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귀신성불록(완)

한 달 간의 귀신성불록 : D-27 자판기 옆에 서 있는 이유

★은하수★ 2008. 1. 8. 15:49

D-27 자판기 옆에 서 있는 이유

 

어제 집에 돌아가서 기가 나에게 과제를 내줬다. 그 할머니가 성불할 생각이 들도록 할 방법을 찾을 것. 아니. 이제 막 시작한 왕초보에게 이런 머리 아픈 과제를 내주다니 정말 너무한다. 화가 나도 기 앞에서 곧장 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다. 안방에 아빠가 있어서 함부로 소리를 크게 낼 수 없었을 뿐더러 기가 명령조로 말했기 때문에 좀 쫄기도 했다.

“그 자판기에 귀신이 붙은 거야.”

“분명히 장난꾸러기 귀신일 거야.”

“야. 야. 그냥 기계 고장이야. 귀신은 무슨.”

반 아이들의 목소리가 아주 또렷하게 들렸다. 내일부터 기말고사라 늘 시험이야기만 오갔는데 간만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저기 6~7명이 모여 있는 그룹은 원래 귀신, 괴기 이야기를 즐기는 애들이니까 그럴 만하다. 자판기에 귀신이 붙었다고?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판기가 이상하게 작동하는 거랑 그 언니가 차에 치어 죽은 걸아 날짜가 비슷한 걸.”

“그렇다고 자판기에 들러붙냐?”

으음. 점점 궁금해진다. 원래는 관심도 갖지 않을 텐데 성불 다니면서 벌서 직업병이 생긴 모양이다. ‘귀신’ 소리만 나오면 귀가 번쩍 뜨이는 것이, 내 자신이 이상하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이렇게 가까이 보이는 이유가 뭐지?

“어, 지희야.”

아, 내 다리가 멋대로 아이들에게 걸어갔구나. 자기 몸이 통제가 안 될 때 자신이 가장 무섭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야기가 궁금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일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다. 역시 본능과 이성은 따로 움직이는 것이다.

“자판기에 귀신이라니? 무슨 말이야?”

이왕 가까이 온 거 별 수 없이 내 궁금증을 풀어야 했다. 그러자 민지가 눈을 반작거리며 나를 올려다봤다. 의도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담스럽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무슨 순정 만화나 코믹 만화도 아니고 현실에서 저런 눈을 어떻게 연출할 수 있는지 신기하다. 본인의 사설에 의하면 자신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갈고 닦은 기술이라는데 좀 난용한다는 게 문제다. 지금은 그 눈을 할 필요가 없을 텐데도 저렇게 반작이고 있다. 괜히 여기에 왔다는 후회가 될 정도다.

“너도 신비한 경험을 해보고 싶구나.”

‘싶니?’도 아니고 ‘싶구나.’라니……. 이 아가씨가 내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게 과히 불쾌하다. 그래도 웃는 낯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신비한 경험?”

“그래. 초자연적인 신비한 경험 말이야.”

설마 귀신의 존재를 경험하는 것을 말하는 건가? 그거라면 야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도 팔찌는 계속 차고 있다. 색이 흰색이다 보니까 선생님들은 건강상태가 불량(?)한 내가 건강 팔지를 한 건줄 알고 그냥 내버려 두신다. 다른 애들이었다면 벌써 압수됐겠지만. 1교시 체육 시간에도 스탠드에 앉아서 친구들이 수업 받는 모습을 구경하는데 10년 전에 우리 학교에서 손목을 긋고 자살했다는 언니가 내 옆에 와서 앉았다. 학교 주변에 돌아다니던 기가 그 언니는 성불시켜서 많은 이야기는 못 나눴지만 그 언니가 자살을 후회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 근처에서 돌아다니는 귀신의 모습도 가끔씩 눈에 보이기 때문에 민지가 말하는 신비한 경험은 나에게 평범한 일상일 것이다.

“그거 그냥 고장 난 거라니까.”

은우가 민지의 반짝이는 눈을 가로 막았다. 고맙다는 생각이 왜 이렇게 절실하게 나는지…

….

“자세히 얘기해 줘.”

난 가까이에 있는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았다. 세미가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지희 너도 서점 앞에 있는 자판기 세 개 알지?”

“물론 알지.”

학교를 중심으로 건물들을 살펴보면 걸어서 가도 무리 없는 거리에서 서점은 딱 한 곳이다. 학교에서도 좀 멀고 집에서도 좀 먼, 거리가 참 애매한 곳에 서점이 딱 하나 있다. 그 서점 입구 옆에는 자판기가 세 대가 있는데 두 대는 캔 음료수 자판기고, 나머지 하나는 커피 자판기다. 사람들이 많이 사용해서 담당 직원이 자판기 속을 채우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자판기에 귀신이라…….

“며칠 전부터 자판기가 멋대로 작동하기 시작했거든. 포카리스웨트를 누르려는데 갑자기 코코팜이 저절로 눌러지질 않나, 실론티를 누르려는데 레쓰비가 눌러지질 않나. 직원이 계속 검사해 봤지만 기계에서 고장 난 건 없대.”

“꼭 귀신이 대신 누르는 것 같지?”

“가만히 있어라.”

세미가 이야기하는 도중에 불쑥 끼어든 민지를 은우가 말렸다.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다. 단순히 A버튼에서 B가 나오는 게 아니라 A를 고르려는데 B쪽에서 제멋대로 나온다는 거구나. 꼭 미국 코미디 쇼에서 짓궂은 광대가 장난치는 것처럼 유치한 일이다. 설마 자판기가 인공지능이 있어서 멋대로 작동할 리는 없고, 귀신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왜 귀신이 쓸데없이 그런 장난을 치는데?”

수희가 민지에게 반격했다. 하긴. 이런 장난을 해서 귀신이 득볼 건 없다. 아니지. 벽에서 불쑥불쑥 손이나 얼굴을 들이미는 귀신도 쓸데없이 장난을 친다. 그러니 자판기에서 버튼 장난을 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 언니가 자기의 억울함을 알아달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거지.”

민지가 말하는 ‘그 언니’라는 분은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다. 5일 전인가 6일 전에 서점 앞 큰 길에서 뺑소니 사고가 일어났다. 피해자는 20살이 갓 넘은 대학생 언니였고 뺑소니 차량은 BMW였다고 한다. 시각은 저녁 9시가 조금 넘은 때라는데 목격자 중 어느 누구도 번호판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 길 부근은 번화가라서 네온사인이나 간판 불빛으로 환하기 때문에 웬만한 건 다 볼 수 있다. 하지만 차량 번호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그 언니네 가족은 범인도 못 잡고 보상도 못 받았다고 한다. 아, 언니는 그 자리에서 즉사.

“그렇게 한다고 범인이 제 발로 나오냐?”

수희의 말이 맞다. 뺑소니는 범인을 잡기 힘들다는데 자판기 붙들고 웃기지도 않는 되레 성질만 돋우는 장난을 친다고 해서 뺑소니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에는 그 언니가 아닌 것 같다.

수업 시작종이 울렸다. 슬그머니 애들에게서 빠져나와 자리로 돌아갔다. 오늘 집에 가기 전에 자판기에 한 번 들러봐야겠다. 팔찌 색이 변하면 귀신의 짓이고, 변하지 않으면 정말 이상한 기계 고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귀신의 소행일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지만 기에게 알려주기 전에 사전 조사라는 걸 해봐야 할 테니 말이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학교에서 나오자마자 서점 쪽으로 뛰어갔다. 으읏. 견디기 힘든 두통과 근육통이 내 몸을 마비시키고 있다. 결국 반도 못가고 길 중간에서 멈춰서야 했다. 너무 괴롭다. 조금만 무리를 해도 온 몸이 잘게 토막 나듯이 아프다. 근육이 한줄 한줄 끊어질 것 같고, 두통은 귀가 들리지 않고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하다. 누가 나 좀 도와달라고 소리 지르고 싶다.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입술도 파르르 떨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신은 이렇게 깨어 있는데 몸은 정신만큼 정상적이지 못하다. 정말 괴롭다. 아무 생각 없이, 바보 같이, 뛰는 게 아니었다.

“저 애, 아픈가 봐.”

오른 팔이 살 떨리듯 차가워졌다. 평범한 사람처럼 말하고 지나갔지만 이 기분은 분명히 귀신이다. 이 길 위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나를 걱정하거나 알아봐 주는 건 귀신 밖에 없다는 것인가? 요즘 세상이 매정하다지만 이건 좀 심한 거 아냐? 이렇게 아파하는데, 이렇게 괴로워하는데……. 아니야, 아프지 않아. 건강하다고. 물론 올해를 넘기지는 못하겠지만 죽기 전가지 건강하게 있어야 해. 난 지금 아프지 않아.

꼭 감고 있던 두 눈을 살그머니 떴다. 하교 시간이었기 때문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았다. 천천히 몸을 감싸고 있던 두 팔을 풀어보았다. 온 몸의 근육이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두통도 처음보다 많이 가라앉았다. 다리를 한 쪽씩 천천히 움직여보니 다행히 걸을 수 있었다. 또 쓰러지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몸이 곧장 움직여주니 고마을 뿐이다.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내 옆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다들 나보다 걸음이 빨랐다. 나도 지금보다 좀 더 빨리 걸을 수 있지만 근육이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지 않아서 최대한 조심했다. 온 몸의 움직임에 신경을 쓰며 걷다보니 느린 걸음에도 빨리 도착한 것 같았다. 눈앞에 문제의 자판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자판기 앞에 흰 A4용지가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직원이 ‘고장’이라고 써 붙인 모양이다. 팔지를 보니 조금씩 붉어지고 있다. 이 근처에 귀신이 있는 건 확실하다. 이제 귀신이 자판기에 있냐 없냐만 확인하면 된다.

“아까 그 애잖아?”

서점에서 젊은 여자 귀신이 나왔다. 팔찌를 보니 확실히 붉은 색으로 변해 있다. 혹시 이 여자가 자판기 소동의 범인일까?“

“넌 내가 보이니?”

여자 귀신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놀라워했다. 그 다음에는 신기해하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보통 사람은 귀신을 볼 수 없으니까 내가 자기를 알아보는 게 당연히 신기할 것이다.

“언니는 언제 죽었어요?”

귀신이랑 보이니 안 보이니 할 시간이 없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좀 무례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어제 저녁에. 병원에서 수술 도중에 못 견디고 이렇게 됐어.”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닌데 웃으면서 신나게 이야기했다. 이 언니도 살았을 때는 몸이 많이 약했던가 보다. 요즘에 수술 도중에 죽는 경우는 거의 없을 텐데 말이다. 아무튼 어제 저녁에 죽었다면 이 언니는 자판기 소동의 주인공이 아니다.

“나도…… 볼 수… 있어요?”

어디선가 6, 7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 꼬마 귀신이 나타났다. 머리를 양 갈래로 높게 묶고 있는데 베개에 비빈것처럼 잔머리가 이리저리 나와서 단정치 못했다. 옷도 노란 꽃이 잘게 그려져 있는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헤프다고 해야 할까, 그냥 걸쳐 입었다고 해야 할까, 전체적으로 깔끔하지 않았다.

“아, 응.”

“귀엽게 생겼는데, 불쌍해라.”

여자 귀신은 꼬마 귀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하지만 꼬마 귀신은 두 팔을 들어 앞을 막으며 여자 귀신의 손을 거부했다. 왠지 감이 좋지 않다. 꼬마 귀신의 모습과 행동이 역겨운 뭔가를 떠오르게 했다. 아닐 거라 생각하지만 너무 확실하고 빠르게 역겨운 것이 생각나 버렸다.

“왜? 싫어? 미안해.”

꼬마 귀신이 몸을 떨며 무서워하자 여자 귀신은 내밀고 있던 손을 거뒀다. 생각 날듯 말듯 하다. 저 꼬마 귀신의 얼굴. 어디서 본 기억이 있다.

“꼬마야. 언제부터 여기 있었니?”

“몰라요. 아주 오래 된 것 같아요. 응……. 여기에 오고 나서 정말 시간이 오래오래, 응…… 많이 지났어요.”

이 꼬마 귀신이 여기에 오래 있었다면 자판기로 장난을 친 것도 이 꼬마 귀신일 수도 있다. 그런데 자꾸 뭔가가 생각 날듯 말듯 하다. 이 불안한 기분과 갑갑한 통증은 내가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정말 기억나지 않는다. 아주 중요한 것 같은데.

“네가 자판기 버튼을 맘대로 눌렀었니?”

“……네.”

“그래.”

겁먹은 저 표정은 연민을 사기에 충분했다. 아무래도 재미로 자판기 옆에 붙어서 장난친 것 같지 않았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을 것이다.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면 미친 사람 취급받는다.”

으힛! 깜짝 놀라서 옆을 돌아보니 어느새 기가 와 있었다.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

정말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너무 깜작 놀랐다. 기가 아니라 내가 아는 다른 누군가였다면 뭐라고 변명을 했을까? 그냥 미친 사람 취급받고 말았을 거다. 어차피 이 근처에서 나한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산 사람 중에서.

“새가 말을 잘 하네.”

여자 귀신은 신기하다는 듯이 기를 쳐다보았다. 성수라고 가르쳐줘도 안 믿을 테니까 그냥 입 다물고 있었다.

“이제 명계로 가야지.”

기의 사무적인 말투에 여자 귀신은 눈을 깜빡였다. ‘저승사자’의 개념만 머리에 있었는지, 기독교의 ‘천사’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 있었는지 이런 식으로 영혼이 거둬지는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어차피 ‘성불’이란 말도 불교에서 주로 쓰는 것이고, 성수가 영혼을 거두는 것도 산 사람 입장 상 쌩뚱 맞은 이야기니까 갓 죽은 귀신께서 영문 몰라 할 만하다.

“사후 세계는 이런 식으로 가는 거군요.”

새로운 사실에 감탄까지 하다니. 살아 있었을 때 성격도 이랬을 지 궁금해진다. 기는 이 여자 귀신이 성불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머리 위에 앉아 주저 없이 성불시켰다. 기의 몸에서 뿜어지는 빛은 귀신을 볼 수 있는 산 사람이나 나처럼 특별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자, 성수, 귀신만이 볼 수 있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아주 평범한 산 사람은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없어졌다.”

여자 귀신이 성불되어 사라지자 꼬마 귀신이 약간 놀란 눈으로 여자 귀신이 있었던 자리를 쳐다봤다. 기가 꼬마 귀신에게 다가가려 하자 내가 손으로 기를 막았다. 아직 꼬마 귀신을 성불시킬 수 없었다. 자판기에서 장난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이 찝찝한 기분의 이유를 알고 싶었다.

“사정 있는 귀신이야?”

“응.”

기는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꼬마 귀신을 한 번 쳐다봤다. 꼬마 귀신은 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눈을 내리 깔았다. 자기도 방금 전 귀신처럼 사라질까봐 겁이 났을 지도 모른다. 어린 아이니까 혼자 여기서 몇날 며칠을 지내는 것도 충분히 무서웠을 것이다. 성불 장면을 직접 목격했으니 무서움이 더 커졌을 것이다.

“다 달래면 불러.”

기는 꼬마 귀신을 내게 맡기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이 근처를 돌아다니거나 집으로 갈 것이다. 어쨌든 꼬마 귀신의 성불은 뒤로 미뤄졌다.

“꼬마야. 이름이 뭐야?”

난 웃으면서 친근감 있는 투로 꼬마 귀신에게 말을 걸었다. 꼬마 귀신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위험한 사람인지 아닌지 경계하는 듯 싶었다.

“난 송지희야.”

내가 먼저 이름을 말하면 괜찮을까 해서 꼬마 귀신이 겁먹지 않게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내 소개를 했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꼬마 귀신이 내게 마음을 열어줬으면 한다. 처음에 내게 자기를 볼 수 있냐며 다가왔을 때처럼 말이다.

“전 김보리에요.”

꼬마 귀신은 천천히 또박또박 자기 이름을 말했다. 보리……. 김보리……. 이제 생각났다. 왜 아까 꼬마 귀신의 모습을 보고 역겨운 단어가 생각나고, 행동에 그리고 얼굴에 뇌가 자극 받은 게 왜인지 생각났다. 6살짜리 여아 유괴 사건. 곳곳마다 이 꼬마 귀신의 살았을 적 사진이 실린 포스터가 붙어 있다. 2주는 넘은 일이다. 이 김보리라는 꼬마 귀신이 유괴된 지 벌써 2주가 다 됐다는 이야기. 벽보는 물론이고 라디오에서도 텔레비전에서도 광고 중간에 끼어서 유괴된 아이를 찾는 방송이 아직도 나오고 있다. 부모들이 이 아이를 찾기 위해 모든 돈을 쏟아 붓고 있다는 증거다. 그 소문의 아이가 지금 귀신이 되어 여기에 있다. 부모가 알면 얼마나 허무해할까? 나도 이렇게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이렇게 조그만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유괴를 당한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잃다니……. 정말 세상이 무섭다.

“언니가 저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보리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자기를 알아봐 줄 사람을 찾고 있었나 보다. 아, 그래서 자판기 버튼을 그렇게 눌렀던 거구나. 그 동안 얼마나 무섭고 속상했을까? 난 슬며시 보리의 손을 잡았다. 귀신의 손을 잡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차다. 귀신의 방향을 체크할 때 몸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보리의 솜도 차갑다. 사늘한 시체. 이 말의 의미가 이 감촉일지도 모른다.

“유괴된 여자 아이가 보리 맞지?”

“네. 엄마랑 아빠가 여기저기에 종이를 붙이는 거 봤어요. 우는 것도 봤어요.”

보리는 처음에 이 근처를 돌아다녔었나 보다. 엄마와 아빠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바로 달려갔을 거다. 하지만 귀신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니까 속상하고 또 속상했을 거다.

“많이 무서웠지?”

보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니까 보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동안에도 혼자 많이 울었겠지? 자기를 볼 수 있는 사람을 찾으면서 많이 울었을 거다. 자기를 볼 수 있는 사람……. 잠깐만, 왜? 주변에서 다른 귀신도 찾을 수 있을 텐데 왜 산 사람을 찾는 거지? 꼭 산 사람이어야만 하나? 그러면, 죽은 사람은 못하고 산 사람만 할 수 있는 일 중에 보리가 애타게 하고 싶어 하는 일이라면…….

“보리야. 지금 네 몸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

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귀신이 된 자신이 아니라 이미 시체가 된 자신의 육체를 찾아달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라디오에서 보리의 부모님이 보리의 시신이라도 찾았으면 좋겠다고 한 적이 있다. 보리도 자기 몸만이라도 부모님께 돌아갔으면 하고 바랄 것이다. 그렇다면 6살의 사고치고는 꽤 괜찮은 방법을 선택했다. 이 자판기 근처에 보리의 몸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 자판기를 살피다가 우연히 보리를 발견할 테고 그러면 범인은 못 잡아도 피해자는 시신이라도 찾는 사건으로 종결될 것이다.

응? 보리가 갑자기 내 팔을 끌어당겼다. 엉겁결에 따라가니 서점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갑자기 서점은 왜? 에…… 설마. 시체가 서점 안에 있다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벌서 냄새 때문에 티가 났을 텐데.

“여기 뒤.”

보리는 책장 한 곳을 가리켰다. 다른 책장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 평범한 책장이었다. 그리고 벽 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라 이 뒤에 종이 몇 장 외에는 들어갈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았다.

“여기가 정말 맞아?”

“뭘 찾는데?”

으힛! 서점 주인이 갑자기 내 옆에 왔다. 오랜만에 서점에 온 나를 반겨주는 듯한 밝은 표정이었다. 보리는 내 손을 곽 잡더니 내 뒤로 가서 섰다. 보리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다. 서점 주인의 눈도 있고 해서 보리를 모른 척 하며 태연하게 서 있는데, 무표정을 일관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보리를 모른 척 하는 것은 어렵다. 일단 지금은 서점 주인을 얼른 상대하고 여길 나가야 한다.

“학교에서 필독도서를 내줬는데 못 찾겠어요.”

난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서 말을 만들어냈다.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다. 다음 주까지 필독도서 5권 중에 1권을 읽어서 독후감을 제출해야 한다. 다만, 나는 그 중에 두 권이나 집에 있기 때문에 살 필요가 없다.

“그 책은 저 쪽 맞은편에 있단다.”

“감사합니다.”

난 보리의 손을 잡은 채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팔을 흔들며 걸어갔다. 걸어가다가 책장 앞바닥에 물이 조금 고여 있는 것을 언뜻 봤다. 보리의 말대로 책장 뒤에 시체가 있다면 바닥에 고여 있는 물은 시체에서 나온 물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려면 조건이 하나 있다. 그 물이 책장 밑바닥에서 새 나와야 할 것. 그 조건만 확인하면 경찰에 바로 연락 할 수 있다.

서점 주인이 손님들 때문에 계산대로 돌아갔을 때 슬며시 보리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보리만 들을 수 있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거기 바닥에 물이 고여 있었어. 그 물이 책장 밑에서 나온 건지 확인해 볼래?”

“네.”

보리는 짧게 대답하고 나서 아까 그 자리로 다시 갔다. 난 책을 한 권 꺼내서 가격을 확인하는 척 했다. 보리가 잽싸게 다녀오는 타이밍에 맞춰서 책을 꽂아 놓았다.

“언니 말이 맞아요. 물이 책장 밑에서부터 나온 거에요.”

빙고. 이제 유유히 이 서점을 나가서 경찰을 찾으면 된다. 시체가 서점에 있다는 것은 서점 주인이 범인이거나 최소한 공범이라는 거니까, 잘 하면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보리는 편안하게 성불 할 수 있겠지.

난 보리의 손을 잡고 다른 손님과 함께 서점 밖으로 나갔다. 서점 주인은 잡지를 뒤적이는 학생들에게 정신이 팔려 나를 보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의심을 사면 곤란하니까 서점 밖으로 나갈 때까지 긴장을 늦춰서는 안됐다. 보리가 몸을 떠는 건 당연하겠지만 나도 지금 다리가 후들거린다. 내가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아니면 보리를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까라는 단순한 이유가 아니다. 정말 역겨운 유괴 사건을 깔끔하게 종결내고 싶다. 그 뿐이다. 물론 마지막에 보리의 성불을 하는 것을 입으면 안 되겠지.

“보리야. 언미나 따라다녀. 알았지?”

“네.”

보리는 내 손을 더 꽉 잡았다. 손의 냉기에 이미 익숙해졌다. 죽은 사람의 손을 잡으면 처음에는 차갑지만 점차 산 사람의 체온이 전해지면서 그 손이 차갑다는 걸 알지 못하는 그런 거였다. 실제로 죽은 사람의 손을 잡아본 적이 없지만, 가족의 시신을 지키는 누군가의 기분이 지금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나는 보리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지구대를 향해 걸어갔다. ‘파출소’라는 개념이 ‘지구대’로 합쳐진 지 꽤 됐지만 아직 입에 붙지 않는다. 아무튼 이 근방을 중심으로 넓게 관할하고 있다는데 내가 사는 곳에 그 중심 건물이 있다니까 은근히 치안 수준이 높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철없는 생각이지만…….

이런저런 잡다라한 생각을 하며 걷는 새에 벌서 지구대에 도착했다. 걷는 동안 보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말을 걸지 않아서였을까? 난 혼자 다니는 게 습관이 돼서 걸으면서 머릿속으로 생각은 많이 하는데 말하는 건 거의 하지 못한다. 점차 익숙해져서 보리가 귀신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는데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걸어가니까 새삼 ‘귀신’으로 보인다. 이러다가 산 사람과 귀신을 구별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다.

“저기…….”

지구대의 유리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경찰 제복을 입은 아저씨들과 언니(제일 젊어 보인다. 차마 아줌마라 할 수 없다.)가 제 일에 바빠 내가 들어오는 걸 보지 못했다. 처음 들어가 보는 곳이라 쭈뼛거리며 들어가는데 한 쪽 벽에 걸려있는 게시판이 눈에 들어왔다. 현상수배를 비롯한 갖가지 범죄(자) 관련 서류들이 붙어있다. 보리의 유괴 사건도 보이는 것 같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한 아저씨가 웃으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계급장을 보니 꽃봉오리가 4개. 내가 경찰 계급에는 문외한이므로 저 아저씨가 얼마나 높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약간 높은 편이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아니라면 별 수 없고.(글쓴이 왈, 경찰 계급은 꽃봉오리 2개부터 4개까지 순경, 경장, 경사라 부르고, 그 다음은 활짝 핀 꽃 한 송이부터 경위, 경감, 경정, 총경 순으로 매긴다. 경위부터 간부라 한다. 그러니 지희에게 말을 건 사람은 경사. 계급이 높냐 낮냐는 독자 개인이 평가하시길.)

“저…… 음…….”

여기에 들어온 것도 난생 처음이고 경찰과 직접 대화를 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에 뭘 먼저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다. 대뜸 ‘서점에 보리의 시체가 있어요.’라고 말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봉사활동하려고?”

“아뇨. 다른 일이에요.”

난데없이 웬 봉사활동? 공관서에서 중학생 봉사활동을 제일 귀찮아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리고 지구대에서 봉사활동 거리를 찾아봤자 뭐 있다고 일부러 찾아가겠나. 아우, 중요한 건 이게 아닌데.

“혹시 도망치는 살인범이라도 본 거니?”

딱 한 명 있는 경찰 언니가 물어봤다. 내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나 보다. 언니, 생긴 건 정말 참하게 생겼는데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좀 무섭습니다. 그런 질문을 하시다니요. 아… 그 질문은 나를 곤란에서 구제해 줄지도 모른다. 살인범은 아니지만 범죄 냄새를 풍기는 걸 보았으니까 이야기를 진행하기 수월할 지도 모른다.

“비슷한 거요.”

심각한 표정으로 경찰 언니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 경찰 언니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내게 다가왔다.

“저기에 앉아서 말해 볼래?”

보통은 애들이 이런 말 하면 웃으면서 잘 안 들으려 할 텐데 내가 표정이 가히 심각했는지 언니가 자리를 안내해 줬다. 그리고 나에게 녹차를 타 주는 언니의 표정은 상당히 부드러웠다. 내가 겁을 먹었을까봐 그런 걸지도 모른다.

“뭘 봤니?”

‘시체에서 나온 물’을 봤다고 하면 배수구나 하수구가 새서 그렇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올 것이다. 보리가 서점에 자기 몸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으니까 찔리지만 거짓말을 보태는 수밖에.

“썩은 시체 냄새가 났어요. 이상한… 좀 불쾌한 물자국도 보였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