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문. 미행? 추격? …다시 깨어난 토르
도장의 수련생들은 모두 돌아가고 도장의 정문 앞에는 환생한 신들이 배달 수행원 엘프의 마력을 견제하며 진철이 나오길 기다렸다. 우트가르드 로키는 더 이상 진철을 노리지 않을 것이고, 이제는 배달 수행원 엘프에게서 지켜내기만 하면 되었다. 마력의 봉인이 없어도 기억의 봉인이라도 푼 것과 풀지 않은 것은 차이가 크기 때문이었다.
“배달 수행원 엘프가 먼저 들어가서 토르에게 접근하지 않는 건 왜일까요?”
세연은 진철을 기다리면서 의문이 생겼다. 그 질문은 다른 신들도 이해할 만 했다.
“베르단디나 앙그르보다의 기억 속에는 배달 수행원 엘프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지?”
세연은 민혁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가르드에 스파이가 잠입해 있다는 사실은 거의 극비 사항이므로 외부인과는 절대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위그드라실의 노른과 미드가르드의 바다를 지배하는 아에기르, 란 등이 그 외부인이다.
“배달 수행원 엘프는 마력이 강한 쪽에 속하지만 할 수 있는 마법이 별로 없어. 스파이로서 필요한 마법 몇 가지가 고작이지. 공격형 마법도 아는 게 별로 없다고 해.”
“그녀의 주특기라고 하면 정신계 마법이 있는데 발키리와 맞먹는 수준이야. 이외에는 정말 별 볼일 없어. 그래서 토르를 깨우기 위한 기억 회생 마법을 할 줄 모르니까 우리가 그를 깨우길 기다리는 거지.”
진원이 민혁의 설명에 보충을 해줬다. 그 사이에 인철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제 2의 세계에서 배달 수행원 엘프에게 최면 마법을 당했던 기억이 나 수치심이 확 끓어 오른 것이었다. 배달 수행원 엘프가 전투에는 별 볼일 없을지 몰라도 스파이로서는 최고의 인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인철 선배, 표정이 영 아닌데요?”
“아냐.”
“옛날 일은 신경 쓰지 말아요. 그 이후부턴 그녀에게 안 당했잖아요.”
민혁은 인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꿰뚫어 보았다. 자신의 정의관에서 ‘자존심’이란 걸 굳게 내 거는 성격이라 (티르나 인철이나 이 점은 똑같다.) 그 속을 알아내기 쉬웠다.
“소용없어요. 어차피 평생 가니까. 은근히 속이 좁거든요. 아-. 장난이에요.”
인철은 레이의 뒤통수에 왼손을 대더니 억지로 90도 각도 인사를 시켰다. 레이는 인철의 힘에 꼼짝 없이 눌려서 제대로 바둥거리지도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근처에 있는 것조차 꺼릴 정도였는데 지금은 충분히 친해진 것 같았다.
“집에 안 가고 여기서 뭐 해?"
진철이 도장에서 나와 레이를 괴롭히고 있는 인철(진철의 관점에서)을 발견했다.
“형 기다리고 있었지.”
인철은 손을 떼고 진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른 신들의 눈도 모두 진철에게 향했다. 진철은 인철과 레이 외의 다른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도장 앞에 있는 사람들에 불과했다. 각성한 인철과 레이랑 같이 살고 있으면서도 진철은 어떤 느낌도 느끼지 못했고 예지몽 같은 것도 꾸지 않았다. 각성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힘으로 밀어 붙이는 토르의 천성을 그대로 갖고 있을 줄이야.”
민혁은 진철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처음, 한 번에 그가 토르의 환생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만약 민혁이 진철을 일찍 알았더라면 토르는 지금보다 일찍 각성했을 것이다. 레이가 같이 살면서도 진철과 인철이 토르와 티르라는 걸 몰랐던 거에 비하면, 민혁이 인철과 만났을 때 인철이 티르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에 비하면 아주 빨리 알아낸 것이다.
“난 잘 모르겠어. 마력이 너무 약해서 그런가?”
세연은 민혁의 옆에 붙어 서서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앙그르보다의 기억으로 보면 딱 토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으음……. 푸웃. 진짜네.”
진철은 민혁과 세연이 자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관계 외의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아서였다.
<인철, 레이. 토르와 같이 집으로 돌아가. 나중에 그녀가 없는 곳에서 봉인을 풀자.>
진원의 텔레파시를 들은 인철과 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철은 먼저 돌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우린 여기서 좀 더 기다릴까?”
진원은 민혁과 세연을 보며 싱긋 웃었다. 인철과 레이의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도장 앞에 남아 있는 셋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배달 수행원 엘프였다. 진원은 궁니르를 다시 본 크기로 만들고-도장의 수련생들이 나올 때 작게 만들었다.- 마력을 서서히 주변으로 퍼뜨렸다.
“이제 나올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언제까지 그렇게 숨어서만 다닐 생각입니까?”
지배의 힘이 강하게 배어 있는 목소리에 배달 수행원 엘프의 마력이 휘청거렸다. 결국 그녀는 진원의 힘에 밀려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땅에 질질 끌릴 정도로 긴 금발 머리, 푸른 눈, 흰 피부, 옅은 분홍빛의 긴 드레스, 마지막으로 옅은 녹색의 에메랄드 브로치. 여신 시프의 옛 모습 그대로였다. 라그나로크에서 죽지 않고 김리궁에서 계속 살아왔기 때문에 모습에 큰 변화는 없었다.
“솔직히 시프의 모습은 본 적이 없어서 상상만 하고 있었는데 내가 너무 미화했었나봐. 프리그나 프레이야에 비하면 별 거 아니잖아.”
시프는 지위가 높은 신이 아니라 노른을 만날 수 없었고, 로키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앙그르보다를 만날 일도 없었다. 그래서 세연은 다른 신들이 시프에 대해 찬양했던 말을 섞고 섞어 그녀의 모습을 상상했었다.
“실례야. 그래도 저 황금 머리칼은 아홉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머리칼이라고.”
민혁은 철없이 말하는, 세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노른 중의 한 분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배달 수행원 엘프는 양손으로 드레스를 살짝 잡고 약간 들어 올리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러고 나서 진원에게도 인사했다.
“오딘께서도 미드가르드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죠?”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못해서 머릿속이 갖은 생각으로 터져버리기 직전입니다.”
진원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매달 수행원 엘프도 기품 있는 미소를 얼굴 가득 피우며 진원과 마주봤다. 머릿속의 갖은 생각에 자신도 포함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신의 미소는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었다.
“토르를 그냥 보내셨더군요.”
“예상외의 일이었습니까?”
“네. 그의 기억의 봉인을 푸는 데 이 정도의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거든요.”
상황이 예측한 경로를 이탈할 때면 말투가 더욱 침착해지는 것은 여전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티나는 짓, 정체나 계획이 탄로 날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스파이의 철칙을 너무 지키다 보니 역습관이 생긴 것이었다.
“여기서는 더 이상 오딘께 친근한 척 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거 하나만 감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의 토르를 돌려주십시오.”
배달 수행원 엘프의 선전포고였다. 그 선전포고에 세 신의 표정이 싹 굳었다. 그 굳었다는 표현이 평범하게 굳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포커페이스가 나타나 표정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감히 신을 돌려달라고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발언이 아니었다. 과거에 토르가 배달 수행원 엘프의 남편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서도 지금 상황에선 피해야 할 말이기도 했다.
“간이 아주 크십니다.”
진원이 마력의 압력으로 주변의 분위기를 살벌하게 바꿔버렸다. 세연은 민혁에게 꼭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겁먹은 병아리가 구석에 숨어서 몸을 최대한 웅크리듯이 몸을 움츠렸다.
“전 토르를 데려갈 거에요. 후작이 그의 기억을 되돌려 주겠다고 약속했거든요.”
배달 수행원 엘프의 표정은 비장했다. 단단한 결의를 한 것처럼 굳은 의지가 보였다.
“그러면 왜 처음부터 데려가지 않은 거야?”
민혁은 사신의 눈으로 조소하듯이 쳐다봤다. 배달 수행원 엘프는 저절로 고개를 획 돌려 민혁의 눈을 피했다. 아무리 뛰어난 스파이라도 사신의 눈을 당당하게 마주 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지진 못했다. 아직 마력이 완전하지 못해서 익숙해지기만 하면 마주 볼 수 있겠지만 역시 오래 보진 못할 것이다.
“오딘의 지배의 힘과 로키의 사신의 눈을 모두 받으면서 그렇게까지 버티다니 대단하네요. 전 분위기에 일찌감치 눌려버렸어요.”
험악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세연은 겨우 두 다리로 지면 위에 서있었다. 베르단디의 기억에 오랫동안 익숙해 있어서 세상 풍란 다 겪은 앙그르보다의 기억을 잘 꺼내지 못 해 무겁고 공포스런 분위기에 견디는 법을 몰랐다. 그래도 민혁에게 붙어있는 걸 보면 버틸 만한가 보다.
“겨우 분위기 잡아 놨더니…….
“너무 험악한 것도 좋지 않아.”
세연은 볼을 한껏 부풀리며 민혁을 똑바로 쳐다봤다. 세연을 쳐다볼 때 만큼은 민혁의 눈은 자동적으로 원래대로 돌아왔다.
“기억 회생 마법은 일부 신에게만 허락된 마법입니다.(우트가르드 로키 쪽은 모두 스스로 각성한 신들) 드래곤인 레시 후작이 어떻게 토르의 기억을 되돌릴 수 있다는 겁니까?”
“스스로 각성하도록 유도하면 그런 마법은 필요 없지요. 예를 들면 마력의…… 읍.”
배달 수행원 엘프는 진원의 지배 때문에 자신의 입이 저절로 움직인다는 걸 알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자신에게 결코 좋지 못한 구도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불리할 줄은 몰랐던 터라 순간적으로 눈동자의 초점이 흔들렸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을 움직이려는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홀드에 걸려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다니, 그동안 편하게 지내셨습니다.”
평화의 긴 시간 속에서 스파이의 감각이 점점 둔해졌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한 커다란 실수가 화근이 돼 버렸다. 이제 진원의 지배에 따라 모든 걸 실토할 일 만이 남아있었다. 배달 수행원 엘프는 진심으로 두려움 때문에 몸을 떨었다.
“제가 무서워서 그러십니까?”
“오딘께서 절 해치지 않으시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레시 가에게 버림받을 까봐 무서운 거야? 바보 같군.”
배달 수행원 엘프가 미처 다 잇지 못한 말을 민혁이 마무리했다. 자신의 소감과 함께.
“혼자가 된다는 게,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괴로운 지 당신은 몰라요.”
배달 수행원 엘프의 목소리는 그녀의 몸만큼 바들바들 떨렸다. 그 때 세연이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전 알아요. 직접 겪어봐서 당신보다 더 잘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처음엔 아스 신이었잖아요. 돌아갈 곳이 있는데 왜 무서워하는 거죠?”
스파이로서의 능력이 이미 봉쇄돼 버린 시프는 세연의 눈에 담겨 있는 짙은 슬픔에 자신이 대신 눈물을 흘려버렸다.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두려움보다 더 크고 무거운 슬픔이 보이자 자기가 얼마나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깨달았다.
“오딘은 당신을 적이라 생각한 적이 없어요. 당신은 엄연히 아스 신족의 일원인걸요. 그것도 순혈 신이죠. 당신이 진심으로 돌아오겠다 마음먹으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곳이에요.”
시프는 끝없이 눈물을 흘렸다. 신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흘려보는 뜨거운 눈물이 뺨을 지나 턱으로 미끄러져 땅 위로, 옷 위로 떨어졌다.
“라그나로크가 끝나고 당신은 레시 가와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어요. 그들이 아직도 당신을 유능한 동료로 봐주던가요? 김리궁의 신들이 오히려 당신을 따뜻하고 아름다운 신으로 봐주지 않았나요? 신들은 이미 당신을 용서했어요.”
“이제…… 그만 하세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세연의 눈과 말은 시프의 마음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시프는 김리궁을 빠져나올 때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아스 신으로서의 자신과 레시 가의 스파이로서의 자신은 너무 달랐다. 하나만 골라야 했다. 고른 그 하나가 정말 자신인지 계속 헤매고 있었다. 그걸 세연이 확실하게 해줬다. 시프는 아스 신이었다. 자신을 깨달은 시프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고 세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여자 마음은 여자만이 달랠 수 있다고, 그 말이 딱이지?”
진원이 민혁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이걸 예상하고 세연까지 부른 거였어요?”
“아니야. 우연이야.”
“속 보여요. 응큼한 오딘 아저씨.”
이 번 만큼은 민혁도 진원의 속셈을 읽지 못했다. 시프를 아스 신으로 끌어들일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 말은 정말 오랜만에 듣는데?”
“딴 데로 샐 생각하지 마세요.”
“매- 정하잖아.”
민혁은 진원의 장난스런 말투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잘 따라하시는 분 거수!) 진원이 진지한 대화를 피하는 게 너무 분명했다.
“시프가 좀 진정이 됐는데 이제 어쩌실 거에요?”
세연이 시프의 눈물을 닦아주며 진원을 불렀다.
“우리 집에 가서 천천히 회포를 풀어보는 건 어떨까요?”
마블이 이끄는 늑대인간 군대와 매튜가 이끄는 리자드맨 군대가 합군하여 레시 가의 오크, 드워프 군대를 상대했다. 확실히 괴물 형제의 군대가 우세해서 레시 가의 짝달만한 군대를 제대로 밀어붙였다. 마블과 매튜는 자신들이 유리하면서도 언제 드래곤이 나타날지 몰라 주위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나가 일족이 멸망만 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마음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텐데.”
매튜는 몸에서 뿜어내는 살기와 독기만으로 자신에게 가까이 오는 오크와 드워프들을 죽였다. 나가 일족의 몰살에 대한 분노가 섞여 있어서 정도가 강했다. 가끔 마법을 사용하기라도 하면 마법이 지나간 자리는 아주 깨끗해졌다.
“가루다 일족이 상공을 봐주고 있고 라미아 일족과 에키드나 일족이 뒤를 봐주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마블은 썩은 피와 독으로 만들어진 검을 휘둘러 자신에게 달려드는 오크들의 목을 순식간에 베어냈다. 검 날의 길이가 마블의 키의 두 배나 돼서 중거리 공격도 가능했고 한 번 휘둘러서 다수의 적을 한 번에 상대할 수 있었다.
“마력을 다 되찾은 판에 걱정은 무슨.”
마블과 매튜는 겉모습이 7살 어린 아이 그대로였지만 마력의 봉인을 모두 푼 상태였다. 마력이 절반 정도 있었을 때는 본 모습으로 변신할 때 부작용이 따를 위험이 있었지만 지금은 맘만 먹으면 언제든 변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드래곤이 나타날 때 할 일.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풍부한 마력만으로도 적을 상대할 수 있었다.
“우리가 꼬마라고 무시하고 있는데…… 정말로 우리가 누군지 못 알아보는 거야?”
마블의 검에 오크 일곱, 여덟 마리가 희생되었다.
“마력과는 거리가 먼 녀석들이니까 별 수 없잖아. 짐승의 육감마저 없는, 그저 걸어 다니는 살덩이들이니까. 마하 포이즌.”
매튜가 왼팔을 옆으로 쭉 뻗어서 마법을 사용하자 쓸모없는 육신(?)들이 사라지고 길이 만들어졌다. 아군은 상처하나 입히지 않고 적군이 있는 곳으로만 마법을 사용하는 고도의 테크닉을 구사했다.
“부하들을 위해 너무 선심 쓰는 거 아냐?"
“지도자 나가를 잃은 리자드맨들에게서 목숨마저 거둬 가면 난 폭정자가 되버리는 거야.”
“흠. 내 늑대인간들은 배려하고 있지 않았구나. 핫!”
마블의 기합 소리에 맞춰서 오크들의 목이 우수수 떨어졌다. 매튜도 롬파이어 형태의 검을 낮고 길게 휘둘러서 드워프들의 머리를 사과 떨어뜨리듯이 땅 위에 떨궜다.
“혀의 늑대인간을 실수로 죽였다간 내 목이 여기에 없을 텐데 어떻게 소홀할 수 있어.”
매튜가 등 뒤에서 수상한 기척을 느껴 뒤로 도는데, 근처에 있던 리자드맨 두 마리가 매튜를 노리던 오크를 덮쳐 목과 심장을 각각 날카로운 손톱으로 깊숙이 찔렀다. 매튜는 자신의 후방을 그들에게 맡기는 셈 치고 검을 현란하게 휘두르며 높이가 다른 오크의 목과 드워프의 목을 차례대로 깔끔하게 베었다.
“내가 네 성격을 잘 아는데 뭘. 당연히 내 늑대인간들의 안전이 보장될 거 뻔한데 그냥 장난친 걸 가지고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마블은 씨익 웃으며 검을 왼손으로 쥐고 오른손엔 마력을 모아 손톱을 길게 했다. 신체의 일부를 변형시키는 마법이었다. 마블의 오른손은 괴수 펜리르의 오른쪽 앞다리의 축소판으로 변했다.
[휙!]
펜리르의 손톱은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는 최강의 무기였다. 오크나 드워프가 상대라면 스치기만 해도 목숨을 앗을 수 있었다. 마블은 오른팔을 길게 뻗어서 가로로 세차게 휘저어 손톱으로 오크와 드워프들을 긁었다.
“역시 손으로 직접 죽이는 게 제일이야.”
마블의 손톱에는 피가 잔뜩 배었고 내장이 꿰어져 있기도 했다. 손과 팔을 뒤덮은 흑갈색의 털에도 피와 살점이 드문드문 묻었다.
“난 그러면 물어뜯거나 한 입에 삼켜야 하나?”
“야, 매튜. 농담이 심하다.”
매튜의 본체(요르문간드)는 손과 발이 없기 때문에 입으로 독기를 내뿜거나 적으로 통째로 삼켜서 소화시키는 등의 공격이 전부였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인간의 모습에서는 무기와 마법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었다.
“펜리르님. 드래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상공을 휘젓고 있던 가루다들이 마블을 불렀다.
“드디어 왔군.”
마블의 얼굴에는 살육의 쾌감을 표현하는 미소가 가득 퍼졌다. 마력을 방출하는 양도 점점 많아졌다.
“가서 에키드나 일족은 그대로 후방을 지키고 라미아 일족은 앞으로 나와서 곳곳에 배치하라고 해.”
오크와 드워프들이 슬금슬금 후퇴하는 기색이 보이자 매튜는 가까이 서 있는 리자드맨에게 전투 배치 명령을 전달시켰다. 매튜가 라미아 일족을 특별히 데려온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드래곤이 나타날 경우 그들이 상공에서 지상을 향해 공격을 퍼부을 게 뻔했다. 그 때 아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을 막기 위해 마법에 능한 라미아 일족이 그들의 마법으로 아군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매튜의 방책이었다.
“시작하자.”
마블과 매튜의 몸에서 다량의 마력이 방출되기 시작하더니 그 양이 엄청난 속도로 불어나면서 둘의 모습도 빠른 속도로 변했다. 거대한 괴수 늑대 펜리르와 미드가르드의 뱀 요르문간드가 그 위압적인 모습을 드러내자 지상에서 늑대인간과 리자드맨 등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위대한 금인족 가루다여! 그대들의 위대한 기상을 온 하늘에 뿌려댈지어다!”
[크아아아아!]
가루다 일족은 펜리르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일제히 괴성을 질러댔다. 드래곤들은 가루다의 괴성에 순간 움찔해서 제자리에 멈춰 상황을 다시 살폈다.
“만약에 나가 일족까지 있었다면 가루다 일족과 라이벌 의식을 일으켜서 훨씬 시끄러워졌을 거야.”
요르문간드는 드래곤이 있는 방향으로 독기를 내뿜으며 역시나 그쪽의 상황을 살폈다. 레시 가 드래곤 중 어린 아이를 빼고는 다 나온 것 같았다. 하나 더, 후작으로 보이는 드래곤도 없었다. 펜리르와 요르문간드 쪽에서 레시 가의 영지를 기습한 거였는데 후작이 없을 줄은 몰랐다.
“후작이 보이질 않아. …… 이미 이성을 잃었군.”
요르문간드는 눈에 얼른 드래곤을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짐승이 눈알에 빗발을 세우고 때를 기다리는 모습이 비쳐서 곧장 드래곤이 보이는 쪽으로 시선을 바꿨다. 이성을 잃은 펜리르는 야수들의 제왕이 아니라 한 마리 짐승에 불과했다.
“용맹스런 펜리르님과 지혜로운 요르문간드님께서 어째서 저희의 땅에 불쌍한 것들의 피를 뿌리십니까?”
고룡급 정도 돼 보이는 드래곤 하나가 앞으로 나와 안정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화근이 될 만 한 건 일찍 없애버리는 게 상책이거든.”
거대한 괴물 펜리르가 하는 말이라서 그런지 드래곤들 사이에 불안감과 공포가 퍼져나갔다. 아무리 후작급 레드 드래곤 레시 가의 드래곤이라도 공포,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자작, 남작급 드래곤보다 강하다 해도 펜리르나 요르문간드에게는 오십보백보 수준이었기 때문에 드래곤들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신들이 후작급 이상의 드래곤을 어려워하는 건 신들의 크기가 드래곤보다 훨씬 작아서 드래곤 사이의 작은 실력 차가 신들에게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펜리르와 요르문간드는 큰 덩치로 밀어붙이기 때문에 드래곤은 그저 다 같은 드래곤에 불과했다.
“저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십니까?”
“크아앙! 신을 납치하고, 신들의 보물을 노리는 게 죽을죄가 아니면 무엇이지? 엉?”
드래곤들은 펜리르의 괴성에 일제히 쫄아버렸다. 대지와 하늘이 모두 흔들릴 정도의 괴성이었다.
“스쿨드님은 지금 어디 계시냐? 그리고 후작은 어디 있어?”
펜리르에 대한 압박으로 드래곤들은 벌벌 떨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전의를 상실했기 때문에 펜리르와 요르문간드가 입을 쩍 벌리고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다 끝날 것 같았다. 한 가문에 속한 드래곤은 많아야 3~40마리.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가아아앙!]
동쪽에서 다수의 드래곤의 고성이 들렸다. 레드 드래곤이 한 마리, 나머지는 실버 드래곤이었다.
“설마 저 후작 녀석이 연합을 형성한 거야?”
요르문간드의 예상이 맞았다. 레시 후작이 데려온 실버 드래곤은 위퍼 가의 드래곤들이었다. 연합을 협상하러 갔다가 어린 드래곤으로부터 기습 이야기를 듣고, 협상이 끝나자마자 지원군을 받은 것이었다.
[가아아앙!]
실버 드래곤들은 떼 지어서 빠른 속도로 지나가며 지상에 브레스를 퍼부었다.
[펑! 퍼버벙! 펑! 펑!]
곳곳에 흩어져 배치하고 있던 라미아 일족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실드를 펼쳐서 지사의 아군을 치켜냈다. 그러나 실력이 부족한 라미아도 있어서 피해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펜리르와 요르문간드는 자신들의 독기로 막을 쳐서 브레스를 녹여버렸다.
“아주 급하게 왔군. 레시 후작.”
“네. 정말 급하게 왔습니다. 제가 오기 전에 몰살당하면 말짱 끝이니 말입니다.”
“목소리 톤 좀 조절하지 그래.”
레시 후작은 요르문간드에게 함부로 대들지도 못하고 이만 부드득 갈았다. 위퍼 가의 드래곤들을 데려오긴 했지만 상대가 펜리르와 요르문간드이고 가루다 일족도 있어서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식하고 나서길 좋아하는 실버 드래곤 녀석들. 후작급이면 뭐해? 본성은 신분하고 상관 없잖아. 크앙.”
펜리르는 실버 드래곤 하나를 덥석 물어서 레드 드래곤 무리 쪽으로 휙 던져버렸다. 레드 드래곤들이 얼떨결에 피하는 바람에 그 운 없는 실버 드래곤은 맨땅에 처박혀 버렸다. 그리고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곧 축 쳐졌다.
“감히 레시 가를 돕다니. 너넨 신념도 없어? 저 녀석이 너희 전체에 대한 처벌을 대신 받은 거니까 꺼져버려.”
드래곤 하나를 너무 쉽게 처치해 버리는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기가 꺾이는 건 당연했다. 동포가 죽었다고 분개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레시 가와의 연합을 결정한 후작과 장로들을 욕할 여유도 없었다. 살기 위해서, 그저 살기 위해서 이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할 시간만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왜, 왜 항상 당신들이 우리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까?”
레시 수작은 펜리르와 요르문간드를 향해 소리 질렀다.
제 2의 세계에서 우트가르드 로키가 아스가르드 속에 분열 분자를 퍼트리고 라그나로크를 준비할 때 레시 가는 4대 보물을 노리며 ‘그’를 부활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들이 수호하고 있는 4대 보물을 드래곤이 노린다는 건 그야말로 어이없는 것이었다. 레시 가의 야망은 금방 들통 나고 말았다. 그때 까지는 오딘의 총애를 받고 있던 펜리르와 요르문간드가 레시 가의 영지를 한바탕 뒤엎어 놓음으로써 상황이 종료되었다. 그 때 요르문간드가 최대한의 자비를 베풀어 살려둔 드래곤이 다섯 정도뿐이었다. 성룡 셋과 갓 태어난 드래곤 둘. 배달 수행원 엘프가 자주 왕래하면서 그들을 봐준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아스가르드에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너희가 하는 짓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알고서 하는 소리야?”
요르문간드가 버럭 소리 지르자 레시 후작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도 하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
“내가 그 옛날 너희 일족을 괴멸시키지 못한 게 정말 후회스럽다.”
요르문간드의 독기가 상공에 제대로 흩뿌려졌다. 라미아 일족은 아군이 독기에 침식되지 않도록 실드를 넓게 펼쳤다. 가루다 일족은 피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마력으로 몸을 감싸 독기를 견뎌냈다. 드래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이번엔 확실하게 이 세상에서 레시 가 자체를 없애버리자고. 가루다 일족은 레시 가의 성으로 가서 남아 있는 드래곤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죽여버려. 그리고 서도 확실하게 부숴버리라고.”
[크아아아!]
펜리르의 명령을 들은 가루다 일족은 앞다투어 레시 가의 성으로 날아갔다.
“안 돼!”
“어딜 가.”
가루다 일족을 뒤쫓으려던 레드 드래곤 하나는 요르문간드에게 가로막혔다. 요르문간드는 입을 쩍 벌려 그 레드 드래곤을 한 입에 삼켜버렸다. 요르문간드의 몸속에 가득한 독 때문에 레드 드래곤은 저항 한 번 못하고 맥없이 녹아 없어졌다.
“이 녀석들은 우리가 처리한다. 너희는 에키드나 일족이 있는 후위로 빠져라.”
펜리르의 두 번째 명령은 지상에서 모든 걸 보고 있던 늑대인간, 라미아, 리자드맨에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명령에 따라 촤르륵 후위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카앙!]
[펑! 펑! 펑!]
등을 보이는 군대에 날린 브레스를 펜리르가 온 몸으로 거뜬히 막았다. 아무리 드래곤의 브레스라도 웬만한 금속보다 더 단단한 펜리르의 가죽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 털도 살짝 그을음을 입는 게 다였다.
[카앙!]
[펑! 펑! 펑!]
레드 드래곤들은 다시 브레스를 날렸지만 펜리르에게 어떤 위협도 할 수 없었다. 진정한 괴물. 몸집이 크고 잘 죽인다고 얻을 수 있는 호칭이 아니다.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끄떡도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괴물이다. 레시 가의 드래곤들과 관전자인 실버 드래곤들은 선대를 통해 전해들은 괴수 형제의 이야기를 그저 옛날이야기로만 취급했던 것을 깊이 반성했다. 진짜 괴물 앞에서 그들은 길거리 참새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다 끝났냐?”
“벌써 성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저쪽은 정말 별 볼일 없었나 보군.”
레시 가의 드래곤들이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할 즈음에 그들의 육신은 이미 펜리르와 요르문간드의 입 안에 들어가 분쇄되거나 독에 녹아버렸다. 김리궁에서 터놓은 길을 가로채고, 스쿨드를 납치 했던 레시 가는 뭔가 크게 해낼 것 같았지만 괴물 형제의 발빠른 대처에 허무하게 무로 변했다. 그들은 그저 드래곤이라는 생명체의 한 종류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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