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1 어둠을 다스리는 보석
여전히 극북지역으로 향하는 리벤에게 길동무가 생겼다. 핀이 왕성으로 갈 것을 결심하고 당분간은 리벤과 같이 잭을 찾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리벤은 성가신 짐이 늘어난다고 싫어했지만 핀이 혼자서 왕성에 가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고집을 피웠다.
그들은 풀 향내 짙은 숲을 지나 도시에서 수소문해 보고 다시 인적이 드문 길로 들어갔다. 지금은 안개가 짙은 늪지대였다.
2-3m 앞까지 밖에 보이지 않는 저급한 시야와 잘못 디디면 깊게 빠지는 질 나쁜 발판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매 초마다 새롭게 주변을 경계해야 했다. 정신을 느슨히 풀었다간 놀랄 일이 속속 들이닥쳤다. 그 예로 갑자기 발 바로 옆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이 지나가기도 했다.
“나 방금 네 발 달린 뱀을 봤어.”
핀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그늘이 졌다. 자극이 조금만 더 쌓이면 졸도할 정도로 상태가 위태로웠다.
“도마뱀이겠지.”
“뱀만한 길이에 뱀의 몸매였다고. 그런데 발이 달려 있었어.”
“뱀의 변종이거나 도마뱀의 변종이거나 하겠지. 여긴 그런 곳이라고.”
“넌 어떻게 그렇게 태평하냐?”
툭하면 사라지는 잭 덕분에 클라마 왕국 전 지역과 주변 소국들을 샅샅이 돌아다녔던 리벤이다. 최소한 클라마 왕국에서 그녀가 안 가본 지역이 없었다. 기상천외한 생물들이 출몰하는 이 숲도 벌써 세 번째 방문이었다. 오랜만이라지만 적응력이 뛰어나서 숲에 익숙해지기 위한 시간이 필요 없었다.
“리벤. 물딸기 찾아왔어.”
윌이 산딸기처럼 작고 둥글게 생긴 새파란 물체를 한 팔 가득 가져왔다. 눈이 의심스럽지만 그것은 분명 자연 속에서 나는 식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가을하늘처럼 새파란 색이었다.
“특정 지역에서만 자란다는 희귀한 식물이잖아. 어떻게 이렇게 많이…….”
“이곳 슈베르츠-슈바르체(Schwerts-Schwarce) 숲이 물딸기의 서식지거든. 넓은 군락지가 숲 전체에 총 다섯 군데 있어.”
리벤의 파트너도 리벤을 부지런히 따라다닌 덕분에 이 숲을 꿰뚫고 있었다. 태어나고 4-5년 계속된 빛의 정령 고유의 나약한 성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어떤 괴생명체가 나타나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을 만큼 신경이 굵어졌다.
“너 이거 받아둬…… 뭐 하냐?”
핀은 물딸기를 한 움큼 내민 리벤의 손이 민망하게 신기한 생명체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것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몸을 움찔 거리며 혐오감을 드러냈다.
크기는 겨우 손바닥만 하지만 생김새는 긴팔원숭이와 꼭 닮았다. 하지만 파라냐의 이를 가진 몽구스의 얼굴과 뱀가죽 무늬와 흡사한 털 무늬가 이것은 원숭이가 아니라고 친절하지 못한 방법으로 가르쳐줬다. 독특한 외모 자체가 무례하리만치 불친절하다는 말이다.
“잼이랑 눈싸움하다가는 순식간에 잡아먹힌다.”
리벤은 핀의 귀를 잡고 질질 끌었다.
“저거 식인 동물이야?”
“정확하게는 육식 동물이야. 그리고 무리지어 움직이는 귀찮은 녀석들이라고.”
핀은 그제야 자신을 보는 험한 시선이 수십 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만 있어도 징그러운 것이 빼곡하게 모여 있으니까 속이 급히 울렁거렸다.
“일단 이거 하나 먹어.”
윌이 핀의 입 속으로 물딸기를 던져 넣었다.
어금니로 딸기를 씹자 말랑한 껍질이 툭 터지면서 계곡물과 흡사한 물이 입 안을 적셨다. 엄지 손톱만한 크기에 비해 속에 압축되어 있는 물은 한 모금 가득 나올 정도로 많았다.
“나 이거 삽화로만 봤었지 실제로 보고 먹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핀이 두 눈을 반짝이며 도가 지나치게 감탄했다. 감동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최저였던 사람이 아니었다.
“독 기운이 진한 곳에서 물딸기는 필수야. 물통은 뚜껑을 따는 순간 그 안으로 독기가 스며들지만, 물딸기 껍질은 독에 끄떡없기 때문에 물을 입 안에서 직접 안전하게 마실 수 있어. 그리고 물딸기의 과즙은 그냥 물이 아니라 유능한 해독제야.”
리벤도 물딸기를 입 안에서 터트려 먹었다. 독기 때문에 생긴 두통이 차츰 가라앉았다.
과육에 해독능력이 있었다면 몸으로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흡수력이 빠른 액체에 해독능력이 있기 때문에 독에 심하게 당한 것이 아니면 지금처럼 효과가 금방 나타난다.
“내 기억으론 교본에는 휴대하기 편한 물주머니라고만 적혀 있었는데?”
“구체적인 설명을 적기 귀찮았다고 하더라고.”
“하더라고?”
“네 스승 헤르겔 다르케스가 그 교본을 만들었거든. 지금 아카데미 등에서 사용하는 교본은 대부분 그 너구리 영감 작품이야.”
리벤은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서 무관심한 표정으로 대강 넘어가는 투로 말했다. 새로운 사실을 알고 가벼운 충격에 빠진 핀이 재밌는 표정을 지었지만, 리벤은 그 표정에조차 흥미를 갖지 않았다. 이미 에드워드에게서 똑같은 표정을 봤었기 때문에 두 번째는 유쾌하지 않았다.
“어떻게 제자란 것‘들’이 스승의 일을 그렇게도 모를까.”
윌이 허리에 손을 얹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냅 둬. 저자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훌륭한 교본을 제멋대로 사는 스승이 만들었을 거라고는 티끌만큼도 의심할 수 없을 테니까.”
“하긴. 본인한테 자기가 만들었단 얘기를 들었을 땐 나도 쇼크였어.”
리벤과 윌이 헤르겔에 대해 갖고 있는 인상을 99%가 능글맞고 답 없는 너구리 영감이었다. 언변술, 여자 등 모든 분야에 정통한 그의 심각한 마이페이스 성향을 함축하는 말이다.
“있지, 리벤. 얼마나 더 가야 이 숲에서 나갈 수 있어?”
클래이가 숨을 거칠게 쉬었다. 땅의 정령이나 보니, 독기가 옅은 땅이라도 그 땅을 계속 디디고 있는 것이 심신에 부담이 컸다. 근본적인 성향 문제라서 파트너 핀의 기력을 빌린다 해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정령마법이 아니면 통하지 않는 몸이기 때문에 물딸기 역시 소용이 없었다. 윌의 치료마법과 자신의 자정능력으로 버틸 뿐이었다.
“지름길로 가고 있긴 한데 아무리 부지런히 가도 달이 떴다 질 때까진 못 나가.”
“내일 나갈 수 있다고 쉽게 말해.”
“그게 아니야, 클래이-.”
윌이 등 뒤에서 클래이의 목을 끌어안았다. 기운이 없는 클래이는 일일이 그녀를 뿌리치지 않았다.
“숲의 출구에는 한밤중이면 도착해. 하지만 달이 떠 있는 동안엔 숲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
“보이지 않을 뿐이지 낮에도 달 자체는 떠 있잖아.”
클래이가 고개를 갸웃 했다. 물딸기에 감탄하고 있던 핀도 뒤늦게 숲에 의문을 가지고서 파트너와 똑같이 머리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에…… 그러니까…….”
윌은 리벤을 슬쩍 쳐다보며 도움을 구했다.
리벤은 풀이 자란 방향을 보며 방향을 계산하더니 서남쪽을 곧게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의 손을 따라갔다.
“저기로 가면 슈베르츠-하(Schwerts-H) 샘이 있어. 물딸기 군락지 중 하나고 숲을 열고 닫는 중추지. 그 샘에 달이 비치면 숲이 닫히는 거야. 만약 백월(태양 빛이 약해서 낮에도 보이는 흰 달)이 떠도 마찬가지야. 달이라 부르는 것이 샘에 비치느냐 아니냐로 숲의 개폐가 정해지는 셈이지. 계속 숲을 열어둘 심산으로 그 샘을 덮어버리면 영원히 숲에 갇히니까 허튼 짓은 안 하는 게 좋아.”
슈베르츠-슈바르체 숲은 희귀한 것이 많고 숲이 고유의 이름을 가진 것에 비해 세간에 알려진 바가 터무니없이 적었다. 리벤은 운 좋게도 스승 잭에게서 수많은 숲에 대해 배웠고 그 중 하나가 이 숲이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든 위험한 것을 교묘하게 피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갇히면 출구를 뚫어버리면 될 걸.”
“내가 클래이를 데리고 나갈 테니까 넌 여기에 하루 더 남아서 밤새도록 뚫어봐.”
리벤의 말에 의미심장한 기운이 농후했다. 핀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숲을 수 곳 돌아다녀봤지만 슈베르츠-슈바르체가 가장 비상식적인 곳이 아닐까 뒤늦게 감을 잡았다.
“숲 안에서든 밖에서든 힘으로 숲을 열려고 하면 그 자리에서 숲의 거름이 되. 아, 밖에서는 닫힌 숲이 안 보이는구나.”
“안 보여?”
“이 숲은 아주 특이해. 숲이 닫히면 숲 전체가 ‘슈바르체-아(Schwarce-A)’라는 아공간으로 변하거든. 그래서 달이 뜬 중에는 숲이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모래벌판만 보여. 만약 그 빈 땅을 지나는 중에 달이 사라지면 숲이 별안간 나타나는 재밌는 경험을 할 수 있어.”
리벤은 겁을 줄 생각인 건지 실제로 흥미가 깊은 건지 환하게 웃었다. 아직 자신이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호기심이 있는 건 맞았다.
“넌 단어를 좀 골라 써야해. 재밌는 경험이 아니라 순식간에 미아가 되는 무서운 경험이라고, 그건.”
핀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표정이 어두워진 것은 클래이도 마찬가지였다. 지상에서 숲이 사라지고 나타나는 현상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여하튼 숲에 실례되는 행동은 하지 말라는 거야. 고대 전설에나 등장할법한 자아가 있는 숲이자 살아 있는 숲에 가장 가까우니까.”
“크읏. 내가 여태껏 다양한 곳을 돌아다녀봤지만 여기만큼 별난 곳은 처음이야. 숲 속에 살고 있는 것들이나 대기를 지배하고 있는 독기나 숲의 개폐나 등등 평범한 사람은 1분 1초도 못 견디고 미쳐버릴 거야.”
이미 핀도 동요하고 있었다. 빨리 숲을 빠져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숲에 처음 발을 들었을 때보다 강해졌다. 숲에 대한 혐오감이, 독기에 괴로워하는 클래이에 못지않았다.
“겁 많고 쓰잘데기 없는 남정네들 같으니라고. 길동무가 아니라 짐짝이야.”
[퍽!]
리벤은 한심한 모습을 보기 싫어서 핀의 허리를 세게 걷어찼다. 그의 허리가 멋지게 뒤로 꺾였다. 아마 발로 차여서 아픈 것보다는 허리가 꺾인 쪽이 훨씬 아플 것이다.
“왜 차?”
“그냥. 네 면상이 마음에 안 들어서.”
“뭐가 어때서. 만년 진지한 표정일 순 없잖아. 가끔은 바보처럼 있어도 된다고.”
“내 앞에서는 하지 마. 같이 바보가 되는 기분이라 불쾌해.”
핀은 한 순간 리벤에게 자유를 뺏긴 기분이었다. 어른 앞에서 예의를 차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전우와 같이 있는 건데도 마음 놓지 못하고 표정에 긴장을 줘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문제는 상대가 다름 아닌 여걸 리벤이라서 말을 안 들을 수가 없었다. 같은 쥬엘 나이르지만 격이 달라서 핀으로서는 리벤의 명령조 발언에 거역할만한 힘이 없었다.
“인간으로서 감정에 충실한 게 어때서.”
풀이 잔뜩 꺾인 어린 소년처럼 입을 비죽 내밀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들은 리벤이 기억하는 지름길을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독가스 기둥이 어디서 솟아오를지 모를 위험천만한 곳에 말을 데려올 수 없었기 때문에 숲 너머 마을에서 말을 빌릴 것을 기대하며 지금은 일단 발품팔기에 전념했다.
쥬엘 나이트들은 물딸기를 정기적으로 하나씩 먹으면서 몸에 축적된 독을 중화한다지만, 클래이는 지옥의 늪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간혹 독기가 강한 곳을 지날 때면 전신이 시큰거려서 한 발짝을 떼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결국 해가 질 때쯤에는 핀에게 업혔다.
“두 시간 정도 더 가면 출구야. 덩굴나무와 바위로 막혀있겠지만 그 근처엔 위협거리가 없어서 편히 쉴 수 있어.”
“그래도 잠깐 쉬자. 신발 끈을 좀 고쳐야 할 것 같고.”
핀은 근처 바위 위에 클래이를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쭈그려 앉아서 달빛에 의지하며 신발을 고쳐 신었다. 잠시 신발을 벗는 사이에 발이 긴장이 풀려서 후끈거리고 발바닥이 못 밭을 밟은 것처럼 따가웠다. 걷는 중에는 종아리나 허벅지 근육이 아플지언정 발이 아픈 것은 느끼지 못했는데, 쉴 때면 걸었을 때의 통증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마냥 전신에서 발이 가장 괴로웠다.
“이 숲에서 한밤중에 아무데서나 쉬는 건 무모해. 여태까지 본 희한한 녀석들이 우리를 노릴 거야.”
“숲의 밤이 위험한 건 어디든 마찬가지잖아.”
“여기가 굉장히 특이한 곳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지?”
핀은 난생 처음 본 이상한 것들과 만났던 낮이 떠올랐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쳤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다.
“달이 뜨고 숲이 닫혔을 때는 여기에 사는 모든 것들이 자유롭게 사방팔방 뛰어 다녀. 누구한테 어떻게 당하는지 알아채기 전에 죽어.”
리벤은 전래동화를 좋아하는 꼬마를 달랠 때나 사용할 법한 말투로 핀에게 경각심을 다시금 일깨워줬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풀 너머에서 수상한 효과음이 들렸다.
“끼꾜꾜꾜 끼이- 끼꾜꾜.”
[부스럭 부스럭]
핀은 소리가 나는 정면을 두 눈 크게 뜨고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 보석 위에 슬며시 손을 대며 언제든지 무기화 할 수 있게 준비했다.
“이 소리는 낮에도 들었어.”
그믐에 가까운 밤이라 시야가 좁았다. 하지만 시각을 활용하지 못하는 만큼 청각과 촉각이 예민해졌다. 게다가 적당한 긴장이 신경을 세련되고 날카롭게 다듬었다. 날카로운 눈매며 꾹 다문 입 등으로 얼굴이 한결 좋아졌다.
“역시 전사라는 족속은 위기가 닥쳐야 제 구실을 한다니까.”
리벤도 언제까지나 여유만만하게 있을 수 없었다. 숲 속의 성가신 원주민을 빛이 부족한 적진에서 상대하려면 정신 바짝 차리고 상대에게 온 신경을 쏟아야했다. 이 숲에서는 윌의 빛조차 위협거리가 되기 때문에 숲에 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윌의 빛을 최소로 줄여야만 했다. 이 숲을 방문할 때마다 그랬지만, 위험천만한 곳에서 잠 한숨 못 자고 긴장 상태로 밤을 지새우는 것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끼이-.”
한 마리가 리벤에게 날아들었다. 리벤의 바로 옆에는 윌이 있기 때문에 그녀의 희미한 빛으로 녀석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손바닥만큼 작은 체구와 독특한 생김새. 낮에 핀과 눈싸움을 했던 잼이었다.
“끼기기기-.”
“끼꾜꾜 끼이-.”
여러 마리가 일제히 뛰어 날았다. 리벤은 미리 인디고 사파이어 플랑베르쥬를 손에 쥐고 있었다. 한 손 검치곤 검신이 길고 검치곤 날 모양새가 독특한 플랑베르쥬를 파도 모양의 날보다 더 유연하게 휘두르며 자신에게 겁 없이 달려든 작은 생명체들을 전부 제거했다. 아무리 몸집이 작아도 날카로운 이를 앞세우며 자신을 죽이려는 녀석들을 사정 봐줄 필요 없었다.
“정말 자비란 눈곱만큼도 없구나. 하긴, 여기서 자비를 운운할 때가 아니지.”
핀도 에메랄드 트라이던트로 자신을 노리는 조그만 것들을 멀리멀리 떨쳐냈다. 창은 손에 쥐고 휘두르는 무기 중에서 사정거리가 가장 길기 때문에 잼들이 가까이 오기 전에 미리 견제할 수 있었다.
“어째 쟤네는 밤에 봐도 징그럽냐. 질린다 정말.”
잼을 싫어하는 기색을 온몸으로 드러냈다.
“저 아저씨는 나이를 먹을수록 소녀다워지는 건 어째서지?”
“낸들 아냐?”
윌이 지적한 부분이야말로 리벤이 계속 물어보고 싶은 것이었다. 건장한 체격의 장정이 몸집에 안 맞게 성격이 나날로 소녀다워지는 건 보는 사람 쪽에서 견디기 힘들었다. 외모와 성격 사이의 균형은 진정 중요했다.
“윌. 클래이는 어때?”
“해가 지기 전에 사용한 치료마법이 마지막이었어. 나도 내 몸 지킬 만큼밖에 원소력이 남아 있지 않아서……. 클래이 거의 가사 상태야. 무척 힘들 거야.”
“솔직히 밤이라서 걱정했던 것이 습격보다는 너희들이었는데.”
정령이 무력해졌다고 해서 쥬엘 나이트가 약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파트너가 걱정되는 마음 때문에 싸움에 집중 못할 수 있다. 그래도 ‘기사’라 불리는 존재 중에서 대자연의 축복을 받은 쥬엘 나이트다. 최소한, 어떤 장애라도 극복할 수 있는 기백을 보여야 했다.
“힘을 많이 소모하겠지만 닫힌 숲에서 무사히 밤을 보내려면…… 역시 녀석을 부를 수밖에 없나.”
잼이 시야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제거하는 건 위험했다. 상대의 수가 수인 만큼 플랑베르쥬의 최장 사정거리를 최대로 활용해야 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적을 감만으로 상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소동 때문에 다른 것들도 몰려오겠어.”
핀의 짐작이 맞았다. 이미 다른 기이 생물체들이 근처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역시 여기서 빨리 벗어나려면 스프라이트의 힘이 필요해.”
스프라이트는 어둠의 상급정령으로 리벤의 계약정령 중 하나다.
“부를 거야?”
“불러야지. 쬐-끔 무리하면 부를 수 있어.”
“여기서는 정령계 문이 열릴 가능성이 반반인데.”
윌은 소환이 성공할지 확신할 수 없어서 인상을 찡그리며 난감해 했다. 전에 이 숲을 두 번 방문했을 때도 스프라이트 소환을 시도했었는데, 처음엔 성공했고, 두 번째엔 실패했다.
본디 계약정령은 정령계라는 이공간에서 불러내는 것이지만, 닫힌 숲처럼 특이한 이공간에서 정령을 부르는 것은 두세 배로 힘이 든다. 성공 가능성도 1/2내지 1/3으로 줄어든다. 정령소환이 도박이 되는 셈이다.
“어둠을 지배하는 왕이여, 그대의 권속이자 나의 동지를 이곳에 부르나니 그대의 은총을 함께 내리소서.”
리벤의 발아래에 스프라이트 소환진이 그려졌다. 하지만 주변이 어두컴컴해서 소환진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소환진에서 새어나오는 암기 때문에 리벤의 하반신도 흐릿하게 밖에 보이지 않았다.
소환의식에 시간이 걸렸다. 대지와 공기를 타고 퍼지는 수상한 마력 때문에 잼이며 기타 생물체들이 동요하고 숲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긴장상태가 됐다. 이 이상 숲을 자극했다간 리벤 일행이 숲의 위협을 받을 것 같았다.
“끼뀨뀨뀨!”
그렇게 열심히 제거했는데도 여전히 수십 마리나 남은 잼 떼가 리벤을 향해 달려들었다.
[휘아아악]
선수필승이라고, 잼들이 1초라도 빨리 움직였다면 리벤에게 부상을 입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프라이트 소환이 그들보다 빨랐다. 스프라이트의 검은 어둠이 잼을 모조리 삼키며 소환자 리벤을 지켰다.
“50% 도박 성공-.”
리벤은 의기양양하게 패자들을 쳐다봤다.
어둠속에서 주먹과 발로 두들겨 패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리벤이 계약한 스프라이트는 타고난 격투가 체질이라서 리벤의 보석과 동화하는 것보다 자신이 직접 날뛰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리벤의 탄생정령 윌보다 계약정령 스프라이트가 리벤 본인과 그녀의 보석들과의 동화율이 높다. 처음부터 높은 기록을 세웠고 리벤의 다른 계약 정령들과 비교해도 제일 높다.
“너 폐쇄된 이공간에서 정령을 소환하는 재주도 있었어?”
“어디까지나 도박이었어.”
핀은 트라이던트의 날을 아래로 내리고 긴장을 조금 푼 채로 어둠을 지켜봤다. 보이지 않아도 스프라이트가 위험물들을 빠르게 처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박력이 어둠 속에서 피부로 느껴졌다.
“이제 스프라이트를 앞세우고 가벼운 마음으로 전진하면 돼.”
리벤은 벌써 목소리부터 가벼워졌다. 보석도 일찌감치 거둬서 양 손이 빈손이었다. 그녀는 스프라이트가 만든 어둠을 꿰뚫어 보듯 지그시 쳐다보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무력해진 윌과 그로기 상태에 빠진 클래이에 비해 이제 막 정령계에서 소환되어 온 스프라이트는 오랜만의 전투에 한창 신이 났다. 자신이 어디로 불렸는지 파악하는 건 뒤로 미루면서까지 치고 박는 싸움을 맘껏 즐겼다. 부모의 통제에서 벗어난 어린 아이나 노예계약에서 풀려난 일꾼이나 감옥에서 탈출한 탈옥수라도 이처럼 제 세상 만난 것을 기뻐할 수 없을 것이다.
“리벤. 스피가 폭주하는 것 같은데?”
“저 정도는 괜찮아.”
“그 동안 쌓인 걸 원 없이 푸는 건 좋은데 저건 좀 심해.”
“괜찮아 괜찮아. 순전히 육탄전이라서 마법을 쓰지 않으니까 숲이 알아차릴 일도 없고 좋잖아.”
리벤도 구경보다는 제 손으로 직접 적을 쓰러트리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 스프라이트의 마음을 잘 이해했다. 그리고 마음 같아서는 윌과 클래이를 핀에게 맡기고 스프라이트에게 가세하고 싶었다. 하지만 간만에 바깥에 나온 기념으로 그에게 전부 양보하기로 했다.
스프라이트가 사방의 적을 차근차근 제거해 나갈 때마다 지독한 썩은 내와 피비린내가 짙어졌다. 쥬엘 나이트들과 탄생정령들은 긴 시간 현역에서 발 빼고 있었지만 구역질나는 악취 속에서 끄떡없었다. 은둔자로 돌아섰더라도 이런 냄새 정도야 어디서든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몸을 숨기며 살던 곳이나 발길 따라 지난 곳이나 그들을 위협하는 것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리 은둔생활을 선택해도 뼛속까지 전투본능이 박힌 태생적인 전사들이다. 그들에게 썩은 내와 피비린내는 본능을 자극하는 그리운 냄새에 불과하다.
“오랜만이야, 리벤. 반경 100m는 깨끗하게 청소했어.”
“고마워, 스프라이트. 육탄전에 기반한 암살은 여전히 최고야.”
리벤은 너무 오랜만에 불렀다고 구박 받기 전에 스프라이트에게 아낌없이 립서비스를 했다. 클래이를 부축하던 윌은 리벤의 뻔히 보이는 속을 알아차리고 풉하고 웃었다. 역시나 리벤의 속보이는 아첨을 알아 챈 스프라이트는 단숨에 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야-. 에르드퓨페-피르에르랑 클래이잖아. 오랜만이네. 클래이가 곤죽이 된 건 우리 철없는 윌 때문인 것 같군. 내가 대신 사과하지. 어리광쟁이를 넓은 마음으로 어울려줘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 신세 많이 졌어. 자, 이제 어른이 돼야지, 윌-오-더-위스프.”
계약자와 정령은 서로 닮아간다는데, 스프라이트의 언변술이 리벤 못지않았다. 리벤은 윌이 당황하는 모습과 그녀를 말만으로 압도하는 의기양양한 스프라이트를 번갈아보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내장이 계속 실룩거려서 배가 아프기까지 했다.
“리벤. 네 정령은 볼 때마다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 하는 것 같다?”
“뭐, 글쎄. 그럴지도 모르겠다. 자, 얘들아. 다시 위험해지기 전에 얼른 이동하자.”
그들은 어둠 속에서 최고의 힘을 발휘하는 스프라이트를 앞세우고 행보를 재개했다. 그는 독기에도 면역력이 강해서 부담 없이 움직이고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덕분에 달이 없는 낮보다 안전하고도 빨리 행진할 수 있었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보석전쟁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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