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원은 다음 주까지 제출할 리포트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공강 때마다 중앙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찾고, 집에 와서는 필요한 부분을 골라 비슷한 것끼리 모으고 앞뒤 순서를 맞추는 등 편집 작업을 하고. 근 나흘 동안 자료 수집·정리만으로 시간을 보낸 듯 했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집안 청소를 미루지 않았고, 환생한 신을 찾거나 4대 보물의 행방을 탐색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 가지 일을 하는 것도 벅찰 텐데 진원은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해서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민혁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진원을 형으로 생각하고 친근감 있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자료를 갖추고 리포트의 목차를 짰으니 구색 있게, 아니 질서 정연하게 본문을 쓰는 일만이 남았다. 아마 이 일도 며칠 걸릴 것이다. 진원은 본문의 대제목을 첫줄에 쓰고 나서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자료를 연신 뒤적이느라 책상 앞에 네 시간 이상 앉아 있었더니 목덜미가 뻐근했다. 진원은 책상 위에 세워둔 작은 달력을 보며 제출날짜까지 남은 일수를 셌다.
“4일이라……. 괜찮게 남았는데?”
[드르르르륵]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진원은 바로 문자를 확인했다. 내일 점심을 같이 먹자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잘 자’라는 글귀도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문자의 도착 시각을 확인하니 11시 43분이었다. 어쩐지 슬슬 졸린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오늘 분량을 끝내야겠지. 커피나 사러 갔다 올까?”
진원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지갑을 바지 주머니에 챙겨 넣고 거실로 나갔다. 아버지는 정기 출장 중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만 거실에 혼자 앉아서 회사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외국 회사와 중요한 계약이 있기 때문에 하나라도 실수하면 안 된다고 연거푸 확인 중이었다.
“이제 그만하셔도 되지 않아요?”
“남은 것만 마저 다 보고. 근데 이 시간에 어딜 가려고?”
어머니는 진원을 보지 않고 서류에만 눈을 박고 있었다. 진원은 어머니가 훑어 본 서류 중 하나를 집어 들어서 훌훌 넘겨보며 대답했다.
“커피 사러요. 캔 커피 쪽이 입에 맞아서요.”
진원은 들고 있던 서류의 한 면을 보이게 해서 어머니 앞에 내밀었다.
“열세 번째 줄에 outrageous의 철자가 틀렸어요. ‘e'다음에 ’o'를 넣어야 되요. 다녀올게요.”
철자가 빠진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 부모님의 회사 소류 교정 작업을 고등학생 시절부터 해 온 터라 오류 방식이 눈에 익을 대로 익어 있었다. 회사 간부인 부모님은 아들이 영특해서 자신들이 편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아들을 대할 때는 회사 사원을 다루는 것처럼 사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가끔 부모처럼 대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가 버린다. 진원은 여기에도 충분히 익숙해 있었다.
“내일 아침에 보면 틀린 부분이 더 잘 보일 텐데 매번 늦은 밤에 몰아서 보신단 말이야.”
진원은 어머니의 습관을 어린애 습관인 것 마냥 취급했다. 부모에게 있어 똑똑하고 예의바른 아들이면서도 진원은 개인적으로 부모님을 지적으로 놀리는 것을 즐긴다. 나름대로 애정 표현인데 진원 혼자 즐기고 부모님은 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니 정말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가로등과 몇 안 되는 네온사인에 의지해 편의점으로 가는 중에, 인도 한복판에 한 아이가 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는 발목을 붙잡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어디 다쳤니?”
진원은 그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무릎을 굽혀 쭈그려 앉았다. 얼굴을 보니 일전에 골목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다가 자신과 부딪혔던 그 남자아이였다.
“넘어져서 발목을 뼜어요.”
“이런……. 잠깐 보자.”
진원이 아이의 발목을 살펴보려고 손을 내미는데 아이가 자신의 손으로 진원의 손을 내쳤다. 그 순간 아이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신체 접촉’을 피하려고 한 행동이 ‘신체 접촉’이었으니 하나마나 한 행동을 한 꼴이 되었다.
진원은 조금 혼란이 생겼다. 노른 중 한 명인 스쿨드의 마력을 느낄 수 있었는데 확실할 수가 없었다. 전에 아이와 부딪히고 나서도 지금도 스쿨드의 마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이는 완벽한 남자아이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환생할 때 종족이 바뀔 수도, 설별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요. 신이 인간으로 환생할 수 있다는 건, 성별도 충분히 바뀔 수 있다는 거에요.”
그 아이는 확실히 스쿨드였다. 진원은 스쿨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으나 막상 성별이 뒤바뀐 환생을 보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스쿨드 본인은 남자아이로 환생한 것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지금 자신이 그런 상태니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저기…… 스쿨드……. 음…….”
진원은 스쿨드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생고생을 해봤으면서 막상 직접 만나니 무슨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 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남자아이에게 스쿨드라고 부르자니 여간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저 집에서 몰래 나온 거에요. 들키기 전에 들어가야 되니까 이만 가 볼게요.”
스쿨드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진원은 재빨리 일어서서 스쿨드를 부축해주었다.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아, 나중에 만나면…… 아는 척 해도 괜찮아요. 제 이름은 김선우에요.”
“으, 응. 난 설진원이야.”
“쉬우면서도 어려운 이름이네요.”
스쿨드는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진원은 스쿨드의 뒷모습을 보며 가만히 서 있다가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을 기억해 내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원은 편의점에 들어가서 캔커피를 사고 집에 돌아가는 중 계속 스쿨드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이는 대략 11살 내지 12살 정도 되는 평범한 체격의 남자아이. 목소리는 변성기 전이라서 그런지 약간 미성이었다. 나이를 고려해 보면 기억의 봉인을 빨리 푼 편이었다.(아마, 진원이 지금 알고 있는 신 중에서 가장 빨리 봉인을 푼 신이 아닐까 싶다.) 마력의 봉인은 찾지 못한 것 같았다.(노른은 모두 마력의 봉인을 찾았으나 다른 곳에 두었기 때문에 진원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눈치를 보아 하니 진원이 오딘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고 그 동안 진원을 피해 왔다는 것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까 스쿨드가 진원의 손을 내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래도 계속 피할 의사가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조만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는 방에 들어가 먼저 주무시고 계셨다. 진원은 최대한 발소리가 나지 않게 걸으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딱]
의자에 앉자마자 캔커피의 뚜껑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스쿨드를 만나고 나니 책상 위의 것들을 손댈 기분이 전혀 나지 않았다. 환생한 신을 찾아낸 것은 기뻐해야 할 일인데도 전혀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스쿨드가 고의로 진원을 피해 다녔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혹시 스쿨드처럼 이미 기억을 찾고, 진원의 존재를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신이 더 있지 않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 순간 우트가르드 로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굴베이그는 욕심이 많은 여신이라네. 황금에 눈이 멀어 해서는 안 될 악행들을 모조리 했다네. 그런 굴베이그를 에시르 신족이 처형했다네. 바니르 신족이었던 굴베이그는 에시르 신족인 오딘의 손에 죽었다네.]
우트가르드 로키는 북구 신화의 서사시를 읊었다. 이 텔레파시는 진원, 민혁, 레이에게 동시에 전달되는 것이었고 셋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직까지 특별히 위험하다 할 낌새는 없었지만 우트가르드 로키가 워낙 별난 인물이라 조금은 긴장했다. 우트가르드 로키의 서사시는 계속되었다.
[굴베이그는 다시 태어났다네. 귀여운 여자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네. 하지만 굴베이그는 여전히 욕심이 많은 여신이라네. ‘그녀’를 아무도 모르게 꼭꼭 숨겨 두고 있다네. ‘그녀’가 누군지 신들이 알면 굴베이그는 다시 신들의 손에 죽을 것이라네.]
서사시가 끝나고 방 한 곳에 워프가 생성되었다. 진원과 민혁, 레이는 각자의 방에 생성된 워프를 보며 바짝 긴장했다.
[여러분을 웨폰 배틀(Weapon Battle)에 초대합니다.]
이번에 우트가르드 로키는 워프를 통해 실험체를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초대하는 것이었다. 이상한 서사시를 읊고 웨폰 배틀을 한다고 하니 수상한 냄새가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진원- “좀 진지해졌군.”
민혁- “웨폰 배틀이라……. 좋긴 한데 나한테는 불리하잖아.”
레이- “이번엔 또 뭘 꾸미는 거야?”
셋은 한 마디씩 내던지고 나서 우트가르드 로키가 열은 워프로 들어갔다. 그의 초대를 거절한 이유는 없었다.
워프를 통과하니 눈앞에는 심히 넓은 경기용 링이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워프를 통해 한 자리에 모인 세 명은 링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보통 경기용 링이라고 하면 탄력성 있는 바닥에 신축성 좋은 로프가 설치되어 있기 마련인데, 우트가르드 로키가 준비한 링은 대리석 바닥에 나무 막대기 18개가 링 둘레에 세워져 있었다. 나무 막대기는 겉으로는 허술해 보여도 특별한 마법이 걸려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로프 대용의 마법이 걸려 있을 것이다. 대리석 바닥도 뭔가 마법이 걸려 있었는데 크게 상관할 건 아닌 듯 했다.
“웨폰 배틀. 진짜 추억 속의 게임인데요.”
민혁은 웨폰 배틀의 경기장을 보며 나름 감탄사를 던졌다. 진원과 레이도 민혁과 같은 생각이었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검은색 가면을 쓴 우트가르드 로키가 경기장 반대편에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흰 가면을 쓴 헤임달과 파티용 가면(눈 부근만 가리는 가면)을 쓴 프레이르와 프레이야가 서 있었다. 민혁 네의 웨폰 배틀 상대 같았다.
“겉으로 예의를 떡칠한 역겨운 말투는 여전하군.”
레이는 불쾌감을 잔뜩 실어서 우트가르드 로키를 향해 말했다. 한국어를 배우면서 거친 말도 같이 배웠는지 유창한 솜씨를 발휘했다.
“아무리 그러셔도 타고난 말투는 고치기 힘들답니다.”
“아, 그래. 그 말투에 속아 넘어가서 당한 녀석들이 한 둘이 아니니까 참 유용하겠어.”
“넘어가 주지 않고 되려 공격하는 분이 있으니 절대적이지는 못합니다.”
레이와 우트가르드 로키의 대담은 속에 잘 갈은 칼날을 품고 있었다. 양쪽 다 특별히 마력이나 살기를 방출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적의의 오로라를 뿜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신들이 모르는 불쾌하고도 저질스러운 일이 둘 사이에 있었는지, 그들의 대화는 아주 사적인 혐오감이 배어 있었다.
“굴베이그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왜 갑자기 웨폰 배틀이지?”
분위기가 다른 방향으로 새려고 하자 진원이 수습에 들어갔다.
“흠흠. 그냥 유희입니다. 원래 웨폰 배틀은 내기 놀이 아닙니까.”
웨폰 배틀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각자 무기를 들고 정해진 공간 안에서, 혹은 자유롭게 싸우는 원시적인 경기다. 그러나 단순히 싸운다고 되는 경기는 아니다. 다룰 수 있는 무기의 종류에 따라 웨폰 배틀의 계급이 달라지고 경기자의 명칭도 달라진다. 공통점이 있자면 경기 상대방을 죽이는 게 허용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기를 쥐고 있는 상태에서는 주먹질이나 발길질이 허용된다.(우트가르드 로키가 말했듯이 웨폰 배틀은 거의 내기성을 띄고 있다. 경기자가 직접 내기할 수도 있고 관전자가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모든 종족이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제 2의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행해진 유희였다.)
라이트 웨폰 배틀은 가장 강도가 약한 경기로 이에 참여하는 경기자를 라이트 솔저(Light Soldier)라고 한다. 이 경기에서 쓸 수 있는 무기는 보통 말하는 쇠붙이들이다. 검, 활, 창, 둔기 등 뭘 사용하든 자유고 자기가 준비한 것 내에서 혹은 경기 개최자가 준비한 것 내에서(아무튼 자유롭게) 얼마든지 사용·교체 가능하다. 관전자가 던져준 무기를 쓸 수도 있다. 상대방의 무기를 모두 사용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거나, 상대방을 중상으로 만들거나 죽이면 경기에서 이기게 된다.
데미 웨폰 배틀은 쇠붙이를 사용하는 것이 기본이고, 마법 구현화 무기를 일정 개수 내에서 사용할 수 있다. 여기서의 경기자를 솔저(Soldier)라고 부른다. 데미 웨폰 배틀 부터는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만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원소 마법을 구현화시켜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는데 몇 가지만 다룰 줄 안다면 솔저가 될 수 있고 데미 웨폰 배틀에 참여할 수 있다. 두 가지 종류의 무기를 쓸 수 있기 때문에 유일하게 무기 사용 제한 개수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수는 경기 시작 전에 임의로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히 자유롭다.
홀리 웨폰 배틀은 웨폰 배틀 중 가장 화려하고 가장 위험하면서 가장 웅대한 경기다. 여기서의 경기자는 나이트(Knight)라 불리며 마법 구현화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홀리 웨폰 배틀에서는 마법 구현화 무기 밖에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이트의 수가 극소수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웨어 마스터정도의 실력이 되어야 나이트도 가능할 것이다. 원소 마법을 최소한 3가지 이상은 할 줄 알아야 되고 구현화 할 수 있는 무기 종류도 3가지 이상은 되야 한다. 꼭 정해진 자격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기 목숨을 지킬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마법으로 구현화 한 무기만 쓰는 것이기 때문에 그 무기를 이용한 부가적인 마법이 허용된다.
제 2의 세계에서는 오딘, 로키, 우트가르드 로키, 프레이야가(지금 이 자리에 있는 신 중에서) 나이트였고 스카디, 프레이르는 솔저, 헤임달은 혼자 라이트 솔저였다. 헤임달은 마법을 쓸 수 있었지만 (일반적인) 데미 웨폰 배틀에 나갔다가는 1분도 안 돼서 목이 날아가 버린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지금 이 분위기에서 웨폰 배틀을 유희라고 부를 수 있나? 웨폰 배틀은 유희면서도 전쟁이니까 지금 여기서는 전쟁이겠지.”
민혁은 우트가르드 로키의 말을 맞받아쳤다. 우트가르드 로키는 민혁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전 단지 삭막한 사이를 좀 유들유들하게 만들어 보려고 이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꼭 화해나 휴전을 청하는 것처럼 들리는군.”
“내키지 않아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미 자기가 만든 경기장에 왔으니 웨폰 배틀에 참여해야 한다는 협박이었다. 빠져나갈 수 없는 이상 경기의 목적이 무엇이든 상관없는 거 아니냐는 뜻이기도 했다. 이 점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피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민혁 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잉]
그 때 우트가르드 로키조차 예상하지 못한 자가 워프를 통해 나타났다.
“누구신지요?”
“4:3은 불공평하잖아. 내가 저쪽에 가담하지.”
새로 나타난 자를 본 민혁과 레이는 충격과 함께 잠간 멍해졌다. 남씨 가의 막내둥이, 뛰어난 직감의 소유자 남인철이 워프 앞에 서있었다. 민혁과 레이는 기억의 봉인을 풀기 전부터 인철에게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뭔가를 감지하지 못했지만, 진원은 인철을 본 순간 그가 신 ‘티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트가르드 로키 쪽도 인철이 ‘티르’임을 알아차린 듯 했다.
“아……. 오딘이시여. 이 자와 아는 사이십니까?”
“오늘 처음 보는 분이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던 자의 등장이라……. 그야말로 히어로군요.”
진원도, 우트가르드 로키도 전혀 알고 있지 않던 티르가 당당하게 나타나자 그곳의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게다가 진원 쪽에 가담하겠다고 직접 말했으니 그가 어떤 의도로 온 것인지 물어보지 않아도 속내까지 뻔히 알 수 있었다.
“죽음의 여왕한테 빚졌어요, 오딘.”
인철은 진원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오른손에 들고 있던 은색 주머니를 내밀었다. 진원이 그 주머니를 받았는데 가히 묵직했다.
“이게 뭐지? 티르.”
인철이나 진원은 서로의 이름을 일부러 불러줬다. 옆에서 둘의 간단한 대화를 들은 민혁과 레이는 상황을 파악하고, 이름을 통해 자신과 상대의 존재를 확인하는 두 신에게서 조금은 찡한 감동을 받았다.
“프레이야의 브리싱가멘과 김리궁 열쇠의 세 조각 중 하나입니다. 내기에는 응당 걸 게 있어야죠.”
은색 주머니를 열어보니 브리싱가멘(프레이야의 상징이기도 한 목걸이)과 독수리 모양의 금장식품이 들어있었다. 진원은 금장식품을 손가락 끝으로 만져 김리궁의 열쇠 조각임을 확인했다. 민혁은 진원의 옆에서 흘끗 쳐다보고, 목걸이에서 풍기는 달콤한 마력을 통해 진짜 브리싱가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슬쩍 프레이야를 쳐다봤다. 가면 때문에 표정을 알기 어려웠지만 초조해하고 있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목숨을 걸지 말아달라는 헬의 부탁이 들어있는 거니까 나쁘게 상각하지 마세요.”
“나쁘게 생각할 이유 없지. 오히려 고맙지.”
진원의 부드러운 미소에 인철은 진원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약간 옆으로 돌렸다. 그 시선에 민혁과 레이가 걸리자 뭔가 복잡한 감정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 감정은 민혁의 말 덕분에 쉽게 덮을 수 있었다.
“어서 와요, 인철 선배.”
민혁은 인철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건 아니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정체가 ‘티르’의 환생이라는 것도 왠지 모르게 납득이 되었다. 이유는 없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드는 것 뿐이었다. 레이 역시 처음에는 굉장히 놀랐지만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껏 마법을 쓰는 장면을 인철에게 보여 온 것이 단순한 불운의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기억의 봉인은 헬이 방금 풀어준 것 같네요.”
레이의 말에 인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가 워프를 통해 공간에 들어갈 즈음에 인철은 마블, 매튜, 마야와 코코아를 마시고 있었다. 레이가 리켄을 처음 만난 날, 레이의 몸에 희미하게 묻어있는 ‘티르’의 마력을 알아차린 리켄이 마야에게 보고했고, 마야가 마블과 매튜의 도움을 받아 인철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인철에게 자정 티파티의 초대장을 보내 거의 억지로 불러내고, 기억 회생 마법을 통해 기억의 봉인을 풀어주었다. 처음에 인철은 혼란스러워 했지만 새턴 세쌍둥이의 짤막한 이야기를 듣고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을 했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려는 찰나에 세이테가 나타나서 진원이 우트가르드 로키가 만든 워프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했고, 세쌍둥이와 인철은 머뭇거릴 것 없이 인철을 지원군으로 보낼 준비를 서둘렀다.
“이봐, 거인왕 우트가르드 로키. 이제 4:4겠다, 우리 쪽에는 내 걸 상품도 있겠다, 너희도 뭔가를 내걸고 경기를 시작하지. 밤이 끝나기 전에 경기를 끝내야 하니까 말이야.”
인철은 우트가르드 로키를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우트가르드 로키는 아무 말 안고 가만히 서있었다.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미리 생각했던 오류가 아닌 이상 대처하는 속도가 느리기 마련이다. 우트가르드 로키는 침묵 속에서 앞으로의 행동방향을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그 침묵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좋습니다. 곧 가져오겠습니다.”
우트가르드 로키는 뒤에 워프를 열고 사라졌다. 인철의 시선은 우트가르드 로키의 옆에 서 있던 헤임달에게로 옮겨졌다. 가면 때문에 표정을 알 수는 없지만 분위기상 대충 인철의 등장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듯 했다. 인철도 헤임달을 곱게 보고 있지는 않았다. 우선은 오딘을 배신했고, 그 다음은 그의 소행이 괘씸했기 때문이었다. 인철은 헤임달의 환생이 누군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래, 학교는 다닐만 해?”
특별히 누구를 부르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헤임달은 자기를 두고 하는 말임을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인철이 티르라는 것을 전부터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인철의 존재는 인철이 기억을 되찾기 전부터 헤임달에게 걸리적거리는 방해 그 자체였다. 지금 인철이 자신의 정체를 다른 이들에게 알릴까봐 나름 긴장하는 중이었다.
“다닐만 하지. 그런데 최근에 유쾌하질 못해서 좀 짜증이 나거든.”
레이는 헤임달의 말투에서 믿기 힘든 뭔가를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동안 헤임달을 직접 상대한 적이 거의 없을뿐더러 그의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어서 몰랐었다. 이 익숙한 말투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담고 있었다. 레이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내밀어 인철의 팔을 붙잡았다.
“아는 사이에요?”
“글쎄, 지나가다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지.”
인철은 알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은 것을 우연찮게 몇 번 봤다는 사실이 불쾌하다는 듯이 불량스런 투로 대답했다.
“레이. 헤임달이 누군지 짐작이 가나보군요.”
진원의 말에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 젓지도 않았다. 짐작은 가지만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맞는다면 매일 적과 함께 지내왔다는 이야기이고, 대담하게, 거리낌 없이 칼을 들이대 왔다는 말이 된다.
“시치미 떼지 말고 가면을 벗어. 정체를 알고 있는데 굳이 숨길 필요 없잖아.”
인철은 무거운 분위기가 깔린 눈으로 헤임달을 응시했다. 헤임달의 손은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가면 가까이로 움직였다. 그러나 뒤에서 워프가 열리는 것이 느껴지자 다시 손을 내렸다.
진원이 인철의 등 뒤에 서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티르, 헤임달을 도발시키지 마. 은근히 단순하거든.”
에르띠에에게서 우트가르드 로키와 헤임달이 접촉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진원은 헤임달이 생각보다 분별력이 떨어지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좀 온화하게 말하자면 성미가 급하다는 말인데 이것도 좋은 표현은 아니다. 아무튼 일부러 다툼거리를 만들 필요는 없기 때문에 인철에게 충고한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사실을 알고 있어도 모르는 척 해 주는 게 서로에게 좋을 수도 있어요.”
민혁도 진원과 같은 생각이었다. 상대가 가면을 쓰고 싶다면 그대로 두는 것이 예의이자, 벗는 것보다 이득일 수 있다. 정체를 알고 있어도 가면을 벗으면 쓸 때보다 심리적으로 상대하기 버거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체를 모르고 있던 자라면, 상대방이 어떻게 생긴 인물이건 간에 크게 상관할만한 건 되지 못하는데다가 언젠가는 분명 정체를 알 날이 올 걸이기 때문에 성급하게 굴 필요도 없다. 지금은 여기서 어떻게 무사히 나갈지 궁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I don't know what to do.(뭘 해야 할 지 모르겠어.)”
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철은 그 말을 듣고, 여전히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레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인철의 체온이 전해지면서 가늘게 떨고 있던 레이의 손은 차츰 진정되었다. 인철은 레이가 헤임달의 얼굴을 확인한 후에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으면 했다.
“이쪽에서 내걸 물건입니다. 아스가르드의 열쇠의 조각들 중 하나와 트림헤임의 열쇠입니다.”
우트가르드 로키의 손에는 그가 말한 물건이 담겨 있는 상자가 있었다. ‘트림헤임의 열쇠’라고 하자 레이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제 2의 세계에서 라그나로크 직후, 한창 혼란기일 때 우트가르드 로키의 약은 수법에 넘어가는 바람에 어이없게 내줬던 스카디의 보물이었다. 트림헤임은 스카디가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지배하던 그녀만의 왕국이었다. 재물도 많고 숨겨진 보물이나 귀한 것들이 많아 트림헤임을 노리는 작자들이 많았는데 우트가르드 로키도 그 중 하나였다.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바보같이 영역을 빼앗긴 스카디는 헬에게 부탁해 니플헤임에서 혼자 조용히 지낼 수 있는 곳을 받아냈다. 그나마 지낼 곳이 있었다는 건 둘째 치고(죽어야만 된다는 전제 조건이 있었으나), 열쇠를 빼앗겨 영역을 잃은 공주님은 ‘힘’의 한계라는 걸 절실하게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이쪽에서 브리싱가멘을 거니까 그쪽에서는 트림헤임의 열쇠를 거는 거군. 뭐, 나쁠 거 없지.”
민혁은 프레이야와 레이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잘만 하면 각자 자기의 보물을 되찾기 위핸 여신들의 자존심 싸움이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둘이 붙으면 안 돼. 레이가 일방적으로 공격할 테니까.”
진원은 민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 챘다. 프레이야가 마력이 바닥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에 레이와 경기를 해선 안 된다는 것까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게다가 프레이야는 전쟁의 여신답지 않게 싸우는 걸 혐오해서 사냥의 여신이 압도적으로 밀고 나갈 게 뻔했다.
“레이야 헤임달이나 프레이르랑 붙겠죠. 프레이야는 저나 인철 선배랑 붙을 테고.”
민혁도 경기가 어떻게 짜일 지는 대충 구상하고 있었다. 인철 역시 기억만 되찾았을 뿐 마력 수준은 근 바닥이었다. 그래도 왼손에 들고 온 검 덕분에 몇 개의 마법은 할 수 있어 보였다. 그래도 지금 엑셀 암렛을 끼고 있는 민혁의 마력까지는 수준이 미치지 못했다.
“이제 대전 상대를 정하기만 하면 되겠군요. 저희는 나이트가 한 명, 솔저가 두 명, 라이트 솔저가 한 명입니다.”
우트가르드 로키가 말한 나이트는 자기 자신이고, 솔저는 헤임달과 프레이르, 라이트 솔저는 프레이야였다. 진원 쪽도 각 계급이 골고루 있긴 하나 명 수가 달랐다. 나이트에는 진원 혼자고, 솔저는 역시 레이 혼자, 라이트 솔저는 민혁과 인철이었다. 이런 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력 수준을 보면 훤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양쪽의 수준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그 쪽에서 솔저 한 명이 라이트 솔저로 경기를 해줘야겠군.”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진원이 우트가르드 로키와 대전 협상을 하려고 하자 민혁이 막았다. 민혁은 오른쪽 손목에 차고 있던 엑셀 암렛을 풀어서 인철에게 건네주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선배가 가지고 있는 검은 하드 메탈 소드일 거에요. 그리고 선배의 실력도 잘 알고. 그러니까 이거 갖고 솔저로 경기해요.”
“이제 막 기억을 되찾은 참이라 마력을 다루는 데 서투를 지도 몰라.”
“선배의 감은 절대적이니까 저보다는 잘 하실 거에요.”
인철은 민혁을 한 번 보고 나서 진원의 눈치를 살핀 후 엑셀 암렛을 왼쪽 손목에 찼다. 시범으로 체내의 마력을 활성화시켰는데 확실히 감이 달랐다. 하지만 벌써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마력을 꽤냈기 때문에 머리로 많은 가짓수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 정도의 마력을 가지고 솔저로 나갈 자신은 없었지만 솔저로 뛰고 싶었다.
“이 정도면 헤임달을 상대할 수 있겠어.”
아무래도 인철은 이미 헤임달을 대전 상대로 찍어 놓고 있었다. 헤임달도 인철과 대전하길 원했는지 주먹을 꽉 쥐었다.
“우트가르드 로키. 저 녀석이 원하는 대로 해 줘.”
“헤임달이 그렇게 말한다면……. 말려도 소용없겠지.”
인철과 헤임달의 경기가 정해지면서 다른 경기도 자동적으로 정해졌다. 홀리 웨폰 배틀은 진원과 우트가르드 로키, 데미 웨폰 배틀은 인철과 헤임달, 레이와 프레이르, 마지막으로 라이트 웨폰 배틀은 민혁과 프레이야가 각각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네 경기나 하려면……. 오늘 자는 건 반납해야겠네. 아마 밤이 끝나기 전까지 결판이 나지 않을 지도 몰라.”
레이는 그녀의 활, 하드 메탈 보우를 본 크기로 만든 후, 손목시계의 시각을 확인했다. 벌써 새벽 1시가 다 되었다.
“그러면 네 경기를 동시에 치르도록 하죠.”
민혁과 프레이야가 도착한 곳은 긴 풀이 무성한 넓은 초원이었다. 우트가르드 로키가 네 팀을 각각 다른 장소로 옮긴 것이었다.
<승패가 결정되면 저절로 방금 전 그 장소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민혁과 프레이야가 치를 경기가 라이트 웨폰 배틀이라 그런지 무성한 풀숲 사이마다 별 부기들이 세워져 있었다. 따로 경기장의 경계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아무 구애 없이 마음대로 싸우라는 이야기였다. 무기나 경기장이 자유로운 건 좋은데 이것들을 얼마나 활용할 수 있을 지가 문제였다. 둘 다 제 3의 세계에서 이런 것들을 한 번도 다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머리로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몸으로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민혁은 우선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검을 뽑아 들어보았다. 날씬하게 잘 바진 검 날, 척 봐도 에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습 때만 써보고 실전 때는 거의 써 본적이 없는 검이었다.(실제로 에페는 실전용 검이다. 연습용 검은 날이 둥글게 무딘 플레래.) 하지만 다른 검보다 가벼운 편이고 다루는 법도 어렵지 않아 지금 초보자의 손에는 가장 적당한 검이었다.
[피융]
민혁의 얼굴 왼쪽으로 화살이 날아갔다. 그런데 바람을 가르는 시원스런 비행이 아니었다. 손에 들고 있는 에페로 충분히 쳐 낼 수 있었으나 빗나가는 것이고 땅에 꽂히지도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내버려뒀다.
“시작 신호라 해석해도 괜찮지?”
에페를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치켜들었다가 프레이야를 향해 내뻗었다. 프레이야는 왼손에 들고 있던 활을 떨어뜨리고 오른손으로 가면을 벗었다. 오른쪽 뺨에 뱀과 악마의 날개가 문신처럼 그려져 있었다. 감정을 절제하고 판단력을 늘이는 주술의 일종이었다.
“처음부터 날 상대하기로 돼 있었군.”
“진심으로 널 죽이고 싶거든.”
프레이야의 오른손에는 어느 샌가 검이 쥐어져 있었다. 손잡이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사브르였다. 검 날의 잘 빠진 모양이나 손잡이의 장식이나, 전체적으로 화려하면서도 우아해 보이는 사브르는 실용성도 높고 위력도 꽤 되는 편이라 가시를 가진 장미라는 점에서 프레이야와 닮은꼴이었다. 그래서 사브르를 들고 있는 프레이야는 아름다우면서 강해보였다.
“어울리는 검을 들었는데 잘 쓸 수나 있어?”
[타다다다]
[챙!]
민혁이 먼저 프레이야에게 달려들었다. 에페와 사브르가 맞부딪히는 소리는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보다 탁하지만 검 날이 넓고 두꺼운 검끼리 내는 호각소리보다 맑았다. 아무래도 두 검은 주 용도가 찌르는 것이기 때문에 검 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깔끔한 편이었다.
[차악]
검끼리 부딪힐 때 생긴 진동이 손에 전해지자 프레이야는 그녀의 악력으로는 견디기 무리였는지, 아니면 깜짝 놀라서 그랬는지 곧바로 사브르를 떨어뜨리고 재빨리 뒤로 미끄러지듯이 물러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손닿는 거리에 있는 창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창이란 원체 무게가 나가는 무기라 저절로 양손으로 들게 되었다.
“늦어.”
민혁은 프레이야가 창을 제대로 들고 자세를 잡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프레이야가 창에 손을 댄 순간 이미 프레이야의 바로 옆에 붙어 그녀의 목덜미에 칼끝을 들이댔다.
“다룰 수도 없는 무기를 들다니, 센스가 없어.”
프레이야는 창을 겨우 양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민혁이 가까이 가지 않았어도 휘두르지 못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창은 길이와 무게 때문에 검보다 다루기 어려운데 프레이야가 고른 창은 창머리가 무거운 편에 속하는 헐버트였다. 민혁은 자신이 가까이 붙어 있는 이상 프레이야가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오른손으로는 에페로 프레이야의 목을 겨누고 왼손으로는 프레이야가 잡고 있는 헐버트를 막듯이 붙잡았다.
“실전에 너무 능숙한 거 아니야?”
얼굴에 그려 넣은 주술 덕분인지 프레이야는 담담하게 민혁의 눈을 볼 수 있었다.
“너도 우트가르드 로키에게 자잘하게 시달려봐.”
민혁은 자신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인데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프레이야가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 자체가 그녀의 공격이었기 때문에 다음 상황에 대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내가 약하다고 말하지 않으니까……. 고마운 건가?”
[챙!]
프레이야가 무기를 바꿔 쥐는 솜씨나 속도는 일품이었다. 미리 계산하고 있었는지 오른손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검을 뽑아 들어 민혁을 향해 내리쳤다. 민혁은 프레이야가 창에서 오른손을 떼는 순간 자신이 잡고 있는 창의 무게가 무거워지자 공격을 예상하고 뒤러 물러서서 프레이야의 공격을 막아냈다.
“아, 싫다. 너무 능숙하게 움직이잖아. 그러면 죽이기 힘들다고.”
프레이야는 창을 붙잡고 있던 왼손에서 마저 창을 놓고 민혁에게 재차 공격을 시도했다.
[붕]
민혁이 뒤로 잽싸게 피하자 프레이야의 두 번째 공격은 허공만 가르는 꼴이 되었다.
“에……. 클레이모어에 에페는 안 먹힌다고.”
[붕]
민혁은 프레이야의 세 번째 공격도 여유 있게 피하며 에페를 버리고 근처에 있는 쇠곤봉을 집어 들었다. 처음 들을 때 묵직하긴 했으나 생각보다 무겁지는 않았다. 그래도 오래 들고 있기엔 무리일 듯 싶었다.
“미안.”
[챙]
네 번째 공격이 가해지자 민혁은 쇠곤봉으로 클레이모어의 검 날을 내리 쳐서 부러뜨렸다. 프레이야가 잠깐 당혹스러워하는 그 짧은 시간 안에 쇠곤봉을 그대로 떨어뜨리고 등 바로 두에 있는 바스타드 소드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프레이야가 다시 다른 검에 손을 대려 할 때, 바스타드 소드의 긴 길이를 이용해 프레이야의 손을 가로 막았다. 민혁의 두 번째 제지였다.
“정말로 날 죽이고 싶어?”
“그래.”
프레이야는 머뭇거림 없이 대답하고 바로 다른 무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바스타드 소드에 막혀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민혁은 프레이야에게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바스타드 소드는 길이가 길어서 접근전은 좀 힘든 편이지만 무기를 들고 있지 않은 상대를 저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말로 죽이고 싶다면 왜 아까 글라디우스를 들지 않았지?”
“그거야……. 내 맘이지.”
프레이야의 초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민혁이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클레이모어 대신에 글라디우스를 썼다면 내 에페를 쉽게 부러트리고 내 목에 들이댈 수 있었을 거야.”
민혁은 프레이야의 손에서 목을 향해 바스타드 소드를 천천히 올렸다.
[슈욱]
프레이야의 오른쪽 뺨에 그려져 있던 주술이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프레이야의 눈은 오히려 날카로워졌다. 감정을 절제하고 판단력을 높인다는 건 개인적인 감성을 줄인다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싶다는 충동적인 마음을 붙잡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이제 주술이 풀렸으니 프레이야는 진심으로 민혁을 죽이려고 무섭게 달려들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진짜로 죽이고 싶은 모양이네.”
민혁은 프레이야의 진심을 존중해서 바스타드 소드를 천천히 내리며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프레이야에게 무기를 잡을 시간을 준 것이었다.
“죽일 거야.”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프레이야는 플랑베르주를 골랐다. (검 날이 물결 모양이라) 상대를 벨 경우에 그 어떤 검보다 부상을 더 크게 만들 수 있는 검이었다. 민혁은 살기가 가득 차 있는 프레이야의 눈에 대해 사신의 눈으로 대응하고 바스타드 소드를 제대로 꽉 쥐었다.
[타다닥]
[채앵]
이번에는 프레이야가 먼저 달려들었다. 바스타드 소드와 플랑베르주가 만들어낸 소리는 듣기만 해도 그에 담긴 살기에 의해 소름이 끼쳤다. 각 검의 주인이 진심으로 상대를 베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채앵! 챙, 챙, 채앵, 챙]
몇 차례에 걸친 호각이 주변에 울려 퍼졌다. 바스타드 소드의 길이 때문에 프레이야는 민혁에게 가까이 붙기 어려웠다. (플랑베르주도 긴 편이지만 그립이 차지하는 길이가 꽤 돼서 검 날의 길이만 비교해 보면 바스타드 소드와의 차이가 눈에 보인다.) 민혁은 프레이야가 검을 무작정 휘두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쉽게 그녀의 빈틈을 찾아 찌를 수 있었지만 그녀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어째서…….”
[채앵, 챙, 챙]
프레이야는 벌써 팔 근육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는지 한 손으로 휘두르던 플랑베르주를 양손으로 들고 마구 잡이로 휘둘렀다. 이미 ‘검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난잡한 흉내질’에 지나지 않았다. 민혁은 프레이야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막는데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프레이야도 자신의 행동이 무의미한 것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어째서 공격하지, 어째서, 어째서…….”
[채앵!]
프레이야는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마지막 호각 다음에 손에서 검을 떨어뜨렸다. 프레이야의 손바닥은 붉고 탱탱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있는 힘껏 세게 검을 쥐고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검을 휘둘렀던 것이었다. 프레이야는 손바닥과 팔 근육의 통증에도 불과하고 눈에 보이는 무기를 또다시 집어 들었다. 배틀 액스 중에서도 그 위력이 최상급이라 알려진 버디슈였다. 도끼 자루 길이만 해도 프레이야의 키보다 길고 반원 모양의 도끼날의 길이도 야수의 목을 거뜬히 벨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길었다.
“넌 왜 골라도 곡 무거운 것만 고르냐.”
민혁은 프레이야가 버디슈의 도끼날을 위로 들어올리기 전에 바스타드 소드로 버디슈를 짓눌렀다. 민혁이 체력을 거의 소모하지 않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만 상대를 해 온 반면에 프레이야는 혼자 의미 없이 날뛰는 바람에 금방 지친 상태가 돼 버렸다. 그래서 양손으로 버디슈를 붙잡고 위로 올리려 했으나 민혁의 한 손을 이기지 못했다.
“어째서 공격하지 않는 거야?”
프레이야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과 팔에서 힘을 빼지는 않았다.
“웨폰 배틀은 공격하지 않고서도 이길 수 있으니까. 그래도 선공은 내가 했잖아.”
민혁은 바스타드 소드를 버디슈에서 떼어 냄과 동시에 왼손으로 버디슈를 붙잡았다. 덕분에 프레이야는 버디슈의 도끼날을 허리 높이까지 들어 올리는 데에 그쳐야 했다. 체력이 남은 자와 바닥난 자의 차이인지, 남성과 여성의 차이인지, 프레이야는 물리적인 힘으로는 민혁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지금 버디슈를 들고 있는 것이 프레이야의 양손이 아니라 민혁의 왼손 한 손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프레이야는 지고 싶지 않았다.
“이거 너나 가져.”
프레이야는 버디슈에서 손을 떼고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떨어뜨렸던 플랑베르주를 다시 손에 쥐었다. 손을 계속 쥐었다 폈다 해서 그런지 퉁퉁 부은 손바닥의 통증이 더 심해졌다. 그리고 붓기 때문에 플랑베르주를 손에 쥐기 불편했다.
민혁은 도끼날이 땡에 박히도록 버디슈를 잘 세워두고 오른손에 들고 있던 바스타드 소드를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거머쥐었다. 프레이야를 공격하는 것은 영 찝찝해서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도, ‘공격하지 않느냐’라고 하는 것도 은근히 신경 쓰였다. 게다가 몸이 전체적으로 늘씬하고 호리호리해서 힘과는 거리가 먼 체형이기 때문에 조금만 더 이렇게 시간을 끌면 얼마 못가서 제풀에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날 죽이고 싶으면 무기를 제대로 골라.”
“네가 날 제대로 상대하면 그렇게 하지.”
“고집부리지 마. 장기전으로 가면 너한테 불리하다고.”
민혁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프레이야는 결국 눈물을 흘려버렸다. 검을 맞부딪치면서 민혁이 자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걸 눈치 챘지만 자신이 그걸 고마워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꾹 참고 있었다.
“정말이지……. 여자 애들이 우는 건 싫어.”
민혁은 순간적으로 세연이 떠올랐다. 은근슬쩍 세연과 프레이야가 우는 모습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원래 민혁은 여자 애들이 울어도 꿈쩍하지 않는다. 다만 주변에서 여자를 울렸다며 호들갑떠는 게 싫은 것이었다. 하지만 세연이 울면, 뭐랄까 너무 불쌍하게 울어서 달랠 수 있다면 뭐든 해주고 싶었다. 프레이야도 우는 모습이 민혁의 동정심을 유발할 만큼 애처로웠다. 민혁은 플랑베르주를 아래로 내리고 팔에 힘이 빠져 축 쳐진 프레이야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프레이야가 현재 ‘적’이라는 사실은 잊지 않고 있었다.
[챙!]
민혁은 바스타드 소드를 휘둘러 근처에 있는 검을 쳐냈다. 프레이야는 그 소리아 깜짝 놀라서 울음을 멈췄다.
“네가 날 죽이지 못하면 내 쪽에서 먼저 이 시답잖은 경기를 끝내주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민혁의 무겁게 진지한 분위기 때문인지 바스타드 소드의 날이 더 날카로워보였다.
“시끄러워. 정말로 널 죽일 테니까.”
프레이야는 소매로 눈물을 닦고 탱탱 부어오른 손으로 플랑베르주를 세게 거머쥐었다. 육체적 통증과 고통이 얼마만큼이든, 심리적 갈등이 어느 정도이든 ‘죽여야 한다’는 생각 앞에서는 충분히 무시할 수 있었다. 민혁이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을 고맙지만 프레이야는 진심으로 그를 죽이고 싶었다. 죽여야만 했다.
[챙!]
둘은 동시에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두 검의 호각 소리와 진동이 주변에 퍼졌다.
[채앵, 챙, 챙, 채앵, 채앵]
프레이야는 팔에 힘이 많이 빠진 상태였지만 처음보다 검을 다루는 솜씨가 제법 괜찮아졌다. 그래도 민혁이 체력이 여유롭고 검을 다루는 손놀림도 한 수 위라서 전체적으로 보면 민혁이 프레이야 쪽으로 밀어나가고 있었다. 검이 한 번 부딪힐 때마다 한 발씩, 민혁은 프레이야를 밀어붙였다.
[챙, 기익]
두 검이 맞붙어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 민혁은 힘을 아낄 것 없이 프레이야에게 검을 바짝 밀었다.
“날 죽이려는 건 널 위해서야 아니면 우트가르드 로키를 위해서야?”
“읏, 대답할 가치…… 없어.”
[차악]
프레이야는 뒤로 멀찍이 피했다. 민혁과 힘으로 싸우는 건 역시 무모한 짓이었다.
[휘익]
민혁은 프레이야에게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바스타드 소드를 가로로 길게 휘둘렀다. 프레이야는 바스타드 소드의 긴 길이를 생각해서 뒤로 더 물러났다. 그 때 시야에 크로스 보우가 걸렸다. 크로스 보우는 석궁처럼 활이 가로로 놓여있는 일종의 화살을 쏘는 장치다. 프레이야가 눈도장을 찍어둔 크로스 보우는 화살이 미리 장전돼 있는 것이었다.(크로스 보우는 위력은 좋은데 장전 시간이 오래 걸려서 웨폰 배틀에서 처음 한 발은 미리 장전해 놓는다.)
[휘익]
민혁이 다시 빠른 속도로 바스타드 소드를 휘두르자 프레이야는 크로스 보우 쪽으로 몸을 피했다. 민혁은 프레이야가 움직이는 방향을 보고 프레이야가 뭘 사용할지 짐작했다. 그래서 프레이야가 플랑베르주를 왼손에 옮겨 들고 오른손으로 크로스 보우를 집어들 때 근처에 있는 평범한 창을 왼손에 집어 들었다.
[피융]
민혁은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바스타드 소드로 가볍게 쳐냈다. 그 때 프레이야가 코 앞가지 재빠르게 다가와서 오른손에 잡고 있는 단도를 내질렀다.
[팍]
언제 크로스 보우를 버리고 단도로 바꿔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민혁은 왼손에 미리 들고 있던 창으로 옆으로 쳐내듯이 단도를 막았다. 단도는 나무로 된 창자루에 박혔다. 그러나 숨 돌릴 새 없이 프레이야는 왼손의 플랑베르주를 민혁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챙!]
민혁은 능숙한 오른손, 프레이야는 어설픈 왼손. 막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양쪽 다, 어느 한 쪽이 먼저 떨어져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머리 회전이 빠른 민혁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 지 벌써 감을 잡았다. 사신의 사악한 눈…….
“미안, 프레이야.”
[퍽!]
“흐억!”
민혁은 가차 없이 프레이야의 배를 발로 걷어차서 억지로 떨어뜨렸다. 덕분에 프레이야는 뒤로 쓰러지고 양손 모두 무기를 놓아버렸다. 민혁이 힘 조절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서 프레이야가 느끼고 있는 고통은 보통 아픈 게 아니었다. 때문에 프레이야는 쉽사리 일어나지 못할뿐더러 무기를 다시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가 이겼어.”
바스타드 소드의 날 끝은 프레이야의 목 바로 앞에서 번뜩였다. 민혁의 세 번째 저지였다. 민혁이 우세하다는 것이 증명된 순간 민혁과 프레이야는 처음에 그들이 모였던 장소로 저절로 이동되었다. 자세는 그대로였지만 무기는 없었다.
“이제 일어나.”
민혁은 검을 잡고 내밀었던 손이 비자 프레이야의 손을 잡아주려는 것처럼 더 가까이 내밀었다.
“됐어. 아까 차버릴 때는 뭐고 일으켜준다는 거야?”
프레이야는 민혁에게 차인 곳을 문지르며 혼자 일어섰다. 그런데 프레이야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진 듯 했다.
“지니까 속 시원하냐?”
“아니, 옛날 생각나서. 내가 너한테 마법을 가르쳐 주는 대신에 너는 티르에게 배운 검술을 내게 가르쳐줬었잖아.”
“거, 쓸데없는 옛날이야기.”
민혁은 프레이야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민혁도 그 때의 일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프레이야가 그녀의 아버지인 뇨르드와 쌍둥이 오빠인 프레이르와 함께 처음 에시르 신족에 합류했을 때, 적응을 도와준다는 차원에서 오딘의 주선으로 로키와 프레이야가 파트너가 되었다. 파트너가 되고 며칠 동안 서먹서먹하게 있을 때, 프레이야가 마법을 잘 한다는 이야기를 오딘에게서 들은 로키가 마법 수업과 검술 수업의 교환을 제시했다. 재미있을 거라 생각한 프레이야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 후부터 두 신은 사이가 가까워졌다. 덕분에 로키의 아내인 앙그르보다도 프레이야와 친해졌다. 그 둘 사이에 그런 행복한 과거도 있었다.
레이와 프레이르가 이동한 곳은 나무가 몇 없는 돌산이었다. 부서지기 쉬운 돌부터 땅 깊숙한 곳에 있을 법한 단단한 돌까지 다양한 바위가 산을 가득 덮고 있었다. 자기 실수로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라도 하면 뇌진탕에 걸리든 즉사하든 하기 알맞은 곳이었다.
“무기가 하나도 안 보이는데?”
레이의 눈에는 바위와 몇 없는 나무 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신에게 그 활이 있다면 저에게는 이 검이 있습니다.”
프레이르는 목걸이 펜던트로 달고 있던 엘프 소드를 꺼내 본 크기로 만들었다. 제공되는 기타 무기는 없고 개인 무기가 하나씩 있으니까 나머지는 모두 마법 구현화 무기로 싸워야 했다. 레이는 상황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제 2의 세계에서 엘프들 사이에서 ‘왕자님’이라 불리며 험한 일에는 손대지 않던 고귀한 프레이르와 트림헤임의 공주로서 사냥과 싸움에 앞장섰던 자신의 대결 구도는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흥미로운 경기가 될 것 같았다.
“당신의 얼음 속성의 마법에는 불 속성의 마법이 효과적이나 저는 그 쪽에 대해서 문외한이라 안타깝습니다.”
프레이르는 민혁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상당히 격식 있는 태도를 취했다. ‘레이디 가드’정신이 제 2의 세계에서나 제 3의 세계에서나 그의 정신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신조였다.
“아, 제가 주로 사용하는 게 얼음계 마법이긴 하지만, 트림헤임의 공주이자 사냥과 스키의 여신은 타 속성의 마법도 할 수 있답니다. 다만 주문을 외우는 것이 귀찮을 뿐이죠.”
[피융]
레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하는 중에 프레이르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먼 거리였기 때문에 프레이르는 화살을 쳐낼 것도 없이 여유롭게 피할 수 있었다. 레이가 약한 정도로 한 개의 화살만 날려서 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새 손질을 안 해서 걱정했는데 잘 날아가네.”
누가 봐도 ‘진짜 얌체다’ 소리 나올 정도로 천연덕스러웠다. 레이의 화살은 프레이르의 심장을 노리고 정확하게 쏜 것이었다. 그걸 두고 시범삼아 쏴 본 거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레이르는 별로 개의치 않아 하는 눈치였다. 레이는 그런 프레이르 태도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냥과 스키, 겨울의 여신께서 다른 속성의 마법을 쓰는 모습을 보고 싶네요.”
“빨리 경기를 시작하자는 말로 이해해도 괜찮을 까요?”
레이와 프레이르는 각각 마력을 모았다. 마력의 봉인을 되찾은 신의 포스는 확실히 위압적이었다. 마력을 적절히 활성화하면서 싸움의 방식을 계산하는 것은 프레이르보다 레이가 더 능숙했다. 프레이르는 단지 상황이 받쳐주는 대로 움직일 뿐이기 때문에 변화무쌍하고 상황주도적인 레이에게는 부족한 상대였다. 게다가 프레이르는 레이를 이기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파티용 가면이란 ‘심술궂은 가면’이라는 별명이 딱 어울리네요. 얼굴을 가린 것 같으면서 눈이 뭘 보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입이 어떤 웃음을 띠고 있는지 다 보이니 말이에요.”
레이는 웨폰 배틀 자체를 몸을 움직이는 하나의 유희로만 즐기려는 프레이르의 미소가 불쾌했다. 우트가르드 로키의 편에 서 있으면서 진심으로 그의 편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가벼운 태도로 경기에 임하려는 책임감 없는 태도가 성가셨다. 적이라면 이왕에 적극적이고 제 일에 소신 있는 적이 상대할 재미가 있는 법이었다.
“그래도 가면을 쓰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프레이르는 왼손의 검지와 중지로 엘프 소드의 날을 죽 문질렀다.
“승패를 가려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 슬프군요. …윈드 블레이드.”
프레이르는 슬며시 미소 지으며 엘프 소드를 가로로 길게 휘둘렀다. 그러자 휘두른 길을 따라 바람이 칼날이 되어 레이를 향해 날아갔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거는 우트가르드 로키와 똑같아.”
레이는 신속하게 마력으로 만든 화살을 하드 메탈 보우에 걸고 시위를 당겨 조준했다.
“그건 저에게 험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두시죠.”
“흥.”
[피융]
[쾅!]
레이가 쏜 화살은 활을 떠나 곧장 앞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활은 윈드 블레이드에 맞지 않았고, 윈드 블레이드는 레이의 오른쪽 옆에 있는 바위를 깨부쉈다.
[챙]
프레이르는 자신의 심장을 향해 정확하게 날아오는 화살을 엘프 소드로 쳐냈다. 조금만 늦게 반응했으면 심장이 꿰뚫릴 정도로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레이는 윈드 블레이드가 날아오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 자신이 위험한 지 아닌 지 판단해내서 화살을 곧장 프레이르에게로 조준한 것이었다.
“윈드 블레이드를 제대로 다룰 줄 모르나 보네요. 깔끔하게 잘라내야 할 걸 부숴버렸으니, 구현화 마법이 부실하다는 걸 잘 알겠어요.”
레이는 스카디의 싸늘한 얼음의 눈으로 프레이르를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정확도의 차이에서 자신의 열등함을 확인한 프레이르는 앞으로 몇 차례 더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거라는 사실에 식은땀을 흘렸다. 프레이르는 레이가 피할 필요로 없을 정도로 빗나간 공격을 했지만 레이는 프레이르를 죽일 수 있을 만큼의 공격을 했다. 경기에 임하는 자세가 만들어낸 결과이면서 둘의 차이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억지로 참가한 것도 억울한데 죽을 위기에 놓이니 더 서글프군요.”
프레이르는 오른손으로 엘프 소드를 더 세게 쥐었다. 아무래도 섬세하게 마법을 다루는 것은 프레이르에게 무리였다. 날카로운 공격을 둔기형 공격으로 만들 정도로 구현화 실력이 좋지 않았다. 그러니 의지할 수 있는 건 손에 들고 있는 엘프 소드뿐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게 좋을 겁니다.”
[피융, 피융]
레이는 2개의 화살을 연달아 쏘았다. 두 화살은 모두 급소를 향해 날아갔다. 프레이르는 한 개는 옆으로 움직여서 피했고 다른 하나는 엘프 소드로 쳐냈다.
“살벌한 눈물, 프리즈 애로우.”
농도 8C의 프리즈 애로우가 프레이르의 머리를 향해 시원스러우면서 소름끼치도록 바른 속도로 날아갔다. 프레이르는 몸을 낮게 숙여 아슬아슬하게 피했으나 연속된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프리즈 애로우가 박힌 곳을 돌아보니 화살을 중심으로 천천히 얼어가고 있었다.
“위험했습니다.”
“프리즈 샤워는 반칙이지만 프리즈 애로우는 허용되는 마법이니까 써먹어야죠.”
프레이르는 처음에 갖고 있던 여유의 미소를 잃어버렸다. 생각보다 살벌하게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얼굴이 사색이 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레이가 풍기는 압력은 하나의 ‘덫’이고 그 자체가 보이지 않는 무기였다. 지는 건 둘째치고 일단 살아 남는 일이 더 중요했다.
“응용력 쪽에서는 검보다 활이 더 훌륭하군요. 정말 멋집니다.”
프레이르의 머릿속에는 레이의 다음 공격이 무엇이며 어떻게 피할지 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자기가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는 생각할 엄두도 못 냈다. 프레이르가 싸우는 법이 서툴다는 것을 잘 아는 레이는 프레이르가 평정을 되찾고 침착해지기 전에 또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무스펠의 외침이여, 대지를 태워라, 플레임 블레이드.”
레이는 왼손에 활을 들고 있기 때문에 오른손은 어떤 무기를 구현화하든 자유로운 상태였다. 농도 7C의 견고한 ‘플레임 소드’를 미리 재빠르게 준비하고 프레이르를 향해 강렬한 화염의 칼날, 플레임 블레이드를 날렸다. 날카로운 반원형 칼날의 형태를 유지하며 불꽃을 터뜨리는 플레임 블레이드는 지나온 길의 수분을 모두 증발시킬 정도로 강력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레이의 오른손에서 붉은 오렌지색 불꽃을 튀기는 투명한 주황색 칼날의 플레임 소드는 농도 7C의 견고함을 플레임 블레이드에도 고스란히 전했다. 얼음 속성계 마법으로 유명한 스카디(레이)에게 이 정도로 강력한 불 속성의 마법이 가능할 줄은 완전히 예상 외였다. 왜 나이트 솔저가 아닌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레이가 플레임 소드를 구현화하는 주문을 생략했기 때문에 프레이르는 플레임 블레이드를 대항할 시간이 너무 짧았다. 하지만 인간은 위기의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플레임 블레이드에 대적할 만한 것을 정확하게 끄집어냈다.
“란이여, 그대의 축복을 내 손에, 블루펄 메탈 실드.”
프레이르가 레이의 공격을 엘프 소드로 막아낸다거나, 받아칠 공격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강한 방어 무기 구현화가 가장 잘 어울리는 대처법이었다.
메탈 실드 자체도 단단하지만 그 겉에 바다의 진주가 빼곡히 박혀서 물 속성의 위력을 가져 방어력이 강화된 것이 블루펄 메탈 실드다. 바다의 여신, 란이 만들어낸 방패로, 대장간 불의 신 로키의 장난을 받아치기 위해 만든 것이 강력한 방어 마법의 리스트에 들어가게 되었다.(로키와 란의 사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로키에게 란은 이모 같은 존재고, 란에게 로키는 조카 같은 존재라 서로 장난을 잘 치고 잘 받아주었다. 그 정도가 좀 기술적이고 심한 것뿐이다.) 블루펄 메탈 실드의 기본 농도만 해도 6C이기 때문에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쿠왕!]
굉장한 폭발음이 일어나면서 그 여파로 흙먼지가 사방에 뿌려졌다. 레이는 좀 먼 거리에 서 있었기 때문에 고개만 살짝 돌렸고, 프레이르는 방패의 위에 서 있었지만 팔로 얼굴을 가려야했다.
[치이이익]
플레임 블레이드가 블루펄 메탈 실드에 박혀 수증기를 일으켰다. 둘 다 농도 7C였기 때문에 완전히 부수지도, 완전히 막지도 못했다.
[쩌억]
[쩌저적]
[차앙!]
칼날과 방패에 각각 금이 길게 생기더니 결국 동시에 깨져버렸다. 파편들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자연 소멸되었다. 붉은 불꽃과 푸른 진주가루가 연출하는 장관이었다.
“괜찮은 방어였어요.”
싸늘한 시선과 차가운 미소는 칭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반응에 대한 짐승적인 사움의 쾌감을 나타낸 것이었다. 레이의 눈에 프레이르는 이미 하나의 사냥감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즐겁게 해줄 수 있을 정도로 대항할 줄 아는 멋진 사냥감이 눈앞에 서있었다. 프레이르는 레이의 눈이 사냥꾼의 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레이의 압력에 눌렸을 때부터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새삼스레 다시 자신의 안전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제가 여기서 기권한다면 화낼 건가요?”
레이는 프레이르의 말에 잠깐 멈칫하나 싶더니 아무 말 없이 농도 3C의 화살을 하드 메탈 보우에 걸었다. 시위를 당기긴 했으나 아직 화살촉을 땅을 향해 내린 상태였다.
“억지로 참여한 몸이 진심으로 이 가치 없는 웨폰 배틀을 즐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마력을 풍기고 있는 모습이 이미 싸우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입으로만 기권하겠다 말하면 신빙성이 없습니다.”
레이는 엘프 소드에 차근차근 마력을 축적하는 프레이르를 향해 활을 겨누었다. 시위는 아주 팽팽하게 당겨져서 화살이 시원스레 날아갈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화살의 농도는 3C. 충분히 다른 종류의 화살로 바뀔 수 있었다.
“이런 걸 보고 긴장상태라 하는 군요.”
[짤랑]
엘프 소드의 검 날이 손잡이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검 날이 꽂혀 있던 구멍에서 마력이 새나왔다.
“맞아. 그 검……. 성가신 검이었어.”
레이는 엘프 소드의 진자 사용법이 생각났다. 날이 달려 있을 때는 평범한 검처럼 사용할 수 있으면서 마법 구현화 무기의 기술도 더불어 쓸 수 있다. 그러나 엘프 소드의 진가는 날을 빼냈을 때다. 맨 손에 마법 구현화 검을 만들 때보다 더 쉽게 더 강한 검을 구현화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엘프 소드 사용자의 마력을 증폭시키면서 기술력도 같이 키워주는 것이다. 레이의 하드 메탈 보우가 화살의 종류와 위력을 일정 한도까지 버텨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네레이드여, 춤을 추어라. 그대들에게 축복을 바치리니, 마린 사브르.”
프레이르가 주문을 외우자 엘프 소드의 손잡이가 사브르의 손잡이 모양으로 바뀌고 손잡이의 구멍부터 칼끝으로 사브르의 날이 생성되었다. 깊은 바다색의 우아하면서 고독한 날이었다.
“이건 이미 데미 웨폰 배틀이 아니라 홀리 웨폰 배틀이잖아.”
“아닙니다. 홀리 웨폰 배틀은 이보다 더 화려하고, 이보다 더 격렬하답니다.”
레이가 혼자 중얼거린 말에 프레이르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자신의 마력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 해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밝은 표정을 지었다. 사냥꾼의 눈을 가진 레이가 그것을 지나칠 리가 없었다. 프레이르는 역시 싸움과 전쟁에 거리가 멀었다. 지위는 높아도 쌍둥이 여동생에게 밀리는 형식적인 상급 신.
“기권하지 않겠습니다. 프레이야가 화낼 지도 모르거든요. 하지만 저를 이겨주십시오.”
낮게 깔린 목소리는 진심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레이는 프레이르를 겨누던 화살의 농도를 높였다.
“우트가르드 로키의 후환이 두렵지 않은가요?”
“그가 요구한 것은 경기의 참가지 이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일부러 그를 이롭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프레이르는 마린 사브르를 레이를 향해 찌르듯이 앞으로 내밀었다. 날의 깊은 바다색은 프레이르의 마음을 보여주는지 우아해야할 색이 우울하게 보였다. 구현화 마법이 원래 구현자(시전자)의 마음을 반영할 수 있다고 하는데 프레이르의 마린 사브르가 그랬다. 그가 제 2의 세계에서 즐겨 쓰는 검으로 언제나 그의 고독함을 보여주었다.
“일렉 애로우.”
[치지직]
레이는 화살을 농도 5C의 번개 속성 화살로 바꿨다. 이 정도 화살은 주문을 일일이 외울 필요가 없었다.
“정말 다양한 속성을 구현화하시는 군요. 제 2의 세계에서 이 사실을 일부러 숨긴 것은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죽 궁금했습니다. 트림 헤임의 아름다운 공주님. 제 추측이지만 역시나 당신의 마음을 빼앗을 발데르 때문이었습니까?”
“뻔하잖아요. 그런데… 여유만만하시군요.”
[치지지직]
일렉 애로우는 자잘한 스파이크를 일으키며 프레이르의 머리를 향해 곧장 날아갔다.
[탁, 치익]
“앗.”
프레이르는 무심코 화살을 마린 사브르로 쳐냈는데 손에 순간적으로 전기가 올랐다. 전기는 물에서 더 잘 통한다는 레이의 계산에 의한 공격을 파악하지 못한 결과였다. 아주 짧은 순간의 통증이었기 때문에 검을 손에서 놓치지 않았다.
“경솔했습니다.”
프레이르는 손의 짜릿한 저림이 가라앉자 마력을 보충하여 마린 사브르의 강도를 높였다.
“뭐……. 스카디의 솔직한 대답을 들어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라즈티어 나이프번들.”
프레이르가 마린 사브르를 위로 높이 들어 올린 후 아래로 빠르고 강하게 내리치자, 푸른빛의 작은 칼날 수십 개가 세로로 줄을 맞춰서 레이를 향해 칼끝을 번뜩이더니 동시에 대형을 유지하며 날아갔다.
“이건 규칙 위반입니다. 살벌한 눈물, 프리즈 애로우.”
레이는 농도 8C의 프리즈 애로우를 만들어서 라즈티어 나이프번들을 향해 쐈다.
라즈티어 나이프번들은 구현화 마법이긴 하나 웨폰 배틀에서는 금지되는 마법이다. 프리즈 샤워가 금지되는 이유와 같다. 실제 쇠붙이 무기를 동시에 수십 개를 다룰 수 없기 때문에 마법 구현화 무기에도 사용 금지 사항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제한적으로 마법이 난무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나이프를 구현화하려면 손으로 직접 던지는 형태로 해야 한다.
[펑!]
프리즈 애로우의 강도가 높았기 때문에 라즈티어 나이프번들의 모든 나이프가, 하나도 남김없이, 싹쓸이되었다.
“아, 실수했네요.”
프레이르가 규칙을 잊어버린 것 역시 진짜였다. 너무 오랜만에 해보는 웨폰 배틀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던 것이다.
“세 번 위반하면 자동 실격이라는 건 기억하고 있나요?”
레이는 일렉 애로우를 시위에 걸며 한심하다는 듯이 물었다. 세 번. 앞서 민혁과 프레이야의 경기에서 민혁이 프레이야를 세 번 제지하자 민혁의 승리로 끝났고, 실격 역시 세 번을 하면 실격이 되어 상대의 승리로 끝난다. 두 경우가 섞여도 된다. 예를 들어 만약 A가 B에게 한 번 제지당하고, 두 번 반칙을 하면 B가 이기게 된다. 이무튼 지금 레이가 조금은 더 유리한 상황이다.
“네. 알고 있습니다.”
프레이르는 레이가 가지고 있는 화살이 일렉 애로우라는 걸 알면서도 마린 사브르를 고수했다. 마린 사브르로 직접 쳐내기 전에 타 기술로 쳐내면 되는 것이었다.
[피융]
“대기 속을 흐르는 물이여, 가로 막는 자를 베어라, 워터 블레이드.”
프레이르는 마린 사브르를 가로로 곧게 휘둘러 워터 블레이드로 일렉 애로우를 받아쳤다.
[펑! 치지지직]
폭발음과 함께, 물과 번개의 반응으로 깔끔하지 못한 소리에 옅은 수증기가 일어났다. 프레이르는 옅은 수증기가 실루엣의 역할을 하는 바람에 레이의 움직임을 놓쳐버렸다. 하지만 마력의 움직임 덕분에 눈으로 보지 않아도 대략의 위치는 파악할 수 있었다.
“움직임이 상당히 민첩하시군요.”
[챙!]
프레이르는 뒤를 돌아서 레이의 프리즈 글라디우스를 막아냈다. 마린 사브르보다 프리즈 글라디우스의 강도가 강했기 때문에 마린 사브르에 금이 갔다. 레이는 그걸 놓치지 않기 위해 검을 더 세게 아래로 짓눌렀다.
“한 쪽 팔을 내주시죠.”
사냥감이 굴복하길 기다리는 사냥꾼의 눈은 소름끼치기 그지없었다. 한 손 대 한 손의 상황이었는데 위로 떠받쳐야 하는 프레이르가 더 많은 힘을 소모하는 것은 당연했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받치고 싶었으나 왼손을 움직이다가 자세가 흐트러지면 그 틈으로 레이가 허를 찔러 올까 두려워 가벼이 움직이지 못했다.
“그 왼손이 할 일을 못 찾고 있나본데, 적당히 쓸 수 없다면 없어져도 상관없겠군요.”
살기 가득한 레이의 말에 프레이르는 심장이 철렁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레이가 뭔가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지금 놀고 있는 왼팔을 제가 가져가겠다는 것입니다.”
레이는 왼팔을 들어올렸다. 하드 메탈 보우 대신에 프리즈 크로스 보우가 발사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레이르는 레이가 자신에게 다가오면서 활이 바꿨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아차렸다. 가까이 마주 보고 있는 상태에서 크로스 보우의 화살을 직격으로 맞으면 피해 정도가 타 활보다 크다. 그런데 마법 구현화된 프리즈 크로스 보우라면 상처를 남기는 게 아니라 팔을 끊어버리거나 말 그대로 날려버릴지도 모른다. 레이는 오른손으로 프레이르의 오른손의 움직임을 봉쇄하면서 왼손으로 프레이르의 왼쪽 어깨를 겨냥했다.
“쉽게 못 내드립니다.”
프레이르는 마린 사브르를 레이의 힘의 방향을 따라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갑작스런 힘의 불균형으로 레이가 잠깐 비틀거렸다. 그 사이에 프레이르는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피융]
[팍]
“으윽.”
하지만 레이는 프레이르를 자유로이 두지 않기 위해 화살을 그대로 쐈다. 몸의 균형을 잃은 상태에서 쏜 것이었기 때문에 노렸던 왼쪽 어깨가 아닌 오른쪽 허벅지를 맞췄다. 위력을 순간적으로 줄인 덕분에 화살은 프레이르의 허벅지에 박혀 깊은 상처만 만들고 자연스레 사라졌다. 그래도(농도가 1C라 해도) ‘프리즈 애로우’기 때문에 상처 부근이 조금 얼었다. 프레이르는 화살을 맞은 후에 비틀거리더니 주저앉았다.
“이런 걸 보고 통증이라 하는 군요.”
“고통이라고 하죠. 우트가르드 로키를 거드는 당신에 대한 저의 응징입니다.”
레이의 왼손에 있던 프리즈 크로스 보우는 사라졌다. 레이는 프레이르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프리즈 글라디우스의 날 끝으로 프레이르의 턱을 받쳐 살짝 위로 올렸다. 프레이르의 눈에는 전의가 사라지고 있었다.
“정말 시시한 사냥감이었습니다.”
레이는 실망이라는 듯이 말했다.
“아닙니다. 그렇게 시시하지만은 않은 몸입니다.”
프레이르의 눈은 다시 생기를 띠었다. 프레이르는 웃으며 윈드 플랑베르주로 바꾼 검을 레이의 왼쪽 옆구리에 가져다 댔다.
“다리 한 쪽을 쓸 수 없다 해서 싸울 수 없다는 건 아닙니다.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지만…… 점점 투기가 생기는 군요.”
쉽게 말해 오기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대충 시간만 때우다가 얌전히 져주던가 기권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몇 차례 공격을 주고받으면서 피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레이가 진심으로 진지하게 경기에 임하는 걸 보니 점점 전염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설야의 은둔자, 그대 이름을 부른다, 프리즈 바젤라드.”
레이는 빈 왼손에 단검의 일종인 바젤라드를 구현화하여 윈드 플랑베르주를 견제했다. 바젤리드보다는 링 대거가 다루기 편하지만 길이나 용도의 다양성에서 바젤라드가 더 나은 편이다. 쓰임새가 다양하다고 ‘만능 단검’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레이가 이런 걸 다 생각하고 나서 프리즈 바젤라드를 구현화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싸움에 길이 든 자가 아니면 이 같은 본능적인 선택은 하지 못할 것이다.
“검을 바꾼 걸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플랑베르주라면 바로 상처를 입힐 수 있을 텐데 불필요한 짓을 했군요.”
“스카디도 글라디우스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제 목 앞에서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습니까.”
자기를 다치게 했지만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도 그 은혜에 보답해서 상처 입히지 않는다는 말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레이나 프레이르나 웨폰 배틀을 종료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손이 더 이상 깊숙하게 파고들지 못했다.
“…그래도, 네……, 네. 제 3의 세계에서 지내온 편한 시간 덕분에 손에 피를 묻히는 게 두려워졌군요.”
레이는 상대를 처리하는 데 있어 머뭇거리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활이라면 먼 거리에서 손에 피를 튀길 것 없이 상처를 입힐 수도, 죽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검은 손에 피를 묻힐 것을 요구한다. 레이는 프레이르를 해치우라고 강조하는 마음에 따라서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바로 눈앞에서 피를 볼 자신도 없었다.
“아윽. 허벅지의 상처가 점점 벌어지는 것 같네요.”
프레이르는 윈드 플랑베르주를 땅 위에 내려놓고 살짝 얼어 있는 상처에서 전해지는 고통을 호소했다. 상처에 물이 닿으면 쓰라린 것과 같은 원리였다.
“지금의 당신은 절 이길 수 없어요.”
프레이르의 턱에서 프리즈 글라디우스를 치운 레이는 뒤돌아서 땅에 떨궜던 하드 메탈 보우를 주우러 걸어갔다. 프레이르는 양손으로 허벅지를 감싸고 잠깐 생각에 빠졌다.
“실격하기까지 남은 규칙 위반 개수는 2개.”
레이는 손수건으로 하드 메탈 보우를 정성스럽게 닦다가 프레이르의 말을 듣고 나서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돌렸다.
“경기 중에 생긴 상처를 경기 중에 치료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어길 건가요?”
레이의 말투는 무덤덤했다. 규칙 위반은 두 번째 까지는 허용되는 셈이니, 다른 실수를 하지 않는 이상 치료 마법을 통해 일부러 규칙을 어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치료 중에 기습 공격을 당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규칙 위반과 기습을 모두 감수할 자신이 있다면 경기 중에 치료를 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리커버리.”
프레이르의 대답이었다.
레이는 손수건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농도 6C의 화살을 만들어 시위에 걸었다. 프레이르가 치료를 하는 도중에 화살을 쏘아 그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생각이었다. 치료 마법 역시 섬세한 마법 실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프레이르는 간단한 상처를 치료하는 데도 신간이 좀 걸리는 편이다. 레이는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프레이르를 방해하기 위해 화살을 쐈다.
[팍]
화살은 프레이르의 바로 오른쪽 옆에 박혔다. 화살이 효과가 있었다. 프레이르는 리커버리를 중간에 멈춰버렸다.
“짓궂군요.”
“더 짓궂을 수도 있어요.”
레이는 두 번째 화살을 날렸다. 그 화살은 정확하게 프레이르의 왼쪽 어깨에 박혔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노래를 불러주세요. 아니면 플루트를 연주해 주세요. 그걸로 당신을 향하던 제 마음을 위로하겠습니다. 난나와 같이 청순하고 얌전한 이가 좋으시다면 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서 멀어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도 이제 한 명의 당당한 ‘신’이지만 광명의 신, 당신과 당신의 아니, 난나를 지키는 수호병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나이트’의 칭호는 기꺼이 거절하겠습니다.
아스가르드든, 요툰 헤임이든, 모든 아홉 세상에서 저의 진정한 실력을 알고 있는 것은 외눈박이 마법사, 오딘과 광명의 신, 당신과 저의 이웃이자 예언자, 앙그르보다 뿐입니다. 이때까지 실력을 숨기고 살아온 몸이 뭣 하러 지금 와서 나이트가 되겠다고 하겠습니까. 전 영원히 솔저로 남아 당신과 난나의 수호병이 되겠습니다. 저에게 명예란 한낱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발데르의 수호병이 되기를 맹세하는 스카디의 말.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신의재림-두번째라그나로크(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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