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귀신성불록(완)

한 달 간의 귀신성불록 : D-24 물을 추적하는 이유

★은하수★ 2008. 2. 14. 20:58
 

 D-24 물을 추적하는 이유


 기는 시험이 끝나자마자 집에 오라고 했지만 꼭 들려야 할 곳이 있어서 그 말은 지키지 못할 것 같다. 아들을 기다리며 집을 지키는 할머니께 오랜만에 인사를 가볼까 한다. 내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할머니의 아들을 찾아주겠어. 그냥 말동무나 되 드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때 한번 본 나를 기억해 주실지 걱정이 되지만 앞으로 며칠에 한 번씩 찾아가면 날 기억해주시고 조금씩 마음을 열어줄 것이다.

 아, 정말. 이 골목은 낮에도 오기가 싫다. 중간 중간에 담벼락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와 놀래키고 있다. 이 후미진 골목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여기서 살 수 있나 볼라. 나처럼 귀신을 보지 못하니까 이런 장난이야 모른다 해도 이 골목 자체가 무섭지 않나? 좁고, 굽이지고, 집도 대부분 폐가고, 그다지 산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환경은 아니다. 게다가 여기는 별별 괴설이 떠돌아다녀서 사람들이 이 근처를 지나는 것조차 꺼린다. 으……. 또 손이냐. 이제는 놀라는 게 아니라 짜증이 난다.

 “안녕하세요.”

 할머니는 대문 위에 살짝 뜬 채 가만히 서서 날 내려다 봤다. 별로 달갑지 않다는 듯한 표정에 몸이 약간 움찔 거렸지만 너무 무서워하는 기색을 보여도 안 될 것 같아서 최- 대한 웃으며 할머니를 쳐다봤다.

 “그렇게 계속 서 계시면 다리 아프지 않으세요?”

 최- 대한 친근감 있게 말을 붙여봤지만 할머니는 약간 엄한 얼굴로 내려다 볼 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살아 있는 사람이 자기를 보고 말을 건다는 게 이상한가? 하긴, 다른 지나가는 사람이-그런 사람이 있겠느냐마는- 날 본다면 날 아주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저……. 며칠 전에 조그만 새랑 같이 왔었던 애에요. 사람처럼 말을 잘 하는 파란 새랑 왔었는데…….”

 할머니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썩 꺼져라.’ 같은 호령을 듣는 것보다 무서운 침묵이 날지도 모른다. 귀신에게 큰 소리를 듣는 것은 좀 오싹할 것 같다. 천연 고아인 아빠랑 엄마를 둔 덕분에 친척이란 일절 없는 내가 개인적으로 ‘할머니’란 존재와 같이 있는 건 처음이고 은근히 부담스럽다. 게다가 할머니 귀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 할머니 말동무가 되려고 온 거에요. 음……. 아, 학교에 윤이라는 여자 친구가 있는데요, 붓을 씻은 물통을 화장실로 가져가려다가 복도에서 미끄러 넘어지는 바람에 물을 쏟아서 교복을 거의 버리다 시피 한 거 있죠. 뒤에서 보고 있는데 얼마나 웃겼는지 몰라요.”

 일단은 나 혼자 떠드는 거라도 좋으니까 평범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다. 할머니는 역시나 별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계속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면 뭔가 말을 꺼내겠지.

 “실은 저희 학교에 장난이 심한 귀신이 한 명 있는데 그 애가 아래층에서 손을 쑥 내밀어서 윤이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거였어요. 아무 것도 모르고 애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윤이가 좀 불쌍하긴 한데…… 후후. ‘엄마야!’하고 넘어지면서 이- 상한 색의 물을 잔뜩 뒤집어 쓴 모습이 정말 일품이었어요.”

 아, 지금 생각해봐도 윤이의 그 몰골은 잊히지 않을 걸작이다.

 “부잣집 딸이라고 자기가 공ㅈ인 줄 아는 애였는데 그렇게 추하게 넘어지니까 뭔가 속이 시원하더라고요. 다른 애들도 맨날 잘났다고 뻐기고 다니는 윤이가 마음에 안 들었었는지 은근히 즐거워하고, 아, 그래, 통쾌해 했어요.”

 점심시간에 윤이를 넘어뜨린 귀신을 찾아가서 말을 걸어봤는데 그 귀신도 윤이가 재수 없어서 그동안 벼르고 있다가 오늘 드디어 한 건 해낸 거라 했다. 세상의 눈은 무섭다고 귀신에게까지 미움을 받으면 그 의미대로 세상 살기 힘들 거다. 이유 모르게 이상한 일을 당하거나 망신살을 당할 수 있으니까.

 아, 근데 할머니는 여전하네. 뭐, 불쑥 찾아와서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를 늘였으니 이상한 애다 싶을 거다. 조금 더 늦었다간 기한테 실컷 잔소리를 들을테니까 오늘은 그만 가야겠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가 볼게요. 저…… 나중에 또 올게요.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받아주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장 골목을 따라 달렸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야지… 싶은데 다섯 발자국 정도 뛰다가 평범하게 걷고 있다. 전신 통증은 절대 겪고 싶지 않다. 조금만 몸에 평범치 않은 자극을 주면 제어할 수 없는 통증이 온 몸을 지배해 버린다. 근처에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는데 통증 때문에 쓰러져 버릴 순 없다. 귀신이나 유령은 파다하게 퍼진 곳인데 도움을 청해도 도와주지 않을뿐더러, 도와준다 해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을 거다. 쯧. 기한테 잔소리 좀 들어도 천천히 가야겠다.

 귀신과 유령들의 장난 공세를 실컷 지겹도록 구경하고 나서 음산한 골목에서 빠져나왔다. 도로 하나를 두고 양쪽이 천지 차이인 건 내가 귀신을 볼 수 있는 것만큼 이상한 일이다. 방치해 놓는 시장 탓이긴 한데…… 여기를 밀어버리려고 하면 담당자들이 모두 심하게 다쳐버린다는 악설이 있어서 아무도 건들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귀신들의 성역이라는 거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 기가 손님이 올 거라 했는데 누구였지? 어제 정신이 반쯤 맛이 간 상태에서 들은 터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침에는 그냥 일찍 오라는 말만 하고 휭 하니 나가버려서 그냥 그런 줄 알고 있을 뿐이다. 기가 부른 손님이니까 분명 특별할 거다. 그래, 기랑 관련될 법한 특별한 손님일 텐데……. 아, 성수 백호랑 그 제자가 온다고 했었지. 이럴 때 보면 나도 은근히 기억력이 좋아. 사사로운 걸 다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야.

 [딸깍]

 아직까지도 ‘비밀 키’라는 첨단 시설(?)을 달지 않은 채 구형 열쇠에 의존하고 있는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 처음 보는 ‘남자’용 운동화가 놓여 있었다. 기가 말한 손님이 벌써 온 모양이다.

 “나 왔어.”

 “이야-! 곧장 집에 오라고 그랬지! 손님이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고나 있어? 엉?”

 은근히 고주파다. 기의 발성 솜씨에 마음속으로 새삼스럽게 감탄사를 보낸다.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었어.”

 난 내가 기보다 훨씬 크다는 걸 이용해서 양손으로 기를 능숙하게 감싸 쥐고 위아래로 몇 번 흔들었다. 기는 어지러워서 저절로 조용해졌다.

 “제자에게 휘둘려 사는군.”

 걸쭉한 목소리에 놀라서 돌아보니까 낯익은 남자 아이랑 하얀 새끼 호랑이가 거실에 앉아 있었다. 분명 호랑이가 성수 백호일 테고, 남자 아이는 그 제자일 거다. 그런데 성수들은 몸이 작아지면 다 귀여운가 보다. 백호도 꼭 인형 같다.

 “시험은 잘 봤어?”

 “응? 아, 뭐…… 보던 식으로……. 아, 손류등!”

 “역시, 내가 누군지 잊어버리고 있었구나.”

 어쩐지 낯익은 애라 했어. 류등은 아버지가 중국인이고, 어머니가 한국인인 혼혈아다. 아버지가 귀화한 대학 교수라 한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짝으로 정해져서 친한 사이다. (나름…….) 이때까지 같은 반을 네 번 정도 했는데 매번 새로워 보인 달까, 류등이 먼저 인사하지 않으면 전혀 모른다. 지금 중학교도 같은데 반이 계속 달라서 싹 잊어버리고 있었다. 꽤 미안하네.

 “내가 원래 사람을 잘 기억 못하잖아.”

 “그래도 근 7, 8년 된 친구를 그렇게 묻어놔도 되는 거야?”

 “미안. 가방 갖다 놓고 마실 것 좀 가져올게.”

 내 손 안에서 약간 넋이 나간 기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류등을 알아보고 나서 좀 놀랐다. 성수 백호의 제자가 류등일 줄이야. 아는 사람이라서 마음이 편하긴 한데 갑작스러워서 머릿속이 조금 혼란스럽다. 류등은 내가 성수 빙황의 제자라는 것을 알고 우리 집에 왔을까? 날 보고 전혀 놀라지 않는 걸 보면 다 알고 온 것 같기도 하다.

 “오렌지 주스야. 기랑 성수 백호는 마시기 평하게 접시에 가져왔어… 요.”

 “저 녀석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말해.”

 기는 내가 백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하는 걸 알아봤다.

 [퍽!]

 [꼬르르륵]

 “에? 기!”

 백호의 앞발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접시 안의 주스에 쳐 박힌 기를 건져내 주었다. 류등도 당황했는지 백호를 안아서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

 “성(珹). 갑자기 그러면 어떡해요?”

 “380살이나 어린 것이 누구한테 ‘저 녀석’이라는 거야?”

 그렇구나. 백호가 기보다 380살이나 많구나. 기는 이제야 200살이 조금 넘었다는데 백호는 580살이 넘었겠네. 어이구야. 오래도 사신 몸이시네. 기가 맞을 만하다. 탁자 위에 있는 티슈로 기의 얼굴을 대충 닦아 주었는데 주스 색 때문에 푸른 털색이 약간 연두색으로 보인다. 그새 색이 물들어버렸냐…….

 “시끄러. 그래도 서열로는 내가 더 높아!”

 어리면서 서열이 높다는 건 신분이 높다는 건가? 성수 사이에도 은근히 별걸 다 따지는 모양이다.

 “이제 막 어른 딱지 받은 녀석이 어디다 대고 큰 소리야?”

 “그럼 황룡이 너보다 어려도 마구잡이로 때릴 거야?”

 “황룡하고 너하고 같아?”

 “내가 황룡보다는 낮아도 너보다는 높아!”

 기와 백호 사이에 누가 더 잘났냐는 공방이 오고갔다. 이런 유치한 말싸움이나 하려고 우리 집에 온 건 아닐 텐데 너무 사소한 것에 목숨 건다.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 걸. 아까 골목에서 귀신들의 장난 때문에 기분 나쁜 게 아직 덜 풀렸건만.

 “지희야. 어쩌지?”

 류등도 좀 난처한가 보다. 하……. 몸집도 조그만 것들이 소리 하나는 무식하게 크네. 말리지 않으면 계속 이렇게 떠들어 대겠지?

 “흐읍. 야! 여기가 누구네 집인데 멋대로 떠들고 있는 거야? 자꾸 쓸데없이 큰 소리 내면 밖으로 내던져 버린다!”

 후. 이제야 조용해졌네. 아무튼 조그만 것들이 한 번 떠들기 시작하면 엄청 시끄럽다니까. 이러고도 몇 백 살씩 먹은 성수인지. 그동안 먹은 나이가 아깝다 정말. 으…… 소리 지르니까 머리가 욱신거리네. 한 번 골 울리기 시작하면 잘 안 가라앉는데. 일만 만들어 버렸어.

 “쿡. 쿡.”

 “넌 내가 큰 소리 듣는 게 웃기냐?”

 백호는 류등을 눈치 없는 녀석 보는 것 마냥 쳐다봤다.

 “성. 혼난 거라고 솔직하게 인정해요. 전 그냥 성하고 빙황이 본 모습으로 돌아가서 말싸움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니까 재밌어서 웃은 거뿐이에요.”

 하긴. 성수의 거대한 모습으로 돌아가서 말싸움하면 가관일 만하다. 다 큰 것들이 뭐하는 것이냐 싶을 거다. 아마도 주변에 있는 신분이 높은 성수나 나이가 압도적으로 많은 성수가 불호령을 내릴 거다. 아, 솔직히 거대한 호랑이란 새가 말다툼 하는 걸 직접 보면 진짜 웃길 지도 모른다. 이런 축소판도 우스꽝스러운데.

 “우우. 오늘 필히 목욕해야겠다. 내 아름다운 깃털색이 이게 뭐냐.”

 기는 부리로 털을 정리하며 우울해 했다. 기의 깃털이 아주 보드랍고 섬세하다는 건 매일 만져봐서 알지만 염색이순식간에 될 정도라는 건 생각외다. 한꺼번에 죄다 염색되면 그나마 나을 텐데 부분부분 염색 되서 병든 병아리처럼 보인다. 병든 병아리? 비유가 왜 그쪽으로 되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그런 느낌이랄까.

 “흥, 추한 꼴 한 햇병아리는 내버려두고 본론으로 가자.”

 “뭐야?”

 백호에게 달려들려는 기를 잽싸게 잡았다. 또 싸우면 진짜로 창밖으로 던져버려야지. 안 그러면 계속 투닥거릴 거다.

 “그릉. 왕이 너한테 이 아이를 맡겼다지만 난 인정할 수 없어. 이건 중요한 일이라고.”

 기에게 나를 맡긴 사람이 성수들의 왕이었구나. 그런데 좀 알기 어려운 이야기가 튀어나온 것 같은데 이제 제대로 설명해 줄 때가 되지 않았나? 내가 오고 나서 기랑 백호가 대뜸 다투기만 하고 말이지.

 “그걸 나한테 말해 봤자라고. 왕이 정한 일이니까.”

 기의 말투를 보아하니 날 억지로 맡았다는 게 확 티난다. 조금씩 불안한 감이 드는 데 내 혈이 모두 봉인되었다는 사실과 연결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게다가 어제 기가 이상한 말을 했던 것도 다 관계된 걸지도 모른다. 앞으로 무슨 말이 귀에 들어와도 마음 굳게 먹고 잘 들어야겠다.

 “지희야.”

 “응?”

 루등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혹시 ‘혈’에 대해서 들어봤어?”

 역시 내 혈과 관련된 이야기가 진행될 건가 보다. 공, 양, 음, 유, 영의 다섯 개 혈과 내가 1000년에 한 번도 나오기 힘든 인간이라는 것. 황당한 전개이긴 하지만 거짓말은 아닌 것 같으니까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되더라도 놀라지 않게 각오해야지.

 “응. 어제 기가 가르쳐줬어. 내 혈 얘기도 해줬어. 좀 놀랐지만.”

 “좀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류등은 뭔가 안타깝다는 표정이다. 내가 모르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 알고 있으니까 여기에 온 걸 텐데 그닥 마음 편한 얘기는 아닌 것 같다. 뭐, 편한 얘기면 벌써 이야기가 시작됐겠지. 지금 내 손에 붙잡혀 있는 기가 약간 긴장하고 있다. 귀신을 성불할 때나 평소에나 당당함으로 먹고 사는데 지금 긴장하다니, 나까지 긴자오디는 것 같다. 설마 핵폭탄 같은 이야기가 터지진 않겠지.

 “주요 혈 다섯 개가 모두 열리는 건 성수뿐이야. 그런데 너는 지금 혈이 봉인돼 있긴 하지만 다섯 개 모두 혈이 열려 있어. 봉인돼 있는 동안 공혈과 영혈도 그 속에서 완전히 열린 거야.”

 백호의 말은 확실하게 골 때리는 말이다. 성수만 다섯 개의 혈이 열린다는데 내가 그렇다니……. 만약 내 혈이 봉인되지 않았다면 난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거 봉인된 걸 감사하게 여겨야 하나?

 “너희 어머니가 8년쯤 전에 돌아가셨지?”

 “응. 그 정도 됐어.”

 여기서 엄마는 왜 나오는 거야?

 “이 사진의 여자군.”

 백호는 탁자 위에 있는 엄마 사진을 발견했다. 류등이 집어 줘서 사진이 있다는 걸 안 거지만. 백호는 엄마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기가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엄마 사진을 보고 몇 분 동안 넋 놓고 엄마 사진을 본 것처럼 백호도 엄마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어머니의 성함이 어떻게 돼?”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길래 백호의 표정을 보니까 무얼 슬퍼하는 것 같다. 성수들은 고인의 사진만 봐도 그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있나? 설마. 그런 재주는 아무래도 말도 안 된다. 뭐, 엄마는 유람선 침몰 사고로 몇 달 동안 실종돼 있다가 극적으로 숨이 붙은 상태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계속 병으로 앓아누워 병원에서 살았다. 병문안 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숨을 거뒀는데 밤에 자다가 조용히 명줄을 놓은 거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괴롭게 죽는 건 보는 사람도 마음이 아프다.

 “현 희. 내 이름의 ‘희’는 엄마의 ‘희’야.”

 그렇다. 송 지원이라는 아빠의 이름에서 ‘지’와 현 희라는 엄마의 이름에서 ‘희’를 합친 송 지희가 내 이름이다. 은근히 기분 좋은 명명이라 어렸을 때 친구들에게 곧잘 자랑했었다.

 “한자로 쓸 수 있어?”

 “잠간만.”

 장식장에서 볼펜과 메모지를 꺼냈다. 왜 엄마 이름을 알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지만 가르쳐줘도 나쁠 거 없으니까. 밝을 현(顯)에 빛날 희(熙). 어려운 한자의 조합이지만 아빠가 열심히 연습을 시킨 적이 있어서 지금은 자연스럽게 쓴다. 흠, 오늘을 비뚤어지지 않고 잘 써졌어.

 “이거야.”

 “아, 난 너희 어머니 이름은 처음 본다.”

 “네가 안 물어봤잖아.”

 기도 백호와 같이 엄마의 이름을 자신을 불 때처럼 쳐다본다. 그야말로 밝게 빛나는 이름이다. 나쁜 조합이 아닌데 생각보다 심각하게 이름을 뜯어보고 있다.

 “어머니의 본명을 알고 싶지 않아?”

 백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나와 똑바로 눈 대 눈을 맞췄다. 엄마의 본명이라니. 무슨 이상한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는지 모르겠다. 기는 엄마의 사진과 이름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다.

 “너희 어머니는 말이야, 대단한 분이야. 너는 그 분의 딸이고 알아야 하지 않겠어?”

 호기심을 자극하는 발언이다. 그렇게 말하는데 넘어가지 않으면 성인일 거다.

 “현무 희(玄武 熙). 너의 어머니는 성수 현무야. 아주 교묘하게 이름을 바꿨지만 본명만큼은 바꾸지 않았으니 성수로서의 자긍심은 끝까지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지.”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 맞은 느낌이다. 엄마가 성수라고? 지극히 평범하고, 자상한 엄마였다. 신비스럽다거나 이상한 점은 전혀 없었다. 엄마는 엄마일 뿐이지 성수와 연결할 수 없다. 믿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