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5시. 진원은 에르띠에 점술가의 집 앞에 다다라서는 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찰칵]
진원이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먼저 자물쇠가 열리고 현관문도 열렸다. 그리고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인 젊은 여자가 긴 망토를 걸치고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에르띠에……?"
생각보다 너무 젊은 모습에 진원은 좀 얼떨떨했다. 에르띠에가 들어오라 손짓하자 진원은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지극히 평범한 가정집의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제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에르띠에가 앞 서 방으로 들어갔다. 에르띠에의 방은 아래 반은 검정색, 위 반은 붉은 색 벽지로 도배되어 있었고 탁자 아래는 검정 카펫이 깔려있었다. 벽에는 주술 도구가 전시되어 있는 장식장이 두 개 정도 한 쪽으로 몰려있었다. 탁자 위는 아주 깨끗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굴베이그와는 아주 다르네요."
진원은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에르띠에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탁자 뒤의 의자에 앉았다.
"역시 오딘은 제가 누군지 금방 알아채시는 군요."
"바니르 신족의, 탐욕스런 마녀들의 여신. 죽여도 죽지 않았던 정말 곤란했던 상대라는 기억 밖에 없습니다."
진원은 장난기 섞인 말투로 말한 뒤 에르띠에와 마주 보며 앉았다.
"그건 아무래도 제 2의 세계의 여신 굴베이그일 뿐, 전 제 3의 세계의 자넷 에르띠에입니다."
에르띠에의 발언은 지원과 에르띠에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이 아닌 '인간'이며, 그것을 전제로 현실에 열심히 살고 있었다. 때문에 우트가르드 로키의 위험한 등장의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신'임을 각성했어도 평범한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역시 어느 세계에 가나 반대 세력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물론 저는 일직이 '마력의 봉인'을 찾았지만, 원래 약했기 때문에 별 도움이 못 될 겁니다."
에르띠에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 진원은 아무리 작은 힘이라도 붙잡아야만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에르띠에의 존재는 진원에게 중요한 자원이었다.
"내 '마력의 봉인'의 나머지 조각들이 어디있는지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로키를 찾아줬으면 합니다."
"죄송합니다. '신'이라든지 '신의 환생'은 무의식적인 방어체 때문에 제 마력으로 위치를 찾을 수 없습니다."
진원은 '역시 안 되는 건가.'하는 표정이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하지만 '신' 고유의 감으로 봐서 제 주위 가까이에 로키가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반신(半神)·반거인(半巨人)의 마력이 제 주변에 산재해 있거든요."
에르띠에의 말에 진원은 벌떡 일어섰다. 그야말로 무조건 반사에 의한 반응이었다.
"누군지 확실히 알고 있습니까?"
그러나 약간 실망스럽게 에르띠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르띠에는 과거 에시르 신족도 잘 알지도 못하는데 로키는 거의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주변에 분산된 마력만으로 정확한 누군가를 집어낸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야말로 대략적으로 '누구쯤 되는 자가 어디쯤에 있다.'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제 '마력의 봉인'의 조각도 못 찾겠군요."
"그 누구도 아니고 오딘의 것인데 어림없습니다."
[띠리링 띠리링]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세연이 나가서 손님을 맞이했다. 예약 손님이 아니면 안 된다 했으나 그 손님은 계속 들어가려고 했다. 진원과 에르띠에는 그 손님에게서 또 다른 마력이 있음을 감지했다.
"세연아, 들어오시라 해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손님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에 가면을 쓴 남성이었다. 진원은 단번에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에르띠에는 그가 어떤 신의 환생이라는 사실만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헤임달, 헤임달!"
진원은 아주 반갑게 그를 부르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가면 속으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싸늘하고 살기어려 있었다. 아무래도 그는 아직 자신이 '신'인지 각성하지 못한 듯 했다. 진원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알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에르띠에는 슬쩍 분위기를 살피다가 진원이 앉았던 의자 옆의 또 다른 의자를 가리키며 앉을 것을 권했다. 하지만 가면 쓴 남자는 에르띠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딘만 응시했다.
"오딘은 너무도 잘 아시는 군요. But you're not my father now.(그러나 당신은 지금 내 아버지가 아닙니다.)"
헤임달은 오른손에 천천히 마력을 모았다. 그렇다. 그는 이미 '신'임을 각성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트가르드 로키가 진원에게 남긴 수수께끼 같은 발언의 답이 풀렸다. 제 2의 세계에서는 오딘과 헤임달이 부자지간이자 에시르 신족의 중요한 동료였으나 지금 제 3의 세계에서는 헤임달이 일방적으로 진원을 적대시했다. 헤임달의 말과 행동은 진원과 에르띠에를 놀래키고 긴장시켰다.
"우트가르드 로키와 손잡은 거냐? 헤임달?"
[퍼엉!]
진원의 물음에 헤임달은 대답 대신 퀵 볼[Quick Ball]을 날렸다. 진원은 빠르게 방어막을 쳐서 가까스로 퀵 볼을 막았다. 워낙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진원도 미리서 마력을 모아두지 않았더라면 곧장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엄마, 무슨 일이야?"
폭발 소리에 세연이 달려왔다.
"락[Lock]."
세연이 문을 열기 전에 에르띠에가 마력으로 문을 봉인해 버렸다.
[찰칵찰칵]
세연은 잠긴 문고리만 헛돌렸다.
"엄마!"
"별 거 아니야. 방으로 돌아가 있어."
"하지만……."
"어서."
에르띠에는 세연을 억지로 돌려보낸 후에 헤임달을 노려보았다. 헤임달은 여전히 느긋하게 마력을 모았다. 정식으로 싸울 생각은 없는 듯 했다. 진원은 지금 혼란에 휩싸여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만 두죠. See you next time."
헤임달은 텔레포트를 해서 사라졌다. 진원은 제 3의 세계 역시 제 2의 세계처럼 대 이변이 일어날 것임을 예측했다. 갑자기 나타난 헤임달과 그의 행동, 그의 발언은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해버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다른 신들을 하루 빨리 찾아내서 각성시켜야 한다는 거군."
진원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혼잣말을 했다.
[띠리링 띠리링]
세연은 현관으로 나가는 중에 에르띠에의 방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더 이상 소란스럽지 않음을 알고 나서 인터폰을 받았다.
"누구세요?"
"민혁."
"잠깐만."
[찰칵]
세연이 현관문을 열어주자 민혁은 제 집에 들어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거실부터 해서 고개를 돌리며 쭉 훑어보았다.
“아까 굉장한 소리가 들리던데?”
민혁은 거실 소파로 가서 앉았다. 세연도 그 옆에 앉았는데 걱정이 얼굴에 비쳐 있었다.
“엄마 방에서 난 소리야. 엄마는 별 거 아니라지만 좀 걱정돼.”
“아줌마는 요즘에 마녀 약 만들기에도 도전하고 계신 거야?”
“엄만 그런 거 안 해.”
민혁이 반 진담, 반 농담으로 한 말에 세연은 발끈 했다. 마녀의 피가 흐르고 있는 탓에 에르띠에는 늙지 않고 20대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세연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상한 질문과 불쾌한 눈총을 받아왔다.
“우리 엄마는 마녀의 후손일 뿐이지 마녀는 아니야.”
“알아. 미안.”
세연이 양 볼을 부풀린 채 뚱한 표정으로 말하자 민혁은 세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과했다. 어렸을 때 세연에게 ‘야, 마녀 딸! 빗자루타고 날아 봐.’라고 말했다가 심하게 두들겨 맞은 적이 있었다. 부모들끼리 잘 아는 사이였던 터라 민혁 역시 에르띠에가 진자 마녀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100% 순수하게 장난이었다. 민혁을 실컷 두들겨 패던 세연이 울음을 터뜨리자 그 말이 세연에게 상처 주는 것임을 뼈저리게 알았다.
“민혁아, 내 다음 예약 손님이었지?”
마침 에르띠에가 방에서 나와 민혁을 반겨주었다. 에르띠에의 뒤로 진원이 따라 나왔다.
“흠, 아줌마. 미성년자는 공짜로 하면 안 될까요?”
“내 장부에는 ‘장민혁’이라는 이름이 없단 말이지.”
[꾸욱]
에르띠에는 오른손 검지로 민혁의 이마를 밀었다. 민혁은 입 양 꼬리를 길게 당기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시선이 진원에게로 옮겨졌다. 진원의 표정은 약간 무거웠다.
“손님은 왕이라고요.”
민혁은 여전히 민혁의 이마를 밀고 있는 에르띠에의 팔을 툭툭 치면서 장난기서린 투로 말했다. 에르띠에는 알고 있다는 듯이 손을 떼고 나서 진원을 돌아보았다.
“아랫집 아이인데 제 딸의 소꿉친구랍니다.”
“묘한, 그런 인연이군요.”
진원은 아까의 무거운 표정과는 다르게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띤 후 가벼운 목례로 인사하고 유유히 나갔다. 진원의 마지막 발언에 민혁과 세연은 물론이거니와 에르띠에도 ‘뭔 말이지?’의 표정으로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
“저게 무슨 뜻이야?”
“글쎄?”
세연이 에르띠에를 빤히 쳐다보면서 물어보았으나 에르띠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같이 궁금해 할 뿐이었다. 독심술사가 아니고서야 진원의 의도를 알 수 없으니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저 사람은 마법사의 후손이에요?”
이번에는 민혁이 빤히 쳐다보면서 물어봤다. 악의 없는 순수 장난적인 말이었으나 에르띠에는 대답거리를 찾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
“설마, 진짜로 마법사에요?”
민혁이 눈을 크게 뜨고 반짝반짝 빛내며 다시 물어보았다. 에르띠에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법사도 아니고, 마법사의 후손도 아니야. 그냥 마법사틱한 사람이야.”
“에이, 그런 대답이 어딨어.”
세연은 에르띠에를 흘겨보며 말했다. 세연 역시 민혁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비로운 발언을 툭툭 터놓는 사람은 드무니까 말이다. 그리고 진원이 오고 나서 정체불명의 소리가 났었음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세연이었다. 진원에 대해서는 민혁보다 더 관심이 있었다.
“그렇다면 아줌마는 아까 그 형에 대해 뭔가 알고 계신다는 거네요.”
민혁은 다시 눈을 반짝거리며 주인의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에르띠에를 올려다봤다.(민혁과 세연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고, 에르띠에는 그 앞에 서 있다.) 에르띠에는 오른손의 검지를 들어 좌우로 까딱까딱 흔들었다.
“손님의 개인 정보는 절대 사수.”
“아줌마, 어휘력이 상당히 좋아지셨네요. 어려운 한자도 쓰시고.”
민혁은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상체를 뒤로 젖혀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럼 당연하지 한국에서 산 지 20년이 훌쩍 넘고 플러스 몇 년 더 넘었는걸.”
[탁 탁]
에르띠에는 거실 중아에 놓여 있는 탁자 앞에 앉아서는 손바닥으로 가볍게 탁자 위를 두 번 쳤다. 소파에서 내려와 앉으라는 표시였다. 민혁과 세연은 에르띠에와 마주 보며 나란히 앉았다. ‘알고 싶은 건?’, ‘용건은?’ 이런 질문을 불필요했다. 세연의 상태는 집 안에서도 다 알고 있었고 오늘 민혁이 올 거라는 사실을 알리면서 이유도 같이 전달 됐기 때문이다. 에르띠에는 양 손을 깍지 끼고 양 팔꿈치는 탁자 위에 올려 논 후 깍지 낀 손으로 턱을 받쳤다.
“세연이는 외모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날 빼다 박았어. 물론 내가 갈색머리니까 세연이도 그렇지. 뭐, 역시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국적 이미지가 풍기지.”
에르띠에는 생글생글 웃으며 세연을 쳐다봤다.
“그래서요?”
“세연이가 예지몽을 꾼다든지 보통 사람과는 구별되는 어떤 감을 가지고 있다든지 하는 건 아무래도 마녀의 피를 진하게 물려 받은 듯 해.”
민혁과 세연은 그 정도 사실은 알고 있다는 식의 표정이었다.
“그래도 이번은 상태가 좀 심하다고.”
세연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르띠에는 세연의 볼을 양쪽으로 주욱 잡아당겼다.
“마녀의 후손의 통과 의례라고, 그 정도로 알아둬. 덧붙여서 민혁은 세연이랑 너무 가까이서 지내다 보니 영향을 좀 받은 거야.”
“그러면 아저씨도 가끔 뭔가를 느끼세요?”
민혁이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자 에르띠에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좌우로 한 번 흔들었다.
“에?”
“세연이 아빠는 좀 둔해서 잘 몰라. 넌 원래 좋은 감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라서 그래.”
민혁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빠졌다. 세연은 민혁을 흘끗 쳐다봤다. 에르띠에의 말은 그럴싸했다. 솔직히 세연의 아버지는 여러 모로 좀 둔한 편이다. 심지어 몸에 상처가 나도 고통을 호소하는 시점이 애매하다. 그에 비해 민혁은 어렸을 때부터 감이 좋아서(세연 보다야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눈에 띄는 훌륭한 ‘감’을 소유하고 있다.) ‘~일 것 같아.’라 발언한 것들은 잘 맞았다.
“하지만 요즘은 불안감이 압도적으로 상승하고 있는 데요.”
민혁은 다시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으나 에르띠에는 씨익 웃을 뿐이었다.
“그냥 통과 의례야?”
이번에는 세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네 중3이잖아. 고입을 앞두고 중3이 불안한 건 사실이야. 너희가 예민한 것도 있지만. 점술가가 불안하면 그에 따른 점괘는 늘 어둡고 불안하기 마련이지. 당연한 거 아니겠어?”
민혁과 세연은 ‘그런가?’하며 고개를 좌우로 까딱까딱 흔들 뿐이었다. 뭔가 대단한 거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쉽게 답이 나오고 끝나버리자 약간은 ‘그래도’라는 의심이 남아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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