주는 성격인가 봅니다.
“지브릴. 저들이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모르지. 적당히 놀다가 워프나 텔레포트로 오면 그만이니까.”
“안타깝게도 여긴 마법으로 못 와. 그러니까 키니가 쟤네를 다리품 팔게 두는 거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우리가 워프로 온 건 뭐고?”
“이 전망대, 내거 거든. 그러니까 난 마법으로 올 수 있지. 아까 워프 내가 열었잖아.”
폴은 그 상황을 맘껏 즐겼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쟤네 황도 바깥에 있었지? 왜 처음부터 마법으로 전망대 가까이까지 오지 않는 거지?”
심판단은 1/3정도 들어온 상태였습니다. 지금 당장 마법으로 이동하고 싶어도 상대가 마법에 능통한 딥데어족이라 쉽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육탄전에 익숙한 그들이 딥데어족처럼 전투 중에 마법을 쓰기 위한 집중을 바로바로 하지 못했습니다. 전망대까지 오려면 처음처럼 계속 밀고 들어오는 수밖에 없어 보였습니다.
“그건 황도가 제 3 성녀의 수호성지라서 그래. 수호성지는 성녀가 아닌 자가 마법으로 들어갈 수 없게 돼 있어.”
[탁]
폴이 조각상에서 사뿐히 내려왔습니다.
“앞으로 반나절 정도 걸릴까?”
“중심으로 올수록 강한 길드가 있으니까 그 정도 걸릴 거야.”
심판단이 지나간 곳은 엉망진창이었지만 쓸데없는 살육은 하지 않은 듯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실험실이지 황도에서 특혜 받고 사는 길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긴, 전부터 그들은 성전에만 집착했지 다른 건 달리 손대지 않았습니다. 성전을 지키려는 자들이야 심판단에게는 걸림돌이 되니까 이리저리 깨진 거고요.
“내려가서 녀석들이 찾으려는 걸 먼저 회수할까나.”
폴은 돌계단을 총총총 발랄하게 뛰어 내려갔습니다.
“폴. 말이 안 맞잖아. 심판단은 실험실을 부수러 온 건데 찾긴 뭘 찾아?”
“아가씨는 내가 그렇게 좋아? 꼬마가 됐는데도 옆에 꼭 붙어 다니려고 하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 우뚝 섰습니다.
“큭큭, 농담이야. 그래도 쬐끔 섭섭하다.”
“됐어. 가기나 해.”
폴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폴은 계속 키득키득 웃었습니다.
“있지. 난 심판단이 실험실을 부수러 왔다고 얘기한 적 없어. 혈안왕도 하프 데몬들이 실험실을 부수고 싶어 한다고 말하지 않았고.”
저도 모르게 ‘아’하고 소리 냈습니다. 심판단이 밖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어서 비약해서 추측한 것이었습니다. 얼굴이 살짝 화끈거렸습니다. 폴이 웃는 걸 멈추지 않았다면 더 붉게 달아올랐을지도 모릅니다.
[쿠궁, 쿵]
“뭐야?”
“캐스트?”
“미안. 발을 헛딛었어.”
캐스트는 테스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섰습니다.
킬 씨가 한심한 행동을 비꼬았습니다.
“계단이 낮아서 엉덩이는 덜 깨졌겠군.”
“하하. 잠깐 단 생각을 하는 바람에…….”
패시는 캐스트의 ‘딴 생각’이 뭘지 신경 쓰였나 봅니다. 무표정을 무표정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타인을 꿰뚫는 눈으로 캐스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의 눈과 마주치기 전에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 때 캐스트에게 의구심을 품은 건 혈안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이들에겐 먼저 가까이 가거나 말을 걸거나 했지만 캐스트에게만큼은 어떤 식으로도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귀족가 자제답지 않게 다가온 사람을 일부러 피하는 무례를 범하기까지 했습니다.
폴과 저는 거의 확신하고 있어서 거북함 없이 태연하게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심판단이 찾으려는 게 뭐야?”
“아마 ‘가이아’일 거야. 하프 데몬을 만들기 위한 핵이지.”
“이제 와서 그걸 왜 찾을까?”
“키니가 시켰겠지. 키니의 머릿속은 훤히 보인단 말야. 큭큭. 카오스 때문에 자리를 오래 비우게 될 것 같으니까 심판단 전체에 명령을 내린 거야. 각 종족에게 성전이 있는 것처럼 하프 데몬에게도 그에 필적하는 것이 있으니 찾아오라고 구슬렸겠지. 가이아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순진한 녀석들은 키니의 말만 믿고 움직이는 거고. 키니도 참 많이 악랄해졌어.”
폴은 모두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채 무턱대고 전망대에 데려와서 몇 명에게 약았다는 소리를 들은 주제에 비스 성녀가 악랄해졌다고 말했습니다. ‘난 절대 나쁘지 않아’와 비슷하지 않나요?
“다 왔다. 이 문 안에는 뭐가 있을 까요?”
[끼기긱]
20년 넘게 방치했다는 걸 증명하는 듯이 녹슨 문에서 고막을 긁어내는 소리를 냈습니다.
회색 먼지가 가득한 수술실이 가장 먼저 보였습니다. 수술대 대신 작은 유리 상자가 있었고 나머지 기구는 수술도구와 별 차이 없었습니다. 실험실 분위기를 내는 건 벽에 빼곡히 진열되어 있는 실험병 뿐이었습니다. 깨진 것도 있었는데 온전한 병에는 색이 탁해진, 썩은 배양액이 들어있었습니다. 뚜껑을 열면 곧바로 악취가 날 것 같았습니다.
“오랜만이네. 다신 안 오려고 했는데.”
폴은 넓은 실험실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금지된 실험을 몰래한 곳 치고는 평범한 분위긴데?”
두 번 다시는 없을 기회라 다들 흩어져서 구경했습니다. 이걸 위해서 폴이 혼자 가도 되는데 모두를 데려간 겁니다.
“텔러. 뭐 생각나는 거 없어?”
“글쎄.”
티는 동생이 기분 나빠할까 봐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혈안왕은 아무 느낌도 없었나 봅니다. 담담했습니다.
“여어, 티. 혈안왕이 몇 살때부터 너희랑 같이 살았어?”
폴이 자체 발광하는 황금구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크기는 폴의 머리보다 좀 더 크고, 표면은 도자기처럼 매끄러웠습니다.
“갓난애기때부터……. 이런, 기억 못하는 게 당연하겠네. 텔러가 혼혈이라는 사실에 너무 집착했나 봐.”
티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습니다.
“복터진 놈이지. 다른 하프 데몬은 다섯 살까지 플리에 있는 수용소에서 살다가 기억 폐쇄 후 방사되니까.”
“비인도적이군. 하프 블러드는 최소한 자립 가능할 때까지 부모가 키우는데.”
“키워줄 이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야.”
폴은 주위를 쭉 둘러보더니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로 시원하게 웃기 시작했습니다.
“하하핫! 하, 하하하하!”
영문을 몰라 눈만 동그랗게 뜨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역시 선수 쳤어. 그런데 이걸 어쩌나……. 뻔히 알고서 내버려둔 건데.”
캐스트 이피머스가 사라졌습니다. 옛 실험실에 정신을 판 사이에 비스 성녀에게 돌아간 겁니다. 별 소용없는 진짜 가이아를 가지고서 말입니다. 심판단을 신념적으로 더 강하게 쥐기 위해서겠죠. 그래도 예의상 가짜 가이아는 남겨뒀더군요.
이 일을 뻔히 예상하고 있던 폴은 당연히 가짜란 걸 알고 있는 가이아를 들고서 재밌어했습니다. 심난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 즐거워 보이려고 과하게 웃었습니다.
세이버의 힘으로 성별이 바뀐 캐스트 이피머스. 그는 원래 ‘아리아 이피머스’라는 소녀였고 비스 성녀의 시종입니다. 캐스트에게 누나가 있다는 건 거짓말인거죠. 동일 인물이니까요. 비스 성녀가 자신이 가진 장기짝을 최대한으로 사용하기 위해 아리아를 남자로 바꿔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다 합니다. 세이버의 수석 기사가 왜 그렇게 제 1 성녀에게 집착했는지, 그 답이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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