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1. 히바하루 NL커플 단편입니다.
2. 팬소설에는 너무나 실력이 미약한 저인지라 졸작이 싫다 하신 분은 ‘뒤로’퍼튼이나 ‘백스페이스’를 살포시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이름
수업이 끝나면 집이 아니라 다른 학교로 쏜살같이 달려가는 여학생이 있다. 여자 아이가 가장 귀여워 보인다는 스커트 길이, 무릎 위 10cm를 천천히 뽐내며 다녀도 좋을 텐데, 그녀에게 하교 시간은 자신을 드러내는 시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중생 고유의 귀여움과 상큼함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재빠르게 교복과 머리를 정돈한다. 심호흡을 하고 오늘은 평소와 똑같이 할 지 다르게 할 지 머릿속도 정리해 본다. 그런데, 그렇게 신나게 질주했으면 하교 하는 학생들을 살펴보며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녀는 나미모리 중학교의 정문 앞에서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의 수를 세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기다리는 사람이 늦게 하교한다는 것을 알면, 천천히 걸어도 될 것을 왜 굳이 뜀박질을 했는가. 글쎄. 그녀의 속사정은 그녀만이 알 수 있는 법이다.
“하루. 부지런하네.”
아담한 체구에 유독 튀는 갈색 머리칼을 가진 남학생이 그녀를 알아봤다. 그의 뒤에는 딱 봐도 운동부 부원으로 보이는 키 큰 남학생과 서양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은회색 머리칼의 남학생이 있었다. 그 셋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언제든지 붙어 다녔다. 그녀는 그들이 평범한 학생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학생’ 외에 숨겨진 신분에 대해서는 일반인에게 비밀이나, 그녀는 어쩌다보니 그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정신 차리고 보니 이 모양이더라’ 쯤 된다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오늘 수업은 잘 들으셨어요?”
“으음. 그럭저럭.”
“조금 있으면 시험인데 수업에 열심히 임하셔야 해요.”
“형님 일에 참견 말고 너나 잘 해.”
혼혈 남학생이 실례될 정도의 거친 말투로 그녀를 쏘아 붙였다. 은회색 머리칼과 에메랄드 색 눈동자라는 아름답고도 신비스런 외모를 가졌지만 성격은 그에 조금도 가깝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홱 돌리고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똑같이 받아치면 피곤한 대화가 전개될 것이라고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녀의 무시성 태도가 오히려 혼혈 남학생의 신경을 몇 배로 자극할 수 있는데, 가까운 곳에 그를 말릴 인재가 둘이나 있기 때문에 그 후 상황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히바리는 오늘 학생회 회의 때문에 늦을 거야.”
“괜찮아요. 항상 저녁 늦게 하교하시는 걸요.”
“아아. 히바리 녀석, 이 지극정성을 알아야 하는데.”
그녀는 키가 훤칠한 남학생의 말을 어색한 미소로 받아넘겼다.
미우라 하루. 그녀가 나미모리 중학교 정문에서 히바리 쿄야를 기다리며 오후 시간을 훌쩍 날려버린 지 어언 두 달. 그녀를 잘 아는 다른 학생들은, 그녀가 히바리를 기다린다는 것만 알았다. 그녀가 두 달 동안 그와 직접 마주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 어째서냐며 경악할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멀리서 그의 모습이 보이면 얼굴이 언뜻 보일 때까지 몰래 지켜보다가, 일정 거리 이내로 두 사람의 간격이 좁혀졌을 때 냅다 집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방에 들어선 그녀가 거울을 들여다볼 때, ‘내 얼굴이 빨간 건 그 사람을 봤기 때문이 아니라 쉬지 않고 뛰었기 때문이다’라고 자기 납득을 하는 것도 일상이다.
세 남학생과 작별 인사를 하고, 학생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시각까지, 구름을 세며 하늘이 점차 진한 주홍색을 변하는 것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매일 질리지도 않고 보기 때문에, 캔버스와 물감을 챙겨주면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가끔은 하늘에 푹 바져서, 자신도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라는 착각을 한 적이 있다.
“하늘에 떠 있으면 그 사람을 보기 쉬울까?”
오른손 위로 뻗어서 구름을 잡는 시늉을 했다. 당연히 손에 구름이 잡힐 일은 없겠지만, 살포시 쥔 주먹에 조각구름 하나가 가려지면 그 구름을 잡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바람을 따라 흐르는 구름은 언제라도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와 자유를 과시했다. 그럴 때마다 구름을 잡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했다.
“구름이라고 해서 땅 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 보이는 건 아닐 거야. 건물 안에 있는 사람이랑 자기 바로 밑에 그림자로 가려진 사람은 안 보일걸?”
멀리서 잠깐이라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일상을 감사히 생각했다. 휴일에 그를 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휴일에도 거스르지 않고 그를 봐야한다며 고집 피울 나이는 아니다. 매일매일 평일의 모습을 눈으로 찍어 머리에 저장해 두고 기억으로 무한히 출력할 수 있기 때문에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은 문젯거리도 못 된다. 하루가 휴일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그와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번도 그와 가까이 있어 보지 못했지만, 근접한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 만으로 행복했다. 그런데 그 행복감을 휴일에는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얼굴만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곳에 있다는 행복함도 상상해야 하는 휴일이 지독하게 싫었다.
“내가 나미모리에 다녔으면 그 사람을 좀 더 자주 봤을까? 아니야. 지금처럼 그를 기다리는 즐거움을 깨닫지 못했을 테니까 얼굴을 자주 본다고 해서 좋을 건 없어. 뭐, 그와의 거리가 지금보다 가까울 수도 있겠지.”
나미모리 중학교 교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상사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나미모리 중학교의 학생으로서 히바리와 마주치면 과연 자신은 어떻게 행동할까? 다른 학생들처럼, 선도부에 걸릴만한 부분이 있나 없나 재빠르게 훑어볼까? 지나온 길을 순식간에 되돌아가서 모퉁이나 다른 반 문 뒤에 숨어 그를 지켜볼까? 어떻건 간에 그에게 나쁘지 보이지 않으려고 혹은 특별히 그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할 것이다.
모두가 익히 아는 ‘미우라 하루’랑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그녀는 리본과 사와다 츠나요시를 만나기 전부터 히바리 쿄야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녀가 곧잘 놀러가던 비밀 장소가 있는데 그 근처가 그의 집이었다. 우연치 않게 지나다니는 어른들의 대화를 듣고 그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게 됐는데, 그를 직접 본 건 그가 나미모리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처음으로 교복을 입었을 때였다. ‘강하다’는 인상이 온 몸으로 풍겨 나왔다. 사람의 눈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원래 사교성이 부족해서 늘 혼자 숨어 놀던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타인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히바리가(家)의 본가 근처에서 홀로 리듬체조를 응용한 놀이를 하던 어린 소녀는, 그 집의 유일한 소년이 귀가하는 시간에 맞춰 조심스럽게 집 가까이까지 갔다. 담장에 바짝 붙어 살금살금 걸었으며 대문에서 몇 m 떨어진 곳에 다다르면 그가 올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렸다. 언제나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같은 행동을 했다. 처음엔 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첫인상이 너무 강했던 데다가 주위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는 것에 맞춰 그에 대한 감정이 변해갔다.
여지없이 담에 딱 달라붙어 대문 족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히이이익!”
순간,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얼음처럼 차가우면서 단단한 물체가 팔뚝에 닿은 것이다. 여름이라 민소매 셔츠를 입고 있어서 양 팔이 어깨까지 시원하게 드러나 있었다.
“아무리 그늘에 있어도 열사병 걸려. 오늘 무지 덥다고.”
히바리 쿄야. 검은 가쿠란을 입은 히바리가 하루의 등 뒤에 있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서 그의 눈을 쳐다보며 담에 붙은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 그녀로서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자.”
그는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것 같은, 아주 차갑게 식힌 캔 음료를 내밀었다. 그녀를 놀래킨 미지의 물체가 이것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상태라 그의 호의에 무반응이었다. 그녀를 따라 가만히 서있던 그는, 그녀를 향해 뻗었던 손을 다시 자신에게 당기더니 ‘칙, 똑’ 하고 캔 뚜껑을 땄다. 그리고 다시 그녀에게 내밀었다.
“못 따면 못 딴다고 말 해.”
히바리는 하루가 캔 뚜껑을 딸 줄 몰라서 가만히 있는 줄 알았다. 하루는 그제야 정신이 들고 최대한 아주 조심스럽게 음료수를 받았다.
“독 같은 거 없어.”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똑같은 것을 꺼냈다. 중학생 소년과 초등학생 소녀는 담에 등을 기대며 나란히 앉았다. 공기가 워낙 뜨겁게 달궈져서 담 아래 음지라고 해도 시원하지 못했다. 덜 더울 뿐이었다. 히바리가 가져온 음료수가 내장부터 차갑기 식혀줬기 때문에 폭염 속에서 더위 먹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남의 잡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면 경찰이 잡아간다.”
“콜록! 콜록콜록. 네? 콜록.”
하루는 그 동안의 행동이 가슴 깊이 찔렸다. 그리고 히바리가 전부 알고 있을까 싶어 덜컥 겁이 났다. 남을 몰래 훔쳐보는 게 나쁜 짓이라고 들은 적 있다. 하지만 몸이 머리가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가 왜 여기 있냐고 물어볼 것을 대비해, 어떻게 대답할지 변명거리를 찾느라고 머리를 빠른 속도로 굴렸다. 하지만 할 필요 없는 궁상이었다. 그는 음료수를 다 마시고 나서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이 날이, 그녀 생애 처음으로 안도의 한숨을 쉰 날이었다. 그리고 그와 최고로 가까이에 있었던 날이었고, 그의 목소리를 최초로 들은 날이었다. 그녀는 이 날 빈 깡통을 들고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이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귀가하고, 귀가하자마자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한 번도 웃지 않았는데 가까이서 봤다는 것만으로 그의 표정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다른 사람과 섞이면 알아낼 수 없는 평범한 목소리인데 잠깐 몇 마디 들은 것으로 그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생각났다. 이 날이,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을 날이었다.
그 후 그의 집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은 없었다. 대신, 그와 직접 마주치지 않기 위해 조심 또 조심하면서, 그가 자주 다니는 길을 그녀도 종종 이용했다. 덕분에 일주일에 서너 번은 그를 우연히 볼 수 있었다. 혼자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부지런히 친구를 만들어서 같이 쏘다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교성이 제로에 가깝던 그녀가 갑자기 사교활동(?)에 분발하기 시작한 것도, 파고들면 순수하지 못한 동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본성은 어쩔 수 없는 지라 같은 반을 몇 번이나 같이 했던 학생들 중에서 친구를 골랐다. 그 때부터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5살(로 보이는) 리본과 사와다 등을 알게 됐다. 그들이 입은 교복을 보고 마음속으로 얼마나 고함을 질렀는지 모른다. 그가 다니는 학교의 학생들. 그들이 나미모리 중학교의 학생이라는 사실만으로 그들을 볼 때마다 그의 얼굴이 생각났다. 스스로 고질병이라고 인정할 만큼 상태가 심각했다. 길에서 우연히 그를 발견하는 것도 일주일에 한두 번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그의 눈에 띄면 다시 그에게 폐를 끼칠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꽉 붙잡고서 일부러 사와다를 쫓아다니기도 하고, 창피를 무릅쓰고 안 해도 될 짓도 닥치는 대로 했다. 그녀만 지칠 뿐이었다. 결국 버티다 못해 어릴적 행동을 다시 시작했다.
“나미모리 푸른- (삐약삐약).”
바로 머리 위에서 낯익다 못해 너무 익숙한 새 소리가 들렸다. 히바리가 얼마 전에 고쿠요에서 데려온 조그만 노란 새였다. 하루는 천천히 무릎을 굽히며 가방을 조심스럽게 땅 위에 내려놨다. 그리고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새를 감싸 잡으며 다시 일어섰다. 새는 도망가지 않고 그녀의 손 안에서 까맣고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아…… 혼자니? 항상 그 사람이랑 같이 있었잖아.”
새는 하루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부리로 날개깃을 다듬었다. 두 손 안에 들어 있는 감촉은 솜뭉치보다 더 부드럽고 폭신했다. 하루는 아무 생각 없이 새를 쳐다보고 있다가 인기척이 나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새를 오른손으로 들고 왼손으로 가방을 줍자마자 사방을 둘러보며 새를 올려둘 곳을 찾았다. 가장 무난한 곳이 자기 뒤에 있는 학교 담이었다. 그녀는 까치발을 하고서 담 위에 새를 올려놨다.
“그 사람 올 때까지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아, 너라면 혼자 그 사람한테 갈 수 있지?”
그녀가 뒤로 물러서며 학교에서 멀어지려고 하자마자 새가 다시 그녀의 머리 위에 앉았다. 그녀는 난처해하면서도 새가 떨어져 다치지 않게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새를 잡으려고 오른손을 천천히 가져가는데 푸드득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새가 앉은 자리는 다름 아닌 히바리의 왼쪽 어깨였다. 그가 흑발이고 가쿠란도 검정색이라, 새의 둥글고 노란 몸이 두드러져 보였다. 그런데 하루의 눈에 두드러져 보이는 쪽은 히바리였다.
머릿속이 전에 없이 바빠졌다. 두 달 만에 그와 마주볼 줄은 몰랐다. 그의 집 근처를 서성거릴 때는 네 달 조금 넘게 버텼는데, 이번에는 그 반 만에 걸렸다. 그가 자신을 알아볼까, 아니면 전혀 모를까. 잠깐이지만 그의 새를 데리고 있었으니까 새에 대해서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음 같아선 냅다 달아나고 싶지만 아무 말 없이 도망쳐 버리면 그거야 말로 수상해 보일 것이다. 이러기는 싫고 저러기는 더 싫고 그랬다간 그에게 나쁜 인상을 남길 테고, 아주 복잡했다. 더욱이 그를 보자마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서 위기 상황을 집착하게 대처하는 것이 힘들었다.
“아…… 저…… 새 주인이신가 봐요? 새가 귀여워서 구경하고 있었어요. 에……. 실례했습니다!”
하루의 선택은,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 할 테니 처음 만나는 척 하고, 새에 대해서 아주 짧게 언급한 후에 바로 사라지자’였다. 허리를 푹 꺾었다가 펴는데, 그 박자에 맞춰 새가 또 다시 그녀의 머리 위에 앉았다.
“네가 퍽이나 마음에 드나봐.”
히바리는 새를 데려가지 않았다. 하루가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을 즐기는 듯했다. 표정은 그냥 무덤덤하지만 분위기가 그랬다.
“저기…….”
“초식동물하고 친한 것 같더라?”
“네?”
그와 그녀가 서로 질문과 새를 교환하는 모양새가 됐다. 그녀는 새를 돌려주고 나서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 했다.
“아기랑 같이 있는 녀석 말이야.”
“아, 츠나 씨 말이군요. 친… 하다기 보다는 아는 사이죠.”
차마 히바리 앞에서 사와다 및 기타 등등 사람들과 친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사와다가 아닌 사사가와 쿄코를 언급했으면 솔직하고 당당하게 친하다고 했을 것이다.
“아는 사이인데 대놓고 이름으로 부르는 군.”
“아!”
비어 있는 오른손이 저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그를 상대할 때는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데, 기습 질문에 휘말리는 바람에 평소에 쓰는 호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말았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을 임기응변이라고 하던가.
“펴, 편하게 이름 트기로 했어요. 츠나 씨도 절 그냥 하루라고 부르는데다가…… 전 최소한의 예의로 ‘씨’를 붙이는 걸요.”
하루는 너무 긴장해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한 번 달아오른 얼굴색은 좀처럼 가라앉지 못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나라님 욕도 한다는데, 날 계속 ‘그 사람’이라고 말하는 건 심술인가? 하긴 예전부터 스토커 짓을 하던 꼬마니,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함부로 이름으로 못 말하겠지.”
울컥 거렸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매일 졸졸 쫓아다니진 않아도 일부러 그가 있는 곳에 찾아오는 건 엄연히 스토킹이었다. 게다가 그가 알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을 그에게 직접 확인사살 당하니 심근이 끊어지는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스토커 짓. 꼬마. 일말의 양심. 이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심근을 잘근잘근 써는 것 같아서 지독하게 괴로웠다. 앞으로는 그를 몰래 보는 일 자체가, 그가 다니는 곳에 접근하는 것도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더라도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고개를 뻣뻣이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스토킹 하는데 상대의 이름을 한 번도 안 불러본 스토커가 어디 있어요? 그래요. 전 당신 말대로 일말의 양심이 있어서 당신 이름을 제 입으로 말하지도 않고 손으로 써본 적도 없어요. 이름을 부르면 그 만큼 그 사람을 구속하는 거니까, 제 주제에 어떻게 당신 이름을 말해요? ‘그 사람’이라고 말하는 건 심술이 아니라 배려예요. 일말의 양심에서 선택한 이름 대용 호칭이라고요.”
말하는 도중에 가슴이 따끔따끔 했다. 왜인지 모르게 눈물도 나올 것 같았다. 자신이 몰래 그를 훔쳐보는 바람에 그가 불쾌함을 느끼고 있는데, 자신이 그에게 폐를 끼쳤는데, 자신의 가슴이 이토록 아프다니, 아직 어린 그녀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가슴은 계속 욱신거리고 눈물은 억지로 참고 있으니, 호흡곤란이라도 올 것 같았다. 더 심해지기 전에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했다.
“잘못한 건 전데 주제넘게 큰소리쳤네요. 죄송합니다.”
그에게 꾸벅 인사하고 나서 집을 향해 몸을 돌렸다. 모든 미련 버리고 정말 그만 둘 생각으로 이 악물고 돌아섰다. 하지만 아직 남은 미련 때문에 그녀의 두 발이 무거워졌다.
“하루.”
첫 발을 떼자마자 족쇄가 채워졌다. 몸이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이름이 사람을 구속한다고? 내가 네 이름을 수십 번 수백 번 부르면 넌 그만큼 계속 내 옆에 있는 건가?”
그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갈 수도 없었다. 다리야 제발 움직여라 하고 속으로 계속 재촉했지만 한 번 채워진 족쇄는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앞으로 계속 불러줄게. 너도 내 이름을 불러도 좋아. 대신, 초식동물을 이름으로 부르는 건 그만 둬. 칼잡이 녀석이나 혼혈 녀석처럼 성으로 불러. 앞으로 나 외에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건 여자 한정이야.”
상냥하지 않은 말투로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가버렸다. 하루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다리는 움직일 수 있게 됐지만 그녀가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사람들에게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복잡한 마음이 정리된 듯 아닌 듯, 엉망이 된 얼굴로 돌아다닐 수 없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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