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9 선우 찬필, 일망타진하다?
마왕 벨제뷔트의 제 3비서 알바트로스에게 트럼프 인형극의 새 규칙을 알려주고, ‘마음에 들어. 할래.’ 라는 대답을 들은 지 딱 24시간이 지났다. 이번 게임에 참여하는 인형들 모두 바알님의 성에 모여서 긴장하며 기다리고 있다. 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꽁무니를 뺀 루시퍼님도 구경꾼 자격으로 성에 왔다. 12시간 전에 마왕 벨제뷔트가 답을 틀린 관계로 첫 번째 페널티가 부여됐다. 앞으로 12시간 동안 어떠한 마법도 쓰지 않을 것. 이제 페널티 시간이 끝났으니까 조만간 도 마왕 벨제뷔트의 답이 날아올 것이다. 두 번째 답이 도착하는 순간 맞든 틀리든 다이아K가 그의 판단력을 흐리는 방해공작을 펼칠 예정이다.
“킹이 포함되고 예상치 못한 인물이 섞이니까 천하의 벨제뷔트도 한 번에 못 맞히는군.”
바알님은 이렇게 감탄하지만, 이 게임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수십 번의 시도가 필요하다. 최대 도전 횟수는 가늠할 수 없다. 카드를 맞혔어도 인형과 매치시키지 못하면 소용없기 때문에 찍기 실력도 상당해야 한다. 난 그 사이에 마왕 벨제뷔트를 마계에서 고립시킬 수 있는 덫을 준비해야 한다. 그가 틀리면 틀릴수록 내게 부여되는 시간은 길어진다. 그러니까, 그런 고로, 신이시여, 제발 마왕 벨제뷔트의 뒤에만은 서지 말아 주십쇼. 차라리 방관하고 계십쇼.
“어차피 모든 걸 간파한 벨제뷔트는 다음 순간에, 모든 인형을 형체도 알아 볼 수 없게 부수고 트럼프 카드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 그는 마계에서 절대적인 존재라고. 이건 불변의 진리야.”
지금 이 순간, 관객으로 와있는 루시퍼님이 진심으로 불쌍해 보인다. 현실이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 부당한 현실에 머리 숙이며 사는 한없이 약하고, 한없이 순응적이고, 한없이 작은 존재를 자칭하는 거나 다름없다. 어쩔 수 없다. 누구나 자기 목숨은 미친 듯이 아까워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건 다른 의미로, 더 살 이욕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쿡. 예전의 나였으면 루시퍼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혁명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했을까? 영웅행세나 하는 바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바보. 용기와 만용을 구별하지 못하는 바보. 쿡. 바보니까 덤비는 거다. 한 번 해볼 만하니까 바보처럼 구는 거다.
“세상에 ‘절대’도 ‘불변’도 ‘진리’도 없어요. 그저 조금 더 강하고, 조금 더 오래 위에 있고, 조금 더 설득력이 강한 것뿐이에요.”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 주제에…….”
“인간의 말이 맞아, 루시퍼.”
“피브리조. 100년 동안 동굴에서 썩어 있더니 기어이 정신이 나갔군.”
루시퍼님은 나를 옹호하는 피브리조님에게 독설을 내뱉었다. 얼음의 귀공자, 피브리조님이 자신보다 힘이 강하다는 것을, 자신에게는 잔머리 밖에 내세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잊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해버렸다. 은둔 생활을 마치고 차츰 본업에 다시 적응하기 시작한 피브리조님은 아끼는 이에게는 관대하고 다정하고 부드럽고 온화하나 그 외에는 모멸차고 냉랭하고 잔인하고 위압적인 옛 성격도 부활시켰다. 자, 피브리조님의 눈이 점점 싸늘해지면서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같은 마왕인 루시퍼님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모습이 신선하면서도 그다워 보이지 않은가?
“오새 말을 막 하는군. 루시퍼, 네가 지금 말을 붙인 상대가 누군지 제대로 알고는 있나?”
“크-읏.”
나는 인간이다. 새삼스럽게도, 나는 피브리조님의 마력을 느낄 수 없다. 루시퍼님이 두 팔로 어깨를 감싸 안다가 허리를 숙이고 목도 아래로 꺾이고 결국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채 꼼짝 못하는 모습을 봐야, 피브리조님이 마력으로 기선제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이 피브리조님과 단 둘이 있으면 난 그가 마법을 쓰고 있는지 아닌지 전혀 알 수 없다. 혹시 그가 나를 향해 마법을 사용한다면 두말할 것 없이 알겠지만 과연 그럴 기회가 있기나 할까? 여하튼 지금 루시퍼님은 뿌린 대로 거두는 중이다.
지금 내 착각인가? 바닥에 그림자가 생겼다가 사라졌다. 어, 또다. 그림자가 발자국처럼 눈에 어른거린다. 먼저 보인 그림자는 단 0.5초 만에 사라지고 다른 곳에서 새 그림자가 나타난다. 그런 식으로 나와 바알님을 향해 다가온다. 내 옆을 스쳐지나갈 즈음에 그림자가 보이는 타이밍을 맞춰서 펜 잉크를 한 방울 튀겼다. 이제 정확히 알겠다. 검은 잉크가 허공에서 움직인다.
“바알님. 나이프를 제일 잘 던지는 광대의 이름을 아세요?”
“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얼른요.”
잉크가 한 자리에 멈춰있다. 바로 내 옆이다. 인기척은 없다. 하지만 누군가 혹은 뭔가 내 옆에 있는 게 분명하다. 트럼프 인형극을 컬러 조커의 승리로 이끌기 위한 마왕 벨제뷔트의 수작일까? 12시간 동안 자신이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것이지 다른 이에게 이것저것 시킬 수는 있다. 12시간 동안 그렇게 해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을 텐데 왜 시간이 다 지난 지금에서야 정보를 모으는 걸까? 그러면 이건 마왕 벨제뷔트의 소행이 아니다? 머리 굴릴 필요 없다. 정체를 들춰보면 되는 거다.
“언어유희 같은 거냐?”
“아- 뇨.”
“진짜 그런 광대가 있는 거냐?”
“아- 뇨.”
“조커에요.”
아, 치사한 세일마글레님. 일부러 제일이 아니면 최고로 둔한 바알님께 문제를 낸 건데, 김샌다.
“왜 조커야?”
“언제 들어오셨어요?”
바알님과 동시에 각자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아직 남자로 있는 세일마글레님은 후후 웃는다. 눈치가, 아무래도, 내 옆에서 대화를 옅듣고 있는 괘씸한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하다.
“그야 트럼프 인형극의 인형이고, 트럼프 카드를 한 장 쥐고 있는 입장이라면, 당연히 카드 중에서 유일하게 광대인 조커를 떠올려야죠. 설마 K나 J이 답이겠어요?”
[파지지지지직!]
“크가갹!”
세일마글레님은 팔을 뻗어 눈에 보일 정도의 강한 전기를 방출했다. 모습을 감추고 있던 마족은 짧게라도 멀쩡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곳곳에서 피가 터져 나온 숯 덩어리가 돼서는 서있던 자세 그대로 바닥에 스러졌다. 보통 감전되면 몸을 꿈틀거리기 마련인데, 이 불쌍한 마족은 숨이 끊어졌나 보다. 몸에서 연기만 난다.
“화려하네.”
“인정사정없군.”
레플리카님과 피브리조님은 피식 웃으면서 죽은 마족이 아닌 세일마글레님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이미 죽은 약한 녀석은 따위는 봐줄 필요 없다는 마족의 본능을 그대로 실천하는 건가? 바로 옆에서 엄청난 전기를 눈으로 보고 피부로 열기마저 느낀 나는 불쌍한 시체에게 먼저 시선이 간다. 세일마글레님의 힘은, 정확하게는 전투용 마법을 구사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지라 살 떨리게 무섭다.
“이런 잡것이 돌아다니는데도 아무도 몰랐단 말이야?”
“주변에 워낙 파다하게 많은 잔챙이들을 무시하면서 사는데 익숙해져서 저것마저 간과한 게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바알님은 자기 성에 무단으로 들어온, 이미 시체가 된 마족을 아니꼽게 쳐다본다. 평소 같으면 자신이 손쓰기 전에 죽었으니까 신경 쓰지 않을 텐데 마왕 벨제뷔트의 일 때문에 어지간히 신경이 곤두 선 모양이다. 오히려 트럼프 중에서 제일 위험한 카드를 쥐고 있는 레플리카님이 비교적 침착하다.
“이번 놀이에 난 낄 수 없는 거야?”
“네?”
세일마글레님이 먼저 마왕 벨제뷔트를 상대하겠다고 나설 줄이야. 애석하게도 난 세일마글레님에게 귀찮은 일을 줄 생각이 없다. 어디까지나 지금 휴가를 즐겨야 하는 본인이 아닌가.
“그냥 인형극의 관객으로 있어야 하냐고?”
“인형극이 끝나면 사탕이나 과자가 객석에 뿌려지잖아요. 그걸 기다리세요.”
“꼭 뿌려진다는 보장도 없지.”
어렸을 때 여러 번 겪으신 모양이군요. 어린 애들을 상대로 하는 극단은 대개 연극이 한 번 끝날 때마다 아이들에게 사탕이나 과자를 듬뿍 나눠준다. 아무리 가난한 극단이라도 최소 한 알, 한 개씩은 조막만한 손에 꼭 쥐어준다. 그런데 가끔 이런 관습을 무시하는 극단이 있다. 아이들을 다음에도 올 수 있는 고객으로서의 관객이 아니라 극단의 부를 늘려줄 관객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극단이 그렇다. 자기들은 공연을 하면 그만이지 애프터서비스는 장사치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번에 내가 개최한 인형극은? 사탕이나 과자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인형극이 끝나고 마왕 벨제뷔트가 얌전히 자기 영토 내에서만 있을 거란 보장도 없고, 내가 생각한 최상의 시나리오가 전개될 거란 보장도 없다. 솔직히 말하면, 사탕이나 과자는…… 세일마글레님은 끌어들이기 싫어서 얼떨결에 생각해 낸 핑계다. 마왕 벨제뷔트는 세일마글레님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자명한데, 일부러 세일마글레님을 마왕 벨제뷔트의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과오를 저지를 수 없다.
“이번에 캐스팅이 끝났으니까 다음을 노리세요.”
“다음이 있으면 무조건 찔러 넣겠지만, 글쎄?”
어감이 이상하다. 이상한 게 아니라… 그래, 이상하다. 꼭 다음은 없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들린다. 앞으로 어떻게 일이 돌아갈지 확실하지 않은 시점에서 세일마글레님은 다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예상도 아니다. 알고 있다. 미래를 보고 온 사람처럼 말이다.
“넌 무조건 열외야.”
바알님이 세일마글레님을 강하게 제재한다. 평범하게 뜬 눈도 눈동자가 빛나면 무서워 보인다는 실례를 실천하는 중이다. 하지만 세일마글레님은 기죽지 않고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이 순간 ‘비뚤어 질 테다!’가 생각나는 건 당연한 현상일까? 두 분이 눈싸움을 하는 사이에 난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가야겠다. 절대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고 싶지 않다.
“피브리조님. 마계에서 제일 험한 산이 정말로 벨제뷔트님의 성이 있는 그 산이에요?”
마왕 벨제뷔트의 두 번째 답이 도착하기 전에 다이아K 카드를 갖고 있는 인형, 피브리조님에게 마지막 확인을 했다.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짓는 게 고작이다. 다 알아서 했다는 뜻이다.
“선대 마왕들의 성이 모여 있는 산이라서 산 모양이 험한 건 둘째 치고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마력이나 기운이 상당해. 마왕급 마족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할 정도니까.”
“그 점에서 보면 벨제뷔트가 허구한 날 본성에서 탈출하는 것도 이해 돼.”
레플리카님과 루시퍼님이 질색을 한다. 내 머릿속에 있는 마계 사전도 그 산을 제일 어둡고 끔찍한 곳으로 표시하고 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내가 게임이나 만화를 통해 습득한 이미지와 지식을 총동원해서 상상할 수는 있다. 내 상상 속의 산과 비슷하거나 그 보다 더 끔찍하다면 먼발치에서도 보고 싶지 않다.
“그 안에 선대 마왕 로키의 성도 있다는데 거긴 어때요?”
피브리조님이야 내가 뜬금없이 올림포스 산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아니까 ‘응, 괜찮아’하며 덤덤한 반응이지만 다른 마왕들은 표정이 참 각양각색이다. 바알님은 제대로 정색을, 루시퍼님은 새하얗게 질리고, 레플리카님은 혼비백산 상태다. 마계의 지리적 지식을 일찍이 습득했던 지라 마왕 로키의 성이 어떤 것인지 쯤은 알고 있다. 이번에 마왕 벨제뷔트에게 제시할 페널티로 ‘마왕 로키의 성 하루 탐방’을 할지, ‘본성으로 일주일간 복귀’로 할지 고민하고 있는 중이라 피브리조님께 여쭤본 것뿐이다. 그런데 다른 마왕들은 순수하게 마왕 로키의 성이 어떤 곳인지 물어보는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너무나 끔찍한 곳이라서 기억 속의 그곳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재밌는 표정을 연출한다. 뭐, 마왕이 망가지는 모습-자제력을 잃고 체통을 지키지 못하는 모습- 은 자주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니까 조금만 더 구경하자.
“이상한 곳만 계속 언급하는데, 대체 뭐 할 생각이야?”
“세일마글레님은 벨제뷔트님이 마계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언뜻 보면… 그렇지……. 확실히, 올림포스 산이랑 그 안에 있는 성들은 벨제뷔트님이라 해도 범접하지 못하는 곳이지.”
정말로 마계의 100%를 지배할 수 있는 존재라면 다섯 마왕이라는 시스템은 필요 없다. 혼자 다스릴 수 있는데 동등한 위치에 마족이 네 명이나 더 있는 건 완전 비효율이다. 다시 말해서 마왕 벨제뷔트는 탁월한 부분이 많지만 마계를 통째로 섭렵할 수 있는 그릇은 아니라는 얘기다. 반드시 약점이나 허점이 있다.
“그래서 말이죠……. 세일마글레님! 뒤……! 큭.”
아뿔싸. 이들이 노리는 건 세일마글레님이 아니라 나다. 일찍이 시체가 된 마족은 그저 염탐꾼이었던 거다. 세일마글레님 뒤로 그림자가 보였는데 내 주위를 분산시키기 위해 쳐놓은 속임수였군. 제길. 목을 붙잡혔다. 숨쉬기 힘들다.
“그대로 가만히 있어.”
바알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직은 주변이 또렷이 보이고 소리도 잘 들린다. 그런데……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숨을 제대로 못 쉬면 가슴이 아프다더니…… 진짜구나. 크읏. ……. 바알님이 알 수 없는 주문을 웅얼거린다. 내 목을 쥐고 있는 힘은 점 점 더 세지고… 의식이…… 몽롱해진다. 바알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아닌 듯…… 몸에 힘은 이미 남아있지 않다. 그저 축 쳐진 채 붙잡혀 있는, 실 한 가닥에 의지하는 꼭두각시처럼,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
[툭]
“이제 괜찮아.”
아, 세일마글레님이다. 사람 품이란 푹신하고 따뜻해서 기분이 좋다니까. …어, 멀쩡하다.
“잘 버텼어.”
바알님이 내 어깨를 툭 친다. 손도 쥐었다폈다 해보고 목도 좌우로 움직여봤다. 제대로 움직인다. 바알님이 날 습격한 녀석들을 처리하자마자 세일마글레님이 회복마법을 쓴 것 같다. 정말이지 죽다 산 기분이다.
“그대로 죽어버렸으면 저것들을 놓쳤을 거야.”
피브리조님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하급 마족 수 명의 시체 더미가 피범벅이 된 채 처절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아니 ,인간 하나 처리하는데 저렇게나 많이 보냅니까? 아니, 좀 이상한데? 마왕 벨제뷔트의 소행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건 단순한 착각일까?
“루시퍼. 제대로 실성했군.”
바알님과 피브리조님의 목소리가 오싹한 하모니를 이룬다. 그 후의 일은…… 세일마글레님이 내 눈과 귀를 막아서 알 수 없을 듯싶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마왕보좌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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