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보석전쟁록

한 달 간의 보석전쟁록 : D-20 조우하는 보석

★은하수★ 2013. 12. 10. 01:07

 

D-20 조우하는 보석

 

잭 세스턴 홀의 유일하지만 별로 머무를 일 없는 거처가 있는 르마인(Rmein) 숲. 그 직전에 있는 도시가 융르마인(Jungrmein)이다. 기구와 비행선 사업으로 유명하여 클라마 왕국 소속 도시지만 주변 소국들과 더 많이 거래하는 자유무역지다. 기구와 비행선이 발달한 덕분에 하늘을 통한 왕래가 자유로워서 도시의 절반이 거대 시장으로 발전한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클라마 왕국 내 수많은 도시 중에서 수도 다음으로 부유하다.

“여기 정말 오랜만이네.”

리벤 대신 윌이 허공을 향해 감탄사를 내질렀다. 이 둘에게는 르마인 숲이 지극히 어려운 장벽이던 시절, 1차 탈출 목표지점이 숲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융르마인이었다. 실력이 늘은 후로는 잭을 대신하여 융르마인에 생필품을 사러 정기적으로 드나들었다.

댈감, 식재료 등은 숲에서 충분히 조달할 수 있고, 책은 잭이 애초에 소장하고 있던 것이 도서관 수준이었다. 그러나 책이 아무리 많아도 새로운 지식에 대한 욕구가 있는 법이다. 또한, 한창 성장기였던 리벤과 깔끔한 것을 유달리 좋아하는 잭에게 옷 기타 개인 물품은 정기적으로 시장에서 사와야 했다. 그래서 리벤은 자신이 편하게 생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르마인 숲 탈출에 도전했다.

“여기가 극북지역만 아니었으면 자주 들렀을 곳인데, 아까워.”

“방랑객이면 한 번쯤 들를 곳이니까 너도 와봤겠네.”

“응. 기구를 대여하려고 두 번 정도.”

핀의 주 활동지대는 수도를 기준으로 서부와 서남부 일대였다. 그래서 유명 도시라도 정말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구태여 북부에서도 극북지역에 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내게 세상을 가르쳐준 제3의 고향인데, 8년만이다 보니 좀 생소하네.”

리벤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자유무역지의 활기가 폐부에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제3? 그러면 제1과 제2는 어디야?”

“제1은 태어난 곳, 제2는 르마인 숲.”

리벤과 윌이 동시에 북쪽을 쭉 뻗어 가리켰다.

르마인 숲과 융르마인이 극북지역이라지만 이 둘이 극북지역의 전부는 아니다. 클라마 왕국의 극북지역이란 북쪽의 파야 왕국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프라우르마인(Fraurmein)부터 르마인 숲을 거쳐 융르마인까지, 이 세 곳이 뿌리박은 지역을 뜻한다.

“북쪽……. 아, 너 파야 왕국 출신이지.”

리벤이 잭과 처음 만났던 12살.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이다.

클라마 왕국과 파야 왕국은 프라우르마인을 두고 전쟁을 했다.

파야 왕국은 강대국은 아니지만 군사력만큼은 상위 클래스에 속하는 소국이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금치 주세인 ‘소년병’을 5개 사단으로 데리고 있을 만큼 관리도 철저했다. 파야 왕국에서 소년병은 일회용 방패가 아니라 장래를 위한 어엿한 군사였다. 리벤도 소년병으로 발탁되었고 제4사단 소속이었다. 3살이 되자마자 부모가 그녀를 나라에 팔았기 때문에 부모 얼굴과 정체를 모르는 것은 당연지사요, 철들기 전부터 살인용 군사훈련을 받아서 살생에 대한 죄책감일 생기기는커녕 살생 자체가 당연한 일이 돼버렸다.

10살이 되면서부터 주변국들과의 자잘한 전쟁에 참가했다. 그런데 12살에 겪은 프라우르마인 전쟁은 이전 2년 동안 참전한 전쟁과는 비교도 안 되게 힘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쥬엘 나이트라서 스페셜리스트로서 최전선을 달렸는데, 전쟁에 익숙해진 어린 소녀의 눈에 프라우르마인 전쟁은 시작 전부터 파야 왕국의 패배가 정해졌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일방적인 패배.

그녀는 동료 소년병들의 시체 밭에 홀로 서서 큰 소리로 울었다. 어머니 뱃속에서 처음 나왔을 때처럼 주변 상관없이 양껏 울었다.

“당시 출전했던 소년병 3개 사단과 본부대 5개 사단 중에서 살아남은 건 나와 또 다른 쥬엘 나이트 한 명. 달랑 두 명 뿐이었지. 그걸 계기로 파야 왕국은 왕국 송두리째 휘청거렸고. 미친 듯이 울고 있던 나를 스승님이 찾아주지 않았다면 그 녀석처럼 엇나가며 살았을지도 몰라.”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악몽에 몸이 떨렸다. 그녀는 표정관리가 안 되는 얼굴을 오른손으로 슬며시 가렸다.

“너 말고 살아남았다는 쥬엘 나이트가 지금 어떻게 사는지 아는 거야?”

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그럼. 서로 이름을 바꾸지 않았고 보석과 정령을 아는걸. 단번에 알아볼 수 있어. 내가 소속했던 소년병 제4사단의 사단장 ―바라 슈.”

핀의 눈은 더 커지고 입까지 턱이 빠지도록 크게 벌렸다. 그만큼 충격을 주체할 수 없었다.

“스승님의 제자로 들어가고 나서 스승님을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두 번인가 마주쳤었어. 이미 그 때 서로의 과거를 묻어버리기로 했지. 엄연히 적이 되었는데 구태여 옛 동료의 잔정을 끄집어낼 필요가 없다는 자질구레한 현실이론인 셈이야.”

자신의 과거를 제3자처럼 감정 없이 술술 설명했다. 단순히 그만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는 깊이가 있었다. ―높은 리더십과 포용력으로 소년병 제4사단을 이끈 사단장과 사단 내에서 홀로 붕 뜬 존재였으나 모두의 시기와 부러움을 산 스페셜리스트. 그러나 지금은 ‘적은 적’― 어릴 적 사단에서 배운 것이 이럴 때 활용됐다. 혹은 세상사는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그 때 살아남은 패전병 두 명이 망명했다는 이야기랑, 그 중 한 명이 너라는 것까지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하필이면 다른 한 명이 네 전 상관이란 말이지?”

“그러니까 과거는 묻어버리기로 했다니까.”

리벤은 귀찮다는 듯이 핀의 시선을 피했다. 정령들은 자연에 동화되어 모습을 감추고 있는데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포이어 회일러가 다음번엔 널 상대한다고 예고했지만 역시 내가 가로채야겠어. 그 때 결착을 못 내서 찜찜하거든. 괜찮지?”

“맘대로 해.”

리벤은 핀이 쓸데없이 신경 쓴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원래 이런 자라는 걸 알기 때문에 길게 말하지 않았다. 망명하고 순식간에 잭의 제자가 되고 트리오가 되고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어, 소년병 시절의 일은 이제 정말로 별 거 아닌 과거가 되었는데 이 멋없는 청년은 왜 자신이 과거에 미련이 있다고 생각할까 하는 한탄을 속으로만 살짝 내뱉었다.

“사람 좋은 바보.”

그녀는 한숨 대신 아주 작은 목소리를 입 밖으로 냈다. 핀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아!”

별안간 그가 심장 놀랄 만큼 큰 소리를 냈다. 리벤은 주먹으로 그의 팔을 꾸욱 밀었다.

“너…….”

“나 르마인 숲에 들어가는 거 처음이야. 설마 슈베르츠-슈바르체처럼 별종은 아니겠지?”

“페리아 숲이랑 같은 수준이야. 제대로 된 문지기도 있어. 그러고 보니 문지기가 이름 없는 골렘이란 점도 페리아랑 같네.”

“그래? 그러면 돌아다닐만하겠네.”

전날 슈베르츠-슈바르체 숲에 된통 시달렸던 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포르포냐 가의 거점이기도 한 저주의 던전, 페리아 숲이 일반인에게는 지극히 공포의 대상이나 경험 좀 쌓았다는 쥬엘 나이트에게는 자극적이면서 흥미로운 곳에 불과하다. 그런데 슈베르츠-슈바르체 숲은 그야말로 별종 중에서도 별종.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운 악몽 그 자체였다. 그렇게 한창 시달린 후에 르마인 숲이 평범한 숲이 아니라는 점은 아쉬우나 페리아 숲과 같은 수준이기만 해도 기쁘게 반길만한 사실이다.

“흐-응. 특별한 숲이 편하잖아. 3-4일 헤맬 곳조차 숨겨진 길을 잘 파고들면 단숨에 돌파 가능하니까.”

잭 밑에서 독하게 큰 리벤다운 발언이었다. 핀은 방랑자를 자처하면서도 ‘안전한 길’을 추구하는 조용한 여행자에 가까워서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질색했다.

“저기, 핀.”

클래이가 그들이 지나갈 곳 몇 발자국 앞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의아해하면서도 불편해하는 오묘한 표정이었다.

“왕이 있는 것 같아.”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주변의 눈치를 살피기까지 했다. 클래이가 ‘왕’이라고 하면 땅의 정령들의 왕 ‘오리에드’였다.

“르파인 숲에 안 들어가도 되겠는데?”

“홀 어르신의 오리에드께 기척을 지우지 않아 감사하다고 절이라도 해야겠는걸?”

두 쥬엘 나이트는 클래이가 가져온 희망찬 단서에 숨김없이 기뻐했다. 그런데 잭이 워낙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변장술에도 탁월하기 때문에 이 이상 시간 끌 것 없이 클래이가 가리킨 곳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수색을 시작했다. 잭의 오리에드도 다른 정령을 감지했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융르마인에서, 유일 존재인 왕과 다르게 개체수가 많은 하․중․상급 정령들을 일일이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리벤. 너 에리얼(바람의 정령들의 왕)하고 계약했잖아. 부탁하는 게 빠르지 않아?”

“속편한 소리. 스승님이 아무리 방랑 중이라 해도 수도 사정을 모를 것 같아? 내가 왔다는 걸 알면 곧바로 튈 거야. 내가 윌한테 광역 스캔을 시키지 않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라고.”

클래이가 오리에드의 기척을 읽은 때부터 리벤이 윌과 클래이에게 신신당부했다. 눈치 빠른 잭에게 도망칠 틈을 주면 안 된다고, 오로지 눈과 귀로만 그를 찾으라고 거듭 주의했다.

“홀 어르신 찾기에 도가 텄구나.”

“전에는 그랬지. 8년 만에 페리아 숲 밖으로 나왔는데 제대로 포획할 수 있으려나.”

“스승을 상대로 ‘포획’이라니.”

“정확한 표현이야. 이보다 어울리는 말은 없어.”

리벤은 사방팔방 제각기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가능하면 빠짐없이 살피려고 노력했다.

175cm 정도의 키에,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오른쪽 뺨 위 사선 흉터, 겨울 늑대의 털과 꼭 닮은 천연 은회색 머리칼, 주로 망토 브로치로 달고 있는 샛노란 호박. ―그가 철저하게 변장하지 않았다면 이것들을 모두 갖춘 인물이 분명 눈에 띨 것이다.

“진짜 오랜만인데. 으-.

모두 흩어져서 리벤 혼자가 되었을 때, 왕성을 나설 때부터 담아둔 속마음을 드디어 입 밖에 냈다. 항상 스승을 찾아 돌아다니던 시절에는 그가 아무리 철저하게 변장해도 스승-제자의 유대감으로 바로 알아봤다. 양아버지-양딸 같은 관계이기도 해서 보통 스승-제자하고는 다르다고 나름 자신만만했었다. 그런데 역시 8년에 가까운 시간이 부담스러웠다. 한 번도 페리아 숲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잭의 흔적을 발견한 게 쌍둥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었을 즈음, 그가 아무도 모르게 선물을 두고 갔다는 것 뿐, 직접 보지는 못했다.

“나 진짜 한심한 얼굴이잖아.”

상점 유리창에 흐릿하게 비친 제 얼굴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조금은… 오랜만에 만나는 거니까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을 지도.”

“호오-.”

낯익은 중저음이 바로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상점 유리창에 낯익은 모습이 비쳐보였다.

“스승님?”

리벤은 그가 제 발로 자신을 찾아온 것이 두 번 다시없을 기적처럼 여기며 몸을 휙 돌렸다.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은회색 머리칼과 사선 흉터, 샛노란 호박을 확인하기까지, 정말로 그가 잭 세스턴 홀인지 의아해했다.

“르마인 숲에 첫 도전장을 내밀고 장렬하게 패배하여 길을 잃었던 때랑 똑같은 얼굴이구나.”

“스승님…….”

능글맞은 헤르겔과 전혀 다른, 온화하면서 근엄한 미소가 이제껏 쌓인 피로를 다 없애주는 듯했다. 또한 주름살이 늘은 것 말고는 크게 변하지 않은 모습을 보니 그리움과 반가움이 동시에 솟아났다. 자신이 정말 그를 만나는 걸 기대하고 있었구나라고 깨달았다.

“여어, 리벤.”

“오리에…드. 어…… 오랜만이에요.”

잭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리에드가 늦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자신과 같이 길을 거닐다가 잭을 찾기 위해 흩어진지 반 시간 밖에 안 된 동료들이 오리에드에게 양팔 가득히 안겨 있었다.

“저기, 스승님, 설명 좀.”

술래잡기 하다가 반대로 술래가 잡힌 듯한? 술래 숫자가 더 많아서 술래잡기라고 명명하기 애매하지만, 완전히 역할이 바뀐 지금 이 그림이 어색해서 바로 상황파악이 안 됐다.

“실은 오리에드가 선물이라면서 아드카스 군과 클래이를 잡아왔거든. 그런데 이들 이야기도 듣기 전에 곧바로 윌-오-더-위스프가 보이더라고. 혹시나 해서 클래이를 미끼로 던졌더니 아니나 다를까 걸려들더군. 아드카스 군의 클래이에게 들러붙는 윌-오-더-위스프라면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잖아.”

“스승님. ……. 오랜만에 거하게 낚으셨네요.”

“암. 아주 만족스러워.”

리벤과 잭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오리에드에게 붙잡힌 이들은 물고기 취급하지 말라고 화를 냈지만 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미소와 미소를 주고받다가 리벤이 먼저 눈을 내리깔고 머뭇거렸다. 잭은 다 큰 제자를 살포시 끌어안고 등을 다독였다.

“천하의 샤퍼 토드(Scharfer Tod, 푸른 사신)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들을 두고 세상으로 나왔다. 이건 분명 너구리 영감이 수도의 불길한 기운 때문에 트리오를 불러 모은다는 증거지. 아무리 그래도 다른 수 다 제쳐두고 나의 하나뿐인 제자를 부려먹다니 가서 수염을 죄 뽑아주겠어.”

리벤의 거친 말투는 잭의 영향이 틀림없다. 그녀는 스승의 팔 안에서 키득키득 웃었다. 이제서야 스승과 만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쌍둥이 앞에서만 보이는 상냥하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스승님.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요.”

 

 

 

 

 

★은하수★의 망상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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