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신의재림-두번째라그나로크(완)

신의 재림 : 제 7문 (3)

★은하수★ 2009. 6. 12. 18:07

지칠 대로 지친 몸이었지만 우트가르드 로키가 마지막 상대라며 베일리를 내보냈기 때문에 깡으로 두 다리로 버텨 섰다. 베일리가 정확하게 열세 번째 상대였다. 과연 마지막 상대로 어울릴 만큼 강한 지 판가름하기 애매하지만 웨폰 배틀에 이어서 다시 한 번 상대할 수 있게 되어 은근히 피가 끓어오르는 듯 했다.

“여긴 콜로세움이니까 헤임달을 죽여도 죄책감이 전혀 없겠군. 이거 우트가르드 로키에게 고마워해야 겠어.”

[붕 붕]

인철은 하드 메탈 소드를 오른손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베일리를 주시했다. 일회용 아이템에 속하지만 나름 위력이 강한 화계 가죽 장갑을 오른손에 끼고 있었고 평범한 검을 왼쪽 허리에 차고 있었다. 좀 신경 쓰이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조그만 혈류석이 나란히 박혀있는 검은 팔찌를 양 손목에 차고 있는 것이었다. 인철은 베일리가 지금 그 팔찌를 차고 있는 게 의아스러웠다.

“제약이 심한 웨폰 배틀이 아닌, 이 자유의 콜로세움에서는 내가 훨씬 더 세다는 걸 잊지 마.”

베일리는 왼손에 마력을 모으고 왼쪽 눈을 개안했다. 헤임달의 자랑스러운 신체무기라 불리는 ‘일루션 아이’였다.

“인간의 육체로 그 일루션 아이를 얼마나 쓸 수 있을지 기대되는 군.”

“시끄러. 윈드 볼.”

농도 8C의 윈드 볼이 주변의 공기를 휘감아 빨아들이며 인철을 향해 맹렬하게 날아갔다. 지금 남은 마력이 제로고, 체력도 제대로 쓸 만한 상태가 아닌 인철은 농도 8C의 윈드 볼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윈드 볼이 만들어 내는 기류와 기압에 휘말리지 않을 곳까지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콰광!]

“범브.”

베일리는 인철이 안전하게 몸을 피한 곳을 향해 오른손에 낀 장갑의 힘을 빌어 범브를 날렸다.

[펑 펑]

범브 정도야 하드 메탈 소드로 가를 수 있는 마법이었다. 둘로 갈라진 범브가 인철의 양 옆을 지나 날아가면서 인철의 팔에 그을음을 입혔다. 인철은 화력 때문에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베일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걸려버렸잖아.”

상대방의 오감을 지배하는 일루션 아이는 굳이 그 눈과 마주치지 않아도 됐다. 일루션 아이를 가진 자가 대상을 보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헤임달은 솔릭이 없는 대신 이 일루션 아이를 갖게 되었다. 물론 헤임달의 마력만 감지해 내면 일루션 아이 정도야 거뜬히 무력화 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인철과 같은 신족 등은 그 눈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원래 약한 신은 지금 나보다 좀 더 강하다 해도 별로 무섭지 않아.”

[휙]

인철은 우측으로 검을 휘둘렀다. 인철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베일리는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베일리도 일루션 아이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인철에게 잘 통하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지만 안 쓰는 것 보다 쓰는 편이 자신을 좀 더 유리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쓸데없는 짓’처럼 보이는 짓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건 아니었다. 베일리도 나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콰광!]

윈드 볼 역시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인철은 뒤로 물러서면서 피했다. 그리고 곧장 검을 휘두르며 뒤로 돌았다.

[깡]

인철의 검과 베일리의 실드가 맞부딪혔다. 베일리가 인철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 있었기 때문에 몸을 움직여 검을 피할 수 없었다. 방어 마법 중에서 가장 간단한 방패를 사용했기 때문에 일절 주문 없이 마법을 발동할 수 있었다.

“제법이군.”

베일리의 목소리가 왼쪽 귀에 바로 들리더니 양 팔을 꽉 잡혔다.

“지금 여기서 가장 쓸모없는 건 바로 너야.”

심장이 쿵쾅거릴 만큼 악의에 찬 유혹의 목소리가 인철의 귀를 지나 뇌를 고동치는 것 같았다. 인철은 자신이 그동안 마음에 걸렸던 사실을 직접 남에게 듣게 되니 어쩔 줄 몰랐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심장이 더 빠르게, 다 강하게 뛰었다.

“오딘이나 스카디, 베르단디처럼 마력이 강한 것도 아니고, 로키처럼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야. 체력? 그거야 토르가 깨어나면 넌 이미 밀려버려. 인간의 체력이야 다 거기서 거기겠지만, 넌 역시 그저 평범한 인간이야. 그런 주제에 여기까지 살아남은 건 칭찬해 주지. 하지만 역시 쓸모없어. 정말 약해 빠졌다고. 네가 제대로 할 줄 아는 거라곤 그저 감 좋은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숨 쉬는 것뿐이잖아.”

베일리의 말은 인철의 가슴을 수차례 찔렀다. 인철이 기억을 되찾고 나서 계속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이다. 신중에서 가장 약한 주제에 함부로 웨폰 배틀에 나서질 않나, 마력을 완전히 되찾은 레이 앞에서 강한 척 하질 않나. 다른 신들이 얼마나 자기를 가소롭게 봤을까. 정말 할 줄 아는 건 숨 쉬면서 살아 있는 것뿐인데 괜히 기억을 되찾아서 신들의 걸림돌이나 된 건 아닌지.

“정말 바보 같군. 이런 녀석이 신이라니 말이야. 너에겐 이 솔릭이 아까워. 차라리 로키에게 주지 그래? 로키도 마력은 없지만 너보다는 이 검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고. 그 비상하게 좋은 머리로 이걸 아주 유용하게 써 줄 거라고. 너 같은 불량품은 빨리 없어져야 하는데, 오딘이 너무 인간성이 좋아서 봐 준 덕분에 이렇게 두 다리로 땅 위에 서 있는 거라고. 네 분수를 좀 알아라. 완전 꼴불견이야.”

인철의 눈은 점차 흐리멍덩해졌다. 사실을, 본인이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사실을 명확하게 집어 주는 것만큼 잔인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인철의 호흡이 점차 느려지고 정신은 점차 자기 판단력을 잃어갔다. 베일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것 같이 안쓰러운 모습으로 변해갔다.

양 팔을 잡고 있는 힘은 점점 강해졌다. 베일리의 모습만 보이지 않던 눈은 완전히 시력을 잃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청각은 이미 베일리의 목소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육체의 힘이 모두 쭉 빠지면서 인철은 축 쳐졌다.

[툭, 투욱]

인철은 검을 떨어뜨리고 나서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베일리는 하드 메탈 소드를 주워 들고 두어 번 휘둘러보더니 옆으로 멀리 내던져버렸다.

[카앙]

“네 녀석이 레이랑 붙어다니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야. 신의 입장을 떠나서, 친구로서의 생각인데 레이가 좋다면 좋은 거야. 그 녀석의 판단이 틀렸던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그 녀석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도 아니고 말이야. 인간 대 인간으로 너희 둘은 참 잘 어울려. 신 대 신이라면 레이가 한참 아깝긴 하지.”

베일리는 인철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뒤로 확 잡아당겼다. 그렇지만 인철은 일루션 아이 때문에 어떤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베일리의 말만 경청하는 인형에 불과했다.

“헬이 네 녀석의 기억을 되돌려줬다지? 어, 뭐, 상관없어. 그 땐 오딘이 우트가르드 로키를 상대하느라 바빴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헬과 접촉한 건 정말 내 신경을 건들더군. 내가 헬과……. 적어도 헬이 끌어들어지지 않길 얼마나 바랐는데, 역시 과한 욕심이었지. 그래도 말이야…… 체스 네 녀석한테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니까 여기서 그만 두지.”

마야와 제 3의 세계에서 맨 처음 만났을 때가 영국 영사관 테러 사건 때였다. 서로에게 마법을 겨눌 정도로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환생 후 첫 대면을 가졌다. 그 때 마야는 진심으로 베일리를 죽이려고 했다. 베일리는 그날 집으로 돌아가서 가슴을 꽉 쥐며 괴로워했다. 보고 싶던 이를 만났지만 반갑게 인사할 수 없었던, 제 2의 세계에 이어 다시 한 번 서로의 목숨을 노려야 하는 처지라는 사실이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 듯 했다.

제 2의 세계에서 비프로스트의 파수꾼 헤임달과 죽음의 여신 헬은 어느 누구도 모르는 애인 사이였다. 괴물 삼형제가 오딘의 명령에 따라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던 평화기에도 그 둘은 사귀고 있는 사실을 숨겨야 했다. 그건 헬의 아버지인 로키와 헬의 애인인 헤임달의 사이가 극도로 나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육체의 반쪽이 추한 시체의 형상인 헬을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선을 넘은 것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사실을 숨겼다. 헤임달은 헬이 어떻게 생겼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헬에게서 너무 사랑스러운 모습을 발견했고, 가끔씩 만날 때마다 점점 커져가는 마음을 진심으로 소중하게 여겼다. 헬은 헤임달이 로키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행동했지만 헤임달의 마음이 조금씩 스며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아버지가 아닌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게 되었다. 라그나로크 직전에 아스가르드와 괴물 삼형제의 사이가 틀어졌을 때도 둘의 밀애는 변함이 없었다.

“둘이 그런 사이였어?”

인철의 눈동자가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다. 베일리가 자기감정을 쉽게 잡지 못해서 일루션 아이의 컨트롤이 조금 비틀어진 틈에 인철의 감각이 대부분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었다. 처음에 베일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때까지로 회복되었다.

“그래서 마야가 네 이야기만 들으면 표정 관리가 허술해졌던 거군.”

인철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베일리의 얼굴이 있을 법한 곳으로 주먹을 세차게 휘둘렀다.

[뻑!]

모습을 보지 않고 때린 것 치고는 제대로 맞아 들어가서 베일리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인철은 태연하게 하드 메탈 소드가 떨어져 있는 곳에 가서 검을 주워들었다.

“다른 이의 솔릭을 함부로 다루다니, 매너가 불량이군.”

“퉷, 생각보다 회복이 빠르잖아. 좀 더 갖고 놀고 나서 죽이려고 했는데.”

베일리는 바닥에 침을 뱉은 후에 일어섰다. 그리고 눈의 피로를 좀 회복시키기 위해 일루션 아이의 최면 상태를 중단했다.

“죽이려면 그냥 빨리 죽이지 그랬어. 덕분에 난 쉬면서 체력이랑 마력이 아주 약간식 회복됐거든. 머리도 한결 시원해지고.”

인철은 베일리를 향해 검을 곧게 내뻗었다. 인철의 눈에는 널 꼭 죽이고 말겠다는 결의가 진하게 담겨있었다. 그건 베일리도 마찬가지였다.

[타다다다]

“범브.”

[펑!]

인철이 베일리를 향해 달려들 때 베일리는 범브를 날려 인철의 주행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인철은 범브를 반으로 가르고, 둘로 나눠진 범브가 양쪽에서 동시에 터져도 그 열기와 연기에 아랑곳 않고 앞으로 달려가 베일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우우웅]

베일리는 마력으로 주변의 공기를 끌어 모아 오른손에 강한 바람을 만들어 내서 검을 막아냈다. 그리고 왼손을 인철의 배 쪽으로 들이 밀며 뭔가 마법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인철이 먼저 베일리의 배를 힘껏 차 넘어뜨렸다.

“네가 그 팔찌를 가지고 있는 게 이해가 되는군. 헬이 너에게 그 팔찌를 줬을 때 넌 뭘 줬지? 하긴 곡 기브 앤 테이크가 이루어질 필요는 없지. 물질적 사랑은 정신적 사랑의 반도 못 따라가니까.”

베일리가 양 손목에 차고 있는 검은 팔찌는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특권의 팔찌다 최고의 신 오딘도 산목숨일 때는 함부로 접근 할 수 없는 죽음의 나라, 헬의 왕국에 아무 거리낌 없이 왕래할 수 있는 건 보통 특권이 아니다. 제 2의 세계에서 받은 선물을 어떻게 지금 가지고 있는 지는 뒤로 남겨두고, 마야와 적대관계인 지금도 조금이나마 그녀의 흔적을 잡아보기 위해 발버둥치는 베일리의 모습이 대견함을 지나서 안타깝다.

“시끄러. 네 녀석이 말할 거리가 아니야. 윈드 볼!”

베일리는 인철의 말에 쉽게 발끈해서는 감정에 따라 마법을 사용했다. 그럴수록 정확도가 떨어지는 법. 인철은 윈드 볼을 피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단순하기 짝이 없군.”

“시끄러!”

[뻑!]

이번에는 베일리가 주먹으로 인철의 얼굴을 제대로 가격해서 날려버렸다. 인철은 베일리가 물리적 공격을 할 거란 예상을 하지 않은 탓에 차마 그 단순한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주먹은 단순하지만 이제껏 베일리가 사용한 마법보다도 인철을 향한 베일리의 적개심 들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두른 것이란 걸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여태껏 네가 날뛰던 것 중에서 가장 쓸 만한 발악이야.”

인철은 베일리에게 맞은 부분을 손등으로 스윽 문지르며 일어섰다.

“정의와 심판의 신답지 않은 단어들을 마구 내뱉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

베일리는 왼쪽 허리에 가만히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든 후, 검을 잡은 오른손에 마력을 모았다. 베일리가 조금이라도 강도가 강한 마법을 쓰면 방어를 하거나 피할 때 성가시기 때문에 인철은 베일리의 움직임을 눈치 채자마자 하드 메탈 소드를 꽉 쥐고 베일리를 향해 휘둘렀다.

[챙]

검과 검이 부딪힌 곳에서 붉은 색의 불꽃이 튀었다. 화계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검을 쥔 채 마력을 모았기 때문에 그런 불꽃이 생긴 것이었다.

[챙, 화르륵]

두 번째로 부딪혔을 때 베일리의 오른손과 검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끼기익]

하드 메탈 소드는 그 정도의 불엔 끄떡없었기 때문에 불에 뒤덮인 검과 오랫동안 맞대며 힘겨루기를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검들은 무사하다 해도 그 주인들은 얼굴과 손이 화끈거려서 저절로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화이어 블레이드.”

이 때를 놓칠 리 없는 베일리는 주저 없이 화이어 블레이드를 사용했다.

[쾅!]

인철은 자기 등 뒤에 있는 큰 거울(스핑크스가 남겨둔 사람 키만 한 거울) 뒤로 재빨리 피한 덕분에 화이어 블레이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플레임 블레이드보다 위력은 약하지만 마법을 쓰지 못하는 평범한 육체가 견뎌낼 수 있는 그런 게 아기 때문에 필히 피해야 했다. 피신처가 마친 가까운 곳에 있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필시 어느 한 곳이 심하게 다쳤을 것이다.

[챙!]

인철은 부서져 널부러진 거울 파편을 밟고 지나서 베일리에게 검을 휘둘렀다. 베일리는 여유롭게 인철의 검을 막아냈다.

[챙, 화르륵]

베일리의 검에 또 다시 불이 피어올랐다. 인철은 그 엄청난 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뒤로 물러났다.

[휘르륵, 휘르륵]

베일리는 불의 검이 돼버린 검을 마구잡이로 휘저으며 인철을 위협했다. 인철은 뒤로 걸으면서 베일리의 검을 이리저리 피하기도 하고 하드 메탈 소드로 쳐내기도 했다.

[치이이이이이…… 펑!]

“끄아악!”

베일리가 끼고 있던 장갑이 자신의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일회용 아이템이기 때문에 베일리의 마력 남용을 이 정도까지 버틴 것 자체가 대단한 거였다. 베일리는 장갑의 폭발로 오른손이 너덜너덜해졌다. 치료 마법을 바로 하지 않는 이상 잘라버리는 게 차라리 날 듯 했다.

“으윽, 으아악! 윽, 윽.”

베일리는 왼손으로 오른팔을 꽉 쥐며 괴로워했다. 피비린내와 살 타는 냄새, 화약 비슷한 냄새 등인 주변에 퍼졌다.

“과한 욕심에 대한 보상이군.”

[석.]

“으윽.”

[툭.“

인철이 베일리에게 다가가 팔을 한 번 움직이자 베일리의 오른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인철이 베일리의 오른쪽 손목 약간 위를 단번에 깔끔하게 잘라버린 것이었다. 폭발에 의한 통증이 정도가 심했기 때문에 검에 베일 때의 통증은 베일리에게 그닥 자극적이지 못했다.

인철은 베일리의 귀에 자신의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선 조용히 속삭였다.

“끝났어.”

 

인철은 우트가르드 로키의 아공간에서 빠져나와 처음 있던 동네 골목으로 돌아왔다. 그곳은 리켄에게서 인철의 납치 소식을 들은 민혁, 진원, 레이, 마야가 있는 것 빼곤 변함없이 멀쩡했다. 레이 빼고는 딱히 인철을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 무덤덤한 표정 속에 알 수 없는 난해함이 깔려있네.”

진원이 먼저 미소 지으며 말을 걸었다.

“마침 잘 왔어요. 이 전리품, 제 왼쪽 눈과 바꿔 주시겠어요?”

인철은 피범벅인 왼손을 진원에게 다짜고짜 들이밀더니 손을 펴서 그 안의 것을 보여주었다. 신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마야는 순간적인 현기증에 몸을 살짝 휘청거렸고 레이는 비위가 거슬렸는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거 먼저 해 주시면 대답할게요.”

헤임달의 일루션 아이가 인철의 손에 들려 있으니 신들의 머릿속에 갖가지 상황이 연상되는 건 당연했다.

“선배, 헤임달은 죽은 거에요? 아니면 그저 승리의 상징으로 그 눈을 가져온 거에요?”

민혁은 딱딱하진 않지만 사무적인 투로 대했다. 어차피 헤임달은 적이니까. 그런 식이었다. 인철은 신들을 죽 돌아보면서 신들이 자신이 겪은 일을, 자신이 한 일을 아주 궁금해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것을 알려줄 수 없었다.

“이 눈이 죽기 전에 어서 바꿔주세요.”

인철이 재촉하자 진원은 물끄러미 인철의 두 눈을 응시했다. 한참을 두 사람이 서로의 눈만 보다가 결국 진원이 궁니르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진원이 미처 궁니르를 본 크기로 만들기 전에 마야가 데스 홀을 꺼내 들고 진원의 팔을 붙잡았다.

“이런 건…, 제가 할게요.”

강한 여왕. 인철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었다. 어느새 평소의 차갑고 성숙한 모습으로 돌아온 마야는 정말 강한 여왕님이었다. 인철은 은근히 마야에 대해서 경외심이 생겼다. 공과 사를 확실히 할 줄 아는 분명한 여왕의 모습이, 조그만 마야에게서 카리스마 있는 헬을 끌어냈다.

“뭐, 이런 마법은 마야가 하는 게 더 낫겠지.”

진원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저에게 그 눈을 주세요.”

마야가 인철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인철은 기꺼이 일루션 아이를 마야에게 건네줬다.

“바로 시작할 게요.”

마야의 왼쪽 눈은 어둠보다 깊고 짙은 검은색이 되었고 데스 홀의 맨 위에 달린 수정은 검푸른 색의 빛을 발했다. 마야의 몸 전체와 데스 홀이 검은 오라에 휘감기면서 무거운 마력을 지표면을 따라 낮게 깔았다. 그 마력과 검은 오라가 인철 쪽으로 확산된 후에는 점차 위로 위로 올라갔다.

“익스체인징 투 리메이크(Exchanging to remake)."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검은 오라를 따라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마야의 왼손에 있던 일루션 아이가 공중으로 떠올라 검은 오라에 감싸였다.

[툭]

데스 홀로 땅바닥을 한 번 치자 일루션 아이가 인철의 왼쪽 눈이 있는 곳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그 후에 검은 오라와 마력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대신 딱 한 곳, 마야의 왼손 안에 공 모양의 검은 오라 덩어리가 들어있었다. 마야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듯 하고 있었다.

“이 안에 있는 건 티르님의 왼쪽 눈이에요. 만약에 일루션 아이가 필요 없게 되면 저에게 오세요. 다시 이 눈을 돌려 드릴게요.”

마야의 말이 끝난 후에 인철의 왼쪽 눈은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인철은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왼 쪽 눈 부분을 더듬어 보았다. 고통 없이 아주 간단하게 두 눈이 바뀌었다. 자신이 베일리에게서 눈을 뽑아낼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레이 저런 거 처음 봐요?”

레이가 두 눈 뜨고는 이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자 민혁이 설마 하는 투로 물어봤다. 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일 리가 없죠. 스카디도 저처럼 신이 되기 전에 거인이었으니까. 만약에 탐나는 특이 신체가 있다면 상대적으로 더 강한 거인이 힘으로 뺏어서 자신의 몸에 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잖아요.”

“악마족도 가끔씩 그런 경우가 있어요. 뭐, 어떤 종족은 강한 자의 심장을 먹는다고도 하잖아요.”

마야는 민혁의 말에 대한 부가설명을, 조금은 살벌한 발언을 방긋 웃으며 말했다. 레이는 머리가 핑글핑글 도는 듯 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 귀에 들어오니까 속도 메스껍고 등에 소름이 끼쳤다. 겨울과 사냥의 여신이라고 하기엔 너무 빈약한 모습이었다. 인철은 레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줬다.

“마야…….”

“네?”

데스 홀을 거두고 다시 인철을 향해 돌아보니까 인철은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야, 미안해.”

인철은 마야 앞에서 무릎 꿇고 앉은 후에 마야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다른 신들은 영문을 몰랐지만 마야는 인철의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헤임달이 죽었다. 인철의 손에서 헤임달이 죽었다. 마야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어쨌든 죽을 거니까 지금 이렇게 일찍 죽는다고 별로 달라지는 건 없는데 가슴이 아팠다. 자신은 죽음의 여신이니까 언제든 죽은 자의 나라로 가서 헤임달을 볼 수 있는데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군. 결국 헤임달이 제일 먼저 니플헤임으로 돌아갔군.”

진원이 헤임달과 헬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알 리가 없었다. 그저 인철과의 싸움에서 죽었다는 걸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레이가 인철의 등 뒤로 가서 말했다.

“잔인… 해요. 그렇다고 눈을 뽑아올 것 까진…….”

“선물이야.”

“……!”

인철의 말은 꽤 애매모호했다. 어떤 의미에서 선물이라는 것인지 온갖 추측과 억측이 돌아다녔다.

“헤임달은 우트가르드 로키가 제 3의 세계에서 친형이라는 이유로 그를 도운 걸 후회하고 있었대. …헤임달 나름대로의 저항이지. 일루션 아이네 마력의 봉인도 같이 있으니까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라면서 가져가라고 했어.”

헤임달의 아스가르드로의 귀환 소식에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그가 다시 아스가르드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우트가르드 로키와의 연결을 확실히 끊어야 했고 그 증거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가 결정한 것이 인철에게 그의 ‘핵심’을 넘겨주고 라그나로크의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베일리가 철이 들었네. 기특한 녀석. 마지막에 좋은 일 하고…….”

방금전가지만 해도 겁먹고 메스꺼워하던 레이는 베일리 생각에 눈물을 글썽였다. 10년 넘게 유지한 우정은 한 쪽의 죽음을 한 쪽이 진심으로 슬퍼하고, 진심으로 자랑스러워 할 수 있게 했다. …결국 눈물이 땅 위로 떨어져버렸다.

“한 사람의 죽음이 너무 많은 이들을 슬프게 하는군.”

“선배가 무사하면 됐죠. 둘을 모두 잃지 않았으니까 다행 아닌가요?”

민혁 다운 지적에 진원과 마야가 피식 웃었다. 인철은 콜로세움 안에서 죽을 뻔 한 걸 생각하면 웃을 수가 없었다. 살아 돌아 왔다고 무사하다고 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가 찢기고 독에 취하고 그닥 멀쩡하지 못한데 ‘무사’하다니 조금은 울컥했다.

“미안해. 이제 눈에 들어오네.”

헤임달의 눈에만 신경 쓰고 있다가 뒤늦게 인철의 모습이 보였다. 상의는 입고 있지 않고, 얼굴부터 맨살이 보이는 곳까지 자잘한 상처부터 위험해 보이는 상처까지 상처의 수가 심히 많았다. 바지도 여기저기가 찢겨서 그 틈으로 상처와 응고된 핏자국이 보였다. 하드 메탈 소드에 독기가 가장 많이 남아있었다. 아무리 신의 무기라지만 그대로 방치하면 못 쓰게 될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리커버리.”

진원은 궁니르 없이 오른손을 인철의 가슴에 갖다 댔다. 진원의 마력이 인철의 몸 내외를 흐르며 독을 제거하고 상처를 치료했다.

그 사이에 프레이르의 마력이 근처에서 감지됐다. 뭔가를 추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민혁은 장난기가 발동해서 뤼폴을 소환했다. 레이는 눈물을 훔치고 뭔 일인가 했다.

“뤼폴, 프레이르의 등 바로 뒤에 체이스 홀을 열어.”

뤼폴은 군말 않고 민혁이 시키는 대로 했다. 민혁은 뤼폴의 체이스 홀을 통해서 섀도우 테크닉을 구사하려다가 그만 두고 뤼폴의 팔을 잡아당겼다. 뤼폴은 체이스 홀을 닫았다. 섀도우 테크닉을 구사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기 때문에 체이스 홀을 연 후에 마력을 활성화 했더니 프레이르에게 걸린 것이었다. 프레이르의 마력이 자취를 감춰버리자 뤼폴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뤼폴은 프레이르의 위치를 확인하고서 민혁의 귀에 속닥였다.

“뭘 꾸미고 계신 거에요?”

마야는 뤼폴을 민혁에게 줬지만 제 백성이 무슨 일에 이용되는지 신경 쓰였다.

“뭘 꾸미긴…… 그저 내기 중이야.”

“프레이르와 1대1로 하는 거야?”

치료를 끝낸 인철은 왼팔로 민혁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민혁은 검지를 제 입술에 살짝 댔다가 떼고서 좌우로 두세 번 흔들었다. 아직은 말할 수 없다는 거였다.

“그래?”

인철은 팔을 살짝 조여서 민혁과 이마가 맞닿도록 했다.

“그저 우리끼리의 일이에요. 우트가르드 로키가 끼어들 이유도 없고 선배가 끼어들 이유도 없어요.”

“알 이유까지도?”

진원의 받아치기에 민혁은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초고속 두뇌 회전 덕에 5초 내에 혀를 다시 움직였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생기면 다 알려드릴게요.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을 거니까요.”

좋은 소식이 ‘생기면’이 아니라 ‘생길 테니’라고 하고 싶었나 보다. 인철은 민혁을 의심의 눈초리로 눈대 눈으로 쳐다보다가 민혁의 목을 감고 있던 팔을 풀었다. 민혁과 뤼폴은 뭔가를 즐기고 있었다.

 

세연의 방 안에서, 세연의 침대 위에서, 세연의 허벅지에 머리를 맡기고 편하게 누워 있는 남자 아이 하나. 인철이 무사히 돌아온 걸 확인하고 귀가한 민혁이었다. 집에 아무도 없어서 세연에게 간 것이었다. 세연은 타로 점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 일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민혁이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그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다.

“많이 침착해졌어.”

민혁은 세연이 궁금한 걸 참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간을 끌었다. 심술궂지만 세연은 민혁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스무고개 할까?”

민혁은 천장을 보며 누워 있다가 세연의 몸통 쪽으로 얼굴을 돌려 옆으로 누웠다. 세연의 체취가 바로 코를 자극했다. 어린 아이가 엄마의 심장소리와 체취에 마음이 편해지듯 민혁도 거의 자동으로 세연의 체취를 쫓았다.

“조그만 싸움이 있었지?”

“응.”

“하지만 어려운 싸움이었고.”

“응.”

“넌 하지 않았어.”

“응.”

“우트가르드 로키가 꾸민 일인 건 확실해.”

“응.”

“오딘이 말려든 거야?”

“아니.”

“치사하지만, 티르가 얽힌 건가?”

“응.”

“티르 혼자?”

“응.”

“우트가르드 로키의 주특기인 아공간을 썼겠지?”

“응.”

“티르의 상대는 둘 이상?”

“응.”

“모두 웨어나 인공 합성 생명체야?”

“아니.”

“헤임달이 끼어들었겠네.”

“응.”

“그게 하이라이트였겠네.”

“응.”

“이긴건 티르?”

“응.”

“티르가 이겼다면 헤임달은… 헤임달은 죽은 거야?”

“응.”

“헤임달은 여기서 우트가르드 로키의 친동생이니까 그가 티르에게 해코지 했겠지?”

“아니.”

세연은 민혁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침대 이불 위로 옮겼다.

“의외네.”

스무고개가 다섯 고개를 남기고 끝났다. 민혁은 몸을 일으키고 앉아서 세연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세연은 민혁을 보고 있지 않았다. 민혁의 손이 세연의 눈을 살짝 가렸다. 과거에 메인 눈은 보기 안타까웠다.

“그래도 티르에게 험한 짓 하지 않았다니까 다행이지?”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연의 눈은 민혁의 손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지만 민혁의 손을 벗어나서 볼을 타고 내려온 눈물이 턱에서 떨어지는 것은 너무 잘 보였다. 민혁은 세연의 눈을 가렸던 손으로 눈물을 닦아줬다. 우는 눈이 아니었다. 그저 지극히 평범한 눈에서 그런 눈물이 나고 있었다. 세연 자신조차도 눈물이 나는 이유를 몰랐다.

“기억의 공존이란 건 정말 사람 애먹이는군.”

“그런 것 같아. 난 세 가지 기억이 같이 있으니까 이것저것 골치 아프다고.”

세연은 민혁의 손을 밀쳐내고서 자신이 나머지 눈물 자국을 닦아냈다. 과거, 운명의 세 여신 노른 중 현재를 관장하는 베르단디가 흘린 눈물이었다. 현재의 세연이 다시금 자신을 이성적으로 지배해서 눈물을 멈출 수 있었다.

“일을 저지르는 사람 따로, 뒤처리하는 사람 따로인 것 같단 말야.”

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삐죽 나온 세연의 입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읏.”

세연은 어깨를 살짝 뒤로 움직였다.

“그래도 윤세연이라는 육체에 같이 살고 있으니까 서로 이해해줘야지. 어차피 배르단디와 앙그르보다는 하나고, 윤세연도 하나인데다가 셋이 하나일 수도 있어. 애석하게도 나눠질 수 없는데 그저 내 탓이오 해야지.”

4대 보물을 모아서 두 번째 라그나로크를 준비하고 있는 우트가르드 로키에게 맞설 수 있는 비장의 카드가 유일하게 말을 듣는 건 민혁이었다. 아스가르드의 대표이자 최고신인 진원도 다룰 수 없는 마지막 열쇠를 민혁만이 달랠 수 있었다. 세연은 아직 하나의 ‘그녀’로서 각성하지 못했지만 이야기를 들어서 대충 알고 있어서 의지할 상대로 민혁을 골랐던 것이다. 그렇게 결심하기도 했다. 그렇게 마법을 걸어놓기도 했다. 누구든 자신에게 명령할 수 없게, 해도 민혁의 말만 듣도록.

“있지… 내가 새턴 세쌍둥이가 너무 보고 싶은 건 앙그르보다 때문이겠지? 그러면서도 막상 보면 피하고 싶은 건 베르단디 때문이겠지?”

“변덕이 심한 아가씨네.”

“웃지 마. 남은 나름 심각한데.”

앙그르보다의 기억을 찾고 나서부터 지금도 여전히 두 기억을 헤매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운 걸 떠나서 귀여운 면이 있었다.

“계속 그렇게 두 명이 왔다 갔다 했으면 좋겠다. 아니, 세 명?”

민혁이 웃으면서 눈을 마주치려 하자 세연이 고개를 돌리면서 피했다. 민혁의 말에 토라진 게 아니라 그 말 속에 있는 의미를 잘 알고 있어서, 의미의 사실에 무서워하는 걸 보이고 싶지 않아서 딱 티나는 행동을 했다.

“우르드랑 스쿨드한테는 여전히 말하지 않은 거야?”

노른의 모임은 여전히 정기적으로 있었지만 세연은 꾸준히 베르단디의 모습으로 임했다. 절대 자신의 안에 앙그르보다가 같이 있음을 알리지 않았다. 점차 진원 쪽으로 기우는 스쿨드에게는 말해도 괜찮겠지만 우트가르드 로키와 너무 가까운 우르드에게는 절대 가르쳐줄 수 없었다. 실은 그들에게 자신에 대해 알리고자 했지만, 정말, 정말 우연히 우르드가 우트가르드 로키랑 같이 있는 걸 목격하고서 사실을 알리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민혁에게도 우르드와 우트가르드 로키의 관계를 말하지 않고 있던 터라 민혁의 말에 심장이 순간 철렁거렸다.

“뭐, 그, 노친네랑 꼬맹이가 심장 마비 걸릴 일 있어? 뭣 하러 말해.”

“노친네랑 꼬맹이……. 쿡. 내가 들어도 좀 심하다.”

세연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하지만 곧 침착해졌다.

“스쿨드한텐 말할 거야. 그래, 선우는 씩씩한 남아잖아.”

세연은 오른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민혁을 똘망똘망 쳐다보며 말했다. 순간 민혁과 세연은 웃음이 터졌다. 남자로 태어난 스쿨드만 생각하면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2, 3년은 스쿨드를 본 세연 역시 남자 스쿨드는 재미있는 존재였다. 아직 8살이라 귀여운 구석이 있지만 어른이 되면 스쿨드라 부르기 얼마나 어색할까.

“우리보다 10살은 많으신 노친네께는 끝까지 말 안 할 거고?”

“내가 말 안 해도 우트가르드 로키가 가르쳐 줄 거야. 두 사람…… 제 3의 세계에서는, 지금…… 사귀는 사이니까.”

지금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은 베르단디의 마음일까? 세연의 눈으로 바뀌고 나서는 무척 평범한, 아무렇지도 않은 눈이 되었다. 다른 자아가 마구 넘나드는 눈에 민혁은 다음은 누가 튀어 나올지 조금은 즐겼다.

“제 3의 세계에서 인간관계가 잔뜩 꼬였는데 그게 뭐 대수야? 이제 뭔 일이 일어나도 별로 놀랍지 않아.”

새로운 사실에 둔감해진 사람이 할 법한 말이었다.

“쿡. 그래도 감정 표현이 확실한 레이가 들으면 눈이 동그래지고 알 수 없는 감탄사를 외칠 거야.”

우트가르드 로키와 우르드의 관계가 신경 쓸 만한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민혁의 태도에 세연은 안심하면서도 화난 듯한, 어쩌면 민혁의 태도에 납득하면서도 그를 무정하게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민혁은 불안정한 아가씨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요즘 더 심해졌어.”

세연도 스스로가 베르단디와 앙그르보다를 자주 오가며 감정, 행동을 난잡하게 다루고 있단 걸 느꼈다. 이에 스트레스가 없다면 거짓말일 게 당연하다. 조금식 지쳐가고 있었다.

“내가 마력의 봉인을 풀 때가 다 됐구나.”

혹시라도 세연이 폭주하면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민혁이 그걸 다 받아내야 했다. 4대 보물이 다 모이진 않았지만 조만간 보물찾기가 끝나면 유혈 쟁탈전이 벌어질 것이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우트가르드 로키가 4대 보물이 없어도 ‘그’를 깨우는 방법을 알아낸다면 세연, ‘그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각성할 것이다. 두 번째 라그나로크가 시작하는 것이다. 그걸 대비해서라도 가까운 시기에 봉인을 풀어야 했다.

“걱정 마. 폐 끼치지 않을 거야.”

“윤세연은 강하니까.”

“응. 강해. …그런데 제대로 된 섀도우 테크닉을 보고 싶긴 해.”

“제대로 된 거라니.”

민혁과 세연은 둘 다 웃고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불안감으로 주변을 채웠다. 날이 갈수록 이성으로 자아를 유지하는 게 힘든 세연. 우트가르드 로키 견제, 보물찾기, ‘그녀’감시 등 멀티 플레이를 해야만 하는 민혁. 그래도 서로에게 서로는 쉴 수 있는 하나뿐인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