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8 바알, 실은 게임에 약하다?
까고 말하면 바알님이 스페이드A이거나 스페이드K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건 머리 나쁜 하급이라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우연찮게 제비뽑기에서 스페이드K가 걸리긴 했지만, 원래 트럼프 인형극의 규칙을 따랐다면 스페이드A감이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는 아니라고 발뺌을 하거나, 못 하겠으면 입이라도 다물고 있을 것이지, 마왕 벨제뷔트가 ‘네가 스페이드K야?’라고 물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그래’라고 대답하는 건 또 뭐냐고요. 덕분에 세 장의 카드와 세 개의 인형을 정확하게 매치시킨 상태다. 이제 하나 남았다. 하트K이거나, 클로버K이거나, 하트A이거나, 다이아A이거나, 클로버A를 가지고 있을 인형을 찾으면 찍기 실력에 따라 한 번에 게임을 끝낼 수 있다. 이미 페널티는 네 번이나 받은 마왕 벨제뷔트다. 난 그가 더 틀리길 바라지만 내 뜻대로 호락호락 움직여 줄 위인이 아니다.
“바알님 바-보.”
“크읏.”
여자로 돌아간 세일마글레님이 집무실 소파에 앉아서 바알님을 흘겨보고 있다. 아, 언제 여자로 돌아갔냐고? 나도 모른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집무실에 먼저 와 있는데 여자 세일마글레님이 들어왔다. 어제 밤이나 오늘 새벽에 저주를 풀었겠지 하고 그냥 넘어갔다. 꼬치꼬치 캐묻는 건 실례니까.
“다음 페널티는 결정했어?”
“생각 중이에요.”
“영 생각나는 게 없으면 전에 쓴 페널티를 더 세게 하거나 섞는 건 어때?”
“그거 괜찮군.”
“레플리카님도 은근히 잔머리 잘 굴리신다니까요.”
바보 바알님은 빼놓고 피브리조님, 레플리카님과 즐거운 담소를 나누는 중이다. 심히 좋게 말해서 담소지 분위기는 육자회담 수준이다. 심각한 공기 속에 은근히 살기까지 있다.
“마지막 남은 인형은 솔직히 얼울 거야. 우리도 설마 그를 인형으로 선택할까 생각도 못했으니까.”
피브리조님은 아직도 그를 마지막 인형으로 정한 사실이 영 탐탁지 않은 듯하다. 원래 게임이란 허를 찌르는 재미에 하는 거다. 납득할 수 없어도 납득해야만 하는 것이 ‘게임’이라는 존재다. 뭐, 플레이어 중에서 지금의 놀이를 즐기는 자는 나랑 마왕 벨제뷔트 뿐이니까 다른 플레이어들이 이해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인내해 주기를 바란다.
“클로버K에 어울리는 녀석이긴 하잖아.”
“아, 마지막 카드가 클로버K구나.”
바보 중에 상바보다! 언제 어디서 마왕 벨제뷔트가 나타날지 모르니까 입단속 하라고 누누이 일렀거늘 결국 일을 낸다. 아, 골 때려.
“벨제뷔트? 벌써 왔어?”
“무슨 소리야. 페널티 시간 끝났다고.”
마왕 벨제뷔트가 모래시계를 가리킨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진 지는 이미 몇 분 지났다. 시간은 내가 상시 체크하기 때문에 모래시계를 조작해봤자 소용없다. 뭐, 다들 마왕이라서 그런 치졸한 짓은 안 하니 굳이 말할 가치도 없다.
“왜 넌 나만 보면 긴장하냐?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해?”
“자연의 법칙상 약자는 강자 앞에서 비굴해 진다고.”
“음…….그러면 저 인간은? 아니지, 비굴해 진다는 놈이 대놓고 나랑 인형극을 하는 건 모순이야.”
마왕 벨제뷔트와 레플리카님이 자기들만의 대화에 빠져있는 사이에 바알님은 피브리조님과 세일마글레님에게 비난 세례를 받는 중이다. 무언의 날카로운 눈초리와 기세등등한 살기만으로 충분하다. 바알님은 의자를 돌려 창밖을 멀거니 쳐다본다. 스스로도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난 한숨만 쉴 뿐이다.
“그래서…… 이번 답은 뭔가요?”
“이번에 다섯 번째잖아. 벌써 반이라고. 우……. 힌트도 없어?”
“바알님께서 엄청난 힌트를 남겼잖아요.”
“우우-. 치사해.”
“치사하지 않아요.”
답을 맞힐 수 있는 열 번의 기회 중에서 다섯 번째다. 마왕 벨제뷔트는 볼을 크게 부풀리고 잔뜩 삐쳤다. 밀고 당기기라고, 전에 페널티를 한 번 깎아 줬으니까 이번에는 얄짤 없다. ……라고 해봤자 바알님이 홈런 하나를 날려서 마왕 벨제뷔트가 손해 볼 건 없다. 나도 뭐 그가 그 힌트 덕분에 단번에 답을 맞힐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세일마글레-. 네 대리가-. 어? 여자다.”
이제사 세일마글레님을 발견한 겁니까? 줄곧 옆에 있었는데. 500년 동안 남자 세일마글레님에게 익숙해져 있어서 오늘도 당연히 남자일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저한테 말하지 마시고 제 대리랑 얘기하세요.”
“우우-. 너도 치사해.”
“치사하지 않아요.”
“우우-. 둘이 똑같아.”
한없이 어린 아이처럼 투정부리다가 바알님과 피브리조님을 쳐다본다. 눈동자로 SOS신호를 애절하게 보낸다.
[척]
갖고 있던 서류로 마왕 벨제뷔트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자, 이제 그만 답 주셔야죠.”
“하아-. 못됐어 정말. 답은 조금 늦게 줘도 된다며.”
“그럼 왜 오신 거에요?”
읏. 이제는 그 불쌍한 강아지 눈을 제게 향하시는 겁니까? 서류를 들고 있는 내 손을 그의 두 손으로 꼬옥 잡는다. 간절함이 흘러넘치는 두 눈에는 눈물도 그렁그렁하다. 올림푸스 산 마왕 로키의 사택이 그렇게나 무서웠나? 마왕 로키의 성에 있었을 땐 멀쩡했는데 사택은 마왕 벨제뷔트도 꼼짝 못할 만한 곳인가 보다. 물론 성도 무서웠다고 말하긴 했지만 몸을 슬쩍 부르르 뜰 뿐,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있잖아. 수수께끼 잘 해?”
“어느 정도요.”
“잘 해?”
“잘 하는 편이에요.”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에 점점 힘이 실린다. 진짜 간절한가 보다. 응? 수수께끼?
“답은 맞출 테니까 수수께끼 푸는 것 좀 도와줘.”
어디서 다른 놀이를 하는 중이었나 보다. 그런데 잘 안 풀리는지 상당히 애절하게 매달린다. 이거 맘 약해지게 시리 손을 놔주지 않는다.
“용건 없으면 여기 오지 말랬잖아.”
“바알, 나빠. 이것도 용건이라고. 그것도 무지무지 중요한.”
바알님과 마왕 벨제뷔트가 서로를 뚫어져라 노려본다. 그 두 마왕의 사이에 서있던 피브리조님은 조용히 책상을 돌아 걸어가더니 바알님이 앉아있는 의자를 뻥 찬다.
“넌 더 반성하고 있어.”
저만치 밀려난 바알님은 끽 소리도 못하고 창밖 멀리멀리 바라본다. 근데 마왕 벨제뷔트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표정을 상당히 구긴다. 레플리카님은 그저 겁먹어 있고 바알님은 무한히 경계하고. 그들이 피브리조님처럼 침착과 감내라는 단어를 속으로 곱씹어 줬으면 바람이 있다.
“무슨 수수께끼인데요?”
“옛날에 로키님이 내준 수수께끼야. 2800년 째 잊어먹고 있다가 이번에 사택에 가니까 기억났어.”
그 경이로운 숫자를 기억하고 있다는 게 더 놀랍다. 기억이란 본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버튼만 제대로 눌러주면 다시 살아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이를 계산하는 것도 귀찮아서 햇수를 세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 마족이 2800이라는 숫자를 계산해 낼 줄은 몰랐다.
“혹시 답을 찾지 못해서 수수께끼 자체를 까맣게 잊으신 거 아니에요?”
“……으응.”
“노력해 보셨구요?”
“그럼. 했지. 근데 어렵다구.”
한숨을 푹 쉰다. 손 쓸 방도가 없을 때 체념하는 것처럼 눈을 내리깐다. 마왕 로키가 남긴 수수께끼가 그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가 문제를 풀고 시파면 딱히 거절할 이유 없다. 그를 도와주고 나서 내가 손해 볼 일도 없다. 혹시 다른 마왕들이 안 된다고 해도 그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나 싶다.
“문제가 뭔제요?”
“야, 너 그렇게 한가해?”
자동적으로 바알님의 핀잔이 튀어나온다.
“바보 바알님은 구석에서 얌전히 듣기만 하세요.”
바알님은 세일마글레님이 솜씨 좋게 태클을 걸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여전히 염두 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세일마글레님이 마왕 벨제뷔트가 집무실 안에 있다는 사실을 달가워하는 건 아니다. 최소한 예의까지만 지키려는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왜 조막조막한 손을 꼭 쥐고 있을까?”
“펼 수 없으니까요.”
“……!”
자동 반사처럼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니, 아기가 손을 펼 수 없으니까 쥐고 있는 거 아닌가? 그거 말고는 없다. 갓난아기가 뭘 생각하고 뭘 소중히 하겠는가. 살기위해서 먹고 싸고 자고 우는 것이 고작이다.
“너무 단순하잖아.”
피브리조님도 나의 즉답에 맥이 빠졌다. 그럴 거 뭐 있나. 설마 심오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수수께끼다. 수수께끼는 절대 심오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최대한 단순하고 최대한 유치하면서도 말 되는 언어유희가 바로 수수께끼다.
“아니, 아니. ‘왜’ 꼭 쥐고 있냐니깐.”
“‘펼 수 없다’ 이 자체도 ‘왜’에 대한 대답이에요.”
마왕 벨제뷔트는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갸우뚱 거린다. 다른 마족들도 아직 이해를 못하고 있다.
“하지만 로키님이 하신 말씀인걸.”
“그 때 수수께끼라고 하셨어요, 문제라고 하셨어요?”
“수수께끼. 그건 확실하게 기억해.”
“그러면 제 답이 맞아요.”
마왕들과 기타 마족들의 얘기나 기록에 의하면 마왕 로키는, 그의 무시무시한 성과 사택과는 반대로, 선대 마왕 중에서 가장 쾌활하고 가장 사려 깊고 가장 온화하고 가장 낙천적이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같이 있으면 즐겁고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란다. 그런 사람이 과연 복잡하고 난해한 수수께끼를 냈을까? 그저 즐길 수 있는 쉬운 문제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로키님인데…… 분명 깊은 뜻이 있을 텐데…….”
맹신. 우상을 향해 맹목적인 신뢰. 존경하고 숭고하게 생각하는 존재에 대한 무한한 믿음. 그 분이라면 언제나 옳은 말씀만 한다는 굳은 믿음 때문에 시야가 좁아진다. 누구나 한 번쯤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이처럼, 마왕 벨제뷔트는 마왕 로키를 진짜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듯하다.
만약 내가 마왕 로키라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마왕 벨제뷔트에게 이런 수수께끼를 냈을까? 초단순하지만 마왕 벨제뷔트는 쉽게 풀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서 문제를 냈을 것이다. 나름 깊은 뜻이 있을 지도 모른다. 언뜻 보면 간단하지만 문제와 그 간단한 답 속에 그의 메시지가 들어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찾는 건 마왕 벨제뷔트의 몫이다. 내 역할은 그가 궁금해 하는 ‘답’만 가르쳐 주는 것이다.
“로키님도 어지간히 심심했나 보지. 원체 속을 알 수 없는 작자이기도 했고.”
“그래도, 그래도……. 바알, 로키님이 보고 싶지 않아? 늘 우리랑 놀아주셨잖아.”
“언제적 얘길 하는 거야?”
바알님은 왼쪽 어깨를 천천히 휘돌리며 피브리조님 쪽으로 느긋이 걷는다. 책상을 지나면서 마지막 남은 미결재 서류를 가져가는데 그 사이에서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 임헤르 북부에서 보낸 서류라고 기억한다. 수상한 점쟁이가 물을 흐리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엘레나가 그 건으로 한 번 다녀왔었는데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나는 모양이다. 실시간으로 계속 속보처럼 서류가 올라온다.
“정말로 갓난아기가 조막만한 손을 곡 쥐고 있는 게 펼 수 없기 때문인가?”
마왕 벨제뷔트는 마왕 루시퍼가 낸 수수께끼와 그 답에 미련을 둔다. 지나치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오랜 시간동안 그걸 두고 깊게깊게 고민하다가 어느 순간 잊어버리고, 또 다시 기억해 내서는 두고두고 고민할 지도 모른다.
“그건 그만 때려치고 이거나 봐봐. 아는 녀석이야?”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마법으로 띄운 다음에 마왕 벨제뷔트의 얼굴 앞으로 들이 밀었다. 그는 점쟁이 사진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리고 ‘나는 이런 거 몰라’라고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런데 사진이 다시 바알님에게 날아가려 할 때 오른손으로 사진이 구겨질 듯이 세게 붙잡는다. 잽싸게 잡아끌더니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로키님?”
믿을 수 없다는 눈이다.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봐도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다.
“무슨 헛소리야?”
피브리조님이 마왕 벨제뷔트의 뒤로 가서 어깨 너머로 사진을 보는데 역시나 순식간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레플리카님도 호기심에 이끌려 가까이 다가온다. 그의 표정도 금세 변한다. 다른 마왕들은 전부 점쟁이의 존재를 의아해 하는데 바알님만 멀쩡…… 아니, 이 시간이 터졌을 때부터 알아챘나 보다. 넉살좋게 입을 쩌억 벌리며 시원하게 하품을 한다. 세일마글레님도 마왕 로키의 이름이 언급됐는데 비교적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다.
“가-끔 광대 짓도 하고, 거지 노릇도 하고, 이번처럼 점쟁이 질도 하고 그래. 잊어버릴 법 하면 한 번씩 꼭 일을 벌인다니까.”
마왕 로키가 마왕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로 본성에서도 사택에서도 별장에서도 모습을 볼 수 없었다는데, 바알님은 은근히 자주 그의 소식을 우연찮게 들어왔나 보다. 덕분에 바알님과 같이 사무를 처리해 온 세일마글레님도 자연스럽게 마왕 로키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게 된 듯싶다.
“어째서…….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졌거든.”
바알님은 책상 위에 걸터앉는다. 그리고 마왕 벨제뷔트를 보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기분이 이상해서 고개를 돌려 세일마글레님을 봤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생글생글 웃는다. 조용히 지켜보라는 뜻이다.
“지다니?”
피브리조님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쏘아 붙인다. 마왕 로키의 소식을 함구하고 있었던 것은 피브리조님으로서도 용서가 되지 않나 보다.
“로키님이 마왕직에서 물러나기 전에 내기를 하나 했는데 내가 졌어. 그 벌로 로키님을 봐도 못 본 척 하기로 했거든. 근데 그걸 2800년째 하고 있다니……. 벨제뷔트 녀석 얘기를 듣고 나니까 무진장 바보짓이더라.”
지금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본다. 마왕 로키는 마왕에서 물러날 때 얼마나 많은 떡밥을 뿌렸을까? 지금 마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 3자의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가? 아니면…… 다시 마왕들 앞에, 마계 전체에 모습을 드러낼 때를 기다리고 있을까? 심장이 말한다. 뇌가 말한다. 내가 중요한 것을 놓쳤다고 야단법석을 떤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마왕보좌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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