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문 - 환상? 현실? … 보물 쟁탈전 개시
교장이 되길 거부하며 끝까지 담임교사로서 충실히 교사 생활을 한 정년퇴임 직전의 교사가 발랄하게 걷고 웃고 장난치는 아이들을 기특하고 사랑스럽게 여길 즈음, 그 아름다운 그림을 무참하게 깨부수는 복도의 무법자가 존재했으니 그 이름하야 윤세연. 오늘도 주제넘게 까불어대는 백원중과 이재성을 복날 개 패듯 패고 있었다. 주변 아이들은 말리지는 못하고 끼어들면 저들도 같이 맞을까봐 조용히 지나가기만 했다. 결국 민혁이 세연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면서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다 죽어가는 두 남아를 구출했다.
“좀 더 일찍 도와주지.”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늦었다고 불평하는 이 화상들.
“적당히, 충분히 맞았다고 생각하고서 구해준 거야.”
불평을 가볍게 받아넘기는 솜씨를 자랑하는 민혁. 은혜를 모르는 화상들이 뒤에서 뭐라 궁시렁 거리든 상관 않고 유유히 교실로 들어갔다. 민혁의 텔레파시에 따라 타로카드를 치는 세연의 모습이 보였다. 근처에서 낯익으면서 기분 나쁜 마력이 느껴져 세연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세연도 그 마력을 눈치 채고 있어서 점치기 어렵지 않았다.
“어때?”
“불청객까지는 아닌데 달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 올 거 같아.”
세연은 약간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6월 하순이라 점점 대기가 더워지는데 주변의 이것저것이 심리를 불편하게만 하니 그런 표정이 나올 만 했다.
“이 녀석들, 그때처럼 학교를 아수라장으로 만들 건가?”
“그때? 뭐? 언제?”
“수도관 터진 적 있었잖아. 지금 이 녀석들, 그때의 프레이르랑 프레이야야.”
민혁이야 언제나 주변을 살피고 신중하기 때문에 표정에 전혀 변화가 없지만 세연은 순간 인상을 팍 썼다가 바로 새침하게 도도한 표정으로 변했다. 교실 안에 학생들이 몇 명인데 얼굴을 구길 순 없었다. 그래도 민혁의 눈에 세연의 속이 불만 가득인 게 보였다.
“이번에도 걔네가 멋대로 굴면 다음에 꼭 우리도 학교 테러하자.”
아무리 민혁이라도 세연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결의에 가득 찬 목소리로 그런 강력한 발언을 하면 웃을 수밖에 없다. 세연이 제 3의 세계에서 프레이르와 프레이야를 본 적 없으면서 이렇게까지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는 건 앙그르보다가 갖고 있는 프레이야를 향한 약간의 경계심 때문이었다. 민혁은 세연의 귀여운 투정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하고만 있을 순 없지. 진원이 형도 눈감아 줄 거야.”
대화중에 프레이르와 프레이야의 마력이 조금씩 가깝게 느껴졌다. 그들이 아주 가까이까지 와 있는 것 같았다. 떠들썩해도 조회시간이라 학생들 모두 제자리에 앉아 있는 교실에서 민혁과 세연만 은근히 긴장 상태였다. 이번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 쌍둥이 신의 마력을 주의했다.
“야. 야. 조용히 해라. 2주 뒤에 기말고사 보는데 완전 나사 풀렸구먼.”
담임이 데려온 타 학교 교복 차림의 남학생과 여학생을 보고 민혁은 머리가 띵했다. 이건 또 무슨 조화인지, 프레이르와 프레이야였다.
“전학생이에요?”
“야, 비쥬얼 죽인다.”
“자기 PR은 화끈하게!”
“조용히 하랬지!!”
제 3의 세계에서도 외모가 기준 이상치라 둘을 반기는 학생들의 호응이 뜨거웠다. 그에 프레이르는 아랑곳 않고 차가운 표정이었지만 프레이야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환호에 보답했다. 이 분위기를 즐긴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세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서 둘의 심사평을 민혁에게 들려줬다.
“괜찮은 선남선년데, 왠지 정이 안 가는 타입이야.”
<쟤네가 프레이르, 프레이야야.>
제 3의 세계에서 그 둘을 직접 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인지라 세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할 말을 잠시 잊고 표정 관리를 하는 도중에 프레이야와 눈이 마주쳤다. 프레이야는 민혁을 찾는 중이었는데 우연찮게 민혁의 앞에 앉아 있는 세연과 마주친 것뿐이었다. 그런데 세연의 눈에서 경계심이 보이자 그녀에게 흥미가 생기는 듯했다.
“자, 자기소개 하고 빈자리 아무데나 가서 앉아.”
담임의 성의 없는 말에도 프레이야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제 일에 열심히 했다.
“잘 들어둬. 프로필은 아무 때나 공개되는 게 아니니까. 이름은 한미나. 생일은 3월 16일, 혈액형은 O형, 귀여운 건 뭐든 좋아하고 선물은 절대 거절하는 법이 없어. 싫어하는 건 딱 하나야. 저기 앉아 있는 장민혁 군.”
시선이 모조리 민혁에게로 향했다. 저런 미인을 언제부터 어떻게 알게 됐냐는 둥, 왜 미인한테서 미움을 샀냐는 둥, 교실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민혁은 왜 자기를 걸고넘어지는지, 앞으로 피곤해 질 걸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조용, 조용. 여기 이 건장하고 예쁘장한 아이는 내 이종사촌, 김한일 군. 생일은 7월 7일, 혈액형은 AB형. 지금 표정이랑 말투가 딱딱한 건 낯가림 때문이고, 적응하면 최고의 호남이이까 여성분들은 한일이를 많이 예뻐해 줬으면 해.”
“꺄-."
프레이르의 소개까지 프레이야가 끝냈다. 여학생들의 반응이 곧바로 터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거기에 세연과 세연․민혁 추종파의 일부를 제외해야겠지만. 세연이 화나면 들소와 맞먹는 성깔을 부리지만 글래도 학교에서는 최고의 여성상이고, 민혁은 뛰어난 두뇌와 바른 행실, 반반한 얼굴 등으로 최고의 남성상이니, 세연․민혁 추종파는 이 불쾌한 뉴 페이스를 곧바로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전학생 소개를 하는 것으로 조회가 일찍 끝나고 반 아이들의 대부분이 전학생의 자리에 몰려들었다. 다른 반에서도 외모가 출중한 전학생의 소문을 듣고 반으로 삼삼오오 무리지어 몰려왔다. 1교시 시작종이 쳐도 통제가 안 될 것 같았다. 이런저런 문답이 오가는 중에 민혁과 세연은 저들이 쓸데없는 짓이나 말을 하지 않을까 부지런히 경계했다.
“저거 무너뜨려볼까?”
뭔가 생각났는지 세연이 눈을 반짝였다.
“뭘 무너뜨릴 건데?”
“잠깐만.”
세연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제 가슴에 민혁의 얼굴이 묻힐 만큼 민혁의 목을 끌어안았다. 우연히 그 모습을 본 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교내에서는 볼 수 없는 과감한 스킨십이었으니 오두방정 떨 만 했다. 덕분에 전체 시선이 세연과 민혁에게 집중됐다.
“너희가 관심 가져주지 않으니까 민혁이가 금방 우울해 하잖아.”
멋모르고 세연에게 성희롱 당하고 있는 민혁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아무 짓도 하지 못했다. 설마 민혁이 그런 캐릭터일까…….
“아잉, 민혁이도. 전학생들이 아무리 잘나도 그 관심이 오래 못 간다고.”
“우리의 귀여운 민혁이는 영원한 마스코트잖아.”
“어이, 어이. 귀엽다는 건 실례지. 잘 생겼다고 해야지.”
민혁 추종자들이 세연에게 넘어가서 아주 난리가 났다. 전학생들에게 몰려있던 학생들도 조금씩 반응을 보였다. 점점 전학생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자 세연은 뭔지 모를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장난이 심하잖아.”
민혁은 조심스럽게 세연의 팔을 풀고 제 몸을 뒤로 살짝 젖혔다. 역시 민혁이랄까. 보통 남자애들이면 세연의 돌발행동에 얼굴이 새빨개지거나 기타 여러 가지의 반응을 보일 텐데 민혁은 그냥 평소다웠다. 세연이 민혁을 놀리기 위해 그런 것이었다면 재미없다고 했겠지만 이번엔 놀릴 대상이 민혁이 아니었기 때문에 만족스런 미소를 귀엽게 나타냈다.
<프레이르랑 프레이야 때문에 이러는 거면 상당히 유치한 행동이야. 지금은 그냥 무시하라고.>
“오해야. 난 그냥 텃세부리는 거라고.”
세연은 다른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그 때 프레이야의 마력이 가까워지는 느낌이 피부를 스쳐지나갔다. 민혁과 세연이 동시에 돌아보니 프레이야가 웃으면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널 지목했었지?”
학생들 모두 프레이야의 행동에 주목했다. 전학생 한미나와 그녀가 유일하게 싫어한다는 장민혁의 대면이었다.
“여자 친구가 있었어? 난 계속 괴로웠는데. 매번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구나.”
민혁에게나 학생들에게나 폭탄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민혁은 앞으로 정말 곤란해지리라 생각했다.
<말 조심해.>
“나 안보고 싶었어? 여기로 전학 온 보람 없게 그렇게 쳐다보지 마.”
프레이야는 민혁의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했다. 민혁이 자기의 교내 이미지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자신을 멀리하려는 줄로 생각했다. 민혁은 세연의 눈치를 보고 나서 프레이야를 텅 빈 눈(!)으로 쳐다봤다.
<이 여자 분은 네가 프레이야라는 걸 알고 있는 귀인이니까 헛수작 안 하는 게 좋아.>
민혁은 이 텔레파시를 세연, 프레이야, 프레이르에게 동시에 보냈다. 프레이르와 프레이야는 살짝 놀란 눈치였다. 세연은 프레이야를 살펴보다가 눈알만 굴려서 학생들을 재빠르게 둘러봤다. 대화의 어색한 연결과 쓸데없는 침묵에 어수선한 상태였다.
“뭘 착각한 모양인데, 난 여자 친구가 맞긴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 부류는 아니야. 그런데 정말 이상해. 태아 적부터 민혁이를 알고 지냈는데 너 같은 애는 오늘 처음 봐. 내 착각인가?”
한 집단에서 모순된 대화가 등장하면 어느 쪽을 진실이라 판단할까? 집단에 오래 있었던 쪽으로 손을 들어줄 것이다. 프레이야는 민혁을 몰아넣으려고 했는데 도리어 자신이 처음 보는 여자애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멋모르고 충격 발언을 한 것을 후회할 법 했다.
“내가 어리광이 좀 심해서 민혁이랑 장 붙어 다니거든. 그래서 내 지인이 민혁이 지인이고 민혁이 지인이 내 지인이야. 아마…… 몇몇 애들도 네가 참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야. 설마 민혁이가 내게 뭔가를 숨길 리가 없잖아. 응? 이상한 아가씨.”
세연 추종자들을 비롯한 주위 아이들은 세연이 지금 상당히 신경이 날카롭다는 걸 알아차렸다. 세연 스스로 제어하지 않는 이상 오늘 또다시 누군가 세연의 손에 아작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분위기가 험악한 쪽으로 돌아가려 하자 학생들은 하나 둘 제 반, 제 자리로 돌아갔다. 전학생 덕분에 들뜬 마음이 전부 가라앉아 버렸다.
“타임아웃.”
노른만 쓸 수 있는 특수 마법이 발동됐다. 학교 전체의 시간이 멈춰버렸다. 지금 시간이 계속 흐르는 건 신들 뿐이었다.
“노른이 로키와 친했었다지만 로키를 위해 자진해서 나설 정도였나?”
프레이르가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말했잖아. 태아 적부터 알던 사이라니까. 건방진 여자애 하나가 멋대로 까부는 건 용서가 안 돼.”
이런 말투를 쓰는 이가 정말 과거의 고귀한 노른인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프레이르와 프레이야는 노른을 직접 만난 일이 한두 번? 이처럼 거의 없었기 때문에 세연이 노른 중 누구인지, 정말 노른인지 감을 잡지 못했다. 그 혼란을 민혁이 한 번에 정리했다.
“베르단디. 이제 친구가 될지도 모르는 아이랑 싸우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흐응. 맘 좋은 내가 참아야지.”
세연은 타임아웃을 풀고 프레이야를 향해 생긋 웃었다.
“미나 양. 내 눈 밖에 나면 너만 손해라는 거 잘 알잖아. 민혁이한테 붙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어떻게 날 모른척하면서 민혁이한테 수작을 부려?”
마지막 강타는 학생들에게 난잡하게 쌓인 잡 추측들을 단번에 정리했다. 민혁과 미나는 과거 아는 사이인데 미나가 민혁을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다가 세연에게 제지당했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기득권의 텃세 승리였다.
“민혁이랑 사귀는 게 아니면 좀 양보해도 되잖아.”
“넌 아들의 여자를 방관하는 엄마 봤어? 아버지의 여자를 내버려두는 딸 봤어? 그만 따지고 자리로 돌아가.”
프레이야는 학생들의 눈 때문에 세연의 말에 순순히 따라야 했다. 세연의 홈그라운드에서 자기가 빛을 바랄 자리는 없어 보였다. 멋대로 튀는 행동을 한 것에 대한 처절한 패배였다. 속으로 이를 갈았다.
세연의 보이지 않는 권력을 증명하는 것처럼 교실 내 학생들 모두 전학생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세연이 먼저 그들에게 잘해주기 전까지는 세연의 눈앞에서 그들을 챙겨주지 못할 것이다. 민혁은 이런 강제적인 분위기에 한숨만 쉬었다. 세연이 자기 멋대로 아가씨긴 하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저 프레이야가 꼬리 내리게 만들 줄 몰랐어. 적당히 하지 그랬어.>
세연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솔직히 자기가 왜 그랬는지 자기도 몰랐다. 그냥 프레이야에게 적개심이 생겼다.
오전 수업 시간 내내 세연은 따가운 시선을 느끼지 않았을까? 프레이야는 세연을 의심의 눈초리로 계속 노려봤다. 그녀가 쓴 마법은 분명 노른의 마법인데 뭔가 노른답지 않았다. 행동이며 말투가 프레이야의 심기를 쿡쿡 쑤셔댔다.
점심시간에 학생 식당으로 가는 길이며 배급하는 줄에서 프레이야는 민혁과 세연을 바짝 따라다녔다. 프레이르야 프레이야가 하는 대로 좇았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민혁의 뒤를 따라다니게 됐다.
“오전 내내 한 마디도 못 했는데 점심시간 정도는 같이 있어도 괜찮지?”
민혁과 세연이 마주 보며 앉은 상태에서 프레이야는 민혁의 옆에, 프레이르는 부득이하게 세연의 옆에 앉았다. 외모가 받쳐주는 4인이 앉아 있으니까 학생들이 그들 쪽을 흘끔흘끔 쳐다봤다.
“한 마디 할 줄 알았는데 가만히 있네. 역시 이미지 관리야?”
음식 앞에서 하면 체할 만한 말이지만 세연은 먹을 때가 가장 기분이 좋을 때라 프레이야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내가 굳이 안 그래도 민혁이 팬들이 난리칠 텐데 뭘.”
세연이는 먹는 중이라 표정이 밝고 프레이야는 품위를 지키기 위해 표정이 밝아서 겉에서 보면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민혁은 시끄러워지지만 않으면 상관없기 때문에 옆에 누가 앉아 있던 개의치 않았다.
“어딜 가나 인기가 많은가봐? 언뜻 보니까 골수팬 수준이던데.”
“응. 사이비 종교 만들면 아마 대박날 걸?”
프레이야는 세연이 건성으로 대답하니까 은근히 짜증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표정관리에 소홀하지는 않았다.
“그만 하고 먹어. 시비걸려고 전학온 거 아니잖아.”
프레이르가 적절한 선에서 끊었다.
“세연인 밥 먹을 때가 제일 행복한 애라 그 때는 욕해도 다 용서하거든. 밥만 보이니까.”
“밥 다 먹고 나서 반 죽여 놓으니까 그 전에 도망가야지.”
“그거야 그런데, 너한테서 도망칠 수 있는 녀석이 이제껏 있었나?”
“없어.”
당연하다는 듯이 단호한 대답이었다. 프레이야는 숟가락으로 국을 빙글빙글 휘젓다가 세연을 쳐다봤다. 정말 행복한 표정으로 먹었다. 그 때 엄청나게 사나운 시선이 느껴져서 옆을 쳐다봤는데 세연․민혁 추종자들이 건너 탁자에 앉아서 전학생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저 시선에 시달려야 돼?”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이제 슬슬 학교 분위기에 적응했는지 프레이르의 표정이 처음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다.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지만 훈훈한 외모에 표정까지 괜찮으니, 프레이르를 훔쳐보던 여학생들이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원래는 그런 표정이었군.”
민혁은 이제까지 저를 경계하는 프레이르 밖에 본 적이 없어서 프레이르의 부드러운 표정이 신기했다. 새로운 걸 발견한 것 마냥 반응을 나타냈는데, 프레이르는 민혁을 보자마자 곧장 시선을 돌렸다. 친해지고 싶지 않은데 프레이야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걸 뻔히 보여줬다.
“있지, 여기엔 왜 온 거야? 전학까지 올 정도로 굉장한 걸 꾸미고 있는 거야?”
세연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어보자 프레이야는 잠시 당황스러워 했다.
“아니…… 전학이란 게 우리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양쪽 부모님이 같이 사업하시는데 그 회사가 외국에 나가게 됐어. 덕분에 이쪽에 사시는 다른 친척 댁에 신세지는 중이야.”
“군이 다르니까 전학을 한 거군.”
프레이르가 설명하자 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르는 가급적 피하고 싶은데 민혁이 일부러 그에게 친하게 굴었다. 며칠 전에 있었던 글린부르스티 도난 사건 때문에 둘 사이가 꽤 틀어졌었는데 민혁은 그건 그저 과거의 장난으로 묻어가려는 듯했다.
“방관자 베르단디가 어째서 그런 걸 묻는 거야?”
“궁금하니까.”
쌈박하게 짧고 분명하며 정확한 핵심적인 명답이었다.
“쿡쿡. 윤세연, 빙고.”
민혁은 세연의 대답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세연도 제 대답이 괜찮다 생각했는지, 민혁의 칭찬 때문인지 얼굴이 확 폈다. 그에 반해 프레이야는 둘에게 당한 것 같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앉아.”
민혁이 순간적으로 표정과 어투를 바꿨다. 프레이르와 프레이야는 등에 소름이 쫙 끼쳤다.
“뭐, 뭔데 명령이야?”
“여기서 나가면 지금 밖에 있는 괴물을 푼 장본인으로 찍을 거야.”
이번에는 세연까지, 세 명의 신이 놀랐다. 건물 밖이긴 한데 교정에 기분 나쁜 마력이 존재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세연은 주변 학생들의 눈치 때문에 가급적 편한 표정으로 민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거… 내 생각이 맞다면 키메라야.”
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야는 침착하게 표정 관리하면서 식판을 들었다.
“나가진 않을 거야. 일어섰다가 다시 앉으면 얼마나 이상하게 쳐다보겠어?”
프레이야가 잔반을 버리러 가자 프레이르도 따라갔다. 둘 모두 키메라의 갑작스런 등장에 당황하고 있었다.
“마블한테 시켜서 데려온 거지?”
세연이 탁자 아래서 발로 민혁의 다리를 꾹 누르며 말했다. 민혁은 한 번 씩 웃었다. 세연은 키메라가 난동 부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서 겉으로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쉬고 발을 치웠다. 민혁이 프레이르와 프레이야를 찾아보니 식당 유리문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키메라가 마력에 예민한 족속이라 잠시 빌린 거야. 4대 보물 중에 아직 발견되지 않을 게 있잖아.”
“쟤네한테 겁줄 것 까진 없잖아.”
“경고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내가 실헝서 그래. 얼른 다른 데로 보내.”
세연이 식판을 들고 일어서자 민혁도 같이 일어서자. 둘이 프레이르와 프레이야가 있는 곳까지 가자 키메라의 마력이 사라졌다.
“평소에도 긴장 좀 하고 살아.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를 세상이니까.”
민혁이 프레이르와 프레이야의 사이를 유유히 지나갔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두 신의 머릿속에 콱 박혔다. 세연은 민혁과 나란히 걸어가면서 치마 주머니에서 타로카드를 꺼내 천천히 섞었다. 맨 위의 카드를 뒤집어보니 ‘달’카드 였다. 카드를 정리하고 주머니에 도로 넣고선 민혁의 옆에 바짝 붙었다.
“오늘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텐데, 역시 조심해야 할 사건이 하나 정도는 일어날 거야.”
매일 그런 위험 속에서 살고 있어서 딱히 신경 쓰이는 점괘가 아니었다. 그래도 한 가지 걱정돼는 것이 있다면 역시 프레이르와 프레이야였다. 프레이르는 원래 전투형 신이 아니지만 프레이야는 전쟁을 부추기는 신에다가 마법 실력이 탁월한 신이라 주시할 필요가 있었다. 프레이야가 마력의 봉인을 찾지 못했어도 이둔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고 프레이르의 마력을 같이 쓸 수 있기 때문에 방심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손님을 초대해야겠어. 너도 참석할 거지?”
“세쌍둥이?”
“응.”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괜히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지더니 이유 모를 불안감과 강박감이 민혁을 휘감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세연이 민혁의 관자놀이에 흐르는 땀을 닦아줬다. 민혁은 세연의 손을 내리면서 주변을 살펴보더니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집중했다. 평소처럼 우트가르드 로키의 마력도 없고, 딱히 누군가의 마력이 느껴지는 것도 아닌데 자꾸 가슴에 켕기는 것이 있었다.
“정말 아픈 거 아니야? 민혁아, 응?”
세연의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뒤늦게 따라온 프레이르와 프레이야도 상태가 심상치 않은 민혁을 발견했다.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가만히 서서 주변을 잔뜩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왜 그러는 거야?”
“몰라.”
“이봐. 정신 차려.”
프레이르가 민혁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도 민혁은 반응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세연은 점점 걱정이 쌓여서 안절부절 못하고 민혁의 손을 꽉 잡았다. 정신줄을 놓은 건 아닌데 혼자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니 보는 사람을 애먹였다.
<로키.>
그 때 신들에게 텔레파시가 전해졌다. 민혁 한 명을 불렀지만 모두가 알아야하는 일인지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그 근처에 김리궁의 열쇠 조각이 있어요. 일단 토르가 주변을 찾고 있는데 로키도 지금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따뜻한 햇살을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발데르였다. 노른 출신인 세연이 가장 먼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발데르, 지금 로키가 이상해요.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고, 갑자기 이래요.”
“아니, 이젠 괜찮아.”
민혁이 울먹이는 세연의 등을 토닥거렸다. 괜찮다고 하기엔 표정이 아직 불안했지만 말을 하고 반응을 보이니 일단 안심이었다.
“토르에게 도움을 청한 건 티르와 스카디가 학교에 있기 때문이지? 여기 우리도 지금 학교에 있다고. 바로 움직이는 건 힘들어.”
민혁은 가슴이 계속 두근거렸지만 처음보다는 평정심을 찾았다.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거라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발데르 덕분에 불안감의 정체를 알아냈으니 대책 없이 헤맬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김리궁의 열쇠 조각이 로키의 학교 내에 있을 수도 있어요. 토르께 부탁한 곳도 그곳 주변이니까요.>
“역시 내가 엘리멘탈 프린트를 가지고 있어서 김리궁의 열쇠 조각에 반응을 하는 거군. 아주 볼쾌한 기분이야.”
<우트가르드 로키보다 빨리 찾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노력해 보지.”
발데르의 신성한 빛이 사라졌다. 민혁은 오른손으로 심장 부근을 짚었다. 4대 보물은 서로를 끌어당긴다고, 민혁의 안에 있는 엘리멘탈 프린트가 근처에 있는 김리궁의 열쇠 조각을 애타게 찾았다. 4대 보물의 조각은 한 곳에만 있는 게 아니라 제가 가지고 있는 마력으로 공간을 이동하고 다니니 찾기 어렵다. 운이 좋은 건지 아닌지 그 중 하나가 학교 부근에 나타났다.
“그때 마력의 봉인을 풀더니 엘리멘탈 프린트 조각을 모두 회수했군.”
프레이르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민혁이 마력의 봉인을 풀던 날, 토르의 폭주하는 마력과 민혁의 방대한 마력에 겁먹고 자리를 서둘러 피했었다. 그토록 비굴한 날이 없었다.
“덕분에 우트가르드 로키의 표적으로 재차 찍혀버렸지.”
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5교시 시작하려면 20분 정도 남았는데 찾을 거야?”
“토르 혼자 수고하게 둘 순 없잖아.”
민혁이 세연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줬다. 프레이야의 눈에 이 두 사람은 친구관계가 아니라 부녀관계로 보였다. 암만 봐도 민혁이 세연의 모든 것을 다 받아주고 다 챙겨주고 있었다.
“간만에 실력 발휘 해야지.”
학교 전체가 민혁의 마력에 휩싸였다. 지면, 대기 할 것 없이 전부 민혁의 지배하에 있게 됐다. 엘리멘탈 프린트의 힘을 조금 빌리기도 했는데 딱히 민혁의 레이더에 걸리는 건 없었다. 4대 보물의 조각은 제 마력을 완전히 숨길 수도 있기 때문에 어디서 갑자기 마력을 반짝 거릴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기다렸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신의재림-두번째라그나로크(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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