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마왕보좌록(완)

한 달 간의 마왕보좌록 : D-7 피브리조, 가치의 차이를 알다?

★은하수★ 2009. 8. 13. 16:00

D-7 피브리조, 가치의 차이를 알다?

 

클로버K 때문에 고전하고 있는 마왕 벨제뷔트를 구석에 몰아넣은 채 바알님과 세일마글레님이 엄청난 언쟁을 펼치고 있다. 정확하게는, 사랑싸움을 격하게 하는 커플의 어마어마한 포스에 눌려서 마왕 벨제뷔트 스스로 구석을 찾아간 것이다. 난 남의 사랑싸움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무슨 일 때문에 저렇게 격하게 싸우는지 전혀 모른 채 엎어진 체스 도구를 정리하는 중이다. 마왕 피브리조와 내가 힌트를 주느냐 마느냐를 걸고 체스를 두고 있었는데 바알님의 과도한 움직임 때문에 엎어졌다.

“바알님. 루시퍼님으로부터의 전갈입니다.”

파슈만의 대사 하나만으로 집무실 내부가 급 고요해졌다. 루시퍼님의 이름이 언급 되자마자 온몸의 털이 일어서는 느낌이다. 내 목숨을 노리는 자. 왜 그러는지 이유를 짐작할 수 없어서 억울하면서도 상당히 두렵다.

“그 자식이 간댕이가 부었나.”

바알님은 낚아채듯이 편지를 가져간다. 속독으로 아래를 훑어 내려가더니 그대로 마왕 벨제뷔트에게 성큼성큼 걸어간다.

“루시퍼 녀석이 네 이름을 팔고 다니다.”

“응?”

마왕 벨제뷔트는 쭈그려 앉은 채 편지를 받는다. 읽는 내내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갸우뚱 거린다. 마지막에는 고개를 위로 들어 바알님을 쳐다본다. 말똥말똥 동그랗게 뜬 눈으로 말이다. 자기는 편지의 내용과 무관하다든가 이런 거 모른다는 뜻이었다.

“내가 왜 저 인간을 죽여야 하는데? 난 그런 생각 해 본적 없어.”

“알아. 아니까 그 자식이 네 놈 이름을 팔고 다니는 걸 아는 거잖아.”

그 순간 세일마글레님과 눈이 마주쳤다. 세일마글레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루시퍼님의 전갈에는 분명 마왕 벨제뷔트의 사주를 받았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죽여야겠다 혹은 이 비슷한 내용이 있을 것이다. 왜 그렇게 날 죽이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마왕 벨제뷔트의 이름을 앞세우면 정당화 될 줄 아는가? 자신도 마왕이면서 참 치졸하다.

“인-간-. 체스 한 판 더 하자.”

[덥썩!]

“이제 일 해야지.”

“바알 무서워-.”

바알님이 눈을 부릅뜨고 마왕 벨제뷔트의 목 뒷덜미를 한 손으로 붙잡았다. 마왕 벨제뷔트는 아이처럼 팔을 바둥거리며 나에게 구조요청을 보낸다. 상대가 바알님인데 나한테 SOS를 쳐봤자 소용없다. 바알님이 일 하라면 일 해야 하는 불쌍한 종자이거늘 어찌 바알님의 뜻을 거스를까. 그저 그에게 다가가서 레플리카님이 만들어준 인형을 꼭 쥐어줄 뿐이다.

“여기 다섯 마왕님을 꼭 닮은 인형이에요. 이거라도 갖고 놀고 계세요.”

“우우-.”

마왕 벨제뷔트는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고 다섯 개의 인형을 세차게 위로 집어던졌다. 이제 정신 연령이 다섯 살로 줄어들었나 보다. 미간을 꽉 쥐고 고민하기도 전에 바알님의 화강암 같은 주먹이 마왕 벨제뷔트의 머리를 강타했다.

[콱!]

“바알님!”

나와 세일마글레님이 동시에 소리 질렀다. 이에 바알님이 상체를 움찔 거리며 반응한다. 슬로우 모션으로 뒤를 돌아보면 엄청 후회할 텐데도 굳이 두 비서의 표정을 확인한다. 나와 세일마글레님은 당연히 바알님의 점잖지 못한 손버릇 때문에 표정이 야차보다 무섭게 일그러져있다. 비서라면 꼼짝 못하는 바알님이니 좀 많이 오싹할 거다.

“벨제뷔트님. 이게 몇 개로 보이세요?”

난 당장 마왕 벨제뷔트 앞에 쭈그려 앉아서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그는 똑같이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이며 내 질문에 응한다. 눈동자에 초점이 불안정한 걸 보니 주먹의 강도가 평소보다 셌나 보다. 확실히, 소리만으로도 강도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었다.

“아야야…….”

“혹 났어요.”

“혹? 으…….”

바알님의 주먹이 강타한 곳에 조심스럽게 손을 댔는데 다른 곳보다 불룩하다. 금세 부어오른 것이다. 아무리 머리카락이 쿠션 작용을 한다지만 시속 50km급 힘은 견딜 수 없다. 혹이 안 생기는 게 이상한 거다. 아무튼 마왕 벨제뷔트는 자기 머리에 손을 함부로 대지 못할 만큼 스린 고통을 느끼고 있다.

“아아-.”

“이리 오세요.”

“야… 이아!(야… 임마!)”

세일마글레님이 바알님을 끌고 간다. 그것도 볼을 세게 꼬집은 채. 바알님은 볼을 잡혔기 때문에 별 수 없이 따라가야만 했다. 사무용 책상 앞까지 끌려간 다음에 기다리는 것은 하이힐의 공포였다. 세일마글레님은 구두의 뾰족한 앞축으로 로우 킥을 날린 다음에 긴 굽을 있는 힘껏 내리쳐서 바알님의 발을 찍어버렸다. 세상에……. 상관을 패는 부하가 진짜 있다. 하극상이란 저런 것이다.

“나잇값 좀 해요. 성질만 더러워서는.”

“야, 너는…… 욱.”

“시끄러워요.”

와. 멱살까지 잡는다. 세일마글레님이 언변술로 바알님을 압도하는 줄 알았는데 무력행사도 상당히 과감하게 한다. 음. 마왕 벨제뷔트가 세일마글레님을 보면서 벌벌 떤다.

“벨제뷔트님도 세일마글레님께 맞아본 적 있으세요?”

“그야 당연하지. 일정 수치 이상으로 화를 건드렸다간 마왕보다 더 해. 장난 아니게 무섭다고.”

마왕보다 더 한다면 그야말로 무적 아닌가? 으……. 오한이 든다. 두 마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연약한 여성상은 온데간데없고 마왕을 힘으로 제압하나는 아마조네스가 내 눈 앞에 있다. 아까부터 줄곧 바알님과 말싸움 중이었으니 지금 무력을 무차별적으로 행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도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마계에서 세일마글레님이 가장 도화선이 길다는데, 혹시 저 두 분 간밤에도 한 판 거하게 싸우셨나.

[쿠광!]

이젠 마법까지 사용한다. 이런이런. 남은 업무는 완전히 내 몫이 되는 구나. 세일마글레님을 말렸다간 나도 한 대 맞을 것 같고, 세일마글레님이 진정된 후에 바알님이 무사히 오늘 업무에 복귀할 수 있을 지도 미지수다.

“벨제뷔트님. 인형놀이가 싫으시면 전쟁 놀이는 어떠세요?”

“나보고 세일마글레 손에 죽으라는 거야?”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되요. 저도 딱히 권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나도 마왕 벨제뷔트도 어색하게 ‘하하하’하고 웃는다. 그리고 세일마글레님을 슬쩍 돌아보는데 마기로 인해 머리칼과 옷자락이 화려하게 흩날린다. 눈에서 레이저 빔이 나올 것만 같다.

“여. 오자마자 살기가 날 반기는군.”

피브리조님이 내 옆에 나타났다. 팔짱을 끼고 평안한 마음으로 일방적인 싸움을 관람한다. 세상에서 싸움 구경이 ‘볼만한 구경거리 순위’에서 3위 안에 든다지만 저건 맘 편히 즐기면서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피브리조님의 강심장이 부럽다.

“어이, 벨제뷔트. 네가 조용하니까 마계 전체가 조용하더라.”

“응? 아. 내가 인간이랑만 노니까.”

마왕 벨제뷔트는 피브리조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의 행동이 다 옳은 것이라 믿어왔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일찍이 마왕 벨제뷔트의 나쁜 습성을 눈치 챈 피브리조님은 한숨을 가볍고 길게 내쉴 뿐 그 이상 상대하지 않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는 피로만 쌓일 뿐 진도가 나가질 않으니 일찌감치 물러나는 것이다.

“있지-. 피브리조-.”

그가 먼저 피브리조님을 붙잡는다.

“루시퍼가 내 이름을 팔고 다닌데. 무려 인간을 죽이겠데.”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물으나마나 루시퍼를 혼내 줘야지.”

“그래? 그럼 적당히 해라.”

“무슨 소리야? 난 인간이랑 같이 인형극을 하는 중이니까 피브리조나 바알이 혼내야지.”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순간 내 머리에 핑-하고 현기증이 났다. 그리고 가슴이 옥죄는 것처럼 갑갑하다. 탄성력이 우수한 복대를 가슴에 단단히 찬 기분이다.

“네가 손쓰지 않으면 의미가 없잖아. 루시퍼 녀석이 왜 네 이름을 팔고 인간을 죽이려는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몰라.”

“야.”

마왕 벨제뷔트는 생각도 하지 않고 단 번에 대답한다. 정말 모른다는 얼굴이다. 이후에 피브리조님의 입에서 술술 나올 이야기가, 내가 예상한 것과 들어 맞다면 난 이 긴 트럼프 인형극을 그만 둘 생각이다. 내가 포기하고 막을 내릴 거다. 누구도 손해 볼 일없다. 인형극을 하면서 마왕 벨제뷔트가 왜 마계를 그토록 멋대로 가지고 놀았는지 짐작이 가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았다. 표현 방식의 차이와 오해, 그리고 한 인물의 판단 착오 등이 엉뚱하게 얽혀서 카오스 이론처럼 일이 커진 것이니, 그 근원점, 나비의 날갯짓을 바로 잡아주면 된다.

조금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클로버K가 날 도와줄 것이냐 하는 것이다. 지금 부재중인 자를 인형극의 무대 위에 올렸기 때문에 조커를 제외한 모든 인형들이 적잖이 긴장하고 있다. 실존하지 않으면 인형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트럼프 인형극의 전제 조건이다. 하지만 나는 부재일 뿐 실존한다는 사실에 이번 인형극의 모든 것을 걸었다. 처음엔 나도 걱정을 심히 많이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확신이 생겼다. 답을 알고 나면 마왕 벨제뷔트는 ‘치사해’, ‘이건 무효야’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야, 전혀 몰랐어.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휴. 루시퍼는 지금 네 자리를 노리고 있어. 예전부터 노렸던 녀석인데 이번에 기회를 탄 거지. 네가 인간의 게임에 푹 빠져선 제대로 휘말리고 있으니까 녀석이…….”

“인간이 이 벨제뷔트님의 약점일 거다. 훗. 그 바보는 머리에 뇌가 아니라 지푸라기가 들었나 보지? 그리고 내가 휘말리고 있다고? 이봐, 피브리조. 불쾌한 단어는 쓰지 마.”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내가 여태껏 보아 온 모습 중에서 가장 마왕다운 표정에 살기 넘치는 목소리다. 피브리조님은 긴 시간 동안 이 모습을 많이 접했기 때문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과연 장난기 많고 어린 애 같은 마왕 벨제뷔트가 진짜일까, 진지하고 살육을 즐기는 마왕 벨제뷔트가 진짜일까. 우문이다. 둘 다 마왕 벨제뷔트다.

“좋은 반응이네. ……. 어쩔 거야?”

“흠. 인간은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

“그걸 왜 제게…….”

마왕 벨제뷔트의 기습에 심장이 적잖이 놀랐다. ‘출렁’까지는 아니지만 ‘철렁’했달 까나.

“루시퍼 그 바보가 널 죽인다잖아. 루시퍼는 인간과 나의 공공의 적. 그러니까 네 의견도 중요해.”

그의 말이 틀리진 않다. 루시퍼님은, 아니 그에게 ‘님’이란 경칭을 붙일 필요가 없지 않은가. 마왕 루시퍼는 나를 죽이고 마왕 벨제뷔트가 앉아 있는 최고 마왕 자리를 차지할 셈이다. 좀만 깊게 생각해보면 부질없는 짓인데 말이다. 다섯 마왕 중에서 머리가 가장 좋다는 건 그저 허울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해 본다.

“아, 피브리조. 피브리조한테 인간은 어떤 존재야?”

“갑자기 무슨 생뚱맞은 소릴 하는 거야?”

“질문엔 그에 맞는 대답을 해야지-.”

“네, 네. ……. 굳이 따지자면 조력자?”

조력자씩이나. 아무 힘없는 인간이 주제넘게시리 마왕의 조력자라니, 심한 과대평가다.

“에이. 조력자라뇨.”

“조력자는 친구인 거지?”

깜짝 놀랐다. 피브리조님도 놀란 눈치다. 마왕 벨제뷔트가 갑자기 천진난만한 얼굴로 환한 표정을 지으며 엄청 좋아한다. 주위에 별빛이 무한히 반짝이는 분위기다.

“그야 생각 나름이지.”

“나도 인간을 친구라고 생각했거든. 인간은? 나랑 피브리조가 인간의 친구?”

“뭐……. 인간들은 같이 놀면서 정이 붙으면 친구라고 하니까요.”

“멋진 말이야.”

한 순간 마왕 벨제뷔트에게 휘말렸다. 그런 기분이다. ‘친구’라는 단어 하나로 이 자리에 있는 세 명의 상물체가 친밀한 관계로 묶였다. 짐작은 했지만 그가 정말로 날 친구로 여길 줄이야. 아무리 단순한 사실일지라도 ‘혹시나’가 ‘역시나’로 변하면 무서운 법이다.

“바알! 있지……. 아.”

바알님을 향해 밝디 밝은 얼굴을 돌리는데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멈칫 한다. 세일마글레님이 저승사자처럼 바알님을 내려다보고 있고 바알님은 그늘진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며 부지런히 서류를 처리하고 있다. 냉기가 흘러넘치는 장면을 3초간 감상하고 나서, 우리 셋은 다시 끼리끼리 대화로 돌아가야겠다고 묵언의 합의를 했다.

“쟤, 쟤네야 인간하고 처음부터 친했으니까. 레플리카는… 에…….”

“흠, 흠. 그 녀석은 나랑 같은 생각일 거야. 분명해.”

마왕 벨제뷔트나 피브리조님이나 ‘여기서 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하고 말하는 것 같다. 난 이곳에서 나갈 수 없는 입장이지만 어느 때보다도 여기를 뜨고 싶다. 손발이 오그라들고 심장이 굳을 것 같다.

“으으……. 저기에 끼고 싶지 않아요.”

“자살 행위야.”

두 마왕이 동시에 대답했다. 역시 세일마글레님의 분노 속에 발을 들이는 건 미친 짓이구나. 이걸 핑계로 오늘 업무는 아예 바알님께 맡기고 일일 휴가를 가져볼까 한다. 지금 바알님이나 세일마글레님의 머리에 ‘선우 찬필’이라는 존재는 없을 테니 말이다. 아, 역시 심장에 좋지 않다. 얼른 자리를 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