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8.5 [외전3]독수리 씨, 인간을 꼬시다?
내 눈을 가리던 세일마글레님의 손이 거둬지고 내 귀를 막던 세일마글레님의 마법이 풀리고 나서 루시퍼님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그의 행방을 아니, 생사여부를 묻지 않았다. 바알님과 피브리조님의 살기가 장난 아니었던 걸 가늠하면 루시퍼님은 분명 살아있다. 용케 도망쳤던 여유 있게 도망쳤든 혼자만 사라졌다. 그와 같이 있던 드로키님은 인질로서 지하 감옥에 갇혀있다. 마왕의 비서씩이나 한 상급 마족이 다른 마왕의 성에 갇히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다. 일단 마왕의 비서라고 하면 마왕의 후광 덕분에 재임 기간 동안 거의 절대적인 안전을 보장받는다. 드로키님은 이것을 잃어버렸다.
저녁의 늦은 업무가 끝나고 방구석에 쭈그려 앉아있다. 마왕 벨제뷔트와 머리싸움을 시작하면서 거의 매일같이 밤마다 이러고 있다. 침대와 가장 가까운 벽 모퉁이에 몸을 끼워 넣고 최대한 몸을 웅크린다. 그러고 벌벌 떨면서 내일 할 일을 생각한다. 그 다음에는 앞으로 사나흘 안에 해야 할 일들을 차례대로 생각한다.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는 새에 잠들고, 아침에 이 자리에서 눈을 뜬다.
<그렇구나. 편안한 잠자리에서 행복하게 잠을 취하지 못하는구나.>
[두근!]
머릿속에 낯선 목소리가 울린다. 내게 말을 걸만한 이들을 재빠르게 훑어 봤지만 그 누구의 목소리도 아니다. 비슷한 이조차 없다.
<구석에서 자면 몸이 딱딱하게 굳고, 아침에 일어나면 상쾌하지 않아. 자, 내가 같이 있어줄게. 무서워하지 말고 침대에서 편하게 자렴.>
낯선 목소리는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모양이다. 생각이 고스란히 읽히다니, 기분 나쁘다.
<네가 편안하게 생활하지 못하면 바알도 세일마글레도 편하지 못해. 안 그래도 늘 너를 걱정하는데 걱정거리를 늘리면 안 되지 않겠어? 자, 침대로 가서 행복한 휴식을 취하렴.>
바알님과 세일마글레님을 경칭 없이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존재인가 보다. 누굴까? 마왕 벨제뷔트는 무조건 아니다. 그는 두 번째 답도 틀려서 마왕 로키의 성에 있다. 그 성에 들어간 마족은 마왕 로키를 제외하고 전부 마법을 쓸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 페널티를 제안했을 때 마왕 벨제뷔트와 협상을 했다. 만 하루는 너무 가혹하다. 나도 동의하기 때문에 12시간으로 대폭 줄였다. 페널티가 완료될 때까지 아직 다섯 시간이나 남았다. 마왕 벨제뷔트는 약속 하나는 철저하게 지키기 때문에 이 목소리의 임자일 가능성은 0%다. 아, 그러고 보니까 난 마왕 벨제뷔트의 목소리를 아는구나.
<경계하지 마려무나. 난 널 해치지 않아. 도리어 네 스스로 네 소중한 몸을 헤칠까 걱정한단다.>
옛스런 말투다. 그런데 가식 냄새가 풀풀 풍긴다. 날 향해 비웃는 느낌이다.
<오해야. 난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자, 어서 침대에서 편히 쉬렴.>
성 안의 하급 마족도 아닐 거다. 성 밖에서 들어왔을 수도 있는데 어쨌든 중급 이하 마족은 아닐 거다. 루시퍼님이 날 노리고 있고 그가 아직 살아 있는 이상 내 목숨이 위험하기 때문에, 바알님과 피브리조님 그리고 레플리카님까지 부적틱한 아이템을 하나씩 만들어줬다. 각각 다른 시각에 다른 장소에서 줬기 때문에 내가 무려 세 개나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거다.
<그것 보렴. 다들 널 걱정하잖니.>
정말 기분 나쁘다. 내 생각이 계속 읽히고 있다. 이 밝은 방 안에서 심장이 뛰고 숨을 쉬는 다세포 생명체는 나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다. 대체 누가 내 시간을 빼앗는 거야?
<아아. 내 말을 곱게 들으면 시간을 뺏길 일이 없잖니.>
목소리는 남성 톤인데 말투는 여성스럽다. 그것도 귀부인이나 쓸법한 투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꿀까?>
그냥 무시하는 편이 건강상 좋을 것 같다.
<고집쟁이구나.>
[푸드득]
날갯짓 소리가 들린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서 난 소리다. 창문만 재빠르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훑어보다가 언뜻 낯선 물체가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다시 거꾸로 고개를 움직였다. 있다. 창가에 처음 보는 물체가 있다. 창문은 항상 제대로 닫아 놓는데 그 창문만 열려 있다. 그리고 부리로 날개깃을 정리하는 갈색의 큰 새가 창틀 위에 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저건 독수리다.
<네가 방에 들어오기 전부터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단다.>
사파야님을 처음 만났을 땐, 고양이로 변한 사파야님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데 저 독수리는 줄곧 똑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싫어할 테니까.>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
<내게 꾸준히 음식을 가져다 줬잖아. 얘기도 하고.>
설마…….
<그 설마가 맞아.>
“하긴, 마계의 거지도 마법을 쓸 수 있는 마족이죠.”
바알님의 성 남쪽 문 근처에 거지 한 명이 살고 있다. 성벽 아래의 그늘을 집으로 삼고 구명이 숭숭 뚫린 망토 하나만 걸친 채 사계절을 보내왔다고 한다. 그렇게 수 백 년을 살았다고 한다. 하급 마족의 수명은 평균 700년. 중급 마족의 수명은 평균 3000년. 상급 이상의 마족은 계산 불가. 그래서 그 거지가 다 죽어가는 하급일 거라 속단하고 불쌍히 여겨서 음식을 갖다 준 적이 몇 번 있다.
<난 다 죽어가는 하급도, 3000년 사는 중급도 아니란다.>
독수리가 차츰 마족 본래의 모습으로 변한다. 내가 아는 누더기를 걸친 마족이 아니라, 깨끗한 슈트를 제대로 갖춰 입은 마족이 창틀에 걸터앉아 있다. 상급 마족 이상은 대개 수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다는 상식이 또 다시 발동한다.
“상급 이상이면 대부분 한 자리 꿰차고 있는데, 혹시 재야인사?”
“딱 맞는 표현이야.”
“다른 말로는 방관자라고도 하죠.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모르는 무책임한 유권력자라는 뜻으로요.”
“난 이미 할 일을 다 하고 은퇴한 건데……. 젊어 보이는 것도 마냥 좋은 건 아니구나.”
[뜨끔]
으아아. 실수했다. 폐가 되는 말실수를 해버렸다.
“자책할 필요 없어. 아직 17살 밖에 살지 않은 어린 아이잖니.”
숫자를 들먹이며 어리다는 이유로 용서하는 건 인간 세계나 마계나 똑같나 보다. 물론 17살이 어리냐 아니냐는 다르지만. 그래도 조금 놀랍다. 이 자가 상급 마족일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다.
“마왕 벨제뷔트가 그렇게 미운 게냐?”
“그야…… 뭐…….”
“너무 미워하지 마라. 그 아이도 불쌍한 아이니까.”
아이. 마왕 벨제뷔트를 아이라고 부른다. 대체 저 자는… 아, 사라졌다. 그 보다는…… 대체 몇 년을 산 거야? 아니, 대체 정체가 뭐야?
꽃이 피고 향기가 맴도는 화원에 우리 아기 누워있구나
해가 지고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 우리 아기 잠을 못 이루누나
저기 가는 행인아 소리 내지 말아라
저기 오늘 들새야 이제 그만 쉬어라
우리 아기 자지 못해 초롱초롱 고운 눈을 뜨고 있구나
예쁜 아기 잠이 안 와 방긋방긋 웃고만 있누나
-마계의 자장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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