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신의재림-두번째라그나로크(완)

신의 재림 : 제 8문 (4)

★은하수★ 2009. 7. 1. 16:58

민혁과 프레이야가 바로 새턴 세쌍둥이네로 갔을 때는 그곳도 발칵 뒤집혀서 패닉상태였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세연을 손님 방 침대에 눕히고 세쌍둥이와 프레이르가 방을 나서려는 찰나에, 이상한 마력이 느껴지더니 세연이 사라진 것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여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마력이었다고 한다. 프레이야가 세연이 누웠던 침대를 살피니 세연의 마력 외에 어떤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기네와 비슷한 상황임을 안 민혁은 자신들에게 있었던 일을 세쌍둥이와 프레이르에게 해줬다. 텔레파시를 통해 양쪽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전해들은 진원과 진철, 인철이 늦은 저녁쯤에 세쌍둥이 네에 도착했다. 김리궁과 미드가르드의 왕래가 자유로워진 덕분에 발데르도 새턴 가의 숨겨진 방에서 이루어지는 회의에 참석했다. 워프를 할 줄 모르는 레이는 미국에 돌아가 있는 상태라 참석하지 못했지만 진원의 텔레파시를 통해 대략의 이야기를 들었다.

“신의 마력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녀석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기이하군.”

진철은 직접 당하지 않아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 마력’과 직접 접해본 민혁과 프레이야도 그 힘을 짐작할 수 없는데 둘 외의 다른 신들이 추측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타인의 마력을 조종하는 능력을 가진 자가 아주 드물게 있긴 하지만 신의 마력을 조종한다는 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

마법에 정통하고 세상만사 지혜로운 오딘, 진원도 이번 일은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나중에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니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문제네요.”

한 때 오딘을 가르쳤었던 프레이야가 이런 말을 하니 문제의 난이도가 어느 저도인지 일일이 따지지 않아도 됐다.

“그 녀석의 목적도 모르겠어요. 노른을 원한다면 스쿨드도 데려가야 할 텐데 세연이랑 우르드가 거의 동시에 사라진 거에 비해 스쿨드는 아직까지도 멀쩡하잖아요. 노른이라는 걸 빼면 세연이랑 우르드의 공통점은 거의 없을 텐데…….”

세연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살짝 이성을 잃었던 민혁은 다시 제정신을 차리고 차가운 두뇌로 이리저리 생각해봤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의문만 쌓일 뿐, 제대로 건져낸 것이 없었다.

“부하가 엘프라는 걸 본다면 그 자를 추적할 범위가 아홉 세계 전체가 될 수 있습니다.”

발데르의 말 대로였다. 아홉 세계 모두 통로가 열린 시점에서, 엘프하임에 평생 고립되어 살고 있는 하이 엘프를-절대 제 고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부하로 두고서 미드가르드에 있는 두 신을 납치(?-정확하지 않지만) 했으니 활동범위가 아홉 세계 전체라 할 만 했다.

“어차피 4대 보물을 찾아야 하니 겸사겸사 녀석을 조사할 수 있겠어.”

“3년 넘게 조각에 대한 단서도 찾지 못했는데 자취를 남기지 않는 녀석을 어떻게 찾아요?”

마블이 인철에게 태클을 걸었다. 제 2의 세계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둘의 사이가 은근히 뒤틀렸다.

“녀석에 대한 단서는 찾을 수 없어도 세연과 우르드, 우르드에게 약을 먹인 하이 엘프에 대한 단서는 찾을 수 있을 거야.”

민혁은 조급해 하지 않았다. 지금 알고 있는 사실과 가능한 현실을 처음부터 이렇게 맞춰 보고 저렇게 맞춰 봐도 뚜렷하게 보이는 게 없으니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른다 가정하고 차근차근 접근할 생각이었다.

“세연님은 가끔 폭주할 때도 있으니까 주변에서 그 기운을 느끼는 자들이 있을 거에요. 찾는 도중에 발견하면 더 쉽겠지만요.”

매튜의 말이 그럴 듯했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종족이 사는 곳에 숨겨져 있다면 정보를 얻기가 하늘에 별 따기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생각보다 빨리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상대는 신의 마력을 제 것처럼 다룰 수 있어. 세연이의 마력도 쉽게 제어될 거야.”

“아무리 잘났어도 제 1의 세계에서 ‘그녀’의 마력까지 맘대로 할 수 있을까?”

“그렇구나. 세연이 폭주할 때 나오는 마력은 ‘그녀’의 마력이었지.”

처음엔 걱정을 많이 했던 프레이야는 조금 그 걱정을 덜었다. 프레이르는 프레이야의 걱정을 덜어주고 나서 도리어 자신이 걱정스런 눈으로 진원을 쳐다봤다. ‘그녀’의 마력이라고 해서 녀석에게 조종당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르드는 지금 조종당하는 중이라 스스로 증거를 남길 리가 없어. 그리고 세연이 깨어나기 전에 우르드에게 먹였던 약을 먹이면 역시 증거를 남기지 않을 거야.”

아주 약간은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았는데 민혁이 한 발 앞선 생각으로 그 희망을 무산시켜버렸다.

“한 마디에 분위기가 급 무거워졌네.”

진철이 장난기 어린 투로 말했다.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면 이게 꼭 나쁜 사태만은 아니야. 새로운 적이 하나 더 생겼지만 대신에 우트가르드 로키도 그 녀석에게 정신이 팔려서 우리와는 저절로 휴전이 된 셈이잖아. 자질구레하게 시간과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세연일 찾는데 그 시간과 힘을 투자하면 돼.”

“토르가 말 되는 말을 하는 건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데 오늘이 그 날인가 보네요.”

“여어, 꼬마 아가씨. 날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야?”

마야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진철을 보며 씩 웃었다. 둘 덕분에 무겁게 앉아 있던 분위기가 조금 풀린 것 같았다.

“진철 씨의 말대로 당분간은 우트가르드 로키의 기습이 없을 테니 조각과 세연을 찾는 일에 열중할 수 있겠어요.”

진원의 마음은 말과는 반대로 ‘그녀’를 잃었다는 생각에 불안해했다. 혹시라도 상대가 세연의 정체를 알고 납치한 거라면 진짜 골치 아프게 일이 돌아갈 수 있었다. 만약 알고 납치한 거라면 세연을 조종해서 신들이 막기 어려운 파렴치한 짓을 해댈 가능서이 높았다. 좋은 목적으로 누군가를 납치하는 경우는 드무니까 말이다.

“혹시…… 4대 보물이나 ‘그녀’의 힘없이 ‘그’가 깨어날 수 있나요?”

모두의 이목이 발데르에게 집중되었다. 발데르는 순간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아뇨, 그게……. 신의 마력을 조종할 수 있다는 건 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얘기밖에 설명이 안 돼서요. 그렇다면 ‘그’ 밖에 없으니까…….”

“그거야말로 골 때리는 추측이잖아.”

인철은 ‘그’가 깨어났다는 가정 자체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인철은 ‘그’를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지만 제 2의 세계에서부터 오딘이 수없이 말해 왔었기 때문에 일종의 트라우마 마냥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야. 4대 보물이나 ‘그녀’와 맞먹는 힘을 갖고 있으면 ‘그’를 부활시킬 수 있어. 하지만 아홉 세계 어디에도 그런 자가 없으니까 99.99% 불가능해.” 회니(빌리), 베와 함께 4대 보물로 ‘그’를 봉인했었기 때문에 깨우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가 봉인된 후, 오딘은 아스가르드를 세우고 신들의 왕이 되었다. 어딜 가나 오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한 신이 되었다. 그런데 회니와 베는 그날 이후 어디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홉 세계의 어느 누구도 그들의 이야기를 알지도 듣지도 못했다. 제 2의 세계가 영원할 것만 같은 시간을 보내는 중에도, 라그나로크로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도, 제 3의 세계가 이어지는 지금도 그들을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었다. 그들이 죽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더라도 그 만큼의 힘만 있으면 되니까 ‘그’를 깨울 수 있잖아요.”

“이봐, 순진무구한 미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요르문간드. ‘그’가 깨어났다는 건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아.”

“정말로 ‘그'가 깨어났다면 무슨 징조가 있어야 하는데 그동안 그런 건 없었잖아.”

프레이야도 ‘그’의 부활은 필사적으로 피하고 싶은지 프레이르에게 바짝 붙었다. 마블이라고 ‘그’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괜한 얘기를 했다가 본전도 못 건졌다. 하지만 민혁이 그 민망함을 없앴다.

“그 하이 엘프도 엘프치곤 마력이 꽤 됐는데, 그만한 녀석들이 1000명 정도 있으면 어떻게든 ‘그’를 부활시킬 수 있겠지. 꼭 엘프가 아니더라도 드래곤에서 강한 종자를 끌어들일 수도 있고.”

이야기가 점차 ‘그’의 부활 쪽으로 기울어갔다. 이게 아니면 도저히 두 신의 감쪽같은 실종을 설명할 수 없어서였다.

“민혁이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의 짓이 아니고…….”

“‘그녀’의 짓일 수도 있어요.”

민혁이 진원의 말을 대신 말했다. 영특한 두뇌의 소지자가 개인적 감정 때문에 가능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리 없었다. 지혜로운 왕 역시 민혁이 만만찮게 자신이 생각한 두 번째 가설을 입증하거나 믿고 싶지 않았다.

“어려운 일도 아니죠. 이미 발작의 수위가 극에 달하고 있었으니까요. 어쩌면 최근 몇 번은 연기였을 지도 몰라요.”

“네가 세연일 믿지 못하면 누가 믿겠냐?”

진철이 낮은 목소리로 근엄하게 말했다. 민혁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등을 의자에 기대 편한 자세를 잡았다.

“가능성이 0.1%라도 있는 사실은 그게 뭐든 집고 넘어가야죠.”

싫어도 해야만 하는 잔인한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잦고 강도가 높아진 발작 외에는 세연에게서 이상한 건 없었다. 하지만 베르단디와 앙그르보다로 나뉘어졌다가 다시 하나가 된 ‘그녀’다. 아스가르드라 김리궁의 신보다 서열이 높은 존재다. 그런 ‘그녀’를, 보호해야만 하는 소녀 ‘세연’으로 고정해서, 이번 사건에서 열외로 둘 수 없었다.

“‘그녀’가 각성하면 이성도 바뀌는 거야? 우르드를 시켜서 날 공격하도록?”

평소에 세연과 친했던 프레이야는 인정할 수 없다는 식으로 반발했다.

“그건 ‘그녀’에게 직접 물어봐야지. 그리고 지금 얘기하는 것들은 모두 가정에 불과해.”

진원이 프레이야를 진정시켰다. 프레이야뿐만이 아니라 세연을 아는 모두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가설이었다. 차라리 ‘그’가 부활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정신건강 측면에서 나을 거란 분위기가 조성됐다.

“세연이 각성을 했든 안했든 적으로 만날 가능성이 커. 각성을 안 했으면 조종을 당할 테니까.”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면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비극의 사실을 말하는 민혁의 표정은, 완벽한 포커페이스 때문에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누구도 민혁의 마음이 얼마나 깊이 도려지고, 얼마큼의 고통을 받고 있는지 가늠하지 못했다.

 

김리궁으로 돌아간 발데르에게서 아스가르드의 열쇠 조각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은 민혁, 진철, 인철이 단박에 요툰하임에 있는 미미르의 샘으로 향했다. 범인은 접근할 수 없는 성역으로 위그드라실의 거대한 세 개의 뿌리 중 하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미미르의 샘에 도착하니 김리궁에서 보낸 마그니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긴 흘렀네. 그 꼬마 토르가 큰 토르가 됐으니.”

민혁은 마그니를 보자마자 제가 기억하고 있던 마지막 모습과 지금을 겹쳐봤다. 지금은 제 2의 세계에서의 토르를 쏙 빼닮아서 처음 보는 이도 토르의 아들이란 걸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철은 토르일 때나 지금이나 잔정이 많아서 훌륭하게 자란 마그니를 기특하게 여겼다.

“그동안 모디만 보다가 마그니를 보니까 뭔가 색다른데?”

이제 어른이 돼서 당당하게 신으로서의 한 몫 하는 마그니지만 초대 아스 신들에게 칭찬을 들으니까 어린 아이처럼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진짜로 조각이 있었으면 해. 그동안 몇 번이나 허탕을 쳤는지 모르겠어.”

“두 번 밖에 없었습니다만…….”

“흠. 아,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인철은 머쓱하게 고개를 돌렸다. 발데르의 정보에 따라 움직인 적이 두 번, 진원과 스쿨드의 정보에 따라 움직인 적이 열 몇 번. 이게 한데 뭉쳐서 인철의 감정을 자극시켰던 것이다.

요툰하임이 거인들의 나라라서 그런지 바위며 나무며 다 큼지막하게 보였다. 하지만 거인의 성격처럼 거칠고 황량한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미미르의 샘 주변은 성역이기 때문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요툰하임의 다른 어떤 곳보다 아기자기하고 생명력 있는 분위기였다. 위그드라실의 거대한 뿌리는 다른 나무들과 풀숲에 가려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미미르의 샘이 비쳐진 모습으로는 성스런 빛을 발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범인은 접근할 수 없는 성역이라고 하니 타 동물들도 함부로 그곳에 다가가지 않았다. 식물 외의 생물이라고 하면 이향충(異香蟲)이 전부였다.

미미르의 샘이라고 명명된 것은 지혜로운 신이자 오딘의 말동무인 미미르의 머리가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위그드라실의 뿌리와 그에게 생명력을 주는 샘을 지키고 있었는데 라그나로크 이후 신들이 미미르의 머리를 김리궁으로 가져갔다. 지금은 거인족 출신의 성역 신관, 에블루딘이 파수꾼으로 있다. 라그나로크가 시작되기 전에, 그보다도 발데르가 죽기 전에 발데르에게 은총을 받아 그를 모시는 신자가 됐었다. 그렇게 즉 발데르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던 에블루딘은 라그나로크 이후에, 김리궁에 돌아온 발데르의 명령으로 미미르의 샘과 뿌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거인족의 수명은 길지 않지만 에블루딘이 지금껏 살 수 있는 건 발데르가 한 달에 하나씩 주는 이둔의 금사과 덕분이었다.

“제가 온 이유는 이곳의 파수꾼이자 발데르의 성역 신관인 에블루딘 때문입니다. 발데르의 말만을 절대적으로 따르기 때문에 다른 이의 말은 듣는 척 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에블루딘을 알고 있는 덕분에 일을 좀 더 쉽게 하기 위해서 모디 대신에 온 겁니다.”

마그니는 환생한 신들을 미미르의 샘 옆에 있는 나무 동굴로 안내했다. 수많은 거대한 나무들이 줄기와 가지가 서로 얽혀서 만들어진 동굴이었다. 햇빛이 조금 새어들고 빗물도 조금 스며들겠지만 거인 한 명이 살기에 충분히 아늑한 곳이었다.

“에블루딘! 자네 안에 있나?”

마그니가 나무 동굴의 입구에서 안을 향해 크게 소리 질렀다. 일반적인 바위굴이라면 소리가 울려 퍼지겠지만 에블루딘이 사는 곳은 나무 동굴이라 소리가 나무로 흡수돼 메아리가 크게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나무 동굴이 깊지 않아 에블루딘의 모습을 금방 볼 수 있었다.

“힘의 마그니. 자네가 올 거란 이야길 들었네. 어서 오시게.”

거인족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대한 몸과 우렁찬 목소리. 근육질의 몸매이긴 했으나 무식하게 우락부락하진 않았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험상궂고 심통 맞은 얼굴 또한 아니었다. 짙은 고동색의 길게 기른 머리칼은 햇빛에 비추면 적갈색으로 보였고, 몸 전체를 은진주색의 로브로 둘러 깔끔한 인상을 줬다.

“역시 발데르의 신관이야. 여기 이분들은 미드가르드에서 환생하신 로키, 토르, 티르시라네.”

마그니는 에블루딘에게 신들을 소개했다. 에시르 신족은 발데르와 마그니 외 네 명밖에 모르고, 발데르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여본 적이 없는 에블루딘이 무릎을 꿇고 고개와 허리를 숙여 절했다.

“미미르의 샘을 지키는 거인 에블루딘입니다. 거인에서 신의 되신 책략가 로키님과 천둥으로 거인족을 제압하신 토르님, 그리고 정의를 관철하여 누구도 사심으로 편들지 않는 티르님께 인사드립니다.”

과하진 않지만 격식을 잘 갖춘 인사에 신들은 부담스러웠다. 마그니도 에블루딘이 발데르 외 누군가에게 이러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인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내가 올 필요가 없었군.”

마그니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들은 바에 의하면 꽤 까다롭고 아집이 셀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은가 보군.”

민혁은 생각보다 극진한 호응에 딱히 불편해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눈을 두 번 깜빡이는 짧은 시간에 빛보다 빠른 속도로 에블루딘을 관찰하고 나름의 평가를 내렸다. 그가 두 번째 라그나로크에서 쓸모 있을까 없을까에 관한 평가였다.

“평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일부터 해야지.”

“그래야죠. 성역 신관 에블루딘. 이 근처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다지? 이분들은 그걸 찾으러 오신 거네.”

“그게 상당히 대단한 건가 보군. 초대 신이 세 분이나 오신 걸 보니 말이야.”

에블루딘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신관은 감정을 쉽게 드러내선 안 된다는 철칙의 표본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감정을 감추는 것이지 민혁의 주특기인 포커페이스가 아니다.

“중요한 물건이지. 때에 따라서는 우리의 목숨보다도 소중해서 꼭 찾아야 해.”

“그런 대단한 것이 여기에 있다니, 제가 다 긴장됩니다.”

신들을 보던 에블루딘은 미미르의 샘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들도 그를 다라 고개를 돌렸는데 미미르의 샘에 비친 빛나는 뿌리에 온 시선이 집중됐다. 이향충들이 수면 위를 물에 닿을 듯 말듯 날아다니면서 수면의 빛을 잡기 위해 한 번씩 수면을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얼마 전부터 신성한 빛이 강해졌는데 어느 날 문득 알 수 없는 마력까지 나타나 샘 전체를 감쌌었습니다. 마력은 금방 사라졌지만 빛은 여전히 밝고 찬란해 이향충들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세상 전체 어디서도 맡을 수 없는 신비한 향을 낸다고 해서 ‘이향충’이 된 날벌레들은 여하의 벌레처럼 빛을 좇는다. 수면에 비친 위그드라실의 뿌리의 빛이 강해지자 주변에 퍼져있던 이향충들이 몰려든 것이었다. 덕분에 샘 주변에 달콤하면서 푸근한 향기가 퍼졌다.

“조각이 마력을 숨긴 채 아직 이 근처에 있을 거에요. 샘과 뿌리를 중심으로 찾아보죠.”

민혁을 필두로 환생한 신들이 서둘러 움직였다. 마그니와 에블루딘도 그들을 거들었다.

“찾고 있는 물건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그건 어떤 신도 알 수 없어. 그것 마음이니까. 다만 부자연스러운 뭔가인 것만큼은 확실해.”

민혁, 인철과 함께 마력의 진을 친 진철은 위그드라실의 뿌리를 훑으며 조각을 찾았다. 뿌리가 워낙 굵고 긴데다가 잔뿌리도 있고, 자체에 마력이 있어서 조각의 경미한 마력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인철은 주변의 나무와 대기를, 민혁은 지면과 그에 붙어있는 작은 것들을 중심으로 찾았다. 10분이 넘도록 진을 치고 있었지만 꼬투리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인철이 이향충에서 미세한 마력을 감지했다. 너무나 적은 양이라 몇 번을 지나쳤었는데 정신을 이향충에 집중하고 보니 이향충의 둘레에 어떤 마력이 묻어있었다. 쓸데없는 진을 없애고 이향충의 움직임과 이향충에서 묻어나오는 마력을 살폈다. 직감이 유난히 발달한 남인철군. 얼마 안 가서 무엇을 발견했다.

“이것 좀 봐봐.” 인철이 모두를 불러 모았다.

“뭐야?”

“이향충 좀 봐. 한 마리씩 약간의 마력이 몸에 묻어있어.”

“이향충은 그저 향기나는 벌레지 마력은 없습니다.”

에블루딘도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한 마리만 잘 보면, 몸에 묻은 마력이 점점 사라지다가 수면에 닿았다 오른 순간에 또다시 마력이 몸에 둘러져.”

인철의 말을 듣고 나서, 무도 이향충에 한 마리씩 시선을 고정해 관찰했다. 샘 위를 아슬아슬하게 날아다니며 몸에 묻은 마력이 거의 사라질 즈음에, 이향충은 샘에 비치는 빛을 잡기 위해 수면을 순식간에 스쳐지나갔다. 그러자 이향충의 몸에 다시 마력이 묻어있었다. 이제 조각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감이 왔다.

“에블루딘. 샘 속으로 들어가서 찾아야 하는데 괜찮지?”

“초대 신께서 들어가시면 샘이 더러워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한 분만 들어가셨으면 합니다.”

그들이 미드가르드에서 환생하여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신들은 그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했다.

“조각을 회수하는 건 마력이 강하고, 마력을 잘 다루는 누군가가 해야지.”

진철이 민혁의 등을 툭 쳤다. 민혁은 어차피 자기가 하려고 했다는 듯이 망설임 없이 물속에 발을 담갔다. 물을 따라 천천히 마력을 흘려보니 어디선가 다른 마력과 맞부딪혔다. 민혁은 그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샘의 가운데에 다다랐을 때 수면이 가슴에 닿았다.

“민혁아, 물속으로 들어가서 찾아봐.”

“네. …하……. 흡.”

민혁은 숨을 크게 들어 마시고 쭈그려 앉았다.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니 샘 속은 그저 물과 돌멩이 뿐, 물고기나 생명체 같은 건 없었다. 수초마저 자라지 않고 있었다.

“푸읍.”

“찾았어?”

“아뇨. 물 밖에 안 보여요.”

“위그드라실의 뿌리가 비치는 곳을 찾아봐. 이향충 바로 밑에.”

감이 좋은 인철의 말에 따라 민혁은 다시 한 번 잠수를 했다. 이향충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곳을 보니 미미르의 샘에 어울리지 않는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손으로 땅을 짚어 기어가서 보니 바다 밑바닥에나 있을 법한 진주조개였다. 그리고 마력의 근원지가 확실했다.

“푸읍. 찾았어요.”

민혁은 진주조개를 손에 쥐고 일어섰다.

“어지, 이번엔 뭐야?”

4대 보물의 조각은 늘 모습이 변해있어서 찾았다는 사실 외에 변한 모습도 관심사였다. 민혁은 손 하나에 쏙 들어오는 작은 진주조개를 조심스럽게 쥐고 샘에서 걸어 나온 다음에 모두에게 손 안에 들어있는 것을 보여줬다.

“이게 찾으시는 물건이 맞습니까?”

“응. 모습이 매번 바뀌니까 찾으러 다니는 게 보통 일이 아니야.”

“그렇군요.”

처음에 진주조개를 보고 의아해했던 에블루딘은 진철의 한 마디에 이해가 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진주조개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의심을 버릴 수 없었다. 신들은 그에 개의치 않고 진원이 만들어준 주머니에 진주조개가 된 아스가르드의 열쇠 조각을 넣었다.

“그게 어디 있는가 했더니 여기 있었구나.”

환생한 신이라면 분명하게 잘 아는 목소리가 샘 쪽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이 보란 듯이 미미르의 샘 위에 서있었다. 본래 같으면 반가워하고 잘 지냈는지 안부를 물어야겠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지는 마력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 신성한 곳에 웬 놈이냐?”

그녀를 모르는 에블루딘은 재빨리 검을 뽑아들고 그녀를 위협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귀여운 미소만 지을 뿐 전혀 겁먹지 않았다. 되레 그녀의 마력에서 당당함이 느껴졌다.

“내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한 사람 뿐. 너같이 미천한 건 내 이름을 부를 수도 알 수도 없어.”

세연과 우르드가 사라진지 어언 세 달이 지났다. 그리고 지금, ‘그녀’로 완전히 각성한 세연이 미미르의 샘 앞에 서있는 다섯 피조물들을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다. 신들은 ‘그녀’가 나타나는 것 자체를 감지하지 못했다. 이것만으로도 ‘그녀’가 신족을 뛰어넘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극도의 위험을 느낀 인철은 아스가르드의 열쇠조각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제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그녀’에게 딱 걸렸다.

“다시 꺼낼 텐데 왜 집어넣어?”

‘그녀’가 인철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인철이 무의식중에 주각을 꺼내려는 걸 진철이 막았다.

“진원이도 지배의 힘은 쓰지 않아. 게다가 우리를 지배할 수 있는 자는 우리들의 왕이지 아움드라, 당신이 아니야.”

“버릇이 없구나.”

어느 순간엔가 ‘그녀’가 진철의 눈 바로 앞에 나타났다. 마력에 민감한 민혁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너도 내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어.”

‘그녀’가 온화하게 웃으며 진철의 머리를 쓰다듬자 진철의 다리는 맥없이 무너져서 ‘그녀’에게 무릎을 꿇었다. 언어로 된 명령 없이 단순한 행동만으로 상대를 복종시킬 수 있는 절대 지배였다. 정신력이 약한 에블루딘은 이미 허무상태였고 마그니도 겨우 버티고 있었다.

“아주 각성했으니 윤세연이란 아이는 이제 없겠군.”

한 무리 내에는 꼭 튀는 녀석이 있다고, 민혁이 다크 글라디우스를 ‘그녀’의 목에 그야말로 들이댔다.

“로키는 장난이 심하구나.”

‘그녀’가 손끝으로 다크 글라디우스를 건들자마자 민혁의 마력이 해제됐다. 그리고 그녀의 지배의 힘이 민혁의 뇌를 움켜잡는 것 같았다. 지배의 힘에는 한 번도 당해본 적 없는 민혁에게 그것은 고통이었다.

“제 2의 세계에서도 오딘은 오직 내게만 지배의 힘을 쓰지 않았어.”

“하지만 난 할 수 있어. 오딘보다 위니까.”

이번엔 민혁이 ‘그녀’의 쓰다듬에 굴복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래도 신이라고, 이성까지 완전 지배되지 않았다.

“괜히 힘 낭비 하지 마. 소용없어.”

‘그녀’는 민혁과 마주볼 수 있게 쭈그려 앉아서는 마력을 모으는 민혁의 오른손에 살포시 제 손을 얹었다. 마력은 완전히 소멸됐고 강한 현기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그녀’에게 저항하고 싶었지만 육체가 정신을 따라주지 않았다.

“이제 조각을 나에게 주렴.”

인철은 버텼다. 버티고 싶었다. 하지만 손이 저절로 아스가르드의 열쇠조각을 ‘그녀’에게 내줬다. 그 순간 엄청난 치욕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여유롭게 신들을 짓밟았다.

“찾느라 수고했다, 아이들아. 아, 앞으로 날 부를 호칭이 필요하겠네? 음……. ‘아이네’라고 불러. 나중에 또 보자.”

‘그녀’가 사라지고 미미르의 샘 전체를 지배하던 힘도 사라졌다. 근처 어디에도 ‘그녀’의 마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으아아아!”

누구보다도 가장 큰 치욕을 맛 본 인철은 짐승이 내는 것처럼 울부짖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과 분노에 무엇 하나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아무 힘도 쓰지 못한 진철도 이를 부드득 갈았고, 민혁도 이성과 냉정을 되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그니.”

생각에 생각만 거듭하던 민혁이 마그니를 불렀다.

“네.”

“김리궁에 돌아가서 ‘그녀’가 부활했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슬픈 소식을 전하는 것만큼 중간자에게 가혹한 일은 없다. ‘그녀’의 지배의 힘을 경험한 마그니는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돌아갈지 걱정됐다. 환생한 신중에서도 김리궁에 있는 신중에서도 ‘그녀’의 지배에 거역할 수 있는 신은 없을 것 같았다. …없는 게 분명했다.

“우리가 한심한 꼴을 보였지?”

민혁은 한 쪽 다리가 주저앉은 에블루딘을 일으켜줬다. 에블루딘은 아직도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의 기억에는 어떤 여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밖에 남아있지 않아서였다.

“아까 그 여자는 뭡니까?”

“태초의 존재 두 명 중 한 명이야. 그 이름을 함부로 말해선 안 되지. 지금은 ‘아이네’라는 별칭이 있으니까 그렇게 알아 둬.”

신족도 아니고 태초부터의 긴 세월을 살아온 존재도 아닌 에블루딘이 민혁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 태초란 그저 전설이나 동화에서 나올 법한 단어니 어려울 만 했다. 발데르를 모시는 신관이라도 다 알 수 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진철이 좌절하다 시피 쓰러진 인철을 부축했다. 오늘 내에 안정을 되찾긴 그른 것 같았다. 인철은 민혁이 열어준 워프로 곧장 집으로 돌아가서 누나들이 뭐라 하던 하나도 듣지 않고 제 방에 처박혔다. 진철은 죽도를 들고 도장으로 가 아무도 없는 조그만 정신 수련 방에서 밀짚 인형만 숱하게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