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7 푸른 빛의 보석
수도의 왕성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아침이었다. 리벤과 쌍둥이는 한 명당 하나씩 방을 배정 받았는데, 방 하나의 크기가 터무니없이 커서 방 밖으로 나가는 데만 평소의 다섯 배로 걸어야 했다. 식당으로 가는 거리는 다 말할 것도 없었다.
“아주 어린 분들인데도 정말 부지런하시네요.”
“역시 트리오 리벤님의 자제분들이세요.”
포르포냐 가의 쌍둥이와 직접 만나 본 사용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들의 어른스러움과 부지런한 성향을 칭찬했다. 그러나 겨우 몇 시간 가지고 성급하게 판단했다간 분명 큰 코 다칠 것이다. 쌍둥이는 왕성에 적응하기 위해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세세한 것을 파악하는 주이기 때문에, 평소의 몇 배로 얌전하게 행동하는 것뿐이었다.
아침 식사 후 쌍둥이가 왕성 탐험을 하고 있을 대, 리벤은 또 다른 트리오인 헤르겔 다르케스의 안내를 받아 왕궁 기사단 훈련장에 있었다. 쥬엘 나이트든 아니든 기사 자격이 있는 자들이 교관의 구령에 따라 오전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평범한 군사보다 비교적 실력과 격이 높기 때문에 일반 군대와는 그 훈련 방식이 사뭇 달랐다. 대개 전략적인 복합성 실전의 형태를 띠었다.
“저것들이 ‘기사’라고?”
굉장히 실례되는 발언이 마치 본인들 보고 들으라는 듯이 크게 울려 퍼졌다.
“숙녀분이 입이 험하십니다.”
왼쪽 가슴에 두 마리의 사자가 그려진 훈장을 달고 이마에 붉은 띠를 둘러맨 남자가 리벤에게 다가갔다. 동료들의 연습 시합을 관전하고 있던 기사들 중 한 명이었다. 키가 리벤보다 머리 두 개는 더 될 만큼 크고 어깨와 가슴이 시원하게 넓어서, 부드러운 인상에 비해 고압적으로 보였다. 머리칼과 눈동자가 붉은 색에 가까운 적갈색인 것도 그 분위기에 한몫했다.
“내가 뭐라 지껄이든 네놈이 뭔 상관이겠거니와 훈련시간 중에 딴 짓이라니 성실하지 못한 놈이군.”
리벤의 독설이 시작됐다. 대선배면서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헤르겔이 옆에 있는데도,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만큼 했다. 어쩌면 오히려 ‘트리오’라는 입지 때문에 자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봐요, 아가씨. 어느 가문 영양이신지 모르겠지만 폴베르그 후작가의 차남에게 이런 식으로…….”
[휙-]
“욱.”
수많은 적을 섬멸한 화려한 전적을 거머쥔 손이, 가문의 이름을 믿고 경솔하게 구는 젊은 청년을 위협했다. 한 손으로 멱살을 바짝 잡고서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아래로 힘껏 잡아당겼다.
“포올- 베에- 르으- 그으-? 호오. 10년 전 프라인 전쟁에서 반역 귀족 멜 백작을 막겠다며 설쳤다가 참패하고, 설욕전으로 한 번 더 바동거리다가 된통 깨지고, 주제도 모르고 반역 귀족 하롤드 후작에게 왈왈 짖었다가 무참하게 밟힌, 그 폴베르그? 세상 사람들은 그 때 그 세 개의 전투를 싸잡아서 ‘폴베르그 3차 굴욕’이라고 부른다지? 응? 아직도 후작 신분인 게 부끄럽지도 않나봐. 하긴. 뚱땡이 천치 주제에 능력이 없으면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아야지. 허헛. 장남도 뚱땡이던데 차남은 봐줄만 하네. 아하, 폴베르그 가의 간판이군.”
수십 개의 단어가 속사포처럼 무자비하게 젊은 기사를 공격했다. 이 소란 때문에 기사단 훈련이 잠시 중단되고 모두의 시선이 그에 쏠렸다.
훈련교관이 이제야 리벤과 헤르겔을 알아차렸다.
“어서 오십쇼. 헤르겔 다르케스님, 리벤 스피어님.”
그는 재빨리 국사들 앞에 서서 절도 있게 경례를 했다. 기사들도 ‘교관을 따라 자동적으로’ 오른손을 오른쪽 눈썹 가까이로 올려붙였다. 아무리 잘난 기사라도 부하는 상관을 따를 뿐이었다.
“오랜만, 알체이스터.”
“시로 오랜만입니다, 리벤 스피어님.”
“이젠 리벤 포르포냐야.”
리벤은 폴베르그 가의 차남을 알체이스터 교관에게 던졌다. 그는 젊은이를 이삿짐처럼 묵직하게 받아내고는, 치우는 것처럼 왼쪽 옆으로 다시 휙 던졌다. 제멋대로 행동해서 트리오의 눈 밖에 난 기사에게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었다.
“에드워드를 시켜 데려왔네. 앞으로 기사단 훈련을 일부 맡을 거야.”
헤르겔이 턱수염을 만지작 거리며 껄껄껄 웃었다. 그런데 리벤이 고개를 홱 돌려서 그를 노려봤다.
“어? 그런 얘기 없었잖아.”
“안 했나?”
“안 했어.”
“그럼 지금 얘기하지. 기사단 좀 맡아주게.”
“이 다 늙은 너구리가…….”
그래도 예상 범위에 들어가는 일이라서 이마와 목에 핏줄이 서도록 화가 나지 않았다. 사전에 얘기가 없었다는 사실이 불만일 뿐이었다.
“이 아가씨가 트리오의 리벤 스피어란 말입니까?”
폴베르그 가의 젊은 기사가 손가락으로 리벤을 가리키며 트리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알체이스터 교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웅성거리고 기사들이 귀신이 지나간 것 마냥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예의를 개념이랑 같이 시궁창에 처박았군. 크흐흐흐. 배짱 좋군. 헤르겔. 왕궁 기사단 교육 말이야, 나한테 전임하지 않겠어?”
“그래준다면야 이 늙은이의 어깨가 가벼워져서 좋지. 잘 부탁하네.”
“‘전임’이야. 딴말 하지 마.”
“그대 소신껏, 얼마든지, 자유롭게.”
트리오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그 어떤 국가 중요문서보다, 왕가 문장이 몇 십 개 찍힌 칙서보다, 트리오의 한 마디가 훨씬 더 강한 위력을 갖는다. 그러니 트리오의 임무 인수인계에 복잡한 서류절차가 필요하지 않다.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됐어? 머리 나쁜 건 집안 내력이야? 그러면 패서라도 강제로 주입해야겠네.”
언제부터 있었는지, 윌이 폴베르그 청년의 뒤에서 그의 귀에 소곤거렸다. 그는 화들짝 놀란 나머지 팔을 거칠게 휘저어 윌을 때리고 말았다. 윌이 일부러 맞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리벤. 나 이 녀석 싫어.”
“나도 싫어.”
리벤에게서 불량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트리오라고 해서 대단한 여장부일 줄 알았는데, 이건 뭐, 나도 트리오가 될 수 있…….”
[뻑!]
시건방진 말에서 요점이 전부 튀어나왔기에, 리벤은 가장 먼저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세차게 날려버렸다. 상대가 키가 커도 팔을 휘두르는 위력이 여타 여성과 차원이 달랐다. 청년이 힘에서 밀려 땅 위에 쓰러졌다.
“기사면 기사답게 해볼까?”
리벤의 코발트 색 눈동자가 서슬 퍼런 칼날처럼 빛났다. 연청색 머리칼에서는 한기가 풍기는 것 같았다.
“모두 대기석으로 이동.”
교관이 눈치 있게 행동했다. 그는 리벤과 면식 있는 사이라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상상만 해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국사는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방금 한 방은 나의 스승님과 헤르겔을 모욕한 벌이다.”
위에 선 자의 위엄. 흉내 낸다고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리벤이 풍기는 살벌한 한기는, 누가 봐도 격이 높은 카리스마의 또 다른 형태였다. 잘났다는 기사들도 절로 몸을 움츠릴 정도였다.
“일어서. 검을 뽑아. 트리오의 자리가 탐이 나면 기사답게 갈구해봐.”
리벤은 왼쪽 가슴에 브로치처럼 달려 있는 라피스 라줄리를 떼어냈다. 푸른 보석은 그녀의 오른손 주먹 안에서 살벌한 빛을 내며 두 자루의 검으로 변했다. 견고한 사브르 쌍검이었다. 그의 푸른색은 리벤의 눈동자와 머리칼과 함께 ‘푸른 사신’을 뚜렷하게 증명했다.
― ‘죽음에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푸른색. 리벤 자체이자 리벤이 사랑하는 색.
넓은 연습장에 리벤과 폴베르그 가의 차남만 덩그러니 서있었다. 그러나 분위기만큼은 그 넓은 공간이 꽉 찬 듯했다.
“역시 스피어님의 존재감은 대단합니다.”
교관이 오랜만에 리벤의 실전을 앞두고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이 때 헤르겔이 놓치지 않고 말을 고쳤다.
“성이 포르포냐로 바뀐 지 8년이야.”
“아. 이거 참……. ‘푸른 사신 리벤 스피어’가 입에 붙어서 말입니다.”
교관의 지도를 받는 기사들 중에 전부터 리벤을 알던 이가 절반이었다. 그들은 과거 전장에서의 리벤의 활약을 회상하며 빨리 시합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폴베르그 청년도 검을 들었다. 허리에 차고 있던 왈론 소드였다.
“어라? 리벤. 저 건방진 녀석은 쥬엘 나이트가 아니야.”
“따라다니는 정령이 없어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 보석도 없어. 하기사, 정령이 있었으면 저 놈을 철저하게 지켰겠지.”
“맞아. 주인이 당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정령이 어디 있어.”
윌은 리벤의 등 뒤에서 공중에 뜬 채 두 팔로 그녀의 목을 감싸 안았다. 쥬엘 나이트와 같이 태어난 정령으로서, 세계의 축복을 받지 못한 청년에게 주인의 우월함을 과시했다. 표정도 상당히 의기양양했다.
“윌. 구경만이야.”
“흐응. 응원하면 안 돼?”
“구경만 해.”
“치사해. 알았어.”
빛의 정령은 시합을 한 눈에 보기 위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정령을 부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꽤 값나가는 페널티인데, 잔재주도 봉쇄하도록 하지. 이제 내 라피스 라줄리는 평범한 사브르에 불과해.”
“둘 다 슈바이체르사벨(사브르의 한 종류)입니까? 장식이 멋집니다.”
청년은 적당히 긴장하고 적당히 여유를 부렸다. 짧게 말하면, 평소대로 행동했다. 상대가 누구건 간에 얕보지도 않고 겁먹지도 않는, 확실한 마이페이스 인간이었다.
“순간순간의 경솔한 행동은 마음에 안 들지만, 유연함을 겸비한 자기중심적 사고는 꽤 쓸 만하겠어.”
리벤은 시작 전에 첫 번째 평가를 내렸다. 중간 수준의 무던한 점수였다.
“하지만……. 집안의 이름을 들먹이는 녀석 중에 제대로 된 녀석 드물지.”
평가가 순식간에 서너 단계 떨어졌다. 평가 당하는 장본인은, 지금 자신이 시험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먼저 공격해도 되겠습니까?”
“그야 물론. 설마 여기에서 레이디 퍼스트라는 신사도를 발휘할 생각이야?”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시키셔도 내키지 않습니다.”
순간적이지만 폴베르그 청년에게서 적의가 느껴졌다. 그리고 칼자루를 쥔 손과 지면을 딛고 있는 발에 힘이 들어갔다. 눈앞에 있는 자가 무기를 갖춘 적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엉덩이 가벼운 바람둥이 같았다.
[타닥]
그는 지면을 힘차게 박차며 리벤을 향해 곧장 돌진했다. 그러나 검을 완전히 휘두르기 전에 팔 동작을 멈췄다. 눈앞에서 상대가 사라졌는데 쓸데없는 움직임으로 에너지며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덕분에 곧장 뒤로 돌아서 리벤의 공격을 막는 데 성공했다.
[챙!]
검에 사용된 금속의 제련도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청아한 울림소리가 넓고 빠르게 퍼졌다.
리벤은 서커스 단원처럼 날렵하게 공중으로 뛰어오른 후 청년의 뒤쪽으로 착지하는 동시에 검을 내리쳤고, 청년은 뒤로 돌면서 허리의 회전력과 팔의 움직임을 절묘하게 섞어 리벤의 검을 쳐올렸다. 첫 번째 접촉에 의한 진동이 손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리벤이 청년의 어깨를 향해 오른쪽 검을 찔러 넣었다. 쌍검 사용자의 우위란 이런 것이었다.
“제법이군.”
그러나 리벤의 두 번째 공격도 불발이었다. 청년이 리벤의 왼쪽 검을 날을 따라 긁어 올리듯이 견제하면서 왼발을 오른쪽 뒤로 한 발짝 물러, 노려진 왼쪽 어깨를 검이 날아드는 직선코스에서 아슬아슬하게 빼돌렸다. 쌍검 사용자를 상대해본 경험이 몇 차례나 있었는지 움직임에 망설임이 없었다. 경험 축적에 의한 반사적 행동이었다.
리벤은 청년에게서 세 걸음 거리만큼 통통 튀듯이 뒤로 빠졌다. 청년도 그 사이에 두 걸음 물러났다.
“흐음-. 물러났단 말이지?”
“물러나 버렸군.”
대기석에서 지켜보고 있는 헤르겔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시점에서 폴베르그 청년의 꼴사나운 완패가 결정됐는지도 모르겠다.
[―――――]
푸른빛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길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리벤이 청년이 있던 자리에 서있고, 청년은 뒤로 한 발짝 밀린 지점에서 뒤로 발라당 넘어져 있었다. 언제 어떤 공격을 했는지 너무 순식간이라서 헤르겔을 제외하곤 아무도 못 알아봤다. 그러나 청년의 가슴에 생긴 긴 상처를 보면 절대 가벼운 공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에? 기절해 버렸어.”
“내버려둬. 적을 앞에 두고 편한 것을 추구하는 머저리에게 자비는 필요 없어.”
리벤은 쓰러진 청년을 지혈도 해주지 않고 헤르겔이 있는 곳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두 자루의 사브르는 하나의 라피스 라줄리가 되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다른 두 개의 보석(인디고 사파이어와 석류석-가넷)도 싸우고 싶어서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다음 차례를 재촉하는 것이 아닐까. 리벤을 뒤따라가는 윌도 앞에 나서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이왕 시작한 김에 끝장을 보자. 첫 번째 줄에 앉아 있는 녀석들 전부 나와. 한꺼번에 쓸어주마. 싹수 있는 녀석이 몇 명이나 되는지 기대 안 할런다. 하지만, 저기 퍼질러져 있는 병신만큼 허접한 놈은 그 자리에서 페이지(Page : 기사Knight의 수발을 들며 따라다니는 최하급 수습기사)나 스콰이어(Squire : 기사의 측근처럼 붙어 다닐 수 있는 수습기사)로 강등한다.”
기사(Knight)만 모여 있는 왕궁 기사단에 토네이도급 위협 선고가 내려졌다. 리벤에게 기사단의 모든 것을 맡긴 헤르겔은 사태를 끝가지 지켜보지 않고, 국왕이 기다리고 있을 중앙 알현실로 돌아갔다. 기사들의 생사는 정말 완전히 리벤에게 달렸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보석전쟁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달 간의 보석전쟁록 : D-25 더 타락한 보석 (0) | 2010.11.03 |
---|---|
한 달 간의 보석전쟁록 : D-26 둘이자 하나인 보석 (0) | 2010.10.15 |
한 달 간의 보석전쟁록 : D-28 파수꾼 보석 (0) | 2010.09.25 |
한 달 간의 보석전쟁록 : D-29 어제를 꿈꾸는 보석 (0) | 2010.08.24 |
한 달 간의 보석전쟁록 : D-30 전장으로 돌아온 보석 (0) | 2010.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