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2 절의 입구를 지키는 이유
내 몸은 등산에 절대 적합하지 않은 불량 육체요, 종교는 무교다. 그런데 어둠의 딸, 이유린의 손에 이끌려 산 중턱에 있는 절을 찾아 산을 오르고 있다. 일부러 제일 완만하고 쉬운 길을 골랐다는데 난 숨이 차고 다리가 무겁다. 일요일이라 실컷 늦잠을 자고 있는 중에 어떻게 알았는지 유린이 우리 집에 습격해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날 끌고 온 것이다. 아빠야, 자유방임의 극치라 절대 말리지 않았다. 쯧, 딸내미를 위해 좀 나서주면 어디가 덧나나.
학교 계단 경사의 반 밖에 안 되는 것부터 학교 계단 경사 만큼인 것까지의 오르막길을 끌려가다시피 오르는데 마음 따로 몸 따로다. 예전 같으면 이 정도는 유린이처럼 쉽게 올라갔을 거다. 이 빌어먹을 육체는 조금의 운동과 노동을 허락하지 않는다. 겨울인데도 몸이 후끈거린다. 땀이 안 나서 다행이지 땀이 나면 100% 감기에 걸릴 것이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저 말이 지금 몇 번째지? 기는 좋겠다. 날아갔으니까 벌서 절에 도착해 있을 거다. 기도 내켜서 따라온 건 아니다. 유린이 기도 가야한다고 막무가내로 고집 부려서 기가 진 척 하고 따라와 준 거다.
“진짜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뭐 이상한 거 없어?”
“이상한 거?”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다른 산과 마찬가지로 나무, 풀, 돌이 점부다. 특별히 다르다거나 이상하다 싶은 건 없다. 으……. 겨울에 산에서 맞는 바람은 평지에서 느끼는 추위보다 더 살벌하다. 피부가 얼어버릴 것 같다. 아.
“내려 와.”
바람 속에서 살기가 느껴져 유린을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바람 때문에 느끼는 추위와 귀신 때문에 느끼는 냉기는 확연히 다르다. 귀신의 존재를 가르쳐 주는 냉기 자체도 기분이 나쁜데 이 정도의 살기까지 더해지니 육체의 고통을 싹 잊을 정도로 긴장감이 생긴다. 역시. 점점 내 감이 좋아지나 보다. 팔찌도 붉다.
“얼른 올라가자.”
“기다려봐.”
이 주변에 귀신의 힘이 넓게 깔려 있어서 귀신이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이 있지 않으면 위치를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이 살기가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서 우린 이미 덫에 걸려 버린 것이다. 위로 올라가려 하면 바로 우릴 공격할 것이다. 아래도 내려가려 해도 마찬가지겠지. 응? 이걸 내가 어떻게 안 거지? 엣, 아무렴 어때. 지금 중요한 건 여길 무사히 벗어나는 거다.
“역시 이 근처에 뭐가 있는 거지?”
‘역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유린의 표정은 음흉하다. 평범한 애들이라면 겁에 질리거나 애써 담담한 척 할 텐데 이 아가씨는 절대 그런 걸 모른다.
“솔직히 말해. 날 왜 데려온 거야?”
“절 때문에. 절에서 아주 ‘고귀한 분’을 봤거든. 내가 육체 이탈한 채라 하마터면 몸을 절 내에 두고 절에서 쫓겨날 뻔 했어.”
이 녀석, 또 멋대로 육체 이탈을 하고 다니잖아. 정말로 큰 일 나봐야 정신 차릴 건가. 음. ‘고귀한 분’이라. 절을 지은 사람이거나 절이 바쳐진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적어도 그런 사람과 관계가 있는 사람일지도. 헤. 지금 살기를 계속 뿜어대는 분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계속 기다려야 돼?”
조금만 기다리면 되니까……. 귀신이 조심성 없이 살기를 계속 내보내서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냈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겨보니 역시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고 눈을 번뜩이는 귀신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있다. 또 다른 기운. 귀신의 존재를 느낀 기가 우리 쪽으로 날아오고 있다.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나 할까?
“마중 나왔어. 천천히 가자.”
기의 힘은 대단하다. 귀신의 냉기와 살기가 말끔하게 양 옆으로 빠져버렸다. 귀신은 사냥감이 자신의 덫 밖에 있으면 절대 건들지 못하는지 노려볼 뿐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그 귀신은 힘이 세던걸.”
“어. 요력을 좀 갖고 있어. 억지로 성불하거나 암렵을 해야 하는데 양쪽 다 쉽진 않을 거야.”
기가 이렇게 말하다니, 죽은 지 100년도 더 넘었나 보다. 성격이 워낙 독하면 죽은 지 5년 만에도 기운이 강해진다는데 요력을 가지려면 최소한 7~80년은 지나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산 속에, 그것도 숲 속에 숨어 있으니 성수들이 못 찾아내고 점점 강해지지. 그럴수록 성수들은 더 손을 못 대고. 언젠가 끝장을 봐야할 거 지금이라도 어서 결말을 내야할 것이다.
“그러면 있다가 성불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야?”
유린은 이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 판타지나 무협지 같은 걸로 보이나 보다. 귀신의 냉기와 살기를 직접 느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철없는 아가씨는 가급적 상대하고 싶지 않다.
“절 안에 저것보다 더 강한 녀석이 있어. 꽤 괜찮은 녀석인데 얘기 한 번 해봐.”
유린이 말한 ‘고귀한 분’을 기도 봤나 보다. 벌서 몇 마디 한 것 같은데 위협적이지 않은가 보다.
“내 말이 맞지? 고귀한 분이라고 했잖아.”
“그 녀석 보여주려고 우릴 데려온 거였냐?”
“응.”
기의 귀찮아하는 말투에 유린은 바보스럽도록 천진난만 대답을 했다. 그런데 기의 말투나 태도가 절에 있다는 그 귀신을 전부터 알고 있는 듯하다. 뭐, 귀신의 힘이 강하려면 기본적으로 긴 시간이 필요하니까 기가 알 법도 하다. 성불하지 않은 건 자기 맘일 테고. 그런데 계속 뒷골이 시리다. 우리를 공격하려 했던 귀신이 아직도 우리를 주시하고 있나 보다.
“기. 아까 그 귀신 먼저 성불하면 안 될까? 계속 뒷골이 시려서 찝찝해.”
“그 녀석은 나중이야.”
너무 딱 잘라 거절한다. ‘음… 나중에 하자.’ 이런 식으로 말해도 나쁠 건 없잖아. 휴. 이제야 절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빌어먹을 몸뚱이로 여기까지 왔다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쓸데없이 사서 고생하고 싶지 않은데, 난 완력엔 너무 약하단 말이야.
“입구를 지나기 직전부터 압도적인 힘을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만큼 절 안의 귀신의 힘이 강하다는 이야기인데, 은근히 가슴이 콩닥거린다. 아까 그 귀신처럼 위험하진 않겠지? 설마… 기랑 같이 가는 건데 목숨이 위험할 리가 없잖아. 위험한 곳에 기가 일부러 가자고 할 리도 없고. 아……. 맙소사. 이미 짧은 명줄에 미련 버렸는데 목숨이 위험하네 어쩌네 소리를 하다니. 스스로에게 염치없는 인간이다.
“이제 절이 훤히 보인다.”
유린은 꼬마 애 마냥 좋아한다. 절이 좋은 게 아니라 절에 있는 귀신이 좋은 거겠지만, 대책 없는 아이다. 다리가 무겁고 온몸의 근육이 산화 겸 마비돼서 어디 앉아 쉬고 싶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 뭐지? 절의 입구에 들어가려면 앞으로 세 발작 정도는 더 나가야 한다. 그런데 뭔가 가로막힌 것 같으면서 저 앞에 냉기 아닌 뭔가가 가득하다. 불안감이나 위협감은 못 느끼겠지만 우릴 경계하는 위화감은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절에 들어가는 걸 꺼리고 있다. 기가 말한 압도적인 힘이 이건가 보다. 분명히 내가 여태껏 만났던 귀신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 하지만 나나 다른 누구를 굴복시킬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다른 귀신이 느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까 한 걱정은 취소해야겠다.
“밑에 있는 귀신은 댈 것도 안 되는데.”
“네 생각 나름이지.”
입구를 지나자마자 기는 내 오른쪽 어깨 위에 앉았다. 그리고 내 눈 앞에 키가 훤칠하고 얼굴도 봐줄 만큼 곱상한데다 단정이 반 묶음을 한 흑장발의 남자가 서있었다. 눈동자도 진한 흑색이다. 그런데 눈매가 날렵하다고 해야 할까 날카롭다고 해야 할까, 한 인상 돼 보인다.
“절이 왜 잡귀가 들어가지 못하는 신성한 곳인지 알아?”
기는 유린 쪽으로 날아가더니 유린의 뒤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유린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유린이 절을 둘러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을 때 기는 왼손을 유린의 머리 위에 얹어서 힘을 사용했다. 유린의 머리 둘레에 푸른빛이 고리처럼 생겼다가 사라지자 유린은 푹 쓰러졌다. 정신을 잃게 만다는 거든가 재우는 거든가 할 것이다.
“이 아이 좀 어디로 옮겼으면 하는데?”
유린을 들어 안은 기는 귀신을 노려보듯이 쳐다봤다. 저건 절대로 부탁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귀신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에 어디론가로 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뒤를 쫓아갔다.
“절에 왜 잡귀가 들어오지 못해?”
걸어가면서, 아까 기가 내게 한 말을 이번엔 내가 했다. 절이 신성해서 잡귀가 함부로 들락거리지 못한다는 건 옛날이야기에나 나오는 사실로 알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가 보다.
“추측해 봐.”
읏. 딱딱하게 굴기는. 기가 유린을 안고 있지만 않았으면 주먹으로 머리를 한 대 맞았을 지도 모른다.
“글세. 옛날에 절은 명당자리에 지었으니까 그것 때문이 아닐까?”
풍수지리니 뭐니 하면서 명당이 어쩌구 따지는 건 같잖은 미신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귀신이란 것과 성수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니까 ‘명당’도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기가 모이는 곳이니까 잡귀는 그 힘에 밀려 함부로 절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그것도 이유라면 이유가 될 수 있겠지.”
으음. 뭔가 다른 게 있다는 거잖아. 명당 이상의 것이 ‘절’에 있다는 걸까? 잡귀들을 모조리 견제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강한 것…… 절 전체를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것……. 모르겠다. 설마 불상이나 경전? 그러면 불교를 믿는 집에는 잡귀가 못 들어가야 정상이지. 에…… 잡귀? 귀신은 귀신이고, 잡귀는 귀신하고는 좀 다른 건가? 잡귀가 절에 들어오지 못하면, 귀신은 들어올 수 있다는 이야기일까? 뭐, 저기 걸어가는 이도 귀신이니까. 아니, 좀 다르다. 귀신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 다르다. 귀신마다 고유의 느낌이 있고, 공통되는 게 있다는 것도 어제 알게 됐다. 구별하는 법. 이 정도로 해 둔다면, 저 귀신은 다른 귀신들하고 다르다.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다. 절 입구에서 느꼈던 힘이 저 귀신의 것이었는데, 정말 귀신이 아니라면 절마다 저런 ‘령’이 있다는 이야기가 될 거다. 절을 수호하는 ‘령’으로 말이다.
“답은?”
기는 벌서 절 한 쪽의 조그만 방에 유린을 눕혀 놨다.
“아마도 네 옆에 서 있는 ‘령’ 때문일 거야. 계속 귀신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엄청 실례한 것 같아.”
“정답.”
기는 내 머리를 비비듯이 쓰다듬어줬다.
“이쪽은 수호령 천(川)이야. 언젠가 소개하려고 했는데 부득이하게 오늘 만나게 됐네.”
“안녕하세요.”
“저야 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 동안 계속 무표정이다가 처음으로 웃었다. 눈매가 날카로워서 조금은 엄하고 무서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가보다. 목소리가 부드러운 편은 아니지만 엄하지도 않다. 듣는데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천은 이 절을 중심으로 이 산 전체를 지키는 수호령이야. 유명한 절과 산에는 천과 같은 수호령이 대부분 있어. 몇몇 바다와 호수도 포함.”
‘대부분’이라는 건 명찰, 명산이라고 수호령이 꼭 있는 건 아니라는 뜻? 뭐, 세상에 100%란 거의 불가능하니까. 그런데…….
“여기는 큰 절도, 유명한 산도 아닌데?”
기의 말과 현 시점의 모순 발견! 이랄까.
“예외도 당연히 존재하지. 여긴 과거에 현무의 제 2성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수호령이 있는 거야.”
헤. 여기가 그렇게 굉장한 곳이었단 말이야? 성수의 집을 성이라 부르는 구나. 현무의 제 2성이 있었다면 엄마도 여기에 왔었겠지? 이 절이 세워진지 좀 오래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현무의 제 2성은 일찍 없어졌나 보다.
“아닙니다. 현무의 제 2성은 아직도 여기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이봐, 천.”
성을 통째로 숨길 수도 있구나. 하긴, 성수의 성을 보통 사람들이 알게 되면 이것저것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무르니까. 흠. 엄마의 성을 한 번 보고 싶은걸.
“이 녀석이 보여 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이미 충분히 보고 싶어.”
기는 내 마음을 충분히 잘 파악하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당연히 이런 솔깃한 이야기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현무 희님의 따님이니까 괜찮아요.”
수호령 천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 내 이름은 당연히 모를 테고, 내가 엄마랑 많이 닮았나? 내가 현무 희의 딸이라는 걸 알고 여기에 성이 있다는 걸 당당하게 말한 모양이다.
“휴. 지희야. 이상하게 생각할 거 없어. 천은 현무 희의 동생이야. 네 외삼촌인 셈이지.”
“아?”
자, 우리 다 같이 이야기를 정리해 볼까요? 일요일인데 맘대로 쉬지 못하고 유린에게 끌려 나왔는데, 유린이 봤다고 하는 고귀한 분은 기가 이미 알고 있는 수호령이었고, 그 수호령은 이 절과 함께 숨겨져 있는 현무 제 2성을 지키는 임무를 하며, 신분은 엄마의 동생이라는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란 말인가. 하. 혼자 머릿속으로 난리 쳐 봤자 풀리는 건 없는데 괜스리 힘쓰지 말자.
“현무 희님의 품에 안겨 여기에 오실 적이 엊그제 같은데 정말 장성하셨습니다.”
따뜻한 목소리를 들으니까 복잡했던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다. 아니 왜 얼굴이 화끈거리는 거야.
“그래. 이 대견스러운 아이에게 정말 현무 제 2성을 보여줄 거야?”
“물론입니다. 현무 희님의 의지를 물려받으시려면…… 읏.”
“닥치어라.”
“기. 왜 그래?”
기가 갑자기 천의 멱살을 잡았다. 기에게서 살기까지 풍겨져 나도 모르게 천의 멱살을 잡고 있는 기의 손을 억지로 떼냈다. 천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기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 기의 살기도 처음이라 나까지 살기에 휘말려 기가 죽을 뻔 했다.
“방금 전까진 괜찮더니 갑자기 왜 그래? 기…… 진정하고 나 좀 봐. 응? 천이 기분 나쁘게 했다면 유린이 깨우고 집에 가자. 기. 응?”
인간의 모습인 기의 눈이 인간의 눈이 아니라 날카로운 맹금류의 눈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 눈이 이렇게까지 무서운 눈일 줄은 몰랐다. 기의 살기 때문일까, 기를 천과 떼놔야만 한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성을 보여준다는 것 때문에 화내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유야 어쨌든 기가 화내는 모습은 왠지 보고 싶지 않다. 진짜 큰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지희님. 성을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천!”
읏, 기가 밀치는 힘이 장난이 아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스스로 기와 천 사이에 끼어들어서 이게 뭐하는 거냐고. 하지만 기의 모습을 보니까 필사적으로 말려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천을 슬쩍 봤는데 천의 날카로운 눈매가 확실하게 살아있었다. 서로 잔뜩 경계하는 것 같다.
“지희님. 성 안에 어머님의 유품이 있습니다.”
엄마의 유품? 확실히 인간이었을 적 엄마의 유품은 거의 없다. 아빠가 다 정리해버려서 내가 알고 있는 게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현무일 적 엄마의 유품을 볼 수 있다는 말이 성을 보고 싶다는 내 마음을 강하게 자극한다 하지만 지금 이런 기를 두고 성을 보러 간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잊으면 안 된다. 난 내가 현무 희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 기의 제자가 되었다. 제자는 스승에 예속되어야 한다.
“죄송해요. 엄마의 유품이란 말은 확실히 유혹적이에요. 하지만 기가 안 된다고 하면 가지 않을 거에요.”
“현무 희님의 따님. 당신의 의지로 선택하십시오. 빙황 기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긴 현무의 영지입니다.”
“천. 그런 식으로 이 아이를 끌어들이지 마라.”
맙소사. 천이 조금 진정된 듯 한 기의 화를 다시 건드려 버렸다. 기가 왜 내가 성을 못 보도록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여길 뜨고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기의 살기는 더 이상 못 견디겠다. 긴장감 때문에 근육이 조금씩 오그라들더니 마비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걸어서 집에 못 갈지도 모른다.
“가자, 기. 몸이 이상해. 오늘 너무 무리한 것 같아.”
내가 매달리다 시피 하자 기가 드디어 살기를 제어했다. 이제 숨 좀 제대로 쉬겠다.
“그래. 가자.”
살기는 없어졌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다. 뭐랄까, 자식을 절대 남에게 내줄 수 없다고 버티는 부모의 느낌이랄까, 지금 기에게서 그런 느낌이 든다. 그런데 평소 행동을 보면 확실히 지금의 기는 너무 이상하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귀신성불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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