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신의재림-두번째라그나로크(완)

신의 재림 : 제 9문 (3)

★은하수★ 2009. 7. 1. 17:02

미드가르드에서 검은 난쟁이의 나라로 이동한 후, 하피들을 처리하고 있던 진철은 등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검은 난쟁이들이 심한 장난꾸러기에 성격이 고약하다지만 자신들을 구하는데 몸을 아끼지 않은 진철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 온갖 약초를 동원해 간호했다.

“으음…….”

등 전체에 하피의 발톱 자국이 생기고 나서도 과다 출혈로 쓰러지기 전까지 묠니르를 쉴 새 없이 휘둘렀던 진철은, 쓰러졌다가 정신을 차리니 상처가 쓰린 건 둘째요 온몸이 근육통 대문에 난리도 아니었다. 사나흘 내리 잠도 안자고 계속 싸웠으니 신의 육체로 변해가는 인간의 육체에서 근육 조직 하나하나가 울부짖을 만 했다.

“정신이 드십니까?”

수염을 배꼽까지 기른 검은 난쟁이가 나무그릇에 물을 떠왔다. 진철은 양 옆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검은 난쟁이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꿀꺽, 꿀꺽. 고마워요. …지금 밖 상태는 어때요?”

“낭인낭인족까지 나타나서 더 혼란스러워 졌습니다.”

하피만 있었을 대는 검은 난쟁이 대 하피의 싸움이었는데 낭인족이 나타나자 싸움 양상이 복잡해졌다. 그런데 그 중에서 제일 약한 것이 검은 난쟁이니 부상자나 사망자 수가 급속하게 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낭인족이 세력을 넓혀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보편적으로 하피보다는 낭인족이 더 강하니까요. 이거…… 지원군이 필요하겠어.”

진원은 마력도 거의 바닥나고 체력도 몸을 일으켜 버티는 것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무한 체력, 방대한 마력의 토르라는 호칭을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하피가 나타나기 전에 엔트와 가고일을 다수 상대했던 터라 시답잖은 하피에게 등을 당했던 것이다.

[쿠구구구]

가까이서 큰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지 동굴 전체가 흔들렸다.

“여기 지하 동굴이죠?”

“네. 아마 지상에서 싸우고 있을 겁니다.”

“이거 미치겠네.”

하피에게 당한 것도 한심해 죽겠는데 아무 것도 못하고 피신해 있으니 자신에게 화가 났다.

[쿠광. 구구구구]

지상에서 한껏 싸움이 벌어지고 있으니 당장이라도 묠니르를 들쳐 메고 뛰쳐나가 모든 걸 평정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자신의 무능함을 적나라하게 말하고 있어서 주먹만 우드득 굳게 쥐었다. 검은 난쟁이들은 진철이 싸우는 모습을 가까이서나 멀리서나 봤었기 때문에, 아무리 부상당한 자라 해도 그의 힘에 휘말릴까봐 슬금슬금 거리를 뒀다.

“화났나봐.”

“싸우지 못하니까 그렇겠지.”

“다 나으면 얼마나 심하게 날뛸까?”

“아마 위에 있는 녀석들 다 죽을 걸.”

진철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곳에 앉아 있는 검은 난쟁이들이 진철을 보며 속닥거렸다. 딴에는 조심하려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겠지만 동굴이라서 소리가 울리고 울려 진철에게 똑똑히 들렸다. 진철은 그들의 말이 하나하나 다 맞으니까 더 욱했다. 체력이건 마력이건 둘 중하나만 좀 쓸 수 있을 만큼 된다면 주저 없이 밖으로 나갈 텐데 몸이 그저 그냥 쓸모없는 상태다보니 시간이 지나는 것만큼 짜증이 차곡차곡 쌓였다.

[구구구구구구]

[툭, 투둑, 투둑]

이번 진동은 유난히 크고 길어서 동굴 내 천장과 벽의 돌멩이가 조금씩 떨어졌다. 진철은 제 발 앞으로 돌멩이가 굴러가자 조금 걱정됐다.

“이 동굴, 무너지진 않을까요?”

“미스릴 동굴이라 괜찮아요. 여간해선 무너지지 않아요.”

진철의 옆에서 시중을 들던 검은 난쟁이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이만한 피신처가 없다는 걸 은근히 강조하는 듯 했다.

“미스릴이라…… 그래도 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광석 중에서 미스릴이 가장 단단하다지만 절대적으로 무적인 건 아니었다. 게다가 광물은 본디 제련을 해야 단단해 지는 것이지 원석은 곡괭이와 삽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약하다. 뭐, 미스릴은 캐려면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지만, 그래도 원석으로 둘러싸인 천연동굴이니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실정이었다. 동굴 속에서 일생을 사는 검은 난쟁이들이 침착하게 사태를 지켜보는 반면에 진철은 조금이라도 빨리 동굴에서 나갔으면 했다.

[구구구구]

[쿠광!]

[구구구구]

[투둑둑, 투둑]

동굴이 울리는 빈도가 잦아졌다. 지상의 싸움이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 강도로 싸울 수 있는 건 낭인족 대 하피의 싸움일 게 분명했다. 지상의 난동이 점점 거세지고 그에 따라 공포가 피부에 닿지 검은 난쟁이들은 조밀조밀 모여 서로에게 의지했다.

“제길…….”

“조금만 더 참으세요. 상처가 덧날지도 몰라요.”

진철의 시중을 드는 검은 난쟁이 두 명이 진철의 등에 있는 상처에 여러 약초를 짓이겨 만든 약을 발라줬다.

“읏.”

약의 쓴 물이 상처에 스며들자 소금물을 뿌린 것처럼 굉장히 쓰라렸다. 하지만 진철은 짧은 소리만 내고 이를 악 물며 고통을 참았다.

[구구구구구구]

[툭]

“아…….”

진철의 시중을 들던 검은 난쟁이의 머리로 주먹만 한 돌멩이가 떨어지는 걸 진철이 팔로 감싸듯이 막아줬다. 검은 난쟁이가 그대로 맞았더라면 머리에 꽤 큰 타박상을 입었겠지만, 근육으로 단단한 진철의 팔뚝은 조그만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검은 난쟁이는 기어들어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진철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누구냐!”

동굴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관계 외인이 억지로 들어오려는 듯 했다.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상대는 한 명 같았다.

“가서 누군지 보고 와 줄래요?”

“알겠습니다.”

검은 난쟁이 한 명이 입구 쪽으로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얼마 안 있어서 무장한 검은 난쟁이 다섯 명에게 둘러싸인 방문자와 같이 돌아왔다.

“토르님을 만나러 왔다는 데요?”

검은 난쟁이들이 억지로 방문자를 꿇어 앉혔다. 방문자는 난처해하면서도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왼손에 들고 있는 리라와 범상치 않은 옷차림새는 진철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기 충분했다.

“하하하하! 브라기! 위기의식이 없는 천진난만한 그 성격은 여전하군. 하하하!”

“토르, 그렇게 웃지 마세요.”

검은 난쟁이들은 진철의 대소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방문자가 최소한 적은 아니라는 걸 알고 무기를 내리고 그에게서 떨어졌다. 진철이 계속 웃으니까 브라기는 입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홱 돌렸다.

“너무 웃는 거 아니에요?”

“큭큭. 미안. 그저…… 누구도 아니고 브라기가 여기에 당당하게 나타날 줄은 몰랐거든. 정말 골 때리게 의외라서.”

“그렇다고 그렇게 웃을 것까지야…….”

늘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토르(진철)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평화스러운 브라기는 묘하게 어울리는 듀엣이었다. 브라기야, 신은 신이지만 아내인 청춘의 여신 이둔 덕분에 부수적으로 유명한 자라서 눈에 띌 듯 말 듯 하다. 그런데 그런 그를 신계에 당당하게 이끌어 내주는 자가 다름 아닌 토르다. 토르 입장에서는 토키 다음으로 귀여워하는 동료라고 할 수 있다.

“그래, 지상의 싸움판을 뚫고 날 찾아온 이유는?”

“발데르의 심부름이에요.”

브라기가 주머니에서 은사과를 꺼내 진철에게 내밀었다. 이둔의 금사과가 젊음과 김 수명을 유지하는 열매라면 난나의 은사과는 잃어버린 힘을 회복시켜주는-100%는 못 되지만- 열매다. 은사과를 받은 진철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이 심부름을 왜 네가 온 거야?”

“김리궁의 모든 신들이 바쁜 중에 유일하게 한가한 자가 저라고 하네요.”

“그게 음유시인 브라기의 본분이잖아.”

“그래서 잡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걸요.”

“어이……. 이건 잡심부름이라 하기엔 꽤나 중요한 심부름이야.”

브라기가 7살 이하 꼬마 아이처럼 방긋방긋 웃으며 말하니까 토르는 한심의 한숨을 쉬었다. 발데르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은사과를 보내준 건 고마운데 브라기를 보낸 건 상당히 의외였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리라 연주와 노래 그리고 수면 마법이 고작인 녀석에게 싸움판으로 심부름을 보내는 건 무모하지 않나 싶었다.

“저 위를 확실하게 쓸어줄 테니까 곧장 김리궁으로 돌아가.”

“그건 좀…….”

브라기가 또 다른 은사과를 꺼내며 난감해했다.

“또 누구한테 가야 하냐?”

“프레이르 한테요.”

“정말이지 이런 심부름을 왜 네가 하냐고.”

진철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꺾였다. 그러고 눈을 살짝 치켜뜨니 브라기의 왼손에 리라 말고 종이쪽지가 쥐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발데르가 브라기보고 아홉 세계를 순회하라고 시킨 모양이었다. 텔레포트 아이템인 구슬이 목걸이에 다섯 개 남아있는데, 김리궁으로 돌아갈 때 쓸 걸 빼면 앞으로 네 명을 더 찾아가야 하나 보다. 진철은 발데르를 향해 속으로 투덜대면서 은사과를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그럼 빨리 가.”

“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브라기는 목걸이에서 구슬을 한 개 떼 내고 손으로 부숴 프레이르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은사과를 다 먹은 진철은 묠니르를 쥐어들고 일어섰다.

“상처가 벌어질 텐데요.”

검은 난쟁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 땐 또 한 번 신세지지 뭐.”

진철은 시익 웃으며 묠니르를 어깨에 멨다. 슬슬 은사과의 약발이 돌자 마력이 체내에서 감질나게 흐르기 시작했다.

[구구구구구구]

“아, 한 번 제대로 놀아 드릴까.”

[쿠광! 구구구구]

[투둑, 투두둑]

“재촉하지 않아도 이제 나갈 거야.”

진철은 당당하게 동굴 입구로 걸어 나갔다. 검은 난쟁이들은 자동으로 진철에게 길을 열어줬다.

그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상의 낭인족과 하피가 몰살당할 거라 생각할까, 진철이 다시 불쌍한 꼴로 돌아올 것을 생각할까. 지금의 진철이라면 결과는 뻔한 게 아닐까.

지하 동굴 밖, 대지는 피와 시체로 뒤덮이고 수풀은 눈 씻고 찾으려야 찾을 수 없고 흙먼지가 안개처럼 뿌옇게 퍼진 지상은, 하피의 울음소리와 낭인족의 진격 소리로 시끄럽고 여기저기 뒤엉켜 싸우는 모습에 눈이 피곤할 지경이었다. 낭인족이 하피에 비해 수가 적지만 전혀 밀리지 않았다. 지상에 늘어가는 건 하피의 시체가 대부분이었다. 낭인족은 대개 맨손으로 싸우나 무기를 든 녀석들은 무법자가 되어 신나게 활보하고 다녔다.

“이제 정리해 볼까? 묠니르. 한 방에 쓸어버리자고.”

진철은 이미 거인을 대거 몰아낼 때의 위대한 토르였다. 그의 묠니르는 흙먼지 때문에 햇빛이 거의 없음에도 살기 만빵, 번쩍거렸다.

“흐아압!”

[쿠과과과과광!!]

“끼야악!”

“커걱!”

진철이 싸움판 가운데로 뛰어들며 묠니르를 크게 한 번 휘두르니 벼락이 싸움판보다 더 넓게 사정없이 떨어졌다. 철제 무기를 든 녀석들은 빠짐없이 다 죽었고 나머지도 대부분이 쇼크사로 사망했다. 운 좋게 살아남았다 해도 뇌사, 전신마비, 신체유실, 행동불능 등 정상인 녀석이 한 놈도 없었다. 이것이 뇌신 토르의 닥 한 번의 기합으로 인한 결과였다.

“뭐야-. 엔트랑 가고일보다 훨씬 쉽잖아.”

가고일이 워낙 힘이 넘치는 종족이니 한 방으로는 잘 안 죽고, 엔트는 식물로 분류되는 종족이라 벼락이 그다지 통하지 않았다. 일일이 묠니르를 휘둘러 쳐 죽이거나 트윈 엑스로 사정 불문, 난도질을 해야 했다. 그러니 낭인족과 하피 같은 평범한 종족은 훨씬 상대하기 쉬웠다. 물론 진철이 팔팔하다는 같은 조건에서 말이다.

진철은 시체더미를 헤집으면서 숨이 붙어 있는 것들을 묠니르로 한 방씩 차례차례 처리했다. 시체 입장에서는 잿덩이가 되는 게 낫지 묠니르에 맞아 추한 꼴이 되는 건 평생 수치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진철에게 시체를 온전한 모습으로 남겨달라는 주문은 통할 리 없다. 신들린 무사-그가 ‘신’이지만- 마냥, 상처가 터져서 덧나건 전혀 상관하지 않고 운 좋게 살아남은 것들을 친절하게 손수 헬에게 보내줬다.

“역시 별 것도 아닌 것들이었어.”

시체로 뒤덮인 대지 면적 측정 불가, 그 대지를 덮고 있는 시체 수 역시 측정 불가. 진철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것들을 죽 둘러봤다.

“좋아, 좋아. 으읏!”

등의 상처가 터지자 양 무릎을 꿇으며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은사과에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까지 있다면 필시 최상의 열매가 되겠지만 그런 능력을 가진 열매 자체가 존재하지 않은 게 유감이었다. 식물의 여신 난나가 만들어 봤다가 너무 맛이 없어서 폐기 했었는데, 맛은 둘째 치고 능력만 좋다면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보는 진철이었다.

“끼유우-.”

상공에 레드 드래곤 한 마리가 원을 그리며 날았다.

“토- 르-.”

레드 드래곤을 타고 있는 건 흰 로브를 입은 선우였다. 진철이 묠니르를 높이 쳐들고 붕붕 돌리자 레드 드래곤이 시체 대지 위로 사뿐히 착지했다.

[철퍽]

선우는 흰 로브와 부츠에 피가 튀건 말건 지상으로 뛰어 내리더니 진철에게로 또르르 달려갔다. 진철이 인사하려고 손을 드는데 가볍게 무시하고 진철을 휙 돌려서 등의 상처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마에 혈관이 삐죽 튀어나오는가 싶더니 진철의 오른쪽 정강이를 온 힘을 실어 찼다.

[퍽!]

“아! 어, 어이.”

“이 상처로 싸웠단 말이에요? 브라기한테서 다쳤단 얘기를 듣고 바로 왔는데 그새를 못 참고 일을 벌여욧!”

선우는 진철의 무식한 행동에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선우는 제대로 열받은 상태이건만 진철은 자기보다 한참 어린 선우가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아무리 화를 내도 새끼 고양이가 냥냥거리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이 정도 가지고 뭘.”

“가. 만. 히. 있. 어. 욧!”

“네…….”

진철은 선우가 치료 마법을 사용하는 동안에 꼼짝 않고 끝나길 기다렸다.

선우는 원래 노른 중 한 명이라 치료 마법을 할 줄 모르지만 지금은 ‘헬’로 돌아가 있는 마야나 어린 애들과는 잘 놀아주는 민혁에게서 틈틈이 배운 덕분에 구급 반으로 전장에 나갈 수 있게 됐다. 드래곤의 수장으로서 그들을 이끌고 싸울 수 있지만 자신이 직접 할 수 있는 걸 찾다보니 이렇게 된 것이었다.

“드래곤 영지는 어때?”

“각 당주들만으로도 충분히 정리할 수 있게 됐어요. 나머지 드래곤은 일부 골라서 저처럼 구급 반으로 뛰게 시켰어요.”

“뛰는 게 아니라 나는 거지.”

[퍽!]

“아야-.”

“재미없는 농담은 사절이에요.”

치료를 끝낸 선우는 진철의 답지 않은 개그에 주저 없이 일격을 가했다. 선우가 진철보다 작고 약하긴 하지만 같은 곳을 두 번이나 차이니 꽤 아팠다. 진철은 맞은 곳을 슬슬 문지르며 천천히 일어서는데 멀리서 낭인족이 사정없이 달려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처리해, 리슈.”

레드 드래곤은 높게 날아오르더니 낭인족 무리를 향해 브레스를 무차별 난사했다. 화구가 터지고 대지가 타들어가는 소리 속에서 낭인족의 비명소리나 함성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역시 위대한 피조물이야.”

진철은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먼 곳의 불 쇼를 감상했다.

선우는 진저리나게 본 광경이라 딱히 눈길을 주지 않았다. 대신에 시체와 피의 벌판을 둘러봤다. 누가 봐도 ‘토르의 작품이네.’라고 할 정도였다. 시체가 좀 깔끔하다 싶으면 상대 종족에게서 미리 살해당한 것이었다.

“상처 보니까 하피한테 당한 거던데 어쩌다가 그랬어요?”

“다른 것들 상대하고 나서 힘이 딸렸거든.”

진철은 솔직 쌈박하게 대답했다. 다른 이가 같은 대사를 하면 궁색한 변명 같을 텐데 거짓말을 못하는 진철이 하니까 따로 태클 걸 필요를 못 느꼈다.

그래도 혼자 고생하는 무모한 모습이 한심한지, 안쓰러운지 선우는 진철을 아니꼬운 눈으로 흘겨보다가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드래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진철은 그것도 귀여워서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도록 비비듯이 쓰다듬었다.

“뭐에요?”

선우는 두 손으로 머리를 정리했다. 진철 만의 애정표현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딱히 화내지도 못했다.

“여긴 말이야, 다른 데보다 유난히 타 종족 이동이 많아. 워프가 시도 때도 없이 열려서 탈이야. 혹시라도 여유만만하게 시간 때우는 녀석이 있으면 이쪽으로 보내 줄래? 그렇다고 브라기는 보내지 말고. 아무튼 난 텔레파시도 못 하고, 직접 워프를 하기엔 여기가 너무 긴박해서 말이지.”

“알았어요. 대신 상처 방치한 채 싸우지 마시고요.”

“응.”

진철은 선우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인지 자신을 믿으라는 뜻에서 인지 최대한 활짝 웃었다. 선우는 그 미소를 믿고 레드 드래곤에 올라탔다.

[우잉]

어디선가 워프가 열리고 다량의 마력이 등 뒤에서, 양 옆에서 감지됐다. 워프가 여러 곳에서 동시에 열린 모양이었다.

“조심해서 가. 어이, 드래곤. 귀한 몸 잘 모시라고.”

레드 드래곤이 공중으로 오르고 선우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데몬과 포이즌 좀비가 떼거지로 득실거렸다. 워프에서 쏟아져 나오는 그들은 대지를 천천히 뒤덮어 나갔다. 진철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생지옥일 게 분명했다.

“마야… 헬의 도움 없이는 택도 없겠어. 테다스헤임으로 가자. 요르문간드를 통해 헬을 불러야겠어.”

선우에게도 텔레파시 능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드래곤의 수장으로서 용언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능력은 쥐뿔만큼도 없었다. 지금 성가시면서 대단하다면 대단한 상황에 빠진 진철을 위해 헬을 부르러 전속력으로 날아갔다. 진철이라면 그 정도 시간은 충분히 벌어줄 거라 믿고서.

 

“미치겠네. 진짜 싹 비웠어.”

민혁은 지금 우트가르드 로키의 아지트를 뒤지는 중이다. 뭔가 단서를 얻을까 해서 찾아가 봤는데, 결계가 없어서 쉽게 들어갔더니 책이며 약재 등 필요한 물건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찾아올 걸 알고 미리 싹 다 챙기고 도주한 유령 회사의 사무실을 보는 것 같았다. 흔적들을 보아하니 아지트에 사람이든 뭐든 드나든 지 일주일은 족히 됐다. 우트가르드 로키가 일찍이 아지트를 버린 것이었다.

“프리그는 정말로 걸어서 돌아다녔나 보네.”

아지트를 뒤지기 시작한 건 진원의 명령이 있어서였다. 프리그의 다리에서 수 개의 긁힌 상처와 멍, 물집 등을 발견하고, 프리그가 혹 며칠 동안 걸어서 방황한 건 아닌지, 그렇다면 프리그가 언제 우트가르드 로키에게서 빠져나온 건지 알아내기 위해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이건가?”

프리그가 보관(?)되어 있었을 법한 유리관을 찾아냈다. 내부의 물기가 완전히 말라 있었고 에너지 보급도 끊긴지 꽤 돼서 그저 텅 빈 통에 불과했다. 관 근처에 물기와 먼지가 엉겨서 생긴 발자국이 있었는데 크기가 대충 프리그의 발 크기와 맞았다.

“여어, 리켄.”

리켄이 공중으로 소환됐다. 최근에 계급이 두 단계나 상승해서 전보다 날개도 폼나게 커지고 옷도 멋스럽게 단정했다.

“이 발자국이 언제 생긴 건지 읽어 봐.”

사물의 기억과 자취를 역으로 읽는 능력은 악마 족 중에서도 일정 계급 이상인 악마만 가능했다. 리켄이 지금 딱 그 계급이라 효율은 좀 떨어질지 몰라도 민혁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은 했다.

“벌서 9일 된 발자국입니다.”

“9일? 아지트보다 더 일찍 정리됐다는 얘기잖아. …아니지, 여기도 그쯤에 같이 철수 됐을 수도 있어.”

민혁은 다른 흔적을 찾기 위해 바닥이며 벽, 가구의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 작은 것이라도 좋았다. 뭔가 건져낼 수 있는 게 걸리길 바랐다.

리켄도 다른 물건의 기억을 읽으며 민혁을 도왔다.

“주인님, 여기에 또 발자국이 있습니다만.”

“어디?”

“출입구입니다.”

리켄의 말대로 아지트의 출입구 문지방에 물과 먼지가 섞여 생긴 발자국이 있었다. 처음 들어올 때 그냥 지나친 모양이었다.

그 발자국은 역시나 프리그의 것이었다. 유리관에서 출입구까지 발자국이 몇 개 보이지 않았는데 먼지에 덮여서 그렇다기보다는 뭔가에 쓸려서 없어진 것 같았다. 민혁이 아지트에 들어갈 때부터 줄곧 공중부양을 하고 있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바닥의 흔적들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프리그가 여길 나간 다음에 누가 여기서 이것저것을 건드렸다… 라……. ‘그녀’일 수도 있고…….”

프리그가 우트가르드 로키의 아지트에서 벗어난 지 9일이 됐다는 걸 알았으면 밖에서 프리그의 흔적을 찾아봐야겠지만 민혁은 그보다 우트가르드 로키가 여기서 뭘 했을 지가 더 궁금했다.

“여기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읽어 볼까요?”

“아니, 여기선 왠지 탐정 놀이를 하고 싶어. 네가 읽어 버리면 너무 싱겁잖아. 넌 밖에서 프리그의 이동 경로를 찾아 봐.”

“알겠습니다.”

민혁과 리켄이 따로 각자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프리그의 발자국이 지워지고 나서 먼지가 엷게 쌓인 터라 쓸린 자국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아지트가 비워진 후 쌓인 미량의 먼지를 치울 필요가 있었다.

“십 윈드.”

실바람으로 아지트 내부 곳곳을 한 번 훑어내고 바람에 쓸린 먼지를 모아 밖으로 버렸다. 손가락 휘두를 필요 없이 마력을 컨트롤하는 잔재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간단 먼지떨이였다. 완전히 청소하진 못했지만 덕분에 젤이 쓸린 채 굳은 자국이나 작은 그을음 자국을 찾을 수 있었다.

“우트가르드 로키가 담배를 피진 않을 테고.”

주먹만 한 크기의 타원형의 그을음에 가장 먼저 손이 갔다. 언뜻 미세한 열기를 느낀 것 같아 다시 손끝을 가운데에 슬며시 대봤다. 아주 여리게…… 마력을 가진 온기가 느껴졌다. 아직까지 이 정도가 남아 있다면 자체 마력이 대단한 물건이 올려 져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코팅된 목재책상에 가맣게 흔적을 남긴 건 마력 때문이 아니었다.

“설마 이게 흐시온체셔일까?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스쿨드도 모를 것 같고. 아무튼 성가신 녀석이야. 이런 걸 모으기나 하고.”

말만 ‘성가신’이지 얼굴은 완전히 즐기는 표정이었다. 뒤통수 때리는 골치 아픈 일일수록 더 의욕이 생기는 것 같았다. 아니, 꼬투리가 생기면 잡고 늘어지고 틈이 생기면 그걸 억지로 벌리는 게 사신의 본성일 지도 모른다.

“하? 이게 뭐야.”

아지트를 완전히 비운 건 아닌 것 같았다. 필요 없는 건 그냥 내버려 뒀는지 책장이 군데군데 찢겨져 나간 파에드니리아가 벽장 구석에 엎어져 있었다. 민혁은 잔 먼지를 털어내고 나서 책장을 촤르륵 넘겨봤다. 집중적으로 찢겨진 곳은 세 군데고 한 장씩 찢긴 곳도 있었다.

“헬한테서 악마의 파에드니리아를 빌려 비교해 봐야겠어.”

우트가르드 로키가 준비한 것, 준비하고 있는 것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민혁이었다. 또 다른 게 없나 하고 둘러보는데 밖에서 건물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트가르드 로키의 아지트가 은근히 번화가와 가까워서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분명하게 들렸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차례차례 들리자 민혁은 파에드니리아를 워프를 통해 김리궁의 임시 거처에 던져 놓고 밖으로 나갔다.

조그맣고 못생긴 코볼트들이 꼬물꼬물 돌아다니면서 자기보다 거대하게 생긴 건 전부 때려 부쉈다. 그 때문에 부상당하거나 사망한 인간이 한 둘이 아니었다.

세계가 혼란스러워지면서 인간들도 호신용 무기 중 금지된 것들도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됐는데-예를 들면 장검이나 총기류 등- 그 덕분에 초창기보다는 피해가 덜 했지만 그래도 역부족이었다. 타 종족과 인간 간의 근본적인 근력차이 등등은 줄일 수 없었다.

“리버스 니들 샤워.”

땅에서 수천 개의 장침이 솟구쳤다. 모두 코볼트를 꿰뚫고 하늘로 솟은 후에 소멸됐다. 민혁의 마법 한 방에 그 지역의 코볼트를 전부 처리했다.

“이런 잡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자기 보호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미드가르드를 지키느라 김리궁 외에는 다른 지역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이 일이 아주 단순 노동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무기를 직접 쓰는 형이 아니라 마법형이라서 순식간에 보이는 전부를 해치우니 재미도 없었다.

그 때 마침 민혁의 무료함을 달래줄 무리가 워프를 통해 등장했다. 말의 몸통에 인간의 상체, 전갈의 꼬리와 새의 날개를 가진 이영물(異靈物), 파 빌 사그였다. 본디 아공간에 봉인돼있는 피조물인데 세계가 정상이 아니다보니 봉인이 풀려버린 듯 했다.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라 등장부터 공포분위기를 끌고 왔다.

“하……. 이런. 하늘을 다 뒤덮을 정도라면 수백만… 인가? 쿡. 이 일대를 전부 날려버리지 않을 수 없겠어.”

전투력이 생긴 거에 비해 별로라지만 꼬리의 독은 전갈류 독 중에서 최강이다. 그리고 머리도 좀 좋은 편이라 연계 공격으로 당할 지도 모른다.

“공중전이 주를 이룰 것 같은데 섀도우 테크닉은 못 쓰겠군.”

민혁이 엘리멘탈 프린트와 엘셀 암렛을 이용해 마력을 증폭시키자 파 빌 사그 무리가 반응을 보였다. 원래는 생체 반응에 따라 움직이지만 민혁의 마력이 워낙 강하다보니 반사적으로 의식이 집중된 것이었다.

“자. ‘놀아주세요.’하면서 꼬리를 흔들어야지. 그래야 착한 아이란다. 안 하는 나쁜 아이에게는 벌을 줘야겠지? …프라임 메테오!”

민혁은 꽃이 만발할 것만 같은 고품격 미소를 지으면서 불에 휩싸인 거대 운석 덩어리 수백 개를 마구잡이로 떨궜다. 파 빌 사그의 무리 곳곳에 구멍이 생기고 지상은 반 이상…… 거의 초토화 됐다. 지상 생존자는 분명 ‘제로’일 것이다.

“오베르튜레는 화려할수록 좋아.”

[슈웅, 슝, 슝]

[스윽]

[츄악]

민혁을 향해 달려드는 파 빌 사그 열 마리를 민혁이 애용하는 다크 헐버트가 한 번에 두 동강냈다. 동시에 피가 터져 나오고 지상으로 허무하게 추락했다.

파 빌 사그가 상대라면 접근전은 좀 위험할 텐데도 민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덤비라면 덤벼라. 민혁은 상대가 누군 인지조차도 신경 쓰지 않았다.

창조될 때부터 아공간에 봉인된 채 갇혀 있어서 ‘신’과 ‘실력 차이’라는 개념이 없는 파 빌 사그는 그저 단순하게 동족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분개해서 민혁을 향해 살기며 공포를 집중했다. 수백만의 무리라지만 신보다 서열이 낮은 피조물. 사신에게 위협을 가할 정도가 못됐다.

되려 민혁이 사신의 붉은 눈에서 핏빛을 번뜩이며 사방으로 압도적인 마력과 절대적인 살기를 내뿜으니 파 빌 사그들이 행동을 일제히 멈췄다.

“이게 절대적인 차이라는 거야.”

파 빌 사그가 유사신족급 피조물이라 하지만 신족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상대가 로키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수백이라는 순자는 처음부터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파 빌 사그는 본능 자체에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는 능력이 없고 오로지 돌진 뿐이라 민혁에게 압도당해 움츠러든 것도 잠시였다.

[그아아앙!!]

몇 마리가 굵은 울음소리를 내자 주변 것들도 따라했고 점차 퍼지면서 수백만 모두가 저음에 파장이 긴 소리를 냈다. 저음이긴 해도 성량이 상당치라서 공간 자체가 진도 7의 지진처럼 흔들렸다.

“공간 경계.”

민혁은 자신을 여유롭게 지금의 공간에서 분리했다.

고층의 건물은 무너져 내리고 땅은 금이 가고, 지반이 약한 곳은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시커먼 구덩이로 내려앉았다. 거대한 날개로 공중에 떠 있는 파 빌 사그는 공간이 어떻게 일그러지든 그저 파괴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지 날씨가 변할 때까지 울음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별안간 태풍이 오겠군.”

흰 구름이 군데군데 떠 있던 푸른 하늘이 시커먼 먹구름으로 잔뜩 뒤덮이고, 뺨을 가볍게 스칠 정도 밖에 되지 않던 바람은 무너진 건물의 콘크리트 덩어리를 맘대로 굴릴 정도로 강해졌다. 이 바람에서도 파 빌 사그는 안정적으로 중심을 잡고 공중에 떠있었다. 그들의 독꼬리는 끝부분이 점점 붉어지더니 독이 제대로 차올라서 위력이 강해졌다.

이제 벼락이 내려치고 비가 지면을 뚫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쏟아지면 인상적인 장면이 완성될 것 같았다. 날씨가 험악해 질수록 이성은 줄어들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법. 싸움이 본능인 자들에게는 축복 같은 날씨일 것이다.

“로키님.”

당분간 아공간 감시를 맡게 된 헬이 파 빌 사그 쪽의 아공간에 이변이 생긴 것을 알고, 니플헤임을 믿을 만한 최상급 악마와 마족들에게 잠시 맡긴 뒤 부리나케 민혁이 있는 곳으로 왔다.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게 하늘을 새까맣게 덮은 수백만의 파 빌 사그인 건 당연했다.

“어서 와. 축제를 알리는 분위기로썬 제격이지?”

“농담할 때가 아니에요. 벌써 아공간 내의 모든 파 빌 사그의 봉인이 풀렸어요.”

[휘익-!]

걱정 만발의 헬의 말에 민혁은 휘파람으로 대답했다. 아이네도 제멋대로고 우트가르드 로키도 꽁꽁 숨어서 무서운 일을 꾸미고 있으니 이젠 웬만한 일에는 걱정도 초조함도 느끼지 않았다.(원래 그런 성격이지만) 그에겐 그저 유쾌한 스릴에 불과했다.

하지만 니플헤임의 지배자이자 죽은 영혼의 여왕인 헬은 사태의 심각성에 심장이 반쪽이 되 버릴 것 같았다. 이곳에 있는 파 빌 사그는 아공간 안에서 바둥거리고 있는 수천만의 파 빌 사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파 빌 사그의 봉인이 모조리 풀렸으니 아공간이 한 번 만 더 열리게 되면 죄다 자유롭게 활개치고 다닐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멸종되는 종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파 빌 사그의 봉인을 푼 녀석이 따로 있기라도 한 거야?”

아이네를 염두하고 한 말이었다. 지금의 아이네라면 선·악·정의 등을 모조리 무시하고 뭐든 다 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이들의 봉인은 저절로 풀린 거에요. 위그드라실의 힘으로 봉인돼 있었던 터라 아이네라고 해도 건들지 못해요.”

헬은 민혁의 질문 의도를 눈치 채고 그에 맞춰서 대답했다. 아직 안정을 찾지 못해 목소리가 여리게 떨렸다.

“흐응. 그렇단 말이지?”

태풍이 몰아치듯 엄청난 비바람이 그 일대를 지배했다. 파 빌 사그는 계속해서 낮고 깊은 톤으로 울었다. 점차 지대 전체가 아래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땅 속으로 꺼져서 모두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민혁은 결계 안에서 무표정으로 파 빌 사그가 하는 짓 전부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오른손을 살짝 쥐며 입술 높이까지 들었다. 중지에 껴 있는 반지의 흑수정에 가볍게 입을 맞춘 다음 팔을 자연스레 앞으로 뻗었다. 마력이 점차 흑수정으로 모이고 민혁을 보호하던 결계의 범위도 처음보다 세 배 가까이 되도록 커졌다.

“나의 부름에, 나의 이름에 따라 대답하는 어둠의 왕이여. 그대의 주인 로키가 명하노니 이 모든 것들을 그대의 망토자락으로 덮어다오.”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를 소환하는 주문임을 안 헬은, 민혁의 결계에서 나와 따로 결계를 만들고 상황을 지켜봤다. 사신 로키가 아르카네를 부르는 일이 좀체 없기 때문이었다.

정령왕이 인간형일 때 대체로 키가 큰데, 아르카네는 검은 망토를 입고 큰 낫을 든 채 그 큰 키를 자랑하며 민혁의 뒤에 얌전히 나타났다.

정령왕을 소환하고 그와 계약하는 일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지만 사신 로키는 어둠의 정령의 주인이니 정령왕 아르카네도 쉽게 소환하고 쉽게 명령을 내렸다. 그래도 정령왕이라 마력을 많이 소진했다.

아르카네의 힘 때문에 파 빌 사그가 뒤덮고 있는 일대 전체가 지독히 어두운 암흑에 감싸이자 파 빌 사그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울음소리가 멈추자 지상의 변화도 태풍과 같은 날씨도 점차 잠잠해졌다.

민혁은 깊게 한 번 숨을 쉰 다음에 조용히 속삭였다.

“섀도우 테크닉.”

[푹!]

[츄악!]

[쿵쿵쿠구구궁!]

이 소리들이 동시에 일련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나서 피비린내가 역겹도록 강하게 코를 찔렀다.

민혁이 아르카네를 보내자 주위가 다시 환해졌다. 하늘은 처음처럼 흰 구름 몇 점 분인 푸른 하늘을 빛냈고 바람도 살갗을 살짝 건들 정도로 부드러웠다.

피비린내 때문에 소매로 코를 막고 있던 헬이 지상을 내려다 본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헉 소리가 절로 났다.

파 빌 사그 때문에 밑으로 무너진 도시, 그 위에 수백만의 파 빌 사그 시체가 대지 대신이 됐고, 파 빌 사그의 피가 대지를 붉게 적셨다. 정확하게 말하면 시체가 피에 잠겨있었다. 살아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이 일대를 장악했던 것은 1분도 안 됐다. 그 짧은 순간에 수백만의 파 빌 사그가 몰살됐으니 헬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르카네의 어둠은 내 그림자나 마찬가지야.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알 수 있고, 섀도우 테크닉으로 정확하게 공격할 수 있지. 대량 학살 방법으로 이보다 좋은 것도 없는데 마력이 좀 많이 들어서 말이야.”

민혁은 파 빌 사그의 시체 밭을 쓸모없는 장난감처럼 내려 봤다. 곧 시선을 돌려서 호나한 표정으로 헬을 쳐다봤다.

“지옥의 불로 아랫것들을 좀 치워줄래?”

“네. 그러죠…….”

헬은 데스 홀을 크게 한 번 휘둘렀다. 파 빌 사그의 시체를 따라 푸른 지옥의 불이 퍼져나갔다. 지옥의 풀은 파 빌 사그의 시체뿐만 아니라 그의 피, 무너진 건물 등 대지 모두를 천천히 삼켜 ‘재’라는 흔적조차도 남기지 않았다.

민혁은 그 모습을 천천히 감상했다.

“아공간에 있는 건 진원이 형을 불러서 처리해. 난 봉인 마법엔 소질이 없거든.”

민혁은 자기가 할 말만 하고 헬이 다른 말을 꺼내기 전에 워프를 통해 우트가르드 로키의 아지트로 돌아갔다.

안타깝게도 방금 전 일로 우트가르드 로키의 아지트도 무너져 있었다. 외벽 조각이며 잔해를 들춰내면서 뭘 찾는 것도 힘들겠거니와 찾아낸다 해도 멀쩡한 상태일 거라 기대하기 힘들었다. 민혁은 짧게 두 번 혀를 찼다.

“파에드니리아를 건진 걸로 만족해야겠군.”

그 순간 민혁은 아차 싶었다. 헬에게 악마족의 파에드니리아를 빌려달라고 부탁하는 걸 깜빡했던 것이다.

“쳇. 루시퍼나 바알을 매수해야 하나.”

함부로 해선 안 될 말이 민혁의 입에서 거리낌 없이 술술 나왔다. 최상급 악마족의 이름이 존칭 없이 막 불리는 거며, 심지어 그들을 ‘매수’한다니 사신다운 말이지만 사신이라도 해도 괜찮은 말인가 싶으나 본인은 그쪽에 대해 별 자각이 없었다.

“주인님.”

심부름 보냈던 리켄이 돌아왔다.

“어때?”

민혁은 표정에서 감정을 완벽하게 가렸다. 리켄은 그저 민혁의 시종악마. 포커페이스를 꿰뚫어 보기엔 아직 미숙하여 주인의 표정 변화를 보지 못했다. 그저 시정답게 일의 경과나 완수를 보고하고 다음 명령이나 합당한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미드가르드의 한 바닷가에서 프리그님의 반지를 찾았습니다. 여기서 날아가도 두 시간 걸릴 거리를 맨발로 걸어서 가셨더군요. 김리궁으로는 정령의 힘으로 이동하셨습니다. 제가 알아낸 건 이것 정도입니다.”

“수고했어.”

민혁은 수정이 박힌 반지를 받은 후 리켄을 향해 손등이 보이도록 손을 내밀었다. 리켄은 순순히 검지의 반지로 돌아갔다.

리켄이 가져온 수정 반지는 빛의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반지로 본래 오딘의 것이었다. 정령 소환물 중에서 민혁이 가지고 있는 흑수정 반지와 쌍벽을 이루는 상위 아이템이다. 오딘의 물건을 어떻게 프리그가 가지고 있었는지는 관심 없었다.

프리그가 발견된 곳은 아스가르드인데, 빛의 정령이 이동형 정령도 아닌데다가 소환자나 소환 정령이나 김리궁까지 갈 마력이 못 돼 중간의 아스가르드에 도달한 듯싶었다.

“프리그도 어지간히 생고생했군.”

바지 주머니에 반지를 집어넣고 김리궁으로 돌아가려다가 니플헤임의 입구로 텔레포트했다. 나스트론드까지 들어가고 싶었지만 괜히 일이 생길까봐 헬의 영토 최외각까지만 간 것이었다.

니플헤임은 늘 어둠이 깔려 있어서 섀도우 테크닉을 부담 없이 쓸 수 있었다. 그림자로 악마족의 거처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루시퍼를 찾았다. 리켄은 최상급 악마를 직접 만날 정도의 급이 아니기 때문에 민혁이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신의 육체라면 악마족의 영지에 맘대로 드나들겠지만 신화(神化가) 덜 된 인간의 육체라 혹시 육체가 부식될까봐 참았다.

“찾았- 다.”

“아주 당당하게 휘저으시더군요, 로키.”

“흐응. 벌써 온 거야?”

민혁이 그림자를 거두자마자 루시퍼가 민혁의 눈앞에 나타났다. 최상급 악마라 외모도 훤칠하고 복장도 고급스러우면서 깔끔했다. 날개는 펼치면 멋있겠지만 마법으로 감추고 있었다. 어른 손바닥만큼 넓은 원형 황금 펜던트가 두꺼운 사슬에 꿰인 채 루시퍼의 가슴 위에서 반짝거렸다. 그 사슬 목걸이는 대법관 루시퍼의 상징이었다.

“텔레파시를 보내면 될 걸 왜 디펠헤임을 혼란스럽게 하시는 겁니까?”

“나름 조심했는데.”

민혁은 자신이 미소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애교스런 말투와 아이 같은 눈으로 루시퍼를 대했다.

“얼른 용건이나 말씀하시죠.”

루시퍼에게는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헬의 은혜로 장대한 수명을 누리고 있는 최상급 악마들은 모두 라그나로크 전부터 존재했던 터라 그 중 한 명인 루시퍼도 사신 로키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악마족을 정리하고 진정으로 지배한 건 헬이지만 그 전에 악마족의 관리를 맡았던 게 로키니 최상급부터 상급까지는 예의상 로키에겐 머리를 숙였다.

헬에게 악마족에 대한 권한이 넘어간 다음에는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악마족을 빼내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을 뿐더러 유별나게 친한 루시퍼와 바알을 사적으로 부르는 일도 헬의 허락 하에서 했고 그마저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와 비교해보면 이번 일은 무단침입이었다. 그래도 루시퍼는 ‘로키’니까 사소한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보지도 못했고 연락도 못했지만 그 이상으로 친분이 쌓여있다는 증거다. 피보다 붉게 빛나는 사신의 눈과 가슴의 황금 펜던트처럼 찬란한 금빛의 루시퍼의 눈이 서로를 거부감 없이 바라보는 것도 그들의 친분을 증명했다.

“헬이 악마족을 쇄신했다는 얘길 들었어. 덕분에 마족까지 정리됐다지?”

“아, 그 일. 두 녀석이 옹케 도망갔지만 그 정도야 저희만으로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헬의 힘을 빌린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입니다.”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 헬이 악마족에 손대는 건 당연한 거야.”

루시퍼는 인간의 육체에서 로키의 본위기가 술술 풍겨지는 것에 살짝 놀랐다. 말투도 암기도 모두 옛날의 로키 그대로라 외모가 달라도 거부감이 없었다. 처음부터 거부감이 없었지만 그래도 재차 느낀 사실이었다.

“이 시국에 안부를 물어보러 온 건 아니겠죠?”

“응. 파에드니리아를 좀 빌려줘.”

머뭇거림 없이 뻔뻔하고 당당하게 부탁하니까 루시퍼가 약간 벙- 했다.

“지금 뭘 말했는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내가 누군지 알잖아.”

민혁이 씨익 웃자 루시퍼는 오른손을 살짝 지끈거리는 이마로 가져가 조심스럽게 꾹 눌렀다.

“제가 자식은 없지만 애물단지 자식 상대하는 기분을 알 것 같습니다.”

루시퍼는 알고 있었다. 파에드니리아를 빌려주는 일이 그리 어려운 건 아니지만, 안 된다고 거절해도 민혁은 분명히 끝까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빌려갈 것이다. 민혁 또한 알고 있었다. 루시퍼가 어쩔 수 없이 파에드니리아를 빌려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둘 다 헬에게서 잔소리를 들을 것이란 것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