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혁은 책상 앞에 앉아 차분히 수학 숙제를 하고 있었다. 명세기 우등생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교내 유명아로 죽을 듯이 아프지 않는 이상은 숙제 필수에 자습 필수였다. 부지런히 샤프를 움직이고 있는데 온몸에서 불안감이 느껴져 방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다시 수학 교과서를 보다가 낮에 에르띠에가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중3, 고입. 나, 장민혁이 그런 거에 불안할 리가 없잖아."
[짤깍짤깍]
샤프심 길이를 다시 조정하고 나서 수학 숙제를 마저 끝내기 시작했다. 한 번 생긴 불안감이 쉽게 사라질 리가 없겠지만 민혁은 천천히 숫자며 갖은 수학 부호들을 써내려갔다.
<로키>
낯설은 목소리에 민혁은 고개를 확 들었다. 민혁도 텔레파시를 쓸 수 있는 입장이지만 혹시나 환청인가 해서 침묵을 지켰다. 민혁은 마지막 몇 글자를 다 채워 쓴 후 샤프를 내려놓고 책을 덮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수학책과 공책을 책가방 안에 넣어 놓고 컴퓨터 활용능력 수험서를 꺼내 펼쳤다.
"너무 민감해졌어."
민혁은 손을 가만히 이마 위에 올려 짚었다.
<로키>
"윽."
[덜컹, 끼익]
민혁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고, 의자의 바퀴가 끌리는 소리는 귀가 찢어지게 거슬리는 소리로 방 안을 채웠다. 민혁은 양 팔로 책상 위를 짚고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
<로키>
다시 그 목소리가 텔레파시로 울려왔다.
<누구냐?>
민혁도 텔레파시로 대응했다. 자신이 보낸 텔레파시가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됐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상대의 응답을 기다렸다.
<역시 로키가 맞았군 그래.>
<미안하지만 자기가 누군지 먼저 밝히시지>
<아직 각성을 하지 않았는가?>
그 목소리는 우려 반, 놀라움 반 섞인 투로 전달됐다. 민혁은 기분이 묘했지만 냉정을 유지하면서 차분히 상대의 말을 들었다. 물론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오늘 만났었지.>
그 목소리의 말에 민혁은 약간 놀랐다.
<에르띠에의 집에서 날 봤을 거야.>
민혁은 그 순간 에르띠에의 뒤에 서 있던, 후에 의문의 말을 남기고 가버린 그 남자가 뇌리에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의 목소리와 텔레파시의 음성이 같았다.
<근데 날 어떻게 알고…….>
<간단해. 로키를 찾는 건 어려웠지만 찾은 후는 텔레파시 정도야 기본이니까.>
<아까부터 계속 로키라고 부르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만나서 하지 않겠어?>
목소리의 제안은 민혁을 망설이게 했다. 상대는 뭔가 알고 있는 듯 했고 민혁과 마찬가지로 텔레파시를 쓸 줄 알았다. 분명히 민혁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민혁은 섣부른 행동을 자제하기로 했다.
<난 당신이 누군지 몰라.>
<만나면 알게 되니까 조금 협조해 줬으면 한데.>
다시 한 번의 정중한 제안에 민혁은 잠시 생각을 해보고 대답했다.
<좋아.>
[띠리링 띠리링]
민혁이 승낙한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민혁은 흠칫 놀랐다. 뭔가 놀라운 타이밍 매치였다. 다시 차분히 상대의 말을 기다리는데 밖에서 어머니가 민혁을 불렀다.
"진원 선배라는데!"
민혁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거실 현관 쪽으로 나갔다. 민혁에게 그런 이름의 선배는 없었다. 아니, 아는 선배라고는 남인철, 한 사람 뿐이었다. 그것도 만나면 안부 인사나 나누는 정도로 말이다.
"고입에 피곤해하는 중3을 위로하고자 왔지."
현관 앞에 서 있는 진원은 빙그레 웃으며 민혁에게 말했다. 에르띠에의 집에서 봤던 남자가 확실했다.
"아, 어서 오세요."
민혁은 상황을 살피고 재빨리 눈치껏 대응했다. 냉정을 유지하는 표정에서는 진원의 갑작스런 등장에 따른 당황이 보이지 않았다. 여차하면 텔레파시로 입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머님, 오늘은 제가 민혁이에게 저녁을 사 주고 싶은데 데리고 나가도 되겠지요?"
"물론이지."
진원의 정중한 요청에 민혁의 어머니는 아무 거리낌없이, 단번에 승낙해버렸다. 방긋방긋 웃는 얼굴은 약간 아방한 성격이 그대로 비쳐졌다.
"잠바 가지고 나올게요."
민혁은 방으로 돌아가 옷걸이에 걸려있는 잠바를 집어 들었다. 너무 빠르게 진행되는 (이상한 일의) 전개로 머릿속이 묘하게 복잡해졌지만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고 나서 거실로 나가며 잠바를 입었다. 현관 앞에서 진원과 어머니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머니는, '민혁에게 이런 선배가 있는 줄 몰랐는데'라 하고, 진원은 '나이 차가 나는 편이라 자주 만나지 못해서 모르시는 걸 겁니다.'라고 대응했다.
<괜찮은 임기응변 솜씨군요.>
민혁은 진원과 마주 본 상태에서 비아냥거리는 투로 텔레파시를 보냈다. 진원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조심해서 갔다 오렴. 너무 늦지는 말고."
"네. 다녀오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민혁과 진원은 현관문을 나서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갈 때까지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텔레파시마저도 없던 중에 진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직 3월이라 저녁은 춥군. 그래도 인적이 드문 공터가 괜찮겠지?"
"이미 그 쪽으로 걸어가고 있잖아요."
"경계심이 가득한 차가운 대답이야."
진원은 빙그레 웃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민혁은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저녁의 길거리는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밝은 편이었고, 네온사인이 여기저기서 번적이고 있어 낮을 방불케 했다. 청소년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농구코트와 쉬어가기에 딱 좋은 벤치들이 여럿 있는 조그만 공원은 상점가와 좀 떨어져 있는데다가 가로등도 몇 개 없어서 조금 어두웠다. 진원은 일부러 가로등 빛조차 잘 비치지 않는 벤치를 골라 앉았다. 민혁은 그 벤치의 끄트머리에 살짝 걸터앉았다.
"너무 경계할 필요 없어."
"경계할 필요가 있어요."
"뭐, 그래도 지금은 경어르 쓰는 걸 보니까 처음보다는 경계가 풀렸다는 거겠지?"
"일종의 연장자에 대한 존대라고 생각하세요."
미소을 일관하며 대하는 진원에 비해 민혁은 싸늘한 분위기로 공격하는 투의 언술을 구사했다.
"내가 중3이라는 건 어떻게 안 거에요?"
"질문 순서가 어긋날 것 같은데?"
민혁은 상황을 자신에게 좀 편하게 돌리고자 진원이 본격적인 대화를 끌어내기 전에 먼저 질문을 던졌다. 진원은 민혁의 옆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며 표정을 읽어냈다.
"간단해. 에르띠에에게 전화해서 알아낼 거야. 서로 숨기는 사실이 있는 사이니까."
진원의 마지막 말은 민혁의 귀를 솔깃하게 했으나 민혁의 포커페이스를 깨뜨릴 정도는 되지 못하였다.
“미스터리틱하지? 이번에는 판타지틱한 이야기를 해 볼까?”
“절 불러낸 이유인가요?”
진원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목걸이 줄을 끌러서 펜던트로 달아 놓은 궁니르를 빼 오른손에 쥐었다. 민혁을 향해 살짝 미소 지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법이라도 쓸 건가요?”
“맞아.”
“말도 안 되는……. 아.”
민혁은 고개를 돌려 진원을 외면하려 했으나 진원의 발밑에 마법진이 빛을 내며 그려지자 시선이 저절로 그 쪽으로 고정되었다. 진원의 오른손 위에서 궁니르가 점점 길어지자 민혁의 눈도 놀라움에 의해 점점 커졌다. 속임수를 이용한 마술이라고 주장하고 싶어도 궁니르에서 나오는 은은한 빛이며 마법진의 빛은 정말 판타지틱한 마법이었다.
“이게 뭔지 알아?”
진원의 말에 민혁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진원은 이미 궁니르를 바로 세워 오른손으로 잡고 있었다.
“뭐, 흔히 게임 용어로 마법 아이템이라고 하는, 그런 거 아닌 가요?”
민혁은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나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 정신적으로 약간 흐트러졌다. 이에 진원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아이템이 아니야. 이건 신의 무기야.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초 레어 아이템이지. 지팡이처럼 쓰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궁니르’라는 이름의 내 창이지.”
진원의 말을 찬찬히 듣고 있던 민혁은, 정신이 다시 날카로운 사고를 할 수 있게 원상 복귀되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신이라는 건가요?“
“아니, 전생이 신이었던, 환생한 인간이야. 인간으로서 신의 무기를 쓰는 것 뿐이야.”
“그 말을 믿으라는…….”
“곧 믿게 될 거야.”
진원은 민혁의 말을 끊고 궁니르로 마력을 모았다. 민혁은 진원의 움직임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진원의 발밑에 새로운 마법진이 생겨났다. 진원을 중심으로 반경 2.5m정도 되는 거대한 원형 마법진이었다. 마법진 내의 모든 선과 글자는 처음에는 햇빛처럼 밝고 투명한 빛을 내다가 점차 붉은색으로 변화하였다. 진원의 몸 주위에는 수십 개의 룬 문자가 푸른빛을 띄며 허공을 떠돌았다. 민혁은 숨을 죽이며 그 모습을 조그만 움직임 하나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안수저 페후 에이화즈 페르쓰 오실라(ansuz fehu eihwaz perth othila). 안수저 페후 에이화즈 페르쓰 오실라. 안수저 이사 케나즈 페후 오실라(ansuz isa kenaz fehu othila). 안수저 이사 케나즈 페후 오실라.”
반짝이는 은빛의 궁니르가 점차 붉은빛을 방출하더니, 진원의 주위를 배회하던 룬 문자들이 궁니르의 창머리(둥근 태양 모양으로 아홉 가지의 태양 광선이 원 둘레에 붙어 있는 형상이다.)로 흡수되었다. 진원이 같은 주문을 한 번 더 외우자 민혁의 발밑에도 비슷한 마법진이 붉은빛을 내며 생겨났다.
“잠깐, 지금 뭘 하려는 거에요?”
민혁은 재빠르게 일어섰다. 그 마법진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네 영혼 속에 잠겨 있는 ‘기억의 봉인’을 풀려는 것뿐이야.”
“봉인이라뇨? 앞뒤 상황을 설명부터 하고……, 읏!”
민혁의 몸 주위에 푸른빛의 룬 문자들이 생겨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민혁은 순간적으로 두 팔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안수저 페후 에이화즈 페르쓰 오실라. 안수저 이사 케나즈 페후 오실라.”
진원이 주문을 외오던 것을 멈추자 궁니르의 창머리가 피보다 더 붉은색을 띠게 되었다. 진원은 색이 변한 창머리 부분이 민혁을 향하도록 궁니르를 고쳐 들고, 궁니르를 붙들고 있는 오른팔을 쭉 뻗었다. 그러자 민혁의 주위에 있던 룬 문자들이 민혁의 이마 앞에서 구 모양의 푸른빛 덩어리로 합쳐졌다. 민혁은 얼굴을 가렸던 두 팔을 천천히 내렸다.
“아, 저기……. 어떤 말이든 믿을테니까 이제 그만 하죠.”
민혁은 웃는 표정을 짓기 위해 애를 썼다. 진원은 살짝 미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았어요. 맘대로 하세요.”
“기억의 봉인 해제.”
[슈욱]
민혁이 반쯤 포기한 듯이 말하자 진원은 곧장 마법의 시동어를 속삭이듯이 말했다. 목소리는 그 크기가 작았으나 약간의 울림이 있어 신성하고 근엄하게 들렸다. 그 순간 민혁의 이마 앞에 떠 있던 푸른빛의 공이 점차 민혁의 이마를 통해 몸속으로 들어갔다. 민혁은 눈을 스르륵 감았고, 민혁의 몸 주위가 아주 잠깐 푸른빛으로 반짝이더니 이내 붉은빛이 여러 개의 고리를 이루며 빙글빙글 돌았다. 마법진을 비롯한 모든 빛이 서서히 사라졌고 궁니르도 펜던트 크기로 작아졌다.
“로키.”
진원은 슬며시 민혁을 불렀다. 민혁은 서서히 눈을 뜨더니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원이 설명할 필요 없이 민혁 스스로 알게 되었다. 민혁 자신은 ‘로키’라는 신의 환생이라는 것과 마주보고 있는 진원은 ‘오딘’이라는 주신의 환생이라는 것. 이 뿐 아니라 오딘의 도움으로 신이었을 때의 모든 기억을 영혼 속에서 꺼낼 수 있었다. 몇 가지의 마법 주문도. 다만, ‘기억의 봉인’은 영혼 속에 있었지만 ‘마력의 봉인’은 이 세상 어느 다른 곳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예전과 같은 마법을 쓸 수는 없었다. (현재 인간의 육체와 영혼에 내재되어있는 마력만으로 마력소비가 그나마 적은 하위 마법을 써야 한다.)
“하아.”
민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원이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민혁의 어깨를 짚어주고자 손을 내미는데 민혁은 그 손을 뿌리쳐 버렸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무표정의, 아니 약간은 차가운 표정으로 진원을 올려다봤다.
“정식으로 통성명하죠. 저는 장민혁이고 16살, 중3입니다.”
“어? 아, 나는 이름이 설진원이야. 21살이고 대학교 2학년.”
“하아.”
민혁은 다시 한숨을 쉬고 고개를 푹 숙였다.
“로키, 내 말 좀 들어 보겠어?”
“잠깐. 통성명했잖아요.”
민혁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진원은 잠시 민혁을 살펴보더니 민혁의 옆에 약간 떨어져 앉았다.
“그래 민혁아. 사전 준비가 끝나겠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지.”
진원은 밤하늘을 한 번 쳐다봤다. 주변은 더 어두워졌으나 별은 한 두 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트가르드 로키를 기억하고 있겠지?”
“그 마법 실력이 뛰어난 우수한 두뇌의 거인왕을 말하는 거죠?”
민혁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진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신들이 환생하기 전에 우트가르드 로키의 영혼과 프리그의 영혼인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의 경계에서 마력 충돌을 일으켰어. 너도 알다시피 프리그는 스피릿 크리스털을 수호하고 있었잖아? 그 마력 충돌은 규모가 굉장했다고 해. 난 그 충돌 직전에 프리그의 도움으로 환생해서 정확한 건 잘 모르지만, 결말은 우트가르드 로키의 승리였어.”
그 순간은 민혁은 고개를 확 들고 진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진원은 민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채고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스피릿 크리스털은 신계를 지탱해 주는 4대 보물 중 하나에요. 또, 그걸 수호하는 프리그이고. 아무리 우트가르드 로키가 똑똑하고 마력이 강하다 해도, 프리그를 이긴다는 건 무리에요.”
“무리이긴 하나 불가능하지는 않아.”
진원은 이렇게 말하고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설마 그 당시에 우트가르드 로키의 마력이 프리그보다 위였다는 건 아니겠죠? 스피릿 크리스털은 강한 쪽을 스스로 선택한다고요.”
“그 설마가 사실이었을 거야. 마력 충돌이 끝나고 우트가르드 로키는 스피릿 크리스털을 손에 넣었으니까. 프리그는 지금 우트가르드 로키에게 납치되어 있어.”
“제길.”
민혁은 지원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의 기억을 되찾자마자 좋지 않은 소식을 들어서 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오딘이 다음에 어떤 말을 할 것인지 짐작되었기 때문에 표정이 복잡했다. 분명히 진원은 민혁에게 프리그의 구출과 스피릿 크리스털의 회수를 도와줄 것을 요청할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뭘 말할 건지 너라면 분명히 알아챘을 거야. 선택은 네 자유야.”
“늘 그런 식으로 말했었죠. 그리고서는 결국 나를 당신 뜻대로 만들었어요. 지금은 나를 놓아주는 척 해도 나중에는 설득하기 위해 다시 내 앞에 나타날 거죠?”
민혁은 비웃음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진원에게 대들거나 반항할 생각은 없었기에 진원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건너편 벤치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면 지금 분명히 해둘까?”
[툭]
진원은 민혁의 어깨 위에 한 손을 얹었다. 민혁은 슬며시 진원을 돌아보았다. 진원의 눈은 슬픔과 안타까움,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했다. 겉으로는 민혁을 보고 있는 듯 했으나 진원의 눈동자는 뭔가 서항을 보는 듯 초점이 분명치 않았다.
“지금, 우트가르드 로키는, 이미 헤임달을 그의 편으로 끌어들였어. 그리고 그 헤임달은 나에게 서로 적임을 선언했다. 아마 우트가르드 로키는 헤임달 이외에 다른 신들도 데리고 있을 거야.”
“헤, 헤임달…….”
‘헤임달’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민혁의 표정은 싸늘해졌다. 제 2의 세계에서 신 로키, 신 헤임달은 그야말로 상극이었다. 유난히 사이가 나빴으며, 그것이 라그나로크 때는 서로 검을 겨누고 서로를 질러 동시에 죽는 사태로 이어졌다. 잠깐 감정적으로 변했던 민혁은 다시 이성을 되찾고 진원의 말을 되씹었다.
“우트가르드 로키에게 헤임달이 한 편으로 붙어 있다……. 다른 신들도 있다면 프리그는…….”
민혁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상황을 정리하고 여러 가지 것들을 예상했다. 진원은 잠자코 기다리다가 먼저 일어섰다.
“저녁을 산다는 약속은 지켜야겠지?”
민혁은 의아하다는 듯이 진원을 올려다봤다.
“진짜 사 주는 거에요?”
“그럼.”
진원은 턱으로 따라오라며 방향을 가리키고는 앞서서 걸어갔다. 민혁은 진원의 걸어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더니 천천히 일어서서 얌전히 진원의 뒤를 따라갔다. 민혁과 진원은 제각기 머릿속에서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민혁과 진원은 동네 칼국수 집에 들어가서 서로 마주보며 앉았다. 주문 후 음식이 나올 때까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지도 않았고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음식 나왔습니다.”
종업원이 칼국수 2인분이 든 큰 그릇을 탁자의 중앙에 올려 두고 빈 그릇을 한 사람에 하나씩, 각자 앞에 친절하게 놓아 둔 후 다음 손님에게 갔다.
“음식 앞에서 이런 분위기는 좋지 않아.”
진원은 민혁의 그릇에 먼저 칼국수를 떠 주었다.
“아, 고맙습니다.”
민혁은 젓가락을 들고 먼저 먹기 시작했다. 진원도 자신의 그릇에 칼국수를 떠 놓고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먹지는 않고 뭔가를 가만히 기다리는 듯 했다.
“왜 그러세요?”
민혁이 입에 든 것들을 다 씹어 삼킨 후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진원은 젓가락을 다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다른 마력이 이 근처에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민혁은 주위를 찬찬히 들러보았으나 이상할 만한 것은 없었다. 진원도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해 보고 나서야 젓가락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제가 이런 말 할 입장은 아니지만, 너무 초조해하지 마세요. 수명 짧아져요.”
“아니야. 너 다운 말이야.”
진원은 다시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민혁은 진원을 빤히 쳐다보다가 칼국수를 한 젓가락 집어먹었다.
“오늘 처음 보는 거면서 어떻게 저 다운 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그야, 로키는……. 미안.”
진원은 순간 아차 싶었다. 기억 회생 후에도 민혁은 ‘로키’가 아닌 ‘민혁’으로 불리길 원했다. 예전의 신이 아닌 지금의 한 인간으로 대접받길 바랐다. 이건 진원이 추구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도 진원은 무의식 중에 신의 기억에 의해서 민혁을 신 ‘로키’로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저나 형은 신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장민혁’으로서 이 세계에 살고 있어요. 그리고 기억 회생 후에도 여전히 ‘장민혁’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어요. 더 이상 ‘로키’가 아니에요.”
민혁은 확실히 받아두자는 듯이 말했다. 진원은 민혁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처음에는 프리그 일은 더 이상 내일이 아니니까… 이렇게 생각했었어. 난 어디까지나 ‘설진원’이라는 한 인간이니까.”
“그래도 마력을 지닌 인간으로서 프리그를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겠죠.”
민혁이 툭 내뱉은 말은 진원의 생각을 정확히 읽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민혁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기도 했다. 진원은 민혁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신은 아니지만, 지 2의 세계에서 신으로서 저지른 과오를 정리하기 위해 이렇게 다시 태어났고 신의 기억을 돌려받은 거라면, 이 제 3세계에서 책임을 다 해야겠죠.”
민혁은 제 그릇을 비우고 더 덜어 먹었다. 진원도 다시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만약 우트가르드 로키의 목적이 4대 보물을 모두 찾는 것이라면 모든 신들을 제 편으로 삼으려고 열심일 테고, 다 모은 후에는 제 4세계를 시작하기 위해 제 2차 라그나로크를 일으킬 지도 몰라요.”
민혁은 젓가락을 내려놓은 후 감히 발설하기 힘든 최악의 사태까지 거침없이 말했다. 진원 역시 예상은 하고 있던 일인지라 민혁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진원도 젓가락을 내려 놓자 둘은 동시에 식당의 출입문 쪽을 응시했다. 식당의 출입문 근처에서 느껴지던 마력이 다시 사라졌다. 경계심을 좀 풀고 나서 민혁이 먼저 진원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프리그를 구하는데 돕겠어요.”
진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민혁과 마주봤다.
“새삼스럽게 뭘 그런 눈으로 봐요? 아까도 말했지만 일종의 의무감이에요. 다 알고 있으면서 방관자 노릇을 하는 건 싫어요.”
“이유야 어쨌든 도와주겠다니까 고마울 따름이야.”
진원은 민혁을 기특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민혁은 어린 아이 보듯 하는 그 시선을 외면했다.
“하지만 전 지금 ‘마력의 봉인’이 없기 때문에 이 적은 마력으로 버텨야 해요.”
“괜찮아. 동지가 생긴 것만으로도 충분히 안심이 되고 기쁘니까.”
“그런 뜻이 아니에요.”
민혁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잠바를 입었다. 진원도 따라 일어서서 외투를 입고는 계산서를 들었다.
“우트가르드 로키는…….”
종업원이 다가오자 민혁은 바로 말을 끊었다.
“만 원입니다.”
진원은 지갑에서 돈을 꺼내 종업원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종업원의 인사를 받으며 신발을 신는 중에 민혁이 텔레파시를 보냈다.
<우트가르드 로키는 상황을 살피며 모든 준비가 끝날 때까지 섣불리 공격해 오진 않겠지만, 헤임달은 달라요. 먼저 선공으로 치고 나오면 전 꼼짝없이 당한다고요.>
<하긴 헤임들은 이미 ‘마력의 봉인’을 찾은 듯 했어.>
둘은 식당에서 나와 제각기 깊은 생각에 빠진 채 걸어갔다.
“헤임달이 너의 존재를 모르길 바라야지. 아직 우리는 헤임달의 환생한 모습을 모르니까 그 쪽에서 먼저 접근 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진원은 차분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어딘가 해결책이 있을 거라는 듯이 빙긋 웃어보였다. 민혁 역시 대충은 어떻게 해야 할 지 감 잡은 듯 했다. 진원의 아머지 6개의 ‘마력의 봉인’과 민혁의 ‘마력의 봉인’을 찾는 것. 우트가르드 로키가 손대지 못한 신들을 먼저 찾아서 기억을 회생시키는 것. 그들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 일들을 해결해 나갈지가 더 걱정이었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신의재림-두번째라그나로크(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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