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철은 우트가르드 로키를 얕봤던 것을 후회했다. 그를 뺀 신들은 그저 그런 신뿐이었지만(그 신들에게 미안하나) 우트가르드 로키만 있으면 끄떡없었다. 그의 머리는 오딘이나 로키가 아니면 절대로 따라갈 수 없다는 걸, 자신은 그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네가 라그나로크를 일으킨 장본인이란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우트가르드 로키가 만든 아공간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고, 인철이 가진 마력은 아공간을 깨부수기에 택도 없었고, 기력이나 마력 모두 조금씩 아공간에 뺏겼다.
“네 녀석이 맘만 먹으면 나 같은 신 정도야 하나씩 차례대로 없애버릴 수 있다 이거냐? 으읏.”
마력의 봉인을 찾지 못해서 마력의 양이 미미한 상태인데, 아공간에 그 적은 마력을 뺏기는 중이라 육체적으로 부담이 가고 정신도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어딘가 짚고 기댈 것도 없어서 비틀거리며 악으로 버텨야 했다.
인철은 우트가르드 로키를 우습게 본 자신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발데르에게서 레시 가의 몰살 소식을 전해 듣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을 때, 그 소름은 자신의 무력과 안일함 때문에 생긴 것임을 알았다. 진짜 적을 옆에 두고 다른 적을 걱정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미치는 줄 알았다. 진원이 어째서 우트가르드 로키에게 선공을 가하지 않는지……. 프리그가 인질이기도 하지만 마력의 봉인을 찾지 못한 신들을 비롯해 아직 완전하지 못한 자신의 신변에 위해가 가해질 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뿌득]
우트가르드 로키가 만든 아공간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저절로 이가 갈렸다. 그리고 얼마 전에 마야가 한 말이 떠올랐다.
‘신이 다른 종족으로 환생한 경우에는 다른 생명체하고 다르게 죽었을 때, 생전의 업적이나 다른 생명체가 가진 그 신에 대한 기억이 모두 사라져요.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가 돼버리죠.’
이건 신이 잠시 다른 세계에 머물렀다가 다른 세계로 이동하거나 아스가르드로 돌아갔을 때(본래 살고 있던 곳으로 돌아갔을 때) 신의 자취를 없애기 위한 장치로써, 신이 환생할 때도 적용하게끔 한 것이다.
“날 죽여도 뒤처리할 필요가 없으니까 아주 좋으시겠군.”
인철은 우트가르드 로키가 듣건 말건 이렇게 죽는 건 싫다는 식으로 이를 악 물며 말했다. 환생한 지 대략 20일이 지났다. 그런데 자신이 가장 먼저 제거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누가 먼저 죽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진 않았다. 그저 자신도 다음 라그나로크까지 살아 있을 줄 알았다.
“레시 가처럼 기습으로 허무하게 사라질 줄이야.”
<그러면 보람을 갖게 해 드릴까요?>
갑자기 들려온 우트가르드 로키의 목소리는 아공간에 가득 울리다가 인철의 고막을 통과했다. 아주 얄밉고 비열하게 들렸다.
“힘을 다 뺏어가 놓고 어쩌려는 거야?”
그저 검고 어두울 뿐이었던 아공간이 서서히 뒤틀리더니 인철의 마력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몸의 피로도 풀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공간은 점차 색이 하얗게 변했다. 인철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긴장하면서 아공간의 변화를 살펴봤다. 아공간은 단순히 색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아공간을 구성하는 마력의 짜임도 바뀌고 있었다.
<그저 하얗고 하얀 공간입니다. 무엇 하나 거치적거릴 것도 없이 깔끔한 공간이지요. 여기서 살아남으시면 무사히 보내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살아남으라니? 뭘 할 생각이야?”
[지잉]
인철의 앞, 조금 떨어진 곳에 워프가 생성되더니 무거운 쇠사슬을 차고 있는 사자 한 마리가 나타났다. 윗 송곳니가 턱 아래까지 내려올 정도로 긴 걸 보니 평범한 사자는 아니었다.
[찰캉 찰캉]
사자는 인철을 보자마자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쇠사슬 때문에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항상 하드 메탈 소드를 지니고 다니는 덕분에 맨손으로 싸울 염려는 없었다. 인철은 하드 메탈 소드를 본 크기로 마들고 꽉 쥐었다. 사슬이 언제 풀려서 사자가 광분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주변에 긴장감이 장난 아니게 돌고 있었지만 인철에게 두려움은 없었다.
<노예들을 기아에 절은 사자와 같이 한 곳에 두고 어누 쪽이 살아남는가 구경하는 콜로세움의 잔인한 도박을 흉내 낸 것입니다. 오늘 하루는 영광스런 검투사가 되 보시죠.>
[팟]
[다다다다]
우트가르드 로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슬이 끊어지고 사자는 인철을 향해 돌격했다. 인철은 양손으로 검을 부여잡고 사자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크아앙![
사자는 인철에게 가까이 다가왔을 때 입을 크게 벌렸다. 인철은 검을 옆으로 눕혀 들고 왼쪽으로 살짝 비켜선 후 뒤에서부터 검을 풀 스윙으로 길게 그었다.
[취잇]
사자는 야생의 감각으로 위험을 느끼고 옆으로 피했으나 입가가 검 끝에 닿아 찢겨졌다. 그 정도 통증은 별거 아니었는지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다시 인철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 인철은 검을 위로 조금 올려 검 날이 자신의 얼굴을 가릴 수 있도록 비스듬히 들었다. 그리고 사자가 바로 앞까지 왔을 때 왼쪽으로 비켜서면서 동시에 손목의 스냅과 팔의 스윙을 합쳐 검을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그었다.
[취잇]
[크르응]
사자의 오른쪽 눈꺼풀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흘러내리는 피 때문에 사자는 제대로 눈을 뜨지 못했다. 하지만 사자가 멈칫거리는 시간도 잠시, 머리를 세차게 두 번 좌우로 흔들고 나서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박차를 가하는 정도가 달랐다. 처음부터 전속력으로 달릴 심산이었다.
“쳇.”
인철은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감싸 쥐고 왼손으로 잘 받친 후에 무릎의 탄력을 이용해서 오른쪽으로 멀리 튀어 올랐다. 인철을 지나친 사자는 인철이 착지할 때 같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방향을 바꿔 인철을 덮치기 위해 뛰어 오르는데 시야에서 인철이 갑자기 사라졌다. 인철이 몸을 최대한 숙이며 앞으로 나가 최고 높이에 이른 사자의 바로 밑에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사자의 움직임을 읽은 빠른 직감이 인철의 몸을 가장 적당하게 움직이도록 해줬다.
[푸우우욱]
검 날은 사자의 배를 깊숙이 찌르고 길게 반으로 갈라냈다.
[취익]
갈라진 틈에서 피가 쏟아져 나와 인철은 그래도 그 피를 뒤집어썼다. 갓 터져 나온 피였기 때문에 끈적거리는 것만 빼면 따뜻한 물을 뒤집어 쓴 느낌이었다.
[쿵]
사자의 시체는 바닥에 떨어졌다.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인철의 승리였다. 인철은 피가 묻지 않은 쪽으로 엉ㄹ굴에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냈다. 피의 비린내가 코를 마비시킬 주음에 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콜로세움의 죽음의 경기인가…….”
한 단계를 클리어 할 때마다 더 강하고 어려운 단계를 수행해야 하는 끝없는 게임에 걸려버린 자신의 운명이 그리 비참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끝없는 게임이라는 별칭이 붙은 죽음의 경기는 실제로 끝이 없는 건 아니다. 단지 끝가지 살아남은 도전자가 없을 뿐이다.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전설에 두고두고 이름이 남을 것이다. 인철은 잡생각을 버리고 우트가르드 로키의 장단에 잠시 맞춰주기로 했다.
“투기가 장난이 아니군.”
인철은 검을 꽉 잡고 뒤로 돌았다.
“어?”
다음 상대는 눈이 붉게 충혈된 토끼였다. 원래 토끼는 눈동자의 색이 붉은색이지만 그 토끼는 본 색이 아니라 충혈된 색으로 보였다. 갈색 털을 가진 평범한 토끼였다. 인철은 겉모습에 잠시 멍해졌지만 토끼에게서 풍겨지는 살기에 곧 정신을 차렸다.
[캬악!]
토끼는 이상한 비명소리를 지른 후에 인철에게 달려들었다. 인철은 몸을 움직이려는데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제길.”
인철은 하는 수 없이 검으로 토끼를 쳐냈다. 토끼의 몸에는 어떤 상처도 나지 않았다. 어딘가에 부딪힐 때 순간적으로 털이 강철처럼 단단해지도록 마법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인철은 토끼를 쳐낼 때 자신의 손에서 느낀 감촉을 의심했지만 두 번째로 토끼를 쳐낼 때 자신의 감각이 맞다는 걸 확인했다. 토끼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털의 강도가 변하는 것이라 검을 이용한 평범한 방법으로 상처 입히긴 힘들 것 같았다. 그렇다고 지금 토끼를 없앨만한 마법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캬악!]
고막을 찢을 만큼 고주파의 비명소리였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인철은 끝없이 달려드는 토끼를 끝없이 쳐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이상한 낌새에 집중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뒤집어 쓴 피가 굳으면서 움직이기 불편한 건 그럴 수 있다 치고, 인철의 직감이 말하는 수상한 것은 보이지 않으면서 인철에게 가까이 붙어있는 것 같았다.
[퍽! 퍽!]
쉴 새 없이 달려드는 토끼는 인철의 검으로 매번 저지 되었다. 그런데 점점 토끼를 쳐내는 힘이 약해졌다. 알 수 없는 현기증과 집중력의 저하. 토끼를 쳐내는 부위가 정확하지 못하고 점점 틀어졌다. 그러자 토끼가 날아가는 거리도 짧아져서 토끼의 공격 시간 간격도 짧아졌다. 인철은 자신의 현기증이 불안감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았지만 궁극적인 원인을 알 수 없어 대책 없이 토끼를 쳐내기만 했다.
[캬악!]
[퍽! 퍽!]
너무 팔을 휘둘러 대서 어깨와 팔 근육에 통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매일 수련으로 다져진 몸인데 생각보다 일찍 지치는 것 같았다. 하드 메탈 소드는 강도가 단단한 거지 무거운 무기가 아니었다.
[캬악!]
[퍽!]
인철의 눈앞에 옅은 흑보라색 연기가 가늘게 지나갔다. 인철의 머리에 스쳐 지나간 생각이 외와 시신경을 강하게 자극했다. 그래서 검을 꽉 쥐고 최대한 힘을 실어서 토끼를 멀리 날려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옷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검붉게 굳은 피 위에 드문드문 검은 얼룩이 보였다. 토끼의 입김이 독 그 자체였고 그 독 때문에 몸이 찌뿌둥해지고 현기증이 나는 것이었다. 인철은 높게 뛰어 오른 토끼를 또 다시 멀리 쳐내고 나서 윗옷을 벗어버렸다. 나시티에도 피와 약간의 독이 배어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캬악!]
“장난은 여기서 끝내지.”
인철은 검을 오른쪽 위로 길게 내질렀다.
[푸엑]
검은 토끼의 입속으로 들어가서 토끼의 몸통을 곧장 꿰뚫었다. 토끼는 독과 피를 동시에 내뱉으며 즉사했다. 인철은 토끼의 독이 손에 닿기 전에 검을 내리고 발로 짓누르며 토끼의 시체를 빼냈다. 토끼가 죽자 발도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몸속까지 단단해지지 못하지.”
인철은 바닥에 길게 너부러진 토끼 시체를 발로 차버리고 검을 어깨에 짊어진 채 뒤로 돌아섰다. 다음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세 번째 상대에게 사과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움직이지 못할 때 공격해도 괜찮았는데 예의가 바르군.”
인철과 키는 비슷하나 몸집은 대략 세 배 정도 되는 거대한 닭이 눈망울을 빙글빙글 돌리며 얌전히 서있었다. 인철이 윗옷을 벗어낼 때 쯤 나타난 새로운 상대였다.
“하나를 끝낼 때마다 새로운 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하나씩 늘어가는 거군.”
인철은 어깨에 지고 있던 검을 내리고서 능숙하게 빙글빙글 돌렸다. 닭의 눈망울도 빙글빙글 돌아갔다.
“다시 말해 나한테 여유부릴 시간은 없다는 거지. 하피!”
[타다닷]
인철은 닭을 향해 달려가서 닭의 목을 단번에 베었다. 닭 머리는 바닥으로 떨어져 몇 번 통통 튄 후에 멈췄다. 여전히 눈망울을 빙글빙글 돌렸다. 닭 머리나 몸통의 잘린 부분에서는 피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하피가 이렇게 자비로운 종족은 아닌데……. 안 그래?”
[탁]
몸통을 찌르려는 인철의 검을 두꺼운 날개가 가로 막았다. 인철은 고개를 들어서 닭 머리 대신 나와 있는 인간의 머리, 하피의 머리를 무덤덤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무리 그래도 하피가 나올 줄은 몰랐어.”
“저 다음엔 반시입니다. 그 다음은……!?”
“걱정 마. 별로 궁금하지 않으니까. 어차피 다 알게 돼 있어.”
몸집이 자신의 약 세 배라 시각적으로 자기보다 키까지 더 커 보이는 하피를 향해 두려움이나 망설임 하나 없이 검을 겨눴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들이 줄줄이 나오기 전에 발리 눈앞의 것을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하피가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까지 살찐 하피는 처음이라 우트가르드 로키의 행동을 더 이해할 수 없게 됐다.
“대단한 자신감이시군요.”
하피는 인철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인철은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속보로 하피의 등 뒤로 이동했다.
[취악]
인철의 검을 막았던 날개가 어느 샌가 잘려서 땅에 떨어지고 피고 뿜어져 나왔다.
“아주 약간의 마력만 있다면 이 정도 속보는 별 거 아니지.”
[푸욱]
인철은 망설임 없이 검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하피는 꾹꾹 소리를 내며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속보. 다른 이름으로는 반전 이동술이라 부른다. 상대와 마주 보고 있다가 다리와 발에 약간의 마력을 더 가중하여 초인적인 빠르기로 상대의 뒤로 이동하여 역습을 하는 기술이다. 정식 마법이 아니라 마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고 전투 중에 요긴하게 쓸 수 있기 때문에 티르와 프레이르가 애용했다. 다른 신들은 이를 잡기라고 해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티르와 프레이르의 전용 기술이 되었다.
[탁, 뻐억]
인철은 하피의 몸통에 꽂혀 있는 검을 디딤대 삼아 높이 뛰어 오른 후에 하피의 머리를 휘갈겨 찼다. 하피의 육중한 몸은 왼쪽으로 쓰러졌다. 날개가 잘려나간 부분이 떨어진 날개의 표면에 닿자 통증 때문에 짧은 다리를 바둥거리고 하나 남은 오른쪽 날개를 파닥거렸다. 하피의 깃털과 잔 솜털이 날려 인철은 팔로 휘휘 저으며 자신의 앞을 정리했다. 시야가 어느 정도 깔끔해지자 한쪽 발로 하피의 몸통을 짚고 검을 뽑아 들은 후 곧바로 하피의 목을 쳐냈다. 피가 철철 넘쳐흘렀다.
“하피는 그 말장난에 놀아나지만 않으면 가장 쉬운 상대지.”
인철은 윗옷을 벗어 던진 곳으로 가서 옷을 주워 들더니 피를 뒤집어 쓴 검을 조심스럽게 닦아 나갔다.
“네 번째부터 너라면 앞으로 상당히 힘들어지겠어.”
흑회색 피부에 검은 눈동자, 검은 로브를 몸에 두른 죽음의 요정 반시가 인철의 앞에 나타났다. 7살 아이 정도의 키. 반시는 인철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마야의 왼쪽 눈이 고귀한 흑진주 같이 깊고, 죽음 그 자체 같이 엄숙한 검을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면, 반시는 외로우면서 슬픈 검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헬의 요정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울음 소리만 내지 않으면 죽이기 쉬워.”
“우우.”
반시는 언어장애아가 낼 법한 소리를 냈다. 동시에 피부색이 점차 하얗게 변하다가 다시 흑회색으로 변했다. 인철은 뛰어난 직감으로 반시의 상태를 파악했다.
“진원이 형이나 마야라면 널 구해줄 수 있었을 거야. 지금의 나는…… 이게 전부다.”
우트가르드 로키의 P-웨어가 된 반시와 열띤 공방전을 치르고, 중간에 등장한 에키드나와 스핑크스를 겨우 처리한 인철은 일곱 번째 상대인 켄타우로스와 마주 보고 섰다. 마력이 거의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에키드나와 스핑크스를 동시에 상대했으니 마력도 이젠 ‘0’이나 마찬가지고 믿었던 검술마저 체력의 미달로 위태위태해 졌다. 스핑크스가 등장할 때 같이 나타난 수백 개의 거울을 이번엔 인철이 사용할 때였다. 몇 십 개 부숴버린 것도 잘 하면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철은 하나하나 상대하고 쓰러트리면서 기분이 점점 묘하게 언짢아졌다. 하나 같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들뿐이어서 일까. 우트가르드 로키의 농락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휘말리고 사라져 가는지 분함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레시 가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프는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기쁨과 안도감에 그동안 쌓인 피로가 싹 풀려 사흘 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시프는 좀 어때?”
뤼폴이 열어준 체이스 홀을 통해 세쌍둥이의 집에 찾아온 민혁이 마야에게 물었다. 시프는 그동안 계속 세쌍둥이 네서 지내고 있었다. 집이 넓고 안 쓰는 방도 많아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시프를 숨기기 딱 좋기 때문이었다. 이왕 미드가르드에 온 거 봉인을 푼 토르를 보고 김리궁에 돌아가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진원과 민혁이 세쌍둥이에게 부탁한 것이기도 했다.
“여신이 자신의 미를 위해서라면 몇 백 년씩이나 꼼짝 않고 잘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인가 봐요.”
마야가 홍차를 따르며 대답했다. 마야가 따른 홍차의 잔 수는 두 잔. 민혁과 마야의 것이었다.
“톨의 마력이 짙게 느껴질 때까지 버틸지도 몰라.”
민혁은 피식 웃더니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마야는 포트를 내려놓고 민혁과 마주보며 앉았다.
“저희는 상관없어요. 어차피 시프가 김리궁에 돌아가도 다시 미드가르드로 올 일이 생길 테니까 여기에 머물고 있는 게 덜 번거롭겠죠.”
“라그나로크를 두고 하는 말이라면 유쾌한 내용이 아니야.”
수하 종족들을 정리하고 레시 가의 영지에 대해 다른 드래곤 가문과 협상을 하기 위해 마블과 매튜가 집을 비우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이 조용했다. 이들이 근 사흘 동안 집 안에 없었는데도 그걸 눈치 채는 사람이 없었다. 집이 큰 거에 비해 사람 수가 너무 적어서 마주치지 못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사고가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토르의 기억이 봉인을 못 풀고 있는 건 그의 마력이 폭발할까봐 인가요?”
마야가 화제를 토르 쪽으로 돌렸다. 민혁은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민혁이 말을 아끼니까 저절로 침묵이 둘을 휘감았다.
토르는 오딘과 로키만이 제어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시한폭탄이었다. 시한폭탄도 그런 무제한적인 시한폭탄이 없을 것이다. 조금만 잘못 건들면 주변에 남아나는 게 없다. 미드가르드의 인간들에게 존경받는 신이지만 성격이 확실히 불같아서 함부로 손을 대서도 안 되고, 손을 댈 수도 없다. 스스로는 마력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상대하기 까다로운 신이다. 아버지인 오딘과 절친한 친구인 로키만이 토르를 막을 수 있고 토르와 같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런 토르가 환생하면서 일이 묘하게 돼버렸다.
“기억의 봉인과 마력의 봉인의 일부가 연결될 수도 있지만 그 일부가 자폭하는 부분인건 어딜 찾아봐도 없을 거에요.”
…….
“하-.”
민혁과 마야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토르 얘기가 나왔다 하면 다른 신들도 한숨 먼저 쉬었다. 기억의 봉인을 풀어주고 싶어도 마력의 봉인과 희안하게 얽혀 있어서 풀어줄 수가 없었다. 스스로 각성하는 것이 가장 좋긴 하지만 미쳐버릴 확률이 높았다.
“말이 자폭이지 동반 자살을 하던가 도시 한 개를 날려버릴 수도 있어.”
토르가 광분했을 때, 이성을 잃고 폭주할 때의 힘을 잘 알고 있는 민혁은 앞날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기억의 봉인이 풀리면서 같이 봉인이 풀린 묠니르를 들고 여기저기를 찍어 내리고 육체 가득히 가지고 있는 마력으로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모습이 원하지도 않는데 눈에 선했다. 토르의 움직임이 눈에 뻔히 보였다.
“마력의 봉인을 봉쇄하면서 기억의 봉인을 풀 순 없는 거에요?”
“토르는 지금 두 개의 봉인이 붙어있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하나만 골라서 봉인을 푼다는 건 불가능해.”
토르의 기억의 봉인을 가장 성공적으로 풀 방법을 며칠 동안 궁리해 보았지만 민혁이나 진원, 다른 신들 모두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두 봉인이 토르의 정신을 휙 돌아버리게 하는 위치가 아닌 다른 곳에 겹쳐져 있었다면 벌써 봉인을 풀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쉽게.
“스스로 각성해도 미치지 않게 각성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데. 정말 난감함의 극치네요.”
마야는 심히 바람직하지 않은 봉인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사태를 마음에 들어 할 이가 당연히 없겠지만.
“시프는 그걸 알면서도 토르를 기다리고 있는 거잖아. 솔직히…… 시프는 예전 그대로지만 토르는 남진철이라는 인물로 살고 있는데 그 둘이 옛날처럼 될 수 있을까? 인철 선배 말이 진철 형은 여자 보기를 돌보듯 한다던데. 환생한 신은 영혼은 신이라도 감정이나 사고는 거의 환생한 인간의 것이라 옛날의 모습을 갖기 힘들어.”
민혁은 당사자이기 때문에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민혁에게 로키의 감정이란 지나간 감정에 불과했다. 로키가 뭘 싫어하고, 뭘 좋아하는지는 민혁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진원도 오딘의 감정을 가슴 밑 구석에 둔 지 오래였다. 레이도, 인철도 모두 현실에 충실했다. 환생하지 않은 김리궁의 신들은 여전히 제 2의 세계에서 가지고 있던 생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제 3의 세계의 미드가르드에 있는 신들이 자신들과 같은 김리궁의 신, 아스가르드의 신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큰 차이가 미드가르드와 김리궁 사이에 존재했다.
“시프 문제는 토르가 해결해야죠.”
마야는 티스푼으로 홍차에 띄어 놓은 레몬 조각을 천천히 움직였다. 잔의 반을 채우고 있는 홍차 위에서 반달 모양의 레문 조각이 의미 없는 모양의 물결을 만들었다.
“뭐든 토르가 봉인을 풀어야 된다는 거잖아.”
민혁은 오른손으로 농도 5C짜리 퀵 볼을 만들었다. 엑셀 암렛을 끼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고 정확하게 5C 퀵 볼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섀도우 테크닉을 열심히 연습한 결과, 그 이하 레벨의 마법을 부리는데 마력 컨트롤이 눈에 띠게 향상된 것이었다.
“아, 혹시 토르의 봉인은 토르 스스로 한 게 아닐까요?”
“토르는 마법에 젬병이야.”
토르는 물리적 힘에선 최고봉에 오를 수 있겠지만 마법은 묠니르와 같이 사용하는 극소수 몇 가지를 빼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토르와 절친한 친구였던 로키-민혁-가 그의 실력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정교하고 치밀한 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야생 흑곰 같이 힘으로 힘에 의해 살아가는 토르의 역량을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건 정말 로키 밖에 없을 것이다.
민혁과 마야가 홍차를 마시느라 잠시 대화를 중단한 사이에 마야의 방 한쪽 구석에 체이스 홀이 생겼다. 마야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고 돌아온 네르갈이었다. 옷부터 날개까지 어둠의 색을 하고 있는 천재 스파이. 그의 귀환에는 언제나 적의 소식이 딸려왔다. 스파이가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경우는 드물지만 어떤 정보든 유리하게 써먹는 것이 바로 고용주, 주인의 능력이다.
“아스타로트가 사병을 거느리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습니다.”
신하 되는 자가 여왕의 명령을 거슬러 사병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여왕의 심기를 과히 건드려 검은 오라가 주변에 풍성하게 퍼지도록 하기 충분했다.
[투두두두]
[촤륵]
마야의 검은 오라 때문에 마야가 들고 있던 분홍빛 찻잔이 검게 변하며 부패돼 부서졌고 그 안에 남아 있던 홍차도 거무튀튀하게 변해서 아래로 쏟아졌다. 마야가 앉아 있던 의자도 사람이 사용하지 않은 채 몇 백 년 방치해 놓은 것 마냥 변해버렸다. 단순히 낡은 게 아니라 찻잔처럼 부패한 것이었다.
“죽음의 여왕의 손끝이 스치기만 해도, 숨결이 살짝 닿기만 해도 모든 것이 죽음에 이른다.”
마야의 모습을 보고 민혁이 ‘헬을 위한 기도문’의 한 구정을 읊었다. 그러나 그 말은 차분한 분노에 휩싸인 마야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제 3의 세계에서는 처음 뵙겠습니다, 로키님.”
“영생을 허락 받은 몇 안 되는 악마 중 하나, 어둠과 죽음이 스파이, 네르갈이군.”
“수식을 지나치게 길게 붙이셨습니다.”
“자네의 공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약소한 수식이지.”
마야가 검은 오라를 잠재우는 동안 민혁과 네르갈은 오랜만에 인사를 나눴다. 제 2의 세계에서 아주 가끔 네르갈이 로키의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악마족 중에서 신 로키와 친분이 있는 유일한 악마이기도 했다. 로키는 변신술의 귀재이기 때문에 스파이로서 손색이 없지만 오딘이 혼자 하기 무리한 일을 종종 시키기 때문에 헬에게서 네르갈을 빌렸었다.
“그래, 아스타로트가 데리고 있는 사병이 어느 정도지? 소문 만큼인가?”
마야의 목소리는 도저히 7살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낮고 무거웠다.
“하급 악마 두 부대와 반시 한 부대입니다. 소문보다는 적은 수입니다.”
악마족에게 한 부대는 지휘관 하나에 부관 하나, 병사 150명이다. 이 부대를 그대로, 여섯 부대를 뭉치면 한 군단이 된다. 헬 아래에 일곱 군단(여왕 직속 군단)이 있으니 아스타로트가 가지고 있는 하급 악마 부대는 헬 군단의 1/21 규모에 해당한다. 그리고 반시 한 부대는 지휘관 하나에 병사 30명이다. 그들은 물리적 공격과 방어를 할 수도 있지만 대체로 교란용이기 때문에 한 부대의 수가 그렇게 클 필요가 없다. 헬 아래에는 12부대가 있다.
“소문보다 적은 수? 사병치고는 너무 많잖아! 게다가 괴수 후작, 프르네우스가 아스타로트한테 붙어있으니 그쪽 병력도 무시 못해.”
프르네우스는 후작급 악마 중에서 대후작으로 불리는 바다의 지배자다. 다른 세계에 각각 그 세계의 바다를 통치하는 자가 있듯이 악마의 세계와 죽음의 나라의 바다는 프르네우스가 담당하고 있다. 괴수를 만들어 내는 재주가 있어 괴수 후작이라고도 풀리는데 해군의 창설자이자 500군단의 지배자라 그 권세가 실로 대단하다.
“해군 쪽이라면 레비아탄이 반 이상을 여왕님께 데려오지 않았습니까?”
“뭐, 베에모트가 데리고 있는 1100군단도 있으니까.”
주요 고관이 우트가르드 로키에게 붙어 있지만 주된 군사는 여전히 마야의 손에 있었다. 바알 아래의 지옥군 700군단도 마야의 의지에 의해서 싸우는 군대였다. 그래도 마야는 자신의 군대 일부와 몇몇 귀족급 악마들이 우트가르드 로키에게 넘어간 것이 분했다.
마야와 네르갈이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걸 다 들으면서도 민혁은 평온한 자세로 느긋하게 홍차를 즐겼다. 마야에게 악마족의 분열은 꼭 해결해야 할 중상에 해당하지만 민혁은 라그나로크에서 전혀 변수가 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군사가 얼마나 많든 상관 없었다. 상부의 머리가 얼마나 치밀하고 정확하게 굴러가느냐가 제일 중요했다.
“사병 세 부대 가지고 너무 열내지마. 어차피 아스타로트는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한다며. 프르네우스의 병력 역시 아스타로트의 움직임 따라 늘고 줄 수 있는 작은 변수에 불과하다고. 여왕이 그 작은 것 때문에 감정을 굴리는 건 보기 좋지 않아. …너무 괘씸하면 그냥 싹 쓸어버려도 괜찮지 않아? 혼자 할 수 있잖아.”
민혁의 말에 마야가 조금 차분해졌다. 사병……. 금지한 사항이긴 하지만 까짓것 3부대짜리 사병이야 위협거리가 못 되기 때문에 코웃음 치면서 넘어갈 수 있다. 아스타로트가 마야의 지배를 받으면서 사병을 거느린 것이었다면 다른 귀족들이 일찌감치 손봤을 것이다. 프르네우스는 권위와 작위에 맞지 않게 아스타로트에게 휘둘려서 레비아탄에게 병력을 대거 빼앗겼으니 대후작이라는 칭호는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문제는 그 적은 사병 수가 아니라 점점 교활해 가는 그 녀석의 두뇌야.”
아스타로트가 머리를 굴려봤자 진원과 민혁, 우트가르드 로키를 따라가지 못한다. 마야 역시 그에게 현혹될 일은 없지만 그녀의 측근들이 휘둘릴 가능성이 컸다. 작위 있는 악마라 해도 고작 아스타로트 때문에 벨제뷔트나 루시퍼를 움직일 수 없지만 그의 교활함을 고료하자면 최고위 악마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제가 조용히 제거하는 게 빠르긴 하지만 고위 악마들을 납득시킬만한 명분이 없으니 되레 제 편을 잃을 가능성이 더 커져버려요.”
“그러니까 지금 내 머리에나, 네 머리에나 그 녀석의 얼굴이 떠오르는 거잖아.”
죽음의 여신이자 니플헤임의 주인, 헬을 겁먹게 할 정도로 사악하고 날카로우며 도저히 파헤쳐낼 수 없는 생각들을 담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의 눈은 그녀의 심장이 크게 한 번 쿵 울리기에 충분했다.
마야는 로키가 제 2의 세계에서 악마족은 헬의 권한이니 자신이 아버지라는 이유로 그녀를 간섭하거나 그들에게 손대는 짓은 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라그나로크가 끝나서도 쭉 지켜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악마에 관한 지식은 다른 신들만큼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는데…… 누구를 어떻게 움직여야 할 지 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신이 두려운 존재인 것을, 마야는 민혁의 눈을 슬그머니 피했다.
“것도 그렇죠.”
너무나 사랑하는 아버지. 하지만 그만큼 두려운 아버지. 세쌍둥이가 가지고 있는 딜레마였다. 로키는 자식에게마저 어려운 대접을 받는 신이었다.
“여왕님, 그 분께는 제가 가서 전달하겠습니다.”
네르갈이 허리를 살짝 굽히며 말하는 중에 그 옆에 체이스 홀이 생성되었다. 그 곳에서 마야가 레이에게 준 리켄이 굉장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허겁지겁 빠져나왔다. 그의 왼쪽 뺨이 벌겋게 부어오른 것이 확연하게 눈에 띄었다.
“하급 악마가 여왕님 앞에서 꼴사납게 굴다니 버르장머리 없군.”
네르갈은 리켄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리켄은 그 시선을 무시하고 네르갈에게 까딱 고개 인사만 한 후에 마야를 향해 한 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예의 모르는 하급 악마라지만 리켄의 행동은 예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바쁘다는 걸 뜻하는 것 같았다.
“티르께서 우트가르드 로키에게 납치당하셨습니다.”
리켄의 이 한 마디가 그곳의 공기를 확 바꿔버렸다. 분위기가 뒤집히긴 했지만 민혁과 마야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아까의 대화의 연장선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스카디는 티르가 납치당한 장소에 있는 건가?”
“아닙니다. 티르님은 혼자 계시던 중에 납치당하신 겁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으면 하는데? 레이의 악마인 네가 어째서 인철 선배의 움직임을 알고 있는 거지?”
민혁은 리켄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리켄은 뭔가 찔리는 게 있는 것처럼 움찔 거렸다.
“실은 스카디께서 점괘가 좋지 않다며 어제부터 저를 티르님께 붙여놓으셨습니다. 티르께서 오늘 도장에 나가실 때 저도 따라갔는데 도중에 수상한 기척이 있어서 티르님의 명령에 따라 그걸 찾았습니다. 그걸 뒤쫓는 중에 티르님 쪽에서 우트가르드 로키의 마력이 느껴져 바로 돌아갔지만 이미 늦은 후였습니다. 티르님이 계시던 자리에 ‘티르를 빌려갑니다.’라고 적힌 쪽지뿐 이었습니다.”
리켄은 마야나 민혁에게 혼날 것이 두려워 몸을 잘게 떨었다. 하지만 둘은 여전히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민혁은 리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르갈. 너는 네 할 일 해.”
“네.”
마야의 명령에 따라 네르갈이 체이스 홀을 통해 자리를 떠난 후에 마야의 시선도 리켄에게로 고정되었다. 화났다거나 앞으로 혼낼 거라든가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냥 평범하게 쳐다보는 상이었다. 리켄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기 때문에 민혁과 마야의 표정을 몰랐다. 그들의 표정을 봤더라면 혼자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레이가 엄청 화가 났겠는걸?”
리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서 민혁을 올려다봤다.
“그걸 어떻게…….”
“그 왼쪽 뺨. 레이한테 맞아서 그렇게 된 거잖아.”
민혁은 그 정도는 쉽게 알 수 있다는 듯이 말했다. 리켄은 멋쩍어 하며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뺨을 문질렀다. 레이가 풀 스윙으로 휘둘러 때린 거라 저릿함이 꽤나 오래갔다. 붓기도 빨리 빠지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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