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신의재림-두번째라그나로크(완)

신의 재림 : 제 2문 (2)

★은하수★ 2009. 5. 7. 17:12

“Ray! Wait, Ray.(레이! 기다려, 레이!)”

베일리는 앞서 걸어가는 레이를 향해 뛰어갔다. 레이는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떼고 베일리를 기다려줬다.

“You're so fast.(너 너무 빨라.)”

“I was just walking.(난 그냥 걷고 있었어.)”

[퍽!]

“Oops!(으윽!)”

레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베일리에게 가까이 붙더니 미소를 띤 얼굴을 하며 등을 세게 쳤다. 베일리는 등을 맞는 순간 고통 때문에 허리를 곧게 세워 등을 쭉 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약해 약해.”

레이는 오른손 검지를 좌우로 흔들며 약 올리는 투로 말했다.

“If someone is hit the back, everyone have pain.(누구든 등을 맞으면 아프다고.)”

베일리는 아이처럼 아픔을 호소했지만 레이는 이어폰을 도로 귀에 꽂으며 싹 무시해버렸다.

“Why are you having me on every time?(넌 왜 매번 날 놀리는 거야?)”

베일리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불평했다. 레이는 베일리를 슬쩍 쳐다보더니 베일리의 표정이 재미있는지 싱글싱글 웃었다. 레이는 베일리를 놀리는 낙에 사는 듯 했다.

“Because you're a kid yet.(네가 아직 어린 애니까.)”

“What?(엉?)”

베일리는 약간 삐진 듯 했고 레이는 상당히 즐거운 듯 했다. 레이는 혼자 배실배실 웃다가 베일리의 어깨를 툭툭 쳐줬다.

“한국에 오면 한국어로 말하기로 했잖아.”

“You're really selfish.(너 진짜 이기적이야.)”

“뭐,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니고.”

베일리가 약간은 화를 일으킬 만한 발언을 했지만 (서양에서는 친한 사이라 해도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 레이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그 말을 흘려버렸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베일리의 팔을 콕콕 찔렀다.

“과학 숙제 했어?”

“Science assignment?(과학 숙제?)”

베일리는 뭔가를 주욱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한 번 퉁겼다.

“아마 했을 거야.”

“응?”

“어제 졸면서 뭔가 하긴 했거든.”

“아, 그래…….”

레이는 가히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베일리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눈을 말똥말똥 뜬 채 레이를 쳐다봤다. 레이는 자신이 맡은 것은 착실히 해 놓는데 비해 베일리는 자신의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습성 때문에 해야 할 것을 잘 챙기지 못한다. 레이가 생각날 때마다 베일리를 틈틈이 챙겨줘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끔은 그 챙긴다는 것이 놀리는 것으로 변질될 때도 있지만.

“휴.”

[퍽!]

“웁!”

레이는 한숨을 쉰 후에 다시 한 번 베일리의 등을 가격했다.

“얼른 가서 확인 해.”

“괜찮아. 했을 거라니까.”

베일리는 손을 등에 대고 괴로워하면서 거절했지만 레이의 차갑게 노려보는 눈에 기가 눌려서 얌전히 교실 쪽으로 걸어갔다. 레이도 그 뒤를 따라갔다.

[다다다 닷따-]

‘라 쿠카라차’의 일부분이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노랫소리였다. 다음 시간은 국어 시간이라(담당 선생님이 늘 10분씩 늦게 들어온다.) 종이 울리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여유롭게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 안은 여전히 수선스러웠다.

“오늘 국어 시간에 발표하는 거 몇 조야?”

“2조.”

“컴퓨터랑 프로젝션TV랑 연결해 놔.”

“발표 대형으로 책상 옮겨.”

학생들의 대화소리와 책상을 끄는 소리가 섞여 교실을 가득 채웠다. 레이와 베일리도 자신들의 책상을 옮기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레이와 베일리는 대각선으로 떨어진 자리인데 교실 전체를 U자 발표 대형으로 바꾼 덕에 비스듬히 마주보게 되었다. 베일리는 가방에서 스프링 공책을 꺼내 뒤적이더니 과학 숙제 부분을 펴서 레이가 볼 수 있게 책상 위에 세웠다. 레이는 공책의 글씨들이 완전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베일리가 숙제를 했음을 알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레이의 신호를 보고 나서 베일리는 공책을 다시 집어넣었다.

[찰칵]

교실 앞문의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국어 선생님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교실에 들어왔다. 반장의 인사 구령을 시작으로 하여, 수업이 진행되었다. 학생 발표 수업일이면 선생님은 교실 맨 뒷자리에 앉고 발표 학생들이 U자 대형 안쪽에서 여러 가지 자료와 갖은 몸동작을 이용해 수업진행을 맡았다.

일괄적으로 선생님의 설명을 듣는 수업 방식에 지쳐있던 학생들에게 학생 자발적인 발표 수업은 활력소, 청량제였다. 레이와 베일리에게 있어서도 이 학생 발표 수업이 가장 즐거웠다.

[똑. 똑. 똑.]

한창 수업이 진행 중일 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국어 선생님이 앞문을 향해 큰 소리로 말하자 한 여학생이 문을 열고 교실 안으로 한 발짝 걸어 들어왔다.

“학년부장 선생님께서 지금 베일리 가디언을 교무실로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그래? 어, 가봐.”

여학생의 말이 끝나자마자 베일리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국어 선생님은 그 자리에 앉은 채 턱으로 나가라는 표시를 했다. 여학생이 국어 선생님에게 목례를 한 후 교실 밖으로 나가자 베일리가 그 뒤를 따라나섰다.

“자, 계속해.”

국어 선생님의 말을 신호로 발표 수업이 계속 이어졌다. 레이는 베일리가 교무실로 갔는데도 걱정 같은 것 하나 하지 않고 그대로 발표 수업을 즐겼다. 설마 뭔 일 있겠냐는 투였다.

베일리는 대량 5분 정도 지나서 교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용히 책가방을 싸고 다시 교실을 나갔다. 복도에 학년부장 선생님이 서 있는 것을 본 국어 선생님이 베일리를 따라 교실을 나갔다. 발표 수업은 중단되고 학생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레이는 이상하게 여기며 교실을 나갔다. 표정이 싹 굳은 베일리의 얼굴이 레이의 눈에 비쳤다.

“무슨 일이야?”

레이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베일리를 보며 물었다. 베일리는 레이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서 가 보거라.”

“네.”

학년부장 선생님이 재촉하자 베일리는 꾸벅 인사하고 학교 밖으로 나갔다. 레이는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베일리의 우울한 표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 동안 레이에게 접촉한 정체 모를 텔레파시와 수상한 현상들. 갑자기 그것들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어쨌든 교실로 되돌아온 레이는 자리에 앉아 시간이 빨리 지나기를 기다렸다. 다시 시작한 발표 수업은 더 이상 레이의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레이는 남은 국어 시간을 그렇게 멍하니 보내고, 쉬는 시간에 창 밖 운동장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빠졌다. 바로 한 시간 전만해도 쾌활하던 베일리가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하자 같이 기분이 침울해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아무 이야기도 해 주지 않은 것에 섭섭함을 느끼기도 했다.

“베일리 걱정하는 거야?”

반장이 레이의 옆에 다가갔다.

“응.”

레이의 눈은 계속 운동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반장도 레이처럼 창밖을 쳐다봤다. 하지만 반장이 보는 것은 아래 운동장이 아니라 학교 맞은편에 있는 건물이었다.

“레이는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게 흠이야.”

“흠?”

“단점이란 뜻이야.”

레이는 반장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반장은 웃으면서 말했다.

“감정이 풍부한 건 좋은 거야. 그 만큼 풍부한 삶을 살 수 있으니까.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 감정을 숨길 수 있어야 해. 감정이 변할 때마다 그대로 밖에 드러나면 상황에 따라서는 곤란하거든.”

레이는 알듯 말듯 하면서도 아직은 감이 잘 안 잡혔다. 반장은 레이의 등을 토닥토닥 두르려주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는 레이가 어린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까 2조 애들이 발표하면서 레이의 얼굴을 보니까 베일리를 걱정하는 게 다 보여서 쳐다보기 민망했데.”

“응…… 아! 미안.”

반장의 말을 듣고 나서 레이는 잠간 생각하는 듯싶더니 반장이 말하려는 것이 뭔지 알아차렸다. 레이는 원체 포커페이스에 약하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 한 달 사이에 반장이 한 말과 비슷한 말을 댓 번 이상 들었다. 사과를 하면서도 레이의 얼굴에는 여전히 베일리를 걱정하는 표정이 얽혀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요즘 들어 이상하게 변해가는 자신의 주변 상황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었다.

 

사흘, 아니 나흘째다. 똑같은 목소리가 레이를 ‘스카디’라 부르며 주변을 경계하라는 메시지만 (텔레파시로) 전달했다. 레이는 이제까지 수없이 많이 점을 쳐 왔지만 정체모를 어떤 존재와 대화를 한다거나 교감해 본 적은 없었다. 요정이나 정령, 천사나 악마를 실제로 보고 싶다고 소망한 적은 있지만 실제로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에 경험하고 있는 이 기이한 사실은 레이를 불안감과 공포에 휩싸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소장 권수나 종류가 극히 부실한 학교 도서실에 실망한 레이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시립 도서관을 찾아갔다. 책장과 책장 사이를 걸어 다니던 중에 도서 분류 번호 290이 써 있는 책장 앞에 멈춰 섰다. 신화학과 관련된 도서들이 꽂혀 있는 책장이었다. 대부분이 그리스․로마 신화에 관련된 것들이었고 드문드문 중국, 인도, 스칸디나비아 반도 등의 신화 자료가 보였다. 레이는 이 중에서 북유럽 신화와 관련된 책들을 뽑아 들었다. 7권. 생각보다 적은 권수였지만 단기간 내에 다 읽기에는 좀 많아보였다.

“Well……. What do I do?(에……. 어쩐다?)”

레이는 두 손으로 7권을 받쳐 들고 있었다. 역시 오늘 내일 중에 이들을 다 읽는 것은 무리였다.

<I'm very sorry, Miss.(죄송합니다, 아가씨.)>

역시나 그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영어로 말하고 있었다. 레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역력했다.

<I don't know that you're a foreigner.(당신이 외국인인줄 몰랐어요.)>

이 말을 듣자마자 레이는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지금 레이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건 오늘, 지금 처음으로 레이를 직접 봤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Who?(누구지?)>

레이가 고개를 다시 오른쪽으로 돌린 순간 거기에 진원이 책을 펼쳐 들고 서 있었다. 진원은 책을 한 손으로 쭉 넘겨보다가 흥밋거리가 없자 도로 덮고 책장에 꽂아 놓았다.

“저기…… 죄송한데요.”

레이는 조심스럽게 진원을 불렀다.

“Please put books back in its place and follow me.(책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절 따라오세요.)”

진원은 레이가 아닌 정면의 책장을 바라보며 말한 후, 출구 쪽으로 걸어 나갔다. 레이는 진원의 뒤를 물끄러미 보다가 손에 들려 있는 책들을 하나씩 천천히 제자리에 꽂았다. 다 꽂은 후에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빠졌다.

“Who is he?(누굴까?)”

레이는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을 가지고 출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진원은 레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양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고 있었는데 오른손은 뭔가를 쥐고 있는 듯이 보였다. 레이는 그 모습에서 약간의 위화감을 가졌다.

“무슨 일이시죠?”

레이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진원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의 시선은 숨겨져 있는 진원의 오른손에 있었다.

“우트가르드 로키가 당신을 찾기 전에 먼저 당신과 접촉해야 했습니다.”

레이의 눈은 약간 놀란 듯이 살짝 커졌다. 진원의 미소를 고수하고 있었지만 실상 말의 내용은 차갑고 경계스러운 것이었다. 레이가 그걸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목소리를 들으니 당신이 텔레파시의 주인공이군요. 북유럽 신화로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지금도 그 차가운 눈을 가지고 있군요.”

진원은 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호주머니에서 오른손을 꺼내 레이에게 오른손에 쥐어져있는 작은 궁니르를 보여주었다. 레이는 점술가의 감으로 그것이 평범한 물건이 아님을 알았다.

“무슨 물건 같습니까?”

진원의 뜬금없는 질문에 레이는 약간 벙벙해졌다. 뭔가 가슴이 탁 막히는 듯 한 압박감. 자신의 몸을 낮추게 만드는 중압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경이로운 물건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레이는 궁니르에 손을 뻗었지만 차마 만지지는 못했다. 진원은 오른손을 다시 살며시 쥐었다.

“특별한 능력이죠. 당신이 가지고 있는 점술의 능력은.”

“제 능력이요?”

“네.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점술력이 아니라 그 이상의 힘을 가진 예언력 혹은 마력이라고 할 우 있죠.”

레이는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점을 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과학을 더 믿는데 뚱딴지같이 마력이라니. 진지한 이야기 같지만 미소로 표정을 일관하는 진원을 보니 뭔가 속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상당히 묘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지만, 말을 마친 진원이 날카로운 눈매로 레이의 뒤쪽을 응시하는 듯 했다.

“죄송하지만 자리를 옮길까요?”

진원은 도서관 정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레이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진원은 순수하면서 천진한 표정으로 레이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세요. 인신매매나 납치 같은 불순한 해동은 전혀 하지 않을 거니까요.”

[캬흑]

소름끼치고 찢어지는 듯 한 소리가 두 사람의 귀를 때렸다.

“Wha…… What's…….(무…… 무슨…….)”

레이는 몸을 움츠리고 그 자리에 박힌 듯이 꼼짝하지 않았다. 진원은 오른손에 약간의 마력을 모으고 나서 레이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릴리즈(Release)."

그러자 레이의 경직된 몸이 풀리고 레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방금 그 소리는 우리 둘 밖에 듣지 못했을 거에요.”

“왜요?”

레이는 약간 울상이 되었다. 무서운 것이다. 진원은 주변의 마력을 살폈다. 상대는 한 명. 아무래도 웨어에 가까웠다.

“아까 우트가르드 로키도 당신을 찾고 있다 했었죠?”

“……네.”

“이미 들킨 것 같네요. 빨리 여기서 나가죠.”

진원은 양 손에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대지여, 나에게 길을 인도해주기를, 워프.”

진원이 주문을 외운 후, 양 손을 한 벽에 대고 시동어를 말하자 청흑색의 문 형상이 나타났다. 마법이란 것을 실제로 보게 된 레이는 어리벙벙해 졌다.

“얼른 따라오세요.”

진원이 먼저 워프를 통과했다. 레이는 그 소름끼치는 소리가 또 들릴까봐 눈 꼭 감고 워프에 뛰어들었다. 몇 발자국 걸은 후 눈을 떠보니 도서관 밖의 시계탑 옆이었다.

“Dream?(꿈인가?)”

레이는 자신의 볼을 양 쪽으로 죽 잡아당겼다. 통증이 있었다. 확실히 현실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이야기를 바로 시작하죠. 겨울과 스키 그리고 사냥의 여신, 스카디.”

진원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스카디의 신의 호칭을 말할 때,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레이는 처음에 ‘스카디’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자신을 칭하는 것임을 극구 부인했었다. 하지만 며칠간 계속 ‘스카디’란 이름이 뇌리에 박히자 조금은 긍정하는 것처럼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지금. 진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부르자 수긍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는 마법과 전쟁의 신, 오딘. 이 제 3의 세계에 환생한 후에는 설진원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진원의 말투는 상당히 격식 있었다. 정말 진지하고 엄한 분위기였다. 레이는 갑자기 빠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정신이 따라가지 못할 뻔했으나 진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제 이름은 레이 스트림입니다. 하지만 전 ‘신’이 아니에요.”

레이도 격식 있는 말투로 대응했다.

“당신이 ‘스카디’라는 것은 제가 확신합니다.”

진원은 궁니르를 꺼내고, 손에 마력을 모아 궁니르를 서서히 본 크기로 되돌렸다. 레이는 마른 침을 삼키며 한 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캬흑]

다시 한 번 불쾌한 소리가 들렸다. 진우너은 궁니를르 세워 들고 태양 모양의 창머리에 마력을 모았다.

“힘을 등에 업은 자여, 어둠 속에서 헤매는 자여, 마음의 공명, 육체의 저이. 그대여 눈을 뜨고 돌아가라.”

주문을 외우자 궁니르의 창머리는 밝은 푸른빛을 발했다. 진원은 아직 시동어를 외지 않고 기다렸다. 웨어라고 추측되는 상대방의 모습을 아직 보지 못했다. 그에게 적중하지 않으면 마법을 쓰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마법을 대기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법 대기는 마력 소모가 꽤 큰 편이기 때문에 궁니르를 잡은 진원의 손은 약하게나마 떨리는 것이 보였다.

[캬악]

뭔가 진원과 레이의 앞에 나타났다. 공중에서 뛰어내린 그것은 일단 생명이 있는 것이었다. 어두운 갈색 피부의 사람. 전체적인 모습은 사람이었지만 네 발 짐승과 같은 자세에 드문드문 황갈색의 긴 털이 나 있었다. 육식 동물과 같은 긴 송곳니와 고양이의 눈. 오른쪽 어깨에 박혀 있는 붉은색의 크리스털. 인공 합성 생명체였다.

“Yech!(으윽!) 구역질나게 생겼잖아.”

레이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진원은 잘못 짚었다 싶어서 마법을 거둬들였다. 진원이 외웠던 마법은 웨어를 주인에게서 해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인공 합성 생명체. 웨어와는 달리 자아를 가지고 행동하기 때문에 주인이 도로 불러내거나 죽이지 않는 이상은 달리 막아낼 방도가 없다. 웨어처럼 그의 주인이 만들어내 장난감이자 병기라 할 수 있는데 차이점은 다만 생명이 있다는 것뿐이다. 뭘 합성하건 주인의 마음대로인 건 당연하다.

[크햑]

그 인공 합성 생명체(이하‘ 그 생물’)는 어두운 피 색의 액체를 진원을 향해 다량으로 뱉어냈다.

“실드.”

진원은 레이까지 보호할 수 있도록 방어막을 쳤다.

[취이익]

그 생물이 뱉어낸 액체를 맞은 부분이 녹아내렸다. 진원은 그 생물의 힘을 알아보고자 실드를 약하게 친 모양이었다. 그 생물의 공격력은 파괴력이 아닌 ‘제거’쪽에 해당했다.

“독이라…… 곤란하게 됐군.”

진원은 궁니르의 창머리에 다시 마력을 모았다.

[크햑]

그 생물은 다시 액체를 뱉어냈으나 진원은 옆으로 움직여 그를 피했다.

[취이익]

진원이 서 있던 곳 근처의 땅이 녹아버렸다. 레이는 두려움에 몸이 경직됐다. 녹아버린 땅을 볼 뿐 그 생물을 다시 보지 못했다. 그 생물은 진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만 공격하라고 명령을 받았구나.”

진원은 생긋 웃으며 그 생물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그 생물은 진원에게 달려들었다.

“디트롤.”

그 생물이 직선으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진원은 가볍게 옆으로 피하고, 시동어룰 외우며 궁니르의 창머리로 그 생물의 등을 스치듯이 건드렸다.

[쿵]

그 생물은 달리던 도중에 묵직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려졌다. 그리고는 몸을 조금씩 떨 뿐 움직이지 못했다. 진원은 레이에게 다가가서 다시 ‘릴리즈’를 외었다. 덕분에 레이는 다시 그 생물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체 저게 뭐에요?”

“아마 우트가르드 로키가 만들어 낸 인공 합성 생명체일 거에요.”

진원은 그 생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마법이 풀리기 전에 제거해야 했다.

“눈 감아 줄래요?”

진원은 레이를 향해 생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레이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진원은 궁니르를 손에 꽉 쥐고 높게 들더니 그 생물을 향해 빠르게 내려 찔렀다.

[푸욱]

“평안의 흐름, 디톡스.”

진원은 우선 해독 주문을 외웠다. 그 생물의 육체 대부분이 독으로 구성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혹여나 독이 주변에 퍼질까봐 미리 방지하는 것이었다.

[화르륵]

“이런.”

갑자기 그 생물에 푸른 불꽃이 일어났다. 진원은 재빨리 궁니르를 뽑아 들고 뒤로 물러섰다. 그 생물은 푸른 불꽃에 의해 소멸되었다. 그 생물이 있었던 자리에는 탄 흔적조차 없었다.

“역시 이 근처에 있었군, 우트가르드 로키.”

<별로 흡족하지 못 할 작품이었습니다.>

주변이 싸늘해짐과 동시에 우트가르드 로키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내가 네 작품의 실험대상인가?>

진원은 미소를 지며 가벼운 말투로 응했지만 확실히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정식으로 싸울 때는 완벽한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 뿐입니다.>

우트가르드 로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의 싸늘함도 사라졌다.

“늘 제멋대로군.”

진원은 미소로 일관하며 잠깐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레이를 향해 돌아봤다. 레이는 여전히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이제 눈 떠도 되요.”

레이는 두 눈을 슬며시 뜨고는 진원이 있는 곳을 향해 돌아봤다. 그 생물이 없음을 확인하고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레이의 손은 아직 약하게 떨고 있었다.

 

레이의 기억의 봉인이 풀리고, 레이는 진원에게서 대강의 현재 상황을 들었다. 처음엔 눈물이 났다. 솔직히 스카디는 제 2의 세계를 끝내는 전쟁이었던 라그나로크에서 죽지 않았었다. 정식으로 제대로 참여했던 신도 아니었다. 다만, 김리궁으로 거둬들여지지 못해서 육체를 버리고 헬이 다스리는 니플헤임에서 살았었다. 그러다가 헬의 권유로, 새 육체를 얻기 위해 제 3의 세계에 환생한 것이었다.

“여기서 싸움에 휘말릴 줄이야.”

레이는 눈물을 닦고 혼잣말 하듯이 말했다. 마력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앞으로를 살아갈 생각을 하니 몸이 저절로 잘게 떨렸다.

“나와 로키를 돕든 아니든 그건 레이 양이 결정할 일입니다.”

진원은 슬픈 표정이었지만 바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같은 편이 되지 못한다면 적어도 우트가르드 로키에게 보내서는 안 되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동료를 만들어 곁에 두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죄송해요.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겠어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레이는 고개를 들어 진원에게 웃는 얼굴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진원은 그 표정을 읽어냈다.

“인연이 닿는다면 또 보게 되겠죠.”

진원은 방긋 웃었다. 레이는 여러 가지 감정과 생각이 교차했다. 머리도 마음도 모두 복잡했다.

“먼저 가 봐도 될까요?”

“네. 조심해서 가세요.”

“그럼.”

레이는 진원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집을 향해 걸어갔다. 뭘 선택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평범한 인간인 레이 스트림으로서의 삶이냐, 전 세계에서의 신인 스카디로서의 삶이냐. 방관할 것이냐, 오딘과 로키를 도울 것이냐.

결말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을 반복하며 길을 가던 중에, 건너편에 베일리가 길을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는 것을 봤다. 베일리의 손에는 든든하게 내용물이 들어있는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레이는 베일리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베일리도 레이를 발견하고 빈손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레이도 같이 손을 흔들었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도서관에.”

둘은 나란히 길을 걸어갔다.

“너희 엄마는 좀 어떠셔?”

“고비는 넘기셨어. 앞으로 몇 주 더 치료받으셔야 하지만.”

베일리는 씁쓸하게 웃었다. 학교에서 호출을 박고, 레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교 하던 날. 베일리의 어머니는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심한 중상을 입고 두 차례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 레이는 이틀 후에서야 베일리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있지, 훈아.”

레이는 베일리의 한국 이름으로 불렀다. 레이가 곧 잘 그렇게 불렀었기 때문에 베일리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널 필요로 한다면 위험한 일이라 해도 도와줄 거야?”

“으응?”

레이의 갑작스런 질문에 베일리는 약간 당황했다.

“아니, 뭐. 너희 엄마가 사고를 당했을 때 구해준 사람들 보면 그렇잖아.”

레이는 억지로 배실배실 웃었다. 베일리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거야 구조대원들의 일이니까. 임무잖아.”

“그런가?”

레이는 자신이 원하던 대답이 아니라서 그런지 약간 실망스러운 듯 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날 필요로 한다면 그를 도와줄 거야. 그 일이 쉽든 어렵든, 위험하든 그렇지 않든. 날 필요로 한다는 건 내가 그 만큼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뜻이니까. 물론 세상에는 이유 없이 태어난 존재가 없고, 가치 없는 존재가 없다지만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찾아야 할 필요는 있어. 그 때가 바로 다른 사람들이 내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해.”

베일리는 막힘없이 또박또박 말했다. 말하는 그 때 만큼은 어른스럽게 보였다. 그리고 은근슬쩍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듯 했다. 레이는 베일리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에 감탄했다. 그리고 뭔가 자신이 원하던 답을 발견한 듯 했다. 표정이 많이 밝아졌다.

“대단해. 네가 그런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어.”

“날 너무 무시하지 말라고.”

“정말 대단해. 멋있는 말이었어.”

레이가 칭찬해 주자 베일리도 기분이 좋아져서 순진한 어린 아이의 밝은 표정을 띠었다. 둘이 헤어지는 지점까지 오자 레이는 베일리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엄마가 안 계셔도 잘 지내야 해. 그리고 빨리 건강해지실거야.”

“응. 고마워. 잘 가.”

“너도 잘 가.”

둘은 서로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레이는 집으로 걸어가다가 방향을 바꿔서 다른 곳으로 갔다. 홈스테이 하는 집의 검도 도장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보통 휴일에는 도장 문을 열지 않지만, 자식들을 단련시킨다는 의도에서 주인아저씨는 휴일마다 도장에서 ‘특별 수련’을 연다. 도장의 수련생 몇 명도 같이 참여하는 소수 정예 훈련이다. 그 수련시간이 끝날 때쯤이었기 때문에 마중 나갈 겸 해서 방향을 바꾼 것이었다.

“하린!”

도중에 하린을 만난 레이는 하린을 향해 달려갔다.

“여긴 어쩐 일이야?”

하린은 손에 들고 있던 죽도로 레이의 이마를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마중 나왔어요.”

레이는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그 때 하린의 뒤로 진철과 인철이 나란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진철, 인철. 훈련 많이 힘들었어요?”

“뭐 늘 그렇지.”

진철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진철의 얼굴에 붉게 상처가 나 있었다. 왼쪽 볼을 길게 가로지르는 상처였다. 며칠 전에 이마에 생긴 상처와 비슷했다. 명색이 예비 사범이라고 관장님(아버지)이 강도를 놓여서 상대를 해주다보니 가끔씩 이곳 저곳에 상처를 입곤 한다. 오늘도 당해서 얼굴에 상처가 생겨버렸다.

“그 상처 아프겠어요.”

레이는 자기가 아픈 것인 마냥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팔, 다리도 부러질 수 있는데 이 정도를 약한 거지.”

진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 때 인철이 진철의 상처를 손가락 끝으로 툭 건드렸다.

“읍!”

진철은 반사적으로 재빠르게 피했으나 상처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몸 전체가 경직되 버렸다.

“아프면 아프다고 하셔야죠.”

인철은 약올리는 듯이 말했다. 그 순간 진철이 인철에게 헤드 락을 걸었다. 진철의 두껍고 육중한 팔 근육이 인철의 목을 제대로 휘감았다. 진철이 별로 힘을 주지 않아도 인철은 충분히 괴로웠다.

“혀엉.”

인철은 진철의 팔을 붙잡고 바둥거렸다. 하린은 레이를 데리고 먼저 가기 시작했다.

“오라버니랑 인철이는 여기에 두고 우리 먼저 가자.”

“……네.”

형제라고는 두 살 많은 언니 하나 밖에 없는 레이는 6명이나 되는 남 씨 형제들이 부러웠다. 서로 의지하고, 장난도 치고. 같은 집에 살면서도 남 같은 자신의 자매지간보다 떨어져 살아도 사이가 좋은 그들이 이상적인 형제의 모습으로 눈에 비쳐졌다.

“오늘 하빈 언니가 형부 될 사람을 데려온대.”

하린은 상당히 즐거워보였다.

“형부?”

“아, 언니의 남편을 형보라고 해. 음, 한국은 가족을 부르는 호칭이 무지 많아서 말이야. 좀 어렵지? 나도 가끔 헷갈려.”

“형부. 언니의 남편. 휴.”

식구가 많은 남 씨 가족에게서 레이가 가장 먼저 배운 것은 가족에 대한 호칭이었다. 친척들이 자주 오가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 때마다 새로운 호칭을 배웠다. 오늘도 ‘형부’라는 호칭을 배우게 된 것이다.

“하린 누님.”

진철의 헤드 락에서 벗어난 인철은 하린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하빈 누님은 눈이 높지 않아요?”

“높지. 높은 편이지.”

하린의 대답을 들은 인철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왜?”

“눈 높은 사람이 벌써 결혼 상대자를 데려온단 말이에요? 재주가 좋은 건지, 운이 좋은 건지.”

[딱!]

뒤에서 따라 걸어오던 진철이 죽도로 인철의 머리를 쳤다. 좀 세게 맞았는지 인철이 상당히 아파했다. 하린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인철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큰 누님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못 써.”

“잘못 했습니다.”

인철이 막내라서 오냐오냐 봐주다 보니 조금은 멋대로 하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그걸 제지하는 것이 진철의 몫이 되었다. 물론 하빈과 하인이 독립하기 전에는 둘의 위엄이 압도적이었다. 그래도 약간의 자비를 가지고 있는 하빈보다 완벽 스파르타주의자인 하인은 인철의 공포의 대상으로 지금도 하인이 집에 온다고 하면 끽 소리도 못하고 굳어버린다.

“아마 하인 누님도 오실거야.”

진철이 이렇게 말하자 인철은 여지없이 얼굴이 사색이 되 버렸다.

“하인은 좋은 사람이던데.”

레이는 인철이 어째서 ‘하인’의 이름만 들으면 무서워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레이가 홈스테이 대상 집을 배정받고 처음 그 집에 들어간 날, 가장 먼저 인사하고 반겨주던 사람이 하인이었다. 그리고 가끔 하인이 집에 올 때마다 이것저것 챙겨줘서 레이는 하인을 친언니인 것 마냥 따르고 있다.

“그럼, 그럼. 하인 언니가 얼마나 사람이 좋은데.”

하인을 제외한 5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하인을 대적할 수 있는 것이 하린이다. 대적한다기 보다는 하인이 하린을 너무 귀여워해서 웬만해서는 해코지를 하지 않는다. 가장 맏이인 하빈도 하인만큼은 잘 손대지 않지만 하린은 너무 쉽고 편하게 하인과 같이 있는다. 어쩌면 하린이 인철의 유일한 피신처일 것이다.

“오늘도 혼날까?”

인철의 얼굴에는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

“손님이 오시는 날인데 누님도 절제하시겠지.”

진철은 어깨동무 하듯이 인철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렇게 길을 가다 보니 그새 집에 도착했다. 레이는 방에 들어가기 전에 하린의 방에 잠시 들렀다. 하린과 같은 방을 쓰는 하진은 어머니를 돕고 있었기 때문에 방에 없었다.

“흐응. 아까 할 얘기가 있었는데 못했구나.”

“아니, 뭐. 그렇다기 보다는.”

하린과 레이는 서로 마주 보며 방바닥에 앉았다. 레이는 막상 방에 들어오긴 했지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많이 어려운 얘기야?”

하린은 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레이는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낼까 하다가 돌려 말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은 예전부터 좀 알던 분과 만났거든요. 그 분이 수수께끼를 워낙 좋아하시는 분이라 이것저것 응해 드렸는데…….”

“그런데?”

“갑자기 점을 쳐달라는 거에요.”

레이가 유능한 점술가라는 것은 하린도 알고 있었다. 레이가 점을 치는 것을 구경한 적은 있지만 자신의 점을 쳐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운명을 미리 아는 건 재미없다나.

“이상하게 나왔어?”

“그렇다기 보다는……. 아뇨. 아예 펼쳐보지 못했어요. 감이 좋지 않았거든요. 대충 얼버무리고 왔는데, 그 점괘 보지 않으면 안 될 것도 같고, 보면 후회할 것도 같고, 안 봐도 후회할 것 같고. 어떻게 할 지 모르겠어요.”

레이의 말을 들은 하린은 살포시 두 눈을 감았다. 레이의 말에서 레이의 망설임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망설임은 스스로 판단 못 할 정도가 아니었다.

“레이.”

하린은 레이를 보며 생긋 웃었다.

“넌 이미 답을 알고 있잖아. 다만 나에게서 답의 확률을 높이고 싶은 거 아니야?”

하린은 레이의 심리를 제대로 간파했다. 레이는 들켰나 싶어서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난 말이지 내가 선택한 일에 후회하지 않아. 뭘 선택하든 내 의지니까 거기에 책임을 지는 거야. 그리고 난 내가 선택한 일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선택하는 나 자신은 그런 잘못된 인간이 아니니까.”

하린의 대답은 레이의 결심을 굳히기에 충분했다. 레이는 더 이상 짙은 안개 속에서 걸을 필요가 없었다. 아니, 짙은 안개 속에서 걷든 어둠 속에서 걷든 문제될 것이 없었다. 레이는 이제야 제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란 없었다. 레이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현실에서 자신을 다시 만들어나갈 것을 결심했다.

 

세상에는 빛을 보며 살아가는 것,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것, 슬픔에 빠져 살아가는 것, 행복을 바라며 살아가는 것, 행복을 찾으며 살아가는 것, 행복을 만들며 살아가는 것, 자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 다른 이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 세상을 증오하며 살아가는 것,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 다른 이를 위해 살아가는 것 등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생명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자신이 사는 삶의 방식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어떻게 살든 그건 당신들의 삶입니다. 당신들의 의지입니다. 당신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방법입니다. 세상을 이루는 하나의 조각입니다. 만족하지 못해도 당신들의 것입니다.

이렇게 싸우고만 있다면 무의미하게 그 삶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분명 이 세상의 일부분입니다. 불필요한 존재나 무의미한 존재나 무가치한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누구나, 그 무엇이든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치 있는 분들이 이런 싸움 속에서 허무하게 사라져버린다면 그만큼 슬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조각 하나하나가 모두 모여야 하나의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당신들과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에시르 신족과 바니르 신족 사이의 전쟁에서 휴전을 권하던 프리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