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마왕보좌록(완)

한 달 간의 마왕보좌록 : D-6 벨제뷔트, 욕심을 버리다?

★은하수★ 2009. 8. 19. 15:56

D-6 벨제뷔트, 욕심을 버리다?

 

리얼 액션이라면 제 정도 돼야 한다. 건장한 두 청년이 각자 검을 하나씩 들고 마법이라는 잔재주 없이 순수하게 검술과 체력만으로 대련하고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검은, 날은 글라디우스처럼 생겼으면서 길이는 보통 글라디우스의 두 배 된다.

“옥좌에 앉아서 잔머리만 굴리는 줄 알았는데 몸도 단련하셨나 봅니다.”

“내가 근 2700년을 헛산 줄 알아?”

사파야님은 정말 벨제뷔트님을 죽일 기세로 밀어붙인다. 벨제뷔트님은 아주 밀리는 건 아니지만 조금씩 밀리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내 눈에는 정식 대련이 애들 칼싸움처럼 보일까? 분명 벨제뷔트님이 여유롭게 웃고 있기 때문이리라. 빙글빙글 웃으면서 한 손으로 사파야님의 공격을 하나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받아낸다. 피하지도 않는다. 성실하게 모든 홉을 한 손으로 상대한다. 사파야님은 두 손으로 검을 휘두르는데 말이다. 파슈만과 질리온의 말에 의하면 검은 두 손으로 잡았을 때 한 손으로 잡았을 때보다 그 위력이 월등히 높다고 한다. 지금 저 광경과 연결해 본 즉, 벨제뷔트님이 사파야님을 데리고 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맙소사. 벨제뷔트님이 진지해지는 경우는 정말 극히 드물구나. 바알님의 제안으로, 식충이 두 명-볼모 형식으로 바알님의 성에 머무르고 있는 사파야님과 트럼프 인형극을 핑계로 시시각각 성에 찾아오다 못해 숙식까지 요구하는 벨제뷔트님-이 밥값 대용으로 검투회에 참가했다. 그런데 진지함이 없다. 그냥 검투회도 아니고 마왕과 최상급 마족이 펼치는 검투회다. 그런데 벨제뷔트님이 순식간에 분위기를 칼놀이로 바꿔버렸다.

“바알. 아무리 봐도 벨제뷔트 실력이 한참 위야.”

“당연하지.”

“알면서도 저걸 시킨 거야?”

레플리카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혹시 사파야님이 벨제뷔트님 손에 죽는 건 아닐까, 아니, 바알님이 사파야님에게 불만이 있어서 이런 이벤트를 벌인 게 아닌가 하는 오만 잡생각이 머릿속을 꽉꽉 채우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건 절대 아닐 거다. 핀트가 맞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아는 바알님과 벨제뷔트님은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데리고 장난치지 않는다. 깔끔하게 한 방에 처리한다. 그런 고로 지금의 검투회는 순수하게 식충이에게서 밥값을 받으려는 것이 목적이다.

“사파야님이 대장인 건 전투력이 높아서가 아니었나요?”

레플리카님과 같이 온 아바트 기사단에게 물어봤다. 그들은 슬쩍 웃더니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 젓지도 않는다.

“사파야가 강하긴 해. 마법에 있어선 우리 중에서 최고야. 그런데 물리력은…… 영 아니야.”

“리더로서의 자질을 전투력만 가지고 판단할 수 없잖아. 리더는 정신적 지주 노릇도 해야 하니까.”

“봐봐. 저 호리호리한 미남이 무기를 들고 전장을 누비는 모습이 어울리기나 해?”

그들의 말이 맞다. 실루엣만 보면 여성이라 착각할 만큼 가냘프고 호리호리한 체형이다. 내가 이런 말하기 그러지만, 팔뚝은 근육이 약간 있긴 해도 무기를 쥐어주자니 전혀 활용하지 못할 것처럼 빈약하다. 곱게 땋은 장발과 고운 피부, 동성과 이성을 모두 홀릴만한 미모는 그가 육탄전과는 인연이 없음을 결정적으로 증명한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보면 ‘참 곱다’ 혹은 ‘기생오라비 같구먼’이라 말할 것이다. 여하튼, 순수한 검술 대련은 그와 어울리지 않다. 그러면 결론은 이미 애저녁에 나온 셈이다.

“바알-. 이만하면 끝내도 되지?”

벨제뷔트님은 사파야님을 상대하는 도중에 시선을 바알님에게 둔다. 정말 여유로운가 보다.

“아.”

얼른 끝내라는 듯이 손을 휘휘 흔든다. 옆에 앉아있는 레플리카님만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툭]

벨제뷔트님이 검을 땅 위로 떨어트리고 두 손을 가볍게 위로 들어올렸다. 항복. 자신이 졌다는 뜻이다.

“에?”

“저 자식…….”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벨제뷔트님을 상대하던 사파야님도, 관객 모두 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벨제뷔트님의 실력이 위인데 스스로 검을 버렸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린다. 저 벨제뷔트님이 패배를 선택하는 일이 어디 존재할 수 있느냔 말이다. 패배를 당하면 당하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지 않을 인물이다. 나도 아리송하다. 이건 기습이나 마찬가지다.

“벨제뷔트. 검 들어.”

바알님만이 동여하지 않는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벨제뷔트님을 똑바로 응시한다.

“하는 수 없지. 바알은 역시 착해.”

벨제뷔트님이 처음으로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파야님의 검을 두 동강냈다. 내 귀가 정상이라면 ,그는 사파야님에게 접근하기 전에 ‘잘 막아라’라고 말했다. 1초.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사파야님이 무기를 잃었다.

“이제 됐지?”

그는 검을 다시 던졌다. 그는 이겼으면서 입을 비죽 내밀었고 반대로 사파야님이 미소 지었다.

바알님이 어째서 벨제뷔트님에게 검을 다시 쥐라고 했는지, 벨제뷔트님이 어째서 바알님에게 착하다고 했는지 한 순간에 감이 잡혔다. 승자와 패자의 모순된 표정 덕분에 바알님이 검투회를 연 진짜 이유를 깨달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알님이 사파야님을 배려한 것이다. 전날, 내가 일방적으로 트럼프 인형극을 끝냈고, 벨제뷔트님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는 자신이 수백 년에 걸쳐 한 모든 행동이 이기적이고 몰상식한 짓이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멈춰야 할지, 언제 그만 둬야 할지를 몰랐을 뿐. 그에게 그 두 가지 사실을 가르쳐 주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마왕들은 넓은 아량으로 벨제뷔트님을 용서했다. 한 명 한 명이 그와 악감정이 쌓였는데도 모두 과거의 일로 두고 전부 함구했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아주 어릴 때부터 다 같이 마왕으로서 마왕 로키의 손에 키워진 터라 형제 같은 성가신 친구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벨제뷔트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은 건 마왕이 아니라 아바트 기사단 전원이다. 그 중 우두머리인 사파야님이 가장 악감정이 많다. 바알님은 사파야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자 이런 갑작스런 쇼를 열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파야님의 자존심이다. 벨제뷔트님이 기권하거나 일부러 지면 되레 그의 자존심을 자극할 것이다. 그래서 바알님이 벨제뷔트님에게 검을 다시 잡으라 했고 선택권이 없는 벨제뷔트님은 단번에 쇼를 끝냈다.

나와 사파야님을 포함해서 바알님의 진의를, 이 검투회의 숨겨진 목적을 파악한 이가 드문 것 같다. 아, 역시 세일마글레님은 간파한 표정이다. 타인이 몰라줘도 괜찮다. 사파야님, 본인이 받아들일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거다.

“저 자식이 끝까지 사람 속을 긁어대?”

까, 깜짝이야. 바알님의 표정이 갑자기 험해졌다. 그의 의자 뒤에 서있던 세일마글레님이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춘다.

“왜 그러세요?”

“하? 기껏 신경 써줬더니 쓸데없는 짓이라잖아.”

사파야님이 텔레파시를 보낸 모양이다. 하긴. 그는 레플리카님이 괜찮으면 자신도 괜찮다고 여기는 위인이니 바알님이 불필요한 참견을 한 것처럼 생각할 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사람이 아니면 더럽게 성격 나쁜 바알님이 특별 서비스 해준 건데 곱게 받아주지. 이런 기회가 흔치 않은데.

“벨제뷔트 녀석. 역시 꼼꼼히 검을 휘둘렀었군.”

피브리조님은 마계 최고의 마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투다. 마계 전체를 장난감 삼아 매일 노는 것처럼 보여도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는 사실을 벨제뷔트님이 눈앞에서 증명했으니 당연하다. 검을 전혀 모르는 나조차 거의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는 것을 느꼈는데 피브리조님은 그의 실력에 얼마나 소름 끼쳤을까.

“벨제뷔트님의 실력은 마계에서 어느 정도 되는 건가요?”

“아, 인간.”

표정이 순식간에 활짝 펴졌다. 벨제뷔트님이 반겨주는 것과는 또 다른 환영 반응이다. 벨제뷔트님은 날 놀이 친구로서 반긴다면 피브리조님은 자식처럼 반긴달까. 굳이 비교하자면 그렇다.

“마계에서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긴 힘들어. 순수하게 무기로만 싸우는 종족이 아니잖아. 최소한 마왕 중에서는 제일 뛰어나.”

“에-이. 그건 검만 그렇지. 창은 피브리조가 최고야.”

벨제뷔트님이 갑자기 끼어들어서 살짝 놀랐다. 그나저나 방금 벨제뷔트님이 혼자 알아서 겸손을 실천한 건가? 이거 정신 연령을 반 년 추가해도 되겠지? 성숙도 1단계 상승도 괜찮을 거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닌데 잡생각이 자꾸만 괴롭힌다.

“마왕님마다 각각 특기가 있으신가 봐요?”

“그야 당연하지. 다들 굉장해.”

더 물어보려는데 피브리조님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그 다음 이어지는 귓속말.

“깊게 물어보지 마. 벨제뷔트 녀석, 은근히 육탄전을 좋아하거든.”

혹시 육탄전과 관련된 것이라면 저도 모르게 흥분하는 걸까? 그런가 보다. 양 볼이 발그레해질 정도로 무척이나 좋아한다. 관전을 더 좋아하는지 직접 뛰는 걸 더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놀이’말고도 좋아하는 게 있었구나. 실례되는 말이나, 안 어울린다. 혼자 흥분하는 벨제뷔트님을 보며 나와 피브리조님은 피식 웃기만 할 뿐이다.

“있지, 있지. 바알은 주먹이 최고야.”

“네?”

“맨손으로 싸우면 바알을 이길 자가 없다는 뜻이야.”

“아……. 그럴 것 같아요.”

피브리조님의 해설이 아니었으면 못 알아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막상 들어보니까 머리로 가슴으로 쉽게 와 닿는다. 바알님에게 어울리는 무기라…….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벨제뷔트님의 표현대로 주먹이 최고인지도 모르겠다.

[챙, 챙]

금속끼리 부딪히는 소리에 내 귀가 반응한다. 아까까지 벨제뷔트님과 사파야님이 대치하던 곳에 파슈만과 질리온이 자리 잡고 있다. 질리온이 외팔이기 때문에 파슈만이 그에 맞춰 검을 한 손으로만 들고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검은 글라디우스 보다는 사브르에 가깝다. 한 손으로 다루기 편한 것으로 고르다보니 자연스럽게 사브르로 선택한 모양이다.

“이왕 검투회를 연 김에 본전 뽑으려나본데?”

피브리조님을 따라 바알님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검을 손질하고 있는 세일마글레님이 보인다. 누구 검이지? 바알님이 출전할 예정이면 아직까지 비서 대리인 나한테 시킬 텐데, 혹시 세일마글레님 본인이 출전할 생각인가? 에이, 설마. 마법 실력이 마왕과 맞먹을 만큼 강할 순 있어도 검술 실력이 검투회에 나갈 정도로 빼어날 수 있을까. 어……, 여검사라는 단어가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 진짜로 세일마글레님이 나갈 건가?

“저기, 벨제뷔트님. 벨제뷔트님.”

“응? 왜?”

파슈만과 질리온의 시합에 푹 빠졌다. 아주 정신없이 보고 있다.

“세일마글레님이 검도 쓸 줄 아세요?”

“나한테 배웠는데?”

“굉장하네요. 예쁘지, 성격 좋지, 마법도 잘하지, 검도 잘 다루지.”

“타고난 능력자라니까 그러네. 오죽하면 내가 탐냈겠어.”

벨제뷔트님은 세일마글레님의 저주가 풀린 후, 그녀에게 전혀 치근덕거리지 않았다. 단순히 다른 마왕의 약혼녀라면 계속 집적 거렸을 거다. 하지만 비서 신분이기 때문에 함부로 손댈 수 없다. 바알님이 세일마글레님과 파혼하고 나서 곧바로 비서직에 앉힌 이유가 바로 비서의 특권 때문이다. 아주 가끔씩 벨제뷔트님이 질 나쁜 장난으로 그가 된 그녀를 곤란하게 했지만 스스로 선을 지켰다고 한다.

“벨제뷔트님. 기준을 조금만 낮추시면 주변에 좋은 여자 많아요.”

배실배실 웃을 뿐이다. 어차피 세일마글레님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렸으니까 이 화제는 더 이상 꺼내지 않으련다.

외팔의 질리온이 외팔에 많이 익숙해졌는지 사브르를 휘두르는 폼이, 까막눈인 내가 봐도 자연스럽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화려하다. 음식에 비유하자면 육즙에 향이 풍미롭게 차 있달까. 그에 비해 파슈만은 절도 있으면서 담백하다. 둘 다 주 무기가 검이지만 파슈만은 원래 양손 검의 일종인 헌팅소드를 사용하기 때문에 사브르가 손에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통찰력이 뛰어나고 신체 움직임 자체가 날렵하기 때문에 한손 검을 써야만 하는 리미트를 그 나름대로 극복하는 듯 보인다. 역시 문외한이라 그들의 대련을 보면서 딱히 뭐라 판단하기 어렵다. 그저 저렇게 몸을 쓸 수 있는 것 자체가 부러울 따름이다.

“성에 돌아가면 무투회나 열어볼까?”

“너도 참가할 거야?”

“아-니. 구경만. 난 주먹질하곤 거리가 멀잖아.”

두 마왕끼리 같이 있게 두고 바알님과 세일마글레님에게 가까이 붙었다. 그래봤자 겨우 네, 다섯 걸음이지만.

“세일마글레님도 참가하시는 거에요?”

“응. 엘레나가 나랑 한 번 붙어보고 싶대.”

내가 알기론 엘레나는 채찍 밖에 휘두르지 않는데 웬 검? 엘레나가 검도 쓸 줄 아는구나. 과연 세일마글레님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일방적인 시합이 되지 않을까요?”

“어떻게 알아?”

“벨제뷔트님에게서 대충 들었어요.”

“흐응-.”

그녀는 손질을 마친 검을 허리춤에 찬 칼집에 조심스럽게 꽂는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엘레나가 검을 휘두르며 몸을 풀고 있다. 상대가 세일마글레님이라 긴장했으려나? 그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질리온과 투닥거릴 때와는 완전 딴판이다.

“핸디캡을 적용하기로 했어.”

“어떤 핸디캡이요?”

“한 쪽 눈을 가릴 거야.”

검을 주고받는데 눈을 가리면 위험하지 않을까 싶다. 원근 감각이 떨어져서 행동에 제약이 심할지도 모른다. 무공이 어느 정도 쌓이면 눈이 아니라 그 외 다른 감각으로 주변을 파악할 수 있다는데 설마 세일마글레님이 그 정도로 고수? 농담도 정도껏 하자. 세일마글레님은 검에 매우 취약한 엘레나를 배려하여 핸디캡을 적용한 거에 불과하다.

파슈만과 질리온의 시합이 끝났다. 결과는 질리온의 승리. 아무래도 리미트 때문에 파슈만이 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 같다. 검을 통일하지 않고 각자 개인 소장 검을 들고 겨뤘으면 어떻게 됐을까? 누구의 컨디션이 더 좋은가에 따라 결과가 확연히 달라질 지도 모른다. 어쨌든 전 시합보다 더 볼만한 시합이었음은 분명하다. 이번 검투회는 어디까지나 친목도모를 위한 것이지 철저하게 승패를 가르는 장이 아니니 말이다.

드디어 세일마글레님과 엘레네의 시합이 시작된다. 바알님은 누구에게도 잘 하라는 말 한 마디 하지 않는다. 그저 경기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수신호만 보낼 뿐이다. 이걸 공정하다고 말해야 할지 미련하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