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0 사람을 사냥하는 이유
오늘이 방학식인데 어제 학교에서 갑자기 사라지고, 오늘 무단결석해 버렸으니 담임이 뭐라고 할까? 어차피 개학식까지 살 수 없는 수명이니까 상관없긴 하다. 그냥 병원 갔으려니 하겠지. 친구들 중에도 내가 몸이 허약하다는 건 다 알고 있어도 수명이 지독히 짧다는 건 류등 밖에 모른다. 그야말로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사라지기구나.
현무 제 2성에 아무 무리 없이 들어와서 그저 푹 쉬었다. 따끈하게 목욕을 하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저녁밥도 거르고 거의 15시간은 잔 것 같다. 천에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지만 조만간 재로 변할 내 육신은 휴식만을 원했다. 우리 집에서는 있을 수 없는 아침상을 구경하고 나서 어제와는 다른 말끔한 정신으로 내가 잤던 방과 성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는 중이다. 동?서양의 고전이 제대로 섞인 듯 한 분위기면서도 고대 중국풍이 진하게 보이기도 하다. 이 정도로 감상은 끝.
“현무 사당은 제 1성에 있어서 못 보여드리는 게 아쉽지만 서고는 제 1성 못지않게 훌륭하니 한 번 들려보시죠.”
“네. 안내해주세요.”
이 자색 긴 머리칼에 얇은 흰 비단을 숄처럼 두른 수호령은 주(珠)라고 한다. 각 성마다 두 명의 수호령이 있는데 각각 성의 외부와 내부를 지킨다고 한다. 현무 제 2성에서는 천이 외부 수호령이고 주가 내부 수호령이다. 내부 수호령은 주로 성수의 잡무를 많이 돕는다는데 천 만만치 않은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여기 있는 책은 모두 현무님과 그 아래 수호령들만 읽을 수 있게 주술이 걸려있습니다.”
침실과 멀지 않구나. 하. 책마다 주술이 걸려있다니 난 아직 못 읽겠네.
“성 자체도 다른 성수나 기타 등등의 것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데 책도 일일이 주술을 걸면 귀찮지 않아요?”
“침입이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중요한 일부 문서만 주술을 걸면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금방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에 주술을 거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친절하고 정확한 설명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이해하기 쉽고 알아듣기 편한가. 기도 제대로 된 스승 노릇을 하려면 이런 걸 배워야 한다. 아, 그러고 보니까 기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날 찾고는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면서? 류등도 내가 주작과 같이 가버렸단 이야기를 성에게 하고 심하게 혼나지는 않았을까? 류등은 스승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일 뿐인데.
“빙황 기가 신경 쓰이십니까?”
[흠칫!]
내가 아무리 표가 잘 난다지만 설마 날 보지 않은 상대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티가 날라고. 아니면 주는 상대를 보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나? 정말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거렸다.
“성수가 성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건 후계자 수업을 받을 때뿐입니다. 현무 정님은 어머님이신 선대 현무, 현무 희님의 의지를 이어받으셔야 합니다.”
저 고운 외모에 군교관식 말투라니, 쬐끔 무섭다. 지금까지 정황으로 봐서 내가 기와 같이 있었던 것이 그닥 바람직하지 않은 거란 건 알겠다. 기가 그동안 내게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는 건 눈치 채고 있었으니까. 반증을 해 줄 사람이 없어서 아무 말도 안 했던 것뿐이다.
“그렇다고 쳐도 전 곧 죽을 목숨이에요.”
“육신은 사라지겠지만 혼백은 계속 살아 있지 않습니까? 현무님의 혼백은 성수가 될 수 있을 정도의 고밀도, 고순도 령입니다. 성수 중에서 종종 스스로 육체를 버리는 성수가 있을 정도로 성수에게 육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럼 뭐야……. 시한부면서 시한부가 아닌 거잖아. 평범한 사람들은 내가 죽었다 생각해도 난 계속 현무로 남는 거니까 나한테는 나쁠 게 없잖아. 으음. 잠깐만. 나를 죽이려는 성수가 있었다는데 그건 내 혼백까지 깨끗하게 없애버린다는 건가? 무섭군.
“저기, 주. 자룡이 절 죽이려고 했었다는 데 그건 제 령을 소멸시킨다는 건가요?”
뭐지…… 이 머뭇거림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바로바로 대답해 줬었는데.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은데 말이야.
“네. 맞습니다. 그런데 자룡 예(曳)님이 주작 문(刎)님에게 저지당하자 대신 저주를 걸었습니다. 현무님의 육신과 혼백이 모두 소멸하도록…….”
그래, 그래. 결국 난 시한부라는 거구나. 육체가 죽을 때 혼백도 같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도록 저주가 걸려있다라……. 대체 몇 가지 주술이 나한테 걸려있는 지 원. 알고 보니까 내 인생도 참 파란만장하구나.
“하지만 다른 성수들과 수호령들이 저주를 푸는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주는 내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있을까? 조금만 더 참아 달라니… 약 3주 정도 남은 내 목숨에서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릴 시간을 찾아낼 수 있을까? 내가 덜컥 죽어버리면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한 자리가 텅 비어버리는 꼴이 될 거다. 성수끼리 파가 갈려서 싸우고 있는 통에 한 자리만 비어도 손실이 크겠지. 안 그러면 내 저주를 풀기 위해 용 쓸 이유가 없다. 아무튼 날 위해서는 아니라는 거니까 난 될 대로 되라지 식으로 굴러다닐란다.
“저주는 둘째 치고 제 기억과 혈에 걸려있는 봉인은 풀 수 있는 건가요?”
“네. 청룡 지(砥)님이시라면 풀 수 있습니다. 곧 청룡을 다시 만나게 되실 테니 걱정 마세요.”
내가 청룡을 만난 적도 있었나? 엄마가 성수였으니까 내 기억이 봉인되기 전에 이 성수, 저 성수를 다 만나봤겠지. 그러면 우리 집에 특이한 손님들이 많이 왔었을 텐데 아빠는 알고 있을까? …윽, 아빠는 내가 외박한 줄 알고 있을 텐데.
주는 천이 불러서 잠깐 밖으로 나갔다. 서고에 책이나 문서는 많은데 내가 볼 수 있는 것들이 없다. 볼 수 있다 해도 다 딱딱한 내용들만 있겠지. 방방마다 다녀보면 뭔가 재미있는 거나 흥미로운 걸 찾아내겠지.
서고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걷고 있다. 초상화라고 할 수 없지만 성수의 본 모습이 그려져 있는 그림들이 복도의 벽에 걸려있다. 이름이 써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림만으로는 어떤 성수인지 전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성수도 본 모습을 모르니까 내가 그것들을 봤는지 안 봤는지 조차 모르겠다. 사람들은 성수의 상상도를 가지고 연구를 한다.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도. 교과서에서 본 그림과 복도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분위기가 확연하게 다르다. 성수의 종류가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림의 질이랄까 풍겨지는 포스랄까 그런 게 다르다.
큰 성에 혼자 이렇게 있으려니까 무료하고 심심하다. 주작도 그랬고 수호령도 그랬지만 성 안에만 있으려니까 지루하다. 안에 주도 없겠다 몰래 나갔다 올까? 주변에서 기와 성만 만나지 않으면 되는 거니까 크게 잔소리 듣지 않을 거다. 물론 기와 성은 날 찾고 있겠지. 하지만 다른 성수의 성역을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하니까 이 근처에만 있으면 괜찮을 거다.
“화상첨로.”
성의 북문은 해무사와 통하니까 동문으로 나갔다. 최대한 수호령들에게 들키지 않게. 동문 밖은 완전히 산자락이다. 나무와 풀, 바위가 주변 풍경의 전부다. 성 안의 공기도 나쁜 건 아니지만 역시 산 속 공기가 제일 편하다. 풀 향도 나고……. 겨울인데 풀 향이 난다니까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겨울 산에는 쌓인 눈 아래에 풀이 돋아 있기도 하다. 여긴 대부분 활엽수라 나무의 모양새가 화려하지 않지만 줄기와 가지의 자태를 그대로 볼 수 있어서 나름 풍취가 있다. 내가 이런 것들을 감상하면서 걷다니 정말 죽을 날이 가까운가 보다.
……살기!
밖에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귀찮은 일에 휘말려 버리냐. 이 감은 내가 처음 해무사로 가던 날 도중에 느낀 것과 같다. 분명히 그 때 나와 유린의 목숨을 노리던 귀신이다. 나를 금세 알아차리고 재빠르게 움직인 모양이다. 여긴 해무사와 좀 멀리 덜어진 산 속인데 여기서도 만났으니……. 아무래도 이 귀신은 이 산 전체를 배회하면서 이렇게 가느다란 실을 덫으로 쳐 놓나 보다.
[휘이잉]
겨울에 걸맞은 칼바람이 불고 있다. 성 안에 있다가 무작정 나온 터라 옷이 두텁지 않다. 그래서 바람이 옷 틈새로 쉽게 들어와 온몸을 휘감고 체온을 떨어뜨렸다. 이거 곤란하게 됐네. 체온이 내려가면 근육의 활동력도 같이 떨어지는데.
[휭]
[사락]
옷이… 바람 때문에 찢어졌다. 내 왼쪽으로 부는 칼바람을 지나쳐 간 짧은 바람은 칼바람도 가를 정도로 빠르고 강했다. 오른쪽 팔뚝 부분의 옷이 찢어졌는데 다행히 살까지 찢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틈새로 찬바람이 들어가 살이 더 에려졌다. 이대로 더 있다가는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갈지도 모른다.
“호상첨로.”
아…….
“화상첨로.”
성으로, 성으로 들어가지지 않는다. 지금 내가 귀신의 덫에 걸려있어서 그런가? 제길, 실에다가 바람. 까딱 잘못 움직였다가는 토막시체가 돼 버릴지도 모르는데 이걸 어쩐다. 천이나 주가 오길 기다리는 것도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그 둘 중 하나라도 도착하기 전에 상황 종료가 될 듯한 기분이 든다. 귀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이 살기로 귀신의 표정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시간 끌 여유 없는 표정이 머릿속을 맴돈다.
[휭]
이번에는 왼쪽 허벅지다. 천천히 통증이 전해지는 걸 보니 베였나보다. 크. 상처에 찬바람 맞으면 상당히 따가운데. 읏. 오른쪽 옆구리. 허벅지 상처에 정신이 팔린 도중에 또 다른 공격을 받았다. 실이 없으면 도망이라도 쳐 볼 텐데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니까 은근히 짜증난다. 으으, 추워. 체온이 떨어져 얼어 죽기 전에 근육의 약화로 심장이 멈춰 죽을 것 같다.
이 산에서 조난 사고가 그렇게 많더니 이 귀신의 짓이었구나. 깔끔하게 토막 난 시체들. 그래서 살인귀가 사는 산이라 불리며 찾아오는 이 없는 산에 속한다. 그나마 해무사 때문에 간간히 사람들이 오고 가지만 한 달에 한두 명 꼴로 사람들이 죽어간다. 안 좋은 취미야…… 살인…….
“아이야, 걱정 마라. 네 심장은 무사할 테니까.”
하늘하늘한 선녀 옷 같은 흰 의상에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의 여인. 이런 옷을 입고 있다면 죽은 지 수백 년은 된 듯하다. 그동안 이 산에서 버티고 있었다니 요력이 생길 만도 하다. 얼굴은 희고 곱다. 뭐 핏기가 없어서 희게 보이는 거겠지만 인상 자체가 거북스런 인상은 아니다.
“날 죽이면 너 역시 무사하지 못할 거야.”
나름 으름장을 놓았는데 저쪽에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뭐 이런 계집이 있나 싶을 거다. 아니, 수백 년 동안 나 같은 인간을 몇 번 봤는지도 모른다. 이 귀신의 손에 몇 천 명의 목숨이 지상에서 사라졌을 텐데……. 혹여나 그 억울한 목숨들을 위로하는 게 해무사라면 모순이 아닐까? 성수의 성을 숨기는 곳인데 거기서 귀신에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애도한다니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다. 내가 혈이 봉인 되지 않고 현무로서 힘을 쓸 수 있다면 성 근처먼저 깨끗하게 청소할 거다.
“육체는 죽어도 혼백은 살아 있지 않느냐. 그러니 나에게 네 심장을 넘겨다오.”
아무리 그래도 어느 인간이 죽는 걸 바라겠냐고.
“두 눈 똑바로 뜨고 내 심장이 네게 먹혀들어가는 걸 봐야 하냐?”
“말이 많구나.”
[휘이잉]
치사하게, 정말. 으… 추워. 바보 같이 귀신의 덫에 걸려서 이게 무슨 꼴이야. 바람은 더 차가워지고 주변의 실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이런 걸 보고 사면초가라고 하는 거야. 아니, 지금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에도 이상한 거나 생각하고 말이지. 살아야 한다. 며칠 못 사는 목숨이지만 그 며칠 꼭 살아보고 싶다. 나 스스로는 인정하지 못하고 있지만, 현무라고 불리는 입장에서, 성수가 귀신의 손에 죽다니 지나가던 유령이 비웃을 일이지.
“정말로, 날 죽이면 너도 죽어. 해무사의 수호령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최대한 인상을 험하게 짓고 귀신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런데 귀신은 겁먹긴커녕 나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비웃기까지 한다.
“오호호호. 수호령의 존재를 아는 걸 보니 성수의 제자구나.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보라 해. 선대 수호령이었던 이 자(紫)님께.”
선대 수호령? 그러면 이 귀신이 예전에 해무사의, 현무 제 2성의 수호령이었어? 그런데 지금 왜 여기서 이런 추잡한 짓을 하고 다니냐……. 그리고 내가 성수와 관련돼 있는 인간이란 걸 알았으면 좀 풀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칫, 그럴 생각이 전혀 없나 보군.
“짤렸구나. 아니, 파문당했구나.”
[짝!]
하. 하. 왼쪽 따귀를 제대로 맞았다. 그만큼 제대로 찔렸나 보군. 하얀 귀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기체면 관리를 할 줄 모르는 분이구나. 솔직히 타인의 뺨을 이렇게 쉽게 손대는 것은 품위 있는 행동이 아니다. 어쩌다 파문을 당했을지 뻔하다. 경솔한 행동이 자신의 목을 조른 것이다. 쯧. 처음에 수호령이 된 것만 해도 기적이다.
“난… 표(彪)님을…… 표님을 끝까지 모셨어. 그런데 희님이 날 버렸어. 그 희, 그 애송이가!”
귀신이 이미 이성을 잃고 흥분한 상태니까 내가 여기서 좀 움직여도 실이 내 살을 파고들 일은 없을 것 같다.
[짝!]
표정을 보아 하니 한 대 맞고 정신이 좀 되돌아온 것 같다. 옛 생각에 너무 흥분했어. 정말 선대 수호령이 맞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끝없이 추잡하고 추잡하다.
“아무리 그래도 희님은 선대 현무야. 네 상관인 성수였어. 엄마에 대해서 그딴 식으로 얘기했다간 아주 골로 보내버릴 줄 알아!”
나도 답지 않게 순간적으로 욱해버렸다. 하지만 죽은 이를 욕되게 할 순 없다.
“엄마? 엄마……. 그래, 그래. 희님이 남긴 현무의 핏줄. 성수의 제자가 아니라 성수였어.”
혼자 열심히 궁시렁 거리는데 미안하지만 바로 면상을 대고 말하는 거라 다 들리거든.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게 내 목숨을 줄여버리지 않을까 싶다. 자기를 내버린 성수의 딸인데 곱게 살려 놓아줄 리가 없지. 표정도 벌서 비열함과 환희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데 무사하길 바라면 완전 도둑놈 심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엄마는 이 귀신의 행적을 알고 있었을 텐데도 왜 내버려뒀지? 사람들이 죽는 걸 두고 봤다는 말인데…….
“그래도 엄만 널 여기에서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줬잖아.”
“성수처형관께서 어떻게 비천한 혼백에게 손을 대시겠습니까. 현대 현무님. 현무는 대대로 성수 유일의 성수처형관이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응, 모르고 계십니다. 아주 날 대고 놀려먹는 말투다. 내 상태를 봐서 현무의 힘을 쓸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을 텐데, 하긴 그러니까 더 쉽게 죽일 수 있어 여유만만인거겠지. 그건 그렇고 현무가 맡은 주 임무가 성수처형관이었구나. 성수 중에 유일하게 맡은 임무. 진짜 거창한 성수구나. 그렇다면 성수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건데 엄마는 어쩌다가 돌아가신 걸까? 흠……. 엣, 지금 이걸 생각할 때가 아니잖아.
“현무가 성수처형관이니까 널 죽이기 쉽다는 얘기잖아. 그것도 한방에.”
“오호호호. 현대 현무님. 죽이는 것보다 살려 놓는 게 더 잔인한 처벌입니다.”
귀신의 말이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살려 놔서 수백 년 간 추한 골로 지내게 하는 게 한 번에 명줄을 끊는 것 보다 몇 배는 더 가혹하고 잔인할 수 있다. 확실히 그럴 지도 모른다.
“성수의 심장은 보통 인간보다 특별하겠죠? 현대 현무님.”
“현무 정이야.”
“아, 죄송합니다. 현무 정님.”
이제 서서히 실이 내 옷에 닿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내 살 속으로 파고들어서 피가 배어나오고 몸이 토막 날 거다. ……이런 실도 쓰고 바람도 다루는 걸 보면 재주는 좋은데……. 단지 행동이 경솔하다는 걸로 쫓겨나기에는 가진 재주가 아깝다.
“우리 협상하지 않을래? 서로 살아남는 방법으로.”
“살기 위한 발악이십니까?”
발악이라니. 표현이 좀 거치네. 협상을 제안하는데도 실을 계속 밀어대면 정말 날 죽일 생각인가 보네. 어차피 처음부터 날 죽일 생각이었으니 멈출 이유 없지. 그래도 사람 말 좀 들어주지. 읏, 드디어 살이 베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고통이 오는데 장난이 아니다. 그래도 근육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보다는 덜하다.
“내가, 읏, 내가 널 고용하지. 내가 네게 부탁한 일을 잘 해내면 수호령으로 되돌려줄게. 읏. 내 혈은 조만간 청룡 지께서 봉인을 풀어준다고 하셨어. 으읏. 그러니까 난 현무로서 널 다시 수호령으로 옆에 둘 수 있어.”
달콤한 제안이었는지 실이 천천히 떨어져나갔다. 수호령으로 복직시켜주겠다는데 안 움직이기고 배기겠어? 아무튼 이 순간에 머리가 빨리 돌아가서 다행이다.
“그동안 제 행적을 모두 덮을 수 있으십니까?”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누가 말려?”
“오호호호. 정님의 삼촌이 되는 천과 저보다 오랜 시간을 현무의 수호령으로 산 주를 꺾을 수 있으십니까? 제 1성에 있는 찬(瓚)과 아(雅)는 모든 수호령 중에서 두령급인데 그들도 말입니까?”
“내가 그렇게 할거라니까.”
아무리 수호령이라도 감히 지배자나 마찬가지인 성수의 말을 거역할 수 있겠어? 물론 이제 15살이고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성수지만 그래도 ‘현무 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수야. 어누 수호령이 어떻게 태클을 걸어도 내가 하겠다 마음먹은 건 해야지. 암. 약속한 건 지켜야 하는 거야.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귀신성불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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