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신의재림-두번째라그나로크(완)

신의 재림 : 제 1문 (5)

★은하수★ 2009. 5. 7. 17:07

“I'm home.(나 왔어.)”

베일리는 교복 재킷은 벗어 손에 들고, 셔츠는 땀에 잔득 젖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땀으로 머리를 감은 듯이 젖어 있었고, 그 머리카락을 적시고 남은 땀들이 목을 타고 셔츠 속으로 흘렀다. 아직 여름이 되려면 멀었으나(이제 3월이나)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듯 했다.

“Why are you so late?(왜 그렇게 늦었어?)"

베일리와 마찬가지로 검은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현관 쪽으로 나왔다. 베일리의 형 네일리 가디언(Neilly Guardian)이었다. 많이 닮기는 했으나 네일리의 눈은 양쪽 다 정상적인 검정 눈동자였다.

“I want to take a shower first.(우선 샤워를 하고 싶어.)”

베일리는 네일리의 질문을 가볍게 건너뛰고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한국에서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다는 것을 또 잊었는지 욕실 문 앞에 다다라서야 신발을 벗고 욕실화로 갈아 신었다. 베일리가 욕실 문을 닫으려는데 네일리가 막았다.

“Why?(왜?)"

“Please take off your shoes at the porch.(제발 현관에서 신발 벗어.)”

베일리는 욕실 앞에 벗어 놓은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 보고나서 네일리를 봤다.

“Sorry. Would you arrange my sneakers?(미안해. 내 운동화 좀 정리해 줄래?)”

“Okay, till naw. Be careful next time.(알았어, 지금까지 만이야. 다음부터 조심해.)”

“I will.(그럴게.)”

베일리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고 나서 욕실 문을 닫고 목욕을 시작했다. 네일리는 베일리의 운동화를 현관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베일리가 지나간 자리에 남아 있는 흙을 청소기로 말끔히 치웠다.

가디언 형제는 부친이 미국인이고 모친이 한국인으로, 네일리가 7살, 베일리가 5살(둘 다 한국나이) 때 부모님이 이혼하여 따로 살았다. 네일리는 모친을 따라 한국에서, 베일리는 부친과 계모와 함께 미국에서 살았다. 모친 역시 재혼을 했으나 재혼한지 1년도 안 돼서 남편이 의문사를 당했고 여태까지 혼자 네일리를 키웠다. 외국계 회사에서 일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풍족한 편이었다. 여름 방학 때는 네일 리가 미국에 가고, 겨울 방학 때는 베일리가 한국에 와서 생활했기 때문에 형제간의 우애는 해가 지날수록 돈독해졌다.

지금은 우연히 베일리가 교환학생으로 선택 돼서 한국에 오게 된 것이다. 소꿉친구인 레이 스트림과 같이 왔지만 레이는 타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했다. 올해 한국 나이로 네일리는 20살, 베일리는 18살로 네일리는 대학에 진학한 상태고 베일리는 외고의 1학년으로 등록되었다.

[따르릉 따르릉]

“네, 여보세요.”

[뚝]

“응?”

전화벨이 한참 울리고 나서 받은 것도 아닌데 내일 리가 수화기를 들고 대답하자마자 끊겨버렸다. 네일리는 장난전화인가 보다 하고 수화기를 도로 내려놓았다. 그 때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따르릉 따르릉]

“네. 여보세요.”

[뚝]

“어…….”

방금 전과 똑같이 금방 전화가 끊겼다. 네일리는 전화벨이 다시 울릴 것을 기다리며 전화기 앞에 서서 기다렸다. 얼마 안 있어 다시 전화벨이 울렸고 네일리는 곧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준아, 엄마야.”

수화기 건너편에서 가디언 형제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일리 가디언의 한국 이름은, 어머니의 성을 따라 송 씨이고 이름은 준이다. 더불어 베일리는 송훈이다. 한국에서는 무조건 한국어와 한국식 이름을 사용해야 했다. 가디언 형제의 어머니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전 남편과 확실하게 연을 끊었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이 아이들에게 이것들을 강조한 것이었다.

“혹시 아까 계속 전화를 끊은 것도 엄마셨어요?”

“미안, 휴대폰이 잘 안 터져서 그래. 훈이는 들어왔니?”

“네, 지금 샤워 중이에요.”

“엄마가 오늘 일찍 들어갈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저녁밥은 스페셜 메뉴로 만들어줄게.”

가디언 형제의 어머니는 상당히 발랄하게 이야기했다. 어렸을 때였다면 네일리도 같이 발랄하게 ‘정말? 뭐? 뭐 할 거에요?’라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빙긋 웃으며 어머니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훈이한테 방정리를 말끔하게 해 놓으라고 전해.”

“네, 그럴게요.”

“그럼 끊는다.”

[뚝]

[달칵]

네일리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이제 막 욕실에서 나오는 베일리를 향해 돌아봤다. 베일리는 젖은 머리를 손으로 털려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거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한 번 보고 나서 네일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What time do mom come back?(몇 시에 엄마께서 돌아오셔?)”

“훈아, 여기는 한국이야.”

네일리는 베일리를 엄한 표정으로 보며 말했다. 베일리는 표정이 뚱해졌다.

“Mom can't hear what I speak.(엄마는 내가 말하는 걸 듣지 못하셔.)”

“너 여기에 한두 번 오는 것도 아니잖아. 약속한 건 지켜야지. 아까는 그냥 넘어간 거야.”

“Talk about what I asked you.(내가 물어본 걸 말해.)”

베일리는 끝까지 영어로 말했다. 어느 정도 선까지 장난을 쳐야 네일 리가 화를 내지 않는 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은 물러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네일리의 표정은 그 장난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이 좀 화난 듯 했다.

“난 오늘 네가 멋대로 한 행동을 용서할 수가 없어.”

네일리의 뜬금없는 발언에 베일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What? Just moment. What are you talking about?(뭐? 잠깐만. 뭘 말하는 거야?)”

네일리는 베일리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베일리를 내려다보는 네일리의 눈은 상대를 위축시킬 정도로 위압감이 강하게 서려있었다. 베일리는 네일리의 눈을 본 순간 위압감뿐만이 아니라 표현하기 힘든 공포도 느꼈다. 뭔가 오한 때문에 소름이 돋는 듯 했다. 네일 리가 화를 내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그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죄책감을 가질 수 있었다. 베일리는 언제나 네일리의 이런 눈에 약했다.

“설마 내가 영어 몇 마디 했다고 이러는 거야?”

“내가 그렇게 속 좁은 인간이야?”

베일리는 네일리의 눈치만 살피며 입 다물고 네일리의 말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민혁은 낯익은 광경을 꿈으로 꾸고 있었다. 신 로키였을 때의 자신이 큰 의자에 앉아 있고 그 맞은편에는 거인족 여자 한 명이, 그 둘 사이에는 각자 생김이 다른 세 개의 생명체가 바닥에 앉아있었다. 거인족 여자는 로키의 아내였던 앙그르보다였고 세 개의 생명체는 각각 괴물 늑대 펜리르, 괴물 뱀 요르문간드, 죽은 자의 여왕 헬이었다. 아직 신족들에 의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기 전으로 나름대로 화목해 보였다.

펜리르와 요르문간드는 서로 장난을 치고 있었고 헬은 앙그르보다와 마주보며 앉아서는 앙그르보다의 치마 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로키는 그들의 모습을 아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펜리르가 앞발로 요르문간드의 머리를 잘 못 쳐서, 요르문간드는 몸을 배배 꼬다가 로키에게로 기어갔다.

“아빠, 아빠. 형이 나 쳤어.”

요르문간드가 로키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서는 로키의 무릎 위에 몸을 돌돌 말며 있었다. 로키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요르문간드의 몸을 쓰다듬어 주었다. 펜리르는 미안해서 로키의 가까이 다가갔다.

“아빠. 나 장난이었어.”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로키의 바지 밑 부분을 물고 살짝 잡아당겼다. 그 때 헬이 펜리르에게 다가가서 꼬리를 살포시 잡았다. 털이 복슬복슬한 펜리르의 꼬리는 느낌이 푹신해서 헬이 곧 잘 가지고 놀았다. 펜리르는 물고 있던 것을 놓고 헬을 돌아보았다.

“야아, 헬.”

“우웅, 푹신푹신해.”

펜리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헬은 그 움직임을 따라 머리를 흔들었다. 펜리르는 꼬리를 멈추고 다시 로키의 바지 밑 부분을 살짝 잡아당겼다.

“아빠, 난 정말 장난이었어.”

“알아, 알아.”

로키는 허리를 숙여 펜리르를 두 손으로 잡고, 올려 안았다.

“펜리르 오빠, 왜 그래?”

헬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펜리르를 쳐다봤다. 펜리르는 로키에게 안긴 채 요르문간드를 내려다봤다. 눈치가 빠른 헬은 요르문간드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요르문간드 오빠는 또 삐진 거야? 펜리르 오빠가 장난한 거 가지고?”

헬이 어린 아이 나무라듯이 말하자 요르문간드는 머리를 몸 쪽으로 바짝 당겨서 숨겼다. 그러자 로키가 요르문간드의 몸을 다시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헬은 오른손 검지로 펜리르의 코끝을 툭툭 건드렸다.

“왜?”

“나랑 뱀딸기 따러 가자. 요르문간드 오빠는 삐쳐서 안 갈 거야.”

헬은 정말 천진난만한 여자 아이의 얼굴로 빙긋 웃으며 말했다. 펜리르는 요르문간드와 헬을 번갈아 가면서 봤다. 그리고는 로키의 눈을 향해 살포시 올려다봤다.

“갔다 오렴. 헬이 가고 싶다잖아.”

로키는 펜리르를 헬 옆으로 내려다 주었다. 헬은 앙그르보다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엄마, 엄마. 조그만 바구니 하나만.”

“그래. 기다리고 있어.”

앙그르보다는 부엌으로 걸어갔다. 헬은 다시 펜리르에게 가서 한 번 더 빙긋 웃어보였다.

“자, 펜리르랑 헬이랑 하나씩.”

앙그르보다는 조그만 바구니 한 개를 펜리르의 등 위에 올려주었고 나머지 한 개를 헬에게 건네주었다. 헬은 바구니를 받아 들고서는 로키를 향해 돌아보았다. 요르문간드는 머리를 약간 들고 펜리르와 헬을 슬쩍 훔쳐보고 있었다. 헬은 그런 요르문간드를 발견하고 나서 로키에게 방긋 웃어보였다. 로키도 같이 미소지어 보였다.

“오빠, 가자.”

헬은 현관문 앞까지 쪼르르 달려간 후에 펜리르를 불렀다.

“응. 다녀올게.”

펜리르는 로키와 앙그르보다에게 인사한 후에 헬에게 다가갔다.

[툭]

헬이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은 순간 요르문간드가 바닥으로 내려왔다.

“나도 갈래.”

“이제 괜찮아?”

펜리르가 요르문간드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난 삐진 적 없어.”

요르문간드는 유유히 펜리르와 헬을 향해 기어갔다. 헬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펜리르 역시 요르문간드에게는 못 당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로키는 그런 세 형제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요르문간드는 펜리르나 헬처럼 바구니를 따로 소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앙그르보다는 요르문간드 몫의 바구니를 펜리르의 등에 펜리르 몫의 바구니와 겹쳐 올려놓아 주었다.

“진짜로 갔다올게.”

헬이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펜리르와 요르문간드가 먼저 밖으로 나가고 마지막으로 헬이 나가서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정말이지 귀여운 아이들이야.”

로키가 자신과 마주보며 의자에 앉은 앙그르보다에게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아이들이 제일 귀엽잖아요.”

앙그르보다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로키는 거인족이긴 해도 보통 인간이나 신처럼 작은 체구에 미소년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뛰어난 말재주와 괜찮은 마법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최고신 오딘과 의형제를 맺을 수 있었다. 그래도 그는 어엿한 거인족이라 신족에게는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로키는 거인족의 신, 거짓말·장난 등의 신으로 불리는 신이기도 해서 신족에 애틋함을 가지기도 했다. 그는 이런 반거인, 반신의 어중간한 존재였다.

그러나 앙그르보다는 완전한 거인족. 체구도 크고, ‘신의 아내’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다른 거인들과는 멀리 떨어져있지만, 여기는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자연이 펼쳐져 있어서 아이들이 외로워하지 않고 지낼 수 있어서 좋아.”

“아이들만 즐겁게 지낼 수 있다면 어디든 괜찮아요.”

로키의 약간의 서글픔이 섞인 한 마디에 앙그르보다는 밝게 대응했다. 로키의 말처럼 그들은 외딴 곳에 떨어져 살고 있었다. 로키는 신족이긴 하나 그건 오딘과 의형제를 맺으면서 얻은 표면상의 칭호. 육체 자체는 거인족이었다. 앙그르보다도 거인족. 그러나 그들 사이의 아이들은 셋 다 거인이 아닌 괴물이었다. 괴물 늑대, 괴물 뱀, 죽은 자 같이 반 썩은 시체의 육체를 가진 여자 아이. 신족이 꺼리는 것은 당연하고 거인족 마저도 로키의 가족들을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이변의 가족은 어느 누구와도 어울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맞아. 아이들만 잘 자라준다면 더 바랄 것도 없어.”

“여기는 아무도 오지 않으니까 아이들이 상처받을 일은 생기지 않을 거에요.”

“음. 그러면 좋겠지만.”

로키의 얼굴에는 약간의 걱정이 비쳐 있었다. 앙그르보다가 그 표정을 읽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이들이 성년이 되기만 하면 이런 걱정은 다 사라질거에요.”

“아니, 더 위험해 질 수 있어. 요즘 신계에서 은근히 나를 피하는 듯 해. 우리 아이들에게 뭔가 해코질 할지도 몰라.”

로키는 한 층 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로키의 발언에 앙그르보다는 발끈했다.

“왜요? 우리 아이들이 왜 신족한테서 미움 받아야 하죠?”

“어이, 어이. 진정해.”

로키는 바로 앙그르보다를 진정시켰다. 앙그르보다의 욱 하는 성격은 금방 가라앉지 않았다. 자신의 아이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다든지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든지 하면 누구든 앙그르보다처럼 감정적으로 변하게 된다. 로키도 마찬가지였으나 좀 이성적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감정을 억눌렀다.

“하지만 여기서 조용히 잘 지내고 있으면 괜찮을 거야.”

미소와 함께한 로키의 말은 앙그르보다의 방방거림을 한 층 더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린 평소처럼 지내면 되는 거야.”

“뭐, 달리 큰 일이 일어날 것도 없는 걸요. 아이들도 저희들끼리 잘 지내고요. 가끔 요르문간드가 잘 삐져서 그러지.”

“응. 계속 이렇게 지내면 되.”

로키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계속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의 심중에 거치적거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앙그르보다는 로키의 얼굴에 나타난 미소만 보고 저도 미소를 지으며 안심했다.

로키가 속으로 걱정하고 있을 때 뭔가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

민혁은 엷은 한숨을 쉬며 잠에서 깨어났다. 오른손은 알람시계의 스위치 위에 얹어져있었다. 알람 소리에 꿈에서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민혁은 천장을 바라보며 가만히 누워있었다. 꿈을 다시 되새겨 보는 듯 한 눈이었다. 그리고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 가리고 뒤숭숭한 마음을 가다듬었다.

[달각 달그락]

부엌에서 어머니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혁은 상체를 일으켜 세운 후에 자신의 몸을 닾고 있는 이불을 걷어냈다.

“하마터면 악몽이 될 뻔했어.”

민혁은 그 꿈의, 그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오른손이 저절로 가슴을 향해 올라갔으나 차마 가까이 대질 못했다. 마음이 너무 아팠던 기억이고, 과거이고, 꿈이었지만 현재는 아니었기에 감정을 최대한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과거를 현재까지 끌고 있으면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기 때문에 굳세게 자신을 조일 필요가 있었다.

“기억의 봉인을 풀고 나면 이렇게 괴롭구나. 아니, 새삼스레 뭘……. 이 정도는 예상했잖아.”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 가슴 앞에서 머뭇거리던 오른손은 결국 가슴에 붙어 웃을 꽉 쥐었다.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아픈, 절대로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시간이 지난 만큼 더 괴로운 그 기억은 민혁의 가슴을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프게 했다.

“안 돼. 참아야 해. 난 장민혁이야. 장. 민. 혁. 로키는 이미 죽었어. 난 장민혁이야.”

계속해서 자신에게 명심시키고, 억지로 자신을 몰아세웠지만 민혁의 감정은 이성으로 다스리기엔 너무 격해져 있었다. 결국 감정은 잠잠해지지 않고 눈물로써 밖으로 빠져나왔다. 민혁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 못하고 가슴만 쥐고 있었다. 모든 감정이 눈물로 승화되어 뺨이 마를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중에 어머니가 방 문 밖에서 민혁을 부르셨지만 민혁의 귀에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