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9 세 개의 위대한 보석
모두의 기대대로 리벤이 잭을 데리고 왕성으로 귀환했다. 헤르겔이 귀환 스크롤을 챙겨줬었기 때문에 돌아오는 것은 편했다.
둘 뿐이었다.
핀은 아직 아니라면서 동행을 거부했다. 그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리벤도 잭도 그와 마주쳤었다는 사실조차 함구했다. 핀을 잘 따르는 쌍둥이에게도 그가 무사하다는 걸 알리지 못해 안타까우나, 특히 에드워드에게 알려지면 안 되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바라와 마주쳤었기 때문에 레이먼드가 핀과의 조우를 알지도 모르지만 에드워드에게 쉽게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잭은 왕성에 발을 들이자마자 네리․샤샤 쌍둥이를 찾아갔다. 능글맞은 미소로 반기는 헤르겔을 냉정하게 지나치고, 국왕의 말을 가지고 온 시종도 무시했다. 제자가 낳은 아기들이 얼마나 반듯하게 자랐는가 제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헤르겔은 오랜 전우를 찬밥 취급한다고 깊게 한탄했다. 리벤은 그저 웃어넘길 뿐이었다.
그래도 트리오로서 일은 제대로 했다. 국왕에게 무사 귀환을 짧게 보고한 후 트리오끼리 조용히 비밀스런 대화를 밤새 나눴다. 그리고 오늘 날이 밝자마자 잭의 귀환소식을 들은 고위 신료들이, 거동이 불편하지 않은 이상, 대부분 왕성 회의실에 모였다.
“잭 세스턴 홀께서 돌아오셨다더니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겁니까?”
한 치수 큰 옷으로 깡마른 몸을 감춘 듯한 한 신료가 직설적으로 잭의 이름을 꺼냈다. 그가 언급한 대로 오늘 임시 조례에는 언제나 왕성을 지키는 헤르겔과 최근 기사단을 거칠게 뒤집어엎은 리벤만 상석에 앉았다. 국왕도 공석이었다.
“폐하와 긴밀한 말씀을 하시나보죠.”
5, 60대 중년들이 모인 자리에, 리벤을 제외하고, 유일한 30대인 신료가 비꼬듯이 말했다. 리벤은 스승보다 한참 어린 주제에, 아무런 공적 없는 단순 귀족 출신 신료 주제에 버릇없는 말투를 거침없이 사용하는 그가 아주 거슬렸다. 리벤이 원래 정기회의에도 참석하지 않는데 왠지 그가 낯설지 않은 건 기사단에서 그와 많이 닮은 젊은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누군지 기억나지 않았다.
“트리오가 다 모이지 않을 거면 폐하라도 참석하시고, 폐하께서 부재라면 트리오가 담 참석해야 하지 않소?”
“아- 짜증나. 트리오 중 한 명이라도 있으면 국왕 대리로 충분하다 못해 국왕보다 우위라는 게 클라마 왕국의 법이잖아. 이 나라에서 썩어가고 있는 녀석들이 따끈따끈한 신생아들조차 아는 사실을 이제 와서 모른다고? 기사단만 엉망진창인 게 아니었어. 헤르겔 다르케스!”
독기 가득한 말이 고위 신료들을 휘어잡더니 마지막엔 헤르겔에게 꽂혔다. 하지만 리벤의 날카로운 시선은 고위 신료들에게 고정된 채였다. 그녀가 제일 어리다 해도 역시 트리오였다. 기고만장한 귀족들을 단숨에 억눌렀다.
“그렇지, 그렇지. 트리오가 한 자리에 다 모일 때가 가장 위험한 법인데, 요새 평화에 절어 사는 신세대들은 무지해서 탈이야.”
“내가 소년병으로 전선에 있을 때도 파티에서 귀족 놀음하던 것들이 신세대야? 하!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단세포야, 그냥. 진화는커녕 성장조차 못하는 단세포. 적어도 다세포면 성장이라도 한다고. 거위 신료란 것들이 이 지경? 내가 원로회에만 얼굴 들이미는 이유가 이거라고.”
리벤은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 거친 말뿐이지만 목소리는 경사로의 지면을 천천히 긁어 내려가는 묵직한 바위와 같았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열화와 같이 분을 표출하는 건 여유 없는 소인배처럼 보일까봐 강한 이성으로 꾹 참았다.
그런데 가장 젊은 귀족이 바닥 카페트에 의자 긁는 소리를 내며 거칠게 일어났다. 헤르겔과 리벤이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는 눈치 채지 못했다.
“귀족을 대하는 태도가 글러먹었는데 트리오입니까? 젊은 계집이 뭘 안다고 그 입 함부로…….”
“저 자식 모가지 베는 건에 찬성하는 분은 거수.”
리벤이 사악한 미소와 함께 평이한 말투로 귀족의 말을 끊었다. 이 자리에 있는 고위 신료 중 절반은 리벤이 전선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직접 봤었고, 나머지의 또 절반은 리벤이 결혼 전 왕성에서 트리오로서 기강을 바로 잡던 시절을 짧은 기간이지만 같이 보냈다. 물론 지금까지 가볍게 입을 열었던 몇몇 신료들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좌석을 지키고 있는 신료 중 3/4가 망설임 없이 손을 높게 들었음은 의심할 필요 없다. 더불어 헤르겔도 손을 들었다. 언제나 능글맞게 웃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으니 지금 얼마나 심기 불편한지 구태여 확인하고 싶지 않다. 그의 성격을 잘 아는 자들은 심장이 덜컹거렸을 것이다. 리벤은 옆자리라서 시선을 돌리지 않으면 헤르겔의 표정을 읽을 수 없지만, 기척으로 충분했다. 역시 그도 화낼 줄 아는 인간이구나 하고 잠깐 감탄하고 슬며시 무시했다.
“그대는 이 나라에 어떠한 혁혁한 공을 세워서 여기 있는 거지? 그냥 집안 잘 타고 난 주제에, 한 것이라곤 집안 위세 떨치기가 고작이면서 주제도 모르고. 아랫자리에서 만족하면 그만인 걸 누구 덕에 여기에? 응? 공작이라도 쉬이 오르지 못하는 자리라고? 누구야? 네 놈을 여기에 들인 바보.”
“무례해도 정도가 있어, 계집!”
“무례한 건 자네야!”
거수했던 귀족 중 노련미와 관록이 눈에 띠는 60대 신료가 앉은 채 외쳤다. 주위를 압도하는 사자후였다.
“면목 없습니다. 푸른 사신. 지금 와서 의문이 드는 제가 진심으로 부끄럽습니다. 저토록 모자란 자가 여기에 발을 들이다니요. 추천인은 제가 책임지고 찾아내겠습니다.”
인사 변동 승인은 국왕이 적당히 옥새를 찍고 넘겼을 테니, 모든 잘못은 추천인에게 넘어갔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지금 여기에 있거나 원로회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를 정도면 원로회 소속은 아닐 것이다. 60대 신료는 동료들을 찬찬히 둘러봤다. 평온치 못한 후작 한 명이 금새 눈에 들어왔다. 헤르겔과 리벤도 일찍이 눈치 채고 있었다. 젊은 신료를 몰아붙일 때 그가 저도 모르게 추천인을 슬쩍 쳐다봤기 때문이었다.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 관찰력을 키운 트리오가 그 순간을 놓쳤겠는가.
험한 시선을 차례차례 받은 후작은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역시 리벤이 테스탈로차와 결혼하고 페리아 숲에 들어간 후에 지금 자리에 오른 자였다. 국사에 탁월한 인재는 절대 아니다. 작위와 재력에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이리라.
“헤르겔. 이 능글맞은 너구리. 일부러 인사를 방치했지? 무능한 왕을 빨리 끌어내리려고. 그러니까 레이먼드 왕자가 혁명을 위시한 반역을 꾀하는 거야.”
리벤은 팔짱을 끼고 상체를 뒤로 바짝 젖혔다. 의자 등받이가 미약하게 삐걱거렸다.
“민감한 부분을 과감하게 들추는군.”
“그게 내 역할이잖아.”
회의실 분위기가 단숨에 싸늘해졌다. 알면서도 외면했던 사실이 당당하게 거론되자 확인 사살이라도 당한 듯 꼬리뼈부터 척추를 따라 목덜미까지 오싹오싹하게 시렸다.
[덜컹]
회의실 문이 열리더니 잭이 들어왔다. 옷자락은 사락사락 가볍게 흔들렸지만 걸음걸이는 당당했다.
“이런, 발언 중이었군. 타이밍이 안 맞아서 미안하군 그래.”
아직 일어서 있던 젊은 신료를 화들짝 놀라며 털썩 앉았다. 귀족으로서 채신머리없는 행동만 연발했다. 그러나 지금 막 나타난 잭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 막 끝냈나? 그렇다면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군.”
잭은 전체적으로 헤르겔보다 날카로운 분위기지만 관심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가볍게 적당히 대했다. 그래도 존재 자체가 위압적이었다. 그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누구 하나 소음을 내지 않았다.
“처음 보는 이가 더러 있군. 역시 세상 변하는 법이야.”
잭을 직접 본 적도 없으면서 그의 부재를 지적했던 몇몇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시선을 피하면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애썼다. 눈치가 빠른 잭은 그저 피식 웃고, 리벤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몸을 뒤로 홱 돌려서 키득키득 거리며 큰 웃음을 참았다. 헤르겔도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헛소리만 하고 있었지? 자, 처리할 게 많다고.”
“어차피 트리오가 결정하면 저 자들은 두말없이 따라야 하는데 왜 굳이 이 귀찮을 짓을 하나 몰라.”
리벤은 자세를 바로 고쳤다. 잭은 동감이라는 듯이 후후 하고 웃었다.
“아직 이 나라의 정치를 모르는 자들이 있어서 가르치는 중이었어.”
역시 헤르겔은 능글맞은 늙은 너구리가 제일 잘 어울렸다. 언제나 속에 꿍꿍이를 가득 채운 미소. 언제나 밝게 생글생글 거리지만 이럴 때일수록 티끌만한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철저함을 고수한다. 그가 세상만사 다 귀찮다는 듯이 지루해 하는 표정이면 신료들은 멋대로 안건을 내고 후딱 회의를 진행해서 터무니없는 결론을 낸다. 하지만 그가 웃고 있을 땐 벙어리 허수아비로 있어야 한다. 그동안 이어진 어리석은 정치를 몰아서 부정당하고 처음부터 모든 것을 정비하는 것은 물론, 귀족이라면 절대 찬성할 수 없는 정책을 강행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반론은 절대 못한다. 엄두가 나지 않을 게 분명하다. 헤르겔의 능글맞은 모습은 분노보다 더 살 떨리는 두려움을 끌어냈다.
“이미 나라 전체에 레이먼드 왕자와 관련된 소문이 퍼졌더군. 여기서 쉬쉬 해봤자 장본인들이 퍼트리면 그만인 게지. 이제 고집 그만 부리고 조만간 내란이 일어날 거라고 인정하지들 그래? 현실 회피는 좋지 않아.”
잭은 묵직한 목소리로 신료들을 압박했다. 그런데 신료들은 인상을 조금씩 찡그릴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주변 소국들을 제압하는 대국에서 꼴사납게 내란이라니, 이런 쓸데없는 자존심만 앞세웠다간 진짜로 나라가 통째로 무너진다고.”
“왕위계승서열 3위라 해도 장남. 게다가 왕위계승서열 1위의 에드워드 왕자는 절대로 레이먼드 왕자에게 검을 겨누지 못해. 지독하게 바보라서.”
리벤과 헤르겔은 핵심을 콕콕 집었다.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현실을 하나씩 들출 때마다 신료들의 인상이 한 단계씩 엉망이 되었다.
“답답한 사람들이군. 클라마 왕국의 정치는 원로회로 충분하겠어. 명석한 인재가 나날이 줄어들고 탁해져서야 쓰나.”
잭의 근엄한 꾸짖음에도 신료들은 현실을 보지 않으려 했다. 왕을 너무 믿는 것인지, 에드워드 왕자를 너무 믿는 것인지, 그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실망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였다.
“현실 직시를 못하는 거야? 레이먼드 왕자한테 얼마나 무시무시한 녀석들이 붙었는지 알려줘? 내 부군(남편)이자 한 때 페리아 숲의 주인이었던 테스탈로차 포르포냐를 죽인 강령술사, 베시릴 타운. 15년 전 프라우르마인 전쟁에서 클라마 왕국 왕성기사단 1개 사단을 혼자서 박살낸 천재 쥬엘 나이트, 포이어 회일러. 지금까지 파악한 건 이 두 명뿐이지만 이들만으로 나라 하나 통째로 쥐고 흔들 수 있어. 아주 충분하다고. 그리고 아직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하지만 사병을 모으고 있을 테고. 명예만 왈왈 거리다가 쓰레기 집단이 된 왕성기사단으론 어림없지. 차라리 지방 민병이 더 쓸만할 거야.”
리벤은 제발 정신 차리라는 투로 요소요소를 언급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부와 명예를 최우선으로 살아온 귀족들은 베시릴 타운과 포이어 회일러가 얼마나 악명 높은지 세간 상식조차 부족한 상태였다. 왕성기사단은 최고의 무력집단이고 트리오가 있으니까 내란이 일어나도 눈 깜짝할 새에 진압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안전 불감증에 지독하게 휩싸여 있었다.
“폐하는 장남을 옛날의 착한 아들로만 기억하고 있고, 신료란 작자들은 제 밥줄만 챙길 줄 알고. 이제 이 나라도 끝이군.”
“애초에 국사(國師)제도가 나라를 망쳤죠.”
리벤은 스승 잭의 말에 깊은 탄식과 함께 동의했다.
“그러면 이들이 알아듣기 쉬운 얘기부터 해볼까? 밥그릇 싸움이라면 말귀를 알아들으니까.”
헤르겔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리벤에게 눈치를 줬다. 리벤은 바로 미간을 찡그리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아, 그 형편없는 왕성기사단? 그냥 폐지해. 다 필요 없으니까 폐지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들은 이 왕성의 긍지입니다.”
젊은 신료가 바로 반박했다. 자기보다 나이가 적은 여성이 트리오라는 사실이 꽤 불만인지 리벤의 말 하나하나를 부정하려고 애썼다. 어지간히 세상 물정이 어두운지, 리벤이 너무 오랫동안 페리아 숲에만 있었는지, 연유야 어떻든 발언 거수도 없이 무례하게 트리오의 말을 끊은 것은 가히 용기가 가상하다고 할 수 있다.
“그응지이. 그래. 처음엔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15년 동안 평화로웠던 덕분에 아-주 나태해졌거든. 7살짜리 내 아들보다 센스가 없어. 그 나이 먹고 그 나날동안 매일 꾸준히 훈련했다면 웬만큼 해야지. 견장 다는 법도 모르는 바보천치들이라고? 검? 참? 그 바보들이 훈련하는 걸 본 적 있어? 특별한 전적은? 그거 귀족가 자제라고 돈 흩뿌리고 다니는 것밖에 할 줄 몰라. 페이지는 방패라도 제대로 들고 돌아다니지, 그 바보 무리는 맨몸으로 발만 동동 구르는 식충이야. 스콰이어랑 페이지로 계급을 낮춰도 속이 안 풀려.”
“귀족 자제들은 어릴 때부터 기초 소양으로 검술이나 창술을 익힙니다. 그들을 격하하는 건 용서치 않겠습니다.”
나이 많은 신료가 젊은 신료를 막으려 했지만 잭이 손을 어깨 높이까지 들며 제지했다. 두고 보라는 뜻이었다.
“아아- 어릴 때 하는 전쟁놀이? 그걸 지금가지 했으면 기본 센스는 몸에 익혔을 걸? 그런데 그만둔 지 한참이라 몸이 굳고 감각이 둔해지고 도저히 기사라고 부를 수 없는 그것들을 긍지 높은 기사단에 들이려고 실력 대신 돈을 쏟아 붓는 너네 귀족들은 제정신이야?”
“어린 나리에 현자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트리오가 되니까 귀족이 우습게 보입니까?”
“풋!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리벤을 비롯해 헤르겔과 잭도 참지 않고 있는 대로 웃어 제꼈다. 헤르겔은 손으로 탁자면을 사정없이 두드리기도 했고, 리벤은 뒤로 너무 젖혀서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정말 꼬맹이군.”
잭이 먼저 가까스로 진정하고 젊은 신료를 귀여우면서도 안타깝다는 듯이 쳐다봤다.
“너, 너…… 하하하하하하. 국사가 되는 조건을 모르는 거야? 암만 썩어 빠진 귀족이라도 제왕학이나 역사학에서 배울 텐데? 아…… 설마 머리 빈 허수아비신가? 자기쪽 발언권을 높이기 위해 머릿수 채우기용 꼭두각시 말이야. 그러려면 추천인이 영향력 강하고 명석한 영특한 사람이어야 하는 게 세상 이치인데 저 놈은 그냥 제 배 부르면 그만인 소인배라고. 우와- 진짜로 여기 있는 인간들 싹 갈아버리고 싶다.”
리벤은 너무 흥분해서 살기를 조절하지 못했다. 이 사람 저 사람 쏘아보며 당장이라도 목을 치겠다고 눈으로 위협했다.
“라플라스 경. 클라마 왕국의 국사는, 혼자서 정치를 할 수 있는 두뇌와 홀로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무력을 모두 가질 것이 전제조건이라네. 그래서 쥬엘 나이트 중에서 국사를 뽑아 왔지. 레이먼드 왕자에게 붙어 있는 포이어 회일러, 바라 슈 역시 국사가 될 자질을 가졌어. 너무 호전적이라, 아니 살생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자라서 이쪽으로 부르지 않았던 게야.”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있는 헤르겔은 이제 막 입문한 제자를 가르치듯 상냥하게 설명했다. 젊은 신료는 새빨개진 얼굴을 한 손으로 엉거주춤 가리고 모두의 시선을 견디기 어려워 안절부절 못했다. 보아하니 리벤이 강하다는 사실도 몰랐지만 쥬엘 나이트라는 것조차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리벤의 날카로운 외모를 앞에 두고 그냥 판단력이 뛰어난 수재라고만 생각했다니, 어지간히 둔한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라플라스? 아, 내가 페이지로 떨어트린 세이지 라플라스랑 친척인가 보군. 이야- 싸잡아서 쓸모없는 녀석들. 아오, 뱃가죽 땡겨. 너무 웃었어.”
“기사단을 두들겨 팬 것도 모자라 계급까지 떨어트렸군.”
“스승님께서 직접 보시면 제가 해체니 폐지니 방방 뜬 걸 이해하실 거예요.”
“헤르겔. 우리가 없는 사이에 살림을 너무 방치했어.”
“반성 중이야.”
트리오는 전날 밤 미리 간단하게 의견을 맞췄지만 막상 신료들과 마주하고 나니 정말로 이 회의가 불필요하다고 절실하게 느꼈다. 국왕에게서 정치 전권(全權)을 받아내 트리오끼리 전부 결정하고 강행권을 행사하여 국사(國事)를 챙기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려니 싶었다.
“리벤. 왕성기사단이 샤샤보다 못하다는 건 과장, 사실 중 어느 쪽이느냐?”
“지금 스콰이어 이하로 덜어진 녀석들은 10이면 10 샤샤보다 떨어져요. 그래도 나이 덕분에 체력이나 근력은 있지만 기사단 최저치에 미치지 못하고, 기초 기술과 응용․상황판단․순발력 등등 내공이 요구되는 기술성은 전부 바닥이에요.”
“샤샤랑 1대 1로 붙어서 진 녀석도 있느냐?”
“현 페이지 전원요. 샤샤한테 진 주제에 나이트라니, 스콰이어도 아까워요.”
잭은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리벤의 판단과 처리가 정당하다고 납득했다. 젊은 신료는 왕성기사단 중에 7살 꼬마보다 못한 이가 실재한다는 현실을 알고, 그 중 한 명이 제 동생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리벤에게 한 자신의 언행이 전부 터무니없이 대드는 것이었음을 깨닫고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였다.
“샤샤 군은 천재 리벤의 친아들인데다가 매일 리벤에게 직접 모든 것을 사사받고 있어,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깔끔하게 자기 것으로 흡수한단 말이지. 탐나는 인재야.”
“헤르겔한테는 안 줘.”
“허허허허허. 이미 샤샤 군에게 차였어.”
헤르겔은 그래도 바람직한 인재가 적게나마 아직 이 나라에서 태어나고 있다는 점을 기쁘게 생각했다. 잭도 마찬가지였다. 직접 만나본 포르포냐 가의 쌍둥이는 모두 기대되는 아이들이었다.
“자, 돌머리 어르신들. 7살 아이한테도 맥 못 추는 바보들을 어떻게 할까? 왕성기사단 자체를 폐지해? 아니면 지금 녀석들을 전부 해체하고 다시 모을까? 지금 훈련권은 저언-부 나한테 있거든.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시나?”
리벤은 트리오끼리의 대화를 적절히 끊고 다시 신료들을 훑어봤다. 여기까지 와서 트리오의 결정을 반박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형 순간을 기다리는 죄수마냥 모두 몸에서 힘을 쫙 빼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폐하의 승인 없이 강행권을 발휘할 수 있겠군.”
잭이 만족스러워했다. 왕성기사단뿐만 아니라 여기 회의실 안에 있는 고위신료들도 뒤탈 없이 깨끗하게 바꿔치워야겠다는 의지가 언뜻 보였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보석전쟁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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