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리궁에 있는 신 중에서 마법 실력이 출중한 신과 전투에 탁월한 신은 모두 세계 곳곳에 퍼져 아홉 세계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힘을 썼다. 미드가르드에 있는 환생 신들도 인간 육체라는 한계를 극복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멋대로 다른 세계에서 날뛰는 것은 상황에 따른 진정시키거나 죽이고, 본래 있어야 할 세계로 되돌려 보내는 데 주력했다. 근처에 신이 없어 강한 종족에게서 구해지지 못한 종족은 차례차례 목숨을 잃어갔다. 제일 심각한 건 인간이었다. 엘프는 마법이라도 쓸 줄 알고, 드워프는 체력이라도 좋은데, 인간은 제 3의 세계에서 마법 능력이나 신체 능력이 현저히 퇴화해 버려서 꼼짝없이 당하기 일쑤였다.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하는 인간 때문에 민혁과 진철, 인철, 레이는 미드가르드에서만 활동했다. 진원은 다른 세계의 심각한 곳을 우선으로 돌아다녔다. 새턴 세쌍둥이는 자신들이 원래 지켰던 곳으로 돌아가 자기 휘하의 종족을 정리했다. 선우는 드래곤족의 수장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서 폭주하는 드래곤이나 무단 활동하는 드래곤을 휘어잡았다. 그리고 이번엔 우트가르드 로키도 신들의 일에 동참했다. 아이네의 옆에 서있는 우르드를 본 것이 그가 움직인 원인이었다.
[쿠과과과광!]
진철이 휘두른 묠니르에서 다량의 마력이 나와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르더니, 태평양의 반을 뒤덮을 수 있을 만큼 넓게, 강력한 벼락이 지상을 향해 사정없이 떨어졌다. 벼락은 모두 정확하게 낭인족과 묘인족을 관통했다.
“너희 앞에 있는 내가 누군 줄 알고 까부는 거냐?”
민혁의 섀도우 테크닉에 당해서 목뼈나 척추 뼈 등 목숨과 직결된 곳이 바스러진 하급 리자드맨의 시체가 사하라 사막 서쪽을 뒤덮었다. 무리지어 있지 않고 독단으로 움직이는 녀석은 민혁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다크 헐버트에 당했다. 그런데 민혁의 몸 그 어느 곳에도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제 2의 세계에서 오딘의 명령에 따라 종족 하나를 고양이 한 마리 죽이는 것만큼 쉽게 없애버리는, 그 때의 모습과 겹쳤다.
“프리즈 샤워.”
[후두두두둑, 파박박박박]
상공에서 무법천지를 만드는 하급 익룡들은 레이의 ‘프리즈 샤워’에 심장이 터져버려서 피를 내뿜으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레이를 중심으로 반경 10km 지역에 피와 익룡의 비가 내렸다. 그건 평범한 인간의 눈에 끔직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레이는 스카디의 본성이 눈뜨자 사냥에, 피에 희열을 느꼈다.
“스피릿 어택.”
자신의 마력의 봉인을 찾은 인철은 영혼에 충격을 주는 마법을 건 후에 뇌사 비슷한 상태의 몸뚱이들을 워프로 밀어 넣었다. 무법자들을 가차 없이 죽이는 위 세 신에 비해 아주 인도적인 일처리였다. 아이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드가르드로 옮겨진 자들이니 저으이의 신에게 그들은 그저 불쌍해 보였다.
“민혁아! 읏.”
아스가르드에서 청소하고 있던 미나가 급하게 민혁을 불렀다. 민혁의 마력과 살기 때문에 가까이 가기 힘들었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뭐야?”
민혁의 두 눈은 옛날 로키와 같이 피보다 붉은 색이었다. 아이네처럼 육체가 영혼에 따라 변하는 중이었다. 신의 육체에 가까워지는, ‘육체의 각성’이었다. 민혁 뿐만이 아니라 다른 신들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위그드라실에만 아무 것도 없어. 아이네가 있기 때문일까?’라고 오딘이 전하래.”
“아이네가 텔레파시를 엿들을까봐 천하의 시긴을 전령사로 쓴 거야?”
사신의 눈은 프레이야로 변한 시긴을 꿰뚫어봤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시간도, 시긴이 확인차 본 모습으로 변할 여유도 없었다. 곧바로 위그드라실로 향했다. 그곳에선 진원과 발데르, 선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아이네와 우르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네가 친 결계 때문에 위그드라실에 접근할 수 없었다.
“뭘 할 속셈인 거죠?”
“음, 그게……. ‘그’가 잠들어 있는 곳이 위그드라실이거든. ‘그녀’가 ‘그’를 깨우려는 건지 뭔지 모르겠어.”
진원이야 말로 이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제 1의 세계에서 ‘그’를 봉인하기 위해 ‘그녀’가 전력으로 힘써줬다. 누구보다도 세계의 질서와 행복을 기원했는데 제 손으로 질서를 부수고 ‘그’를 깨우는 행위는 처음과 너무 모순적이라 ‘그녀’의 진의가 무엇인지 좀체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럼 본인에게 물어봐야죠. 하이퍼 익스플로션.”
[푸슈욱]
아이네의 힘은 민혁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거대한 화구는 결계에 닿자마자 녹듯이 사라졌다. 그래도 아주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위그드라실 앞에서 주문을 외던 아이네가 결계를 사이에 두고 민혁과 마주보고 얘기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버릇없고, 성가시게 머리 좋은 불량 꼬마구나.”
“정말 악취미야. 뭘 할 생각이지?”
아이네는 사심 없이 방긋 웃었다.
“눈치 채다시피 이미르를 깨울 거야.”
[퍽!]
민혁은 주먹으로 결계를 세게 내질렀지만 표정하나 바꾸지 않았다. 아이네는 민혁의 눈을 마주보면서 미소를 일관했다.
“‘그’의 바람이 너의 바람이야?”
“힘들게 ‘그’라고 부를 필요 없어. 나와는 다르게 이미르라고 부를 것을 허락할 테니.”
아이네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직접 회자되자 신들은 몸을 움찔거렸다. 이름 자체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섣불리 말할 수도 글로 쓸 수도 없었다. 그런데 아이네는 강아지 이름처럼 쉽게 말했다.
“이거 재밌네요. 당신이 직접 ‘그’를 깨울 줄은 몰랐습니다.”
때마침 우트가르드 로키가 나타났다. ‘그’와 ‘그녀’가 깨어나길 원한 장본인이니 역사적인 순간을 놓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바라던 것인데도 아이네를 보는 우트가르드 로키의 표정엔 불만과 불쾌가 비쳐보였다.
“아아. 너구나. 상관없잖아. 어차피 나처럼 ‘그’를 깨우려고 했잖아.”
“아뇨. 상관있습니다. 4대 보물을 모두 모으고 제가 직접 깨우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기껏해야 거인 주제에 내 걸 노리다니, 도가 지나치잖아.”
아이네는 우트가르드 로키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쿡쿡 거리며 웃었다. 생각이 깊고 지혜로운, 거인족의 마법왕 우트가르드 로키는 아이네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입을 꾹 다문채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를 깨우려는 목적이 같은데 어째서 아이네와 우트가르드 로키가 대립하는 거죠?”
4대 보물에 대해서조차 아는 것이 적은 시긴은 아이네와 우트가르드 로키의 대화가 이상하게 들렸다.
“있지, 시긴. 보물찾기에서 먼저 찾은 사람이 임자이듯 ‘그’도 먼저 깨운 사람이 부릴 수 있어.”
“부리다뇨? 시종이나 부하를 부리는, 그런 뜻인가요?”
“응. ‘그’는 절대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부리는 존재니까.”
진원과 발데르가 텔레파시로 각지에 흩어진 신들을 불러 모으고 있을 때, 민혁이 시긴에게 평범하리만치 단순한 진리를 일러줬다. 먼저 손 댄 사람이 임자. 선착순 폭탄 세일에서나 신대륙의 발견에서나 상관없이 적용되는 평범하고 당연한 진리다. 하지만 이것은 상황에 따라 공평할 수도 있고 지극히 불평등할 수 있다. ‘조건’이나 ‘예외’라는 말이 그냥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4대 보물을 한데 모아서 한 명이 소유하면 ‘그’를 깨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유도 할 수 있어.”
“하지만 아이네는 예외야. ‘그’를 만든 장본인이니까 4대 보물 같이 거창한 건 필요 없어.”
발데르에게서 텔레파시를 듣고 급히 온 인철이 민혁의 말을 뒤이었다. 환생한 신이며 김리궁의 심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아이네가 ‘그’를 만들었다고요?”
마그니는 통칭 2세대 신이니 깜작 놀랄 만 했다. 신족에게도 제 1의 세계에서 있었던 일들은 전설에 해당하는 거라 진실을 알지 못했다.
“아이네의 지배에 있는 ‘그’를 해방시키고 역조종, 그리고 파괴하기 위해 만든 것이 4대 보물이지. 단순한 봉인 열쇠가 아니야.”
진원은 걱정스런 눈으로 아이네를 봤다. 아이네는 충분히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위그드라실의 줄기를 꼭 끌어안았다. 멀리 떨어져서 위아래를 훑어보다가 다시 줄기를 꼭 끌어안았다.
“우르드, 우르드. 이 나무를 봐. 이 위그드라실은 말이야 내가 태어나서 맨 처음으로 심은 나무야. 나랑 나이가 똑같은 내 나무지. 대단하지 않아?”
위엄 있고 기품 있던 모습은 어디 가고 어린 아이마냥 까르르 웃으며 좋아했다. 그러다가 분위기를 한 순간에 살기 그득하게 바꿔서 눈을 엷게 뜨고 위그드라실의 줄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위그드라실의 마력이 아이네의 마력에 공명하는가 싶더니 역마력으로 아이네의 마력을 중화했다.
“위그드라실의 자아가 아이네를 거부하고 있어.”
시종 드래곤을 안전한 곳으로 보낸 선우가 걱정스런 눈으로 위그드라실을 쳐다봤다. 평생을 위그드라실 아래서 운명을 예언하던 노른이니 위그드라실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선우는 오른손에 주먹을 곡 쥐고 심장 바루 위에 갖다 대며 위그드라실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쓸데없는 짓을!”
“선우야!”
[쾅!]
위그드라실이 자신을 거부해서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한 중에 선우가 위그드라실과 교감을 시도하자 아이네가 여태껏 쓰지 않던 공격 마법을 썼다. 얼굴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위그드라실이 받아주지 않으니 상당히 주급해진 모양이었다. 때 좋게 나타난 펜리르가 선우의 앞을 막아서고, 그 앞을 민혁이 재빠르게 날아가서 스크류 메탈 실드로 방어한 덕에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
“이거 감사하게 되었어.”
우트가르드 로키는 아이네가 선우를 노릴 때 잠깐 생긴 결계의 틈으로 들어가서 우르드를 낚아채고 재빨리 수면 마법을 걸었다. 결계에서 나와 우르드를 안전한 곳에 눕혀 논 건 당연했다. 아홉 세계 전체가 뒤숭숭해서 워프를 통해 다른 곳에 데려다 놓느니 눈에 보이는 곳에 두는 게 훨씬 나았다. 그는 바닥에 손으로 직접 진을 그려 결계를 쳤다.
“내가 깨우러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줘.”
우르드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다.
“아이네의 결계가 다시 견고해졌어요.”
레이가 시험 삼아 화살을 쏴 봤는데 화살은 결계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소멸됐다. 결계 안에서 아이네는 위그드라실과 교감하고 ‘그’를 깨우기 위해 별별 노력을 다했다. 위그드라실을 다그치기도 하고 달래보기도 했지만 위그드라실은 아이네에게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천하의 아이네를 거부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줄이야.”
“아이네가 최초의 전재이긴 하나 절대자는 아니니까.”
“우리가 아이네의 힘 앞에서 쩔쩔 맸었는데 아이네가 허둥거리는 걸 보니까 기분 묘하군.”
아이네의 무력한 모습을 보고 있지만 신들은 아직 결계하나 뚫지 못하는, 똑같이 무력한 상태였다. 위그드라실이 아이네에게 복종하거나 교감하기 전에 결계 안으로 들어가서 아이네를 막아야 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아이네의 결계 앞에서는 신들이 무력한 터라 공격 마법도 무기도 결계에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아이네가 직접 열지 않는 이상 절대로 결계 내로 들어갈 수 없는 건가?”
진철은 자신의 묠니르가 아무 소용 없자 이를 바드득 갈았다.
“어떡해……. 위그드라실이 괴로워하고 있어.”
선우는 펜리르의 머리 위에 앉아 슬픈 눈으로 위그드라실을 쳐다봤다. 그런 선우의 모습이 민혁의 눈에 확 들어왔다.
“선우야. 아까 위그드라시로가 얘기 하려고 했지?”
“네. 걱정 돼서요.”
“아이네의 결계가 있는데도 가능해?”
“교감은 마력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요.”
민혁의 머리에 순간적으로 결계를 열 방법이 생각났다. 줄곧 민혁을 주시하던 우트가르드 로키도 그 방법을 알아차리고 다른 신들의 눈에 안 띄게 결계에 가까이 붙었다. 그리고 마력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면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선우야. 잘 들어. 위그드라실에게 아가처럼 아이네의 마력을 상쇄해서 결계를 없애달라고 해. 그리고 우린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아이네를 막기 위해 모인 거고, 위그드라실의 가호가 필요하다고, 도와달라고 해.”
“으음.”
선우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노른에게 있어 위그드라실은 부모이자 형제, 때론 자식과 같은 존재로 공생관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초대 라그나로크 때 위그드라실이 휩쓸리는 걸 보고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는데 지금 다시 싸움에 개입시키다니,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말짱한 노른은 선우 하나 뿐이라 상의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위그드라실이 위대한 나무이긴 하지만 아이네의 마력과 동급이거나 상위일 순 없어.”
“인철 선배. 혹시 못 보셨어요? 위그드라실의 마력이 아이네의 마력을 상쇄시키는 장면 말이에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아이네가 자신이 위그드라실을 ‘심었다’라고 했지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다는 거에요. 최소한 둘은 동급이란 얘기죠.”
민혁의 말이 일리 있었다. 민혁의 말을 들은 신들은 모두 그에 동감했다. 진원은 다시 주의 깊게 결계 안을 살폈다. 결계 때문에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아이네의 마력이 위그드라실의 마력에 밀리거나 팽팽하게 맞서는 것 같았다.
“위그드라실이 도와준다면 아이네를 저지할 수 있을 거야.”
진원은 비장한 표정으로 선우를 향해 돌아봤는데 목소리는 희망에 차있었다.
결계를 열고 접근할 방법은 이거 하나 뿐인 것 같다는 분위기가 전체를 휩쓸었다. 신들의 기대에 찬 시선이 선우에게 집중됐다. 하지만 선우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슬프고 안쓰러운 눈으로 위그드라실을 바라봤다. 폭풍 전에 잔잔하게 흔들리는 수면처럼 고요하게 화내고 있었다.
“언제까지 위그드라실 혼자서 아이네를 상대하게 둘 거지?”
민혁의 이 한 마디에 선우는 심장이 욱신거렸다. 위그드라실을 라그나로크에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마음이 되레 위그드라실이 아이네에게 당하게 방치하는 것 같았다. 위그드라실이 얼마나 자아가 강하고 얼마나 마력이 강한지 알고 있지만 상대가 ‘그녀’라고 하니 몸이 떨리고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선우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 없이 두 눈을 꼭 감고 위그드라실을 불렀다.
“저 꼬맹이가…….”
아이네는 선우를 방해하기 위해 공격하려다가 멈췄다. 결계를 조금이라도 열면 그 틈에 누군가 우트가르드 로키처럼 잽싸게 들어올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신 한 둘 정도야 아이네에게는 식은 죽 먹기지만 이번엔 왠지 절대로 어느 누구도 들여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혜로운 오딘도 경계해야 하지만 꾀 많고 당돌한 로키가 더욱 염려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민혁의 눈치를 보니 뭔가 있는 것 같았다.
“로키…….”
발데르가 염려 가득한 눈으로 민혁을 쳐다봤다. 다음 방책이 없는 상황. 민혁은 이번 한 순간에 결정짓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때를 기다렸다. 너무 긴장해서 식은땀까지 흘렸다.
[모두 잘 들으세요. 아이네는 분명 강합니다. 하지만 구세대적이라 한 번에 한 가지 밖에 제대로 쓰지 못해요. 위그드라실이 아이네의 힘을 중화해서 아이네가 흐름을 멈춘 틈에 그녀를 사로잡고 확실하게 봉쇄해야 합니다.]
민혁은 아이네가 위그드라실과 선우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모두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단 한 순간에, 한 번에 끝내야 하는군.”
진원의 얼굴이 평소보다 경직되고 핏기도 거의 없었다. 궁니르를 꽉 쥔 오른손은 땀이 가득 차서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궁니르를 미끄러 떨어트릴 것 같았다.
아이네… ‘그녀’를 처음 봉인할 때는 질, 회니가 같이 영혼분리술을 사용했었는데 지금은 진원 혼자였다. 영혼분리술을 사용할 줄 아는 신이 진원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상대의 영혼이 워낙 크고, 고도의 정밀함을 요하기 때문에 어중간한 능력의 신과 같이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으로 ‘그녀’를 봉인하자니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위그드라실. 지금 전 남자 아이의 몸을 하고 있지만 노른의 스쿨드에요.
-알고 있다. 네 영혼은 스쿨드의 영혼. 어서 오너라.
-위대한 세계수 위그드라실이여. 저희 신들을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세계의 중립자라는 걸 알고 있지만 지금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우주의 피조물, 아움드라 때문인가?
-‘그녀’는 이 세계를 혼돈 속에 빠뜨리려 하고 있어요. 당신 아래에 잠들어 있는 ‘그’를 깨워 라그나로크를 다시 일으키려 해요.
-그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일이 또 일어나려 한다는 것인가? 우주의 피조물이라는 자가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위대한 세계수여, 우주의 중립자여. 저희에게는 ‘그녀’를 막을 힘이 없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그녀’의 힘을 상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부디 저희에게 ‘다음’을 살 수 있는 희망을 보여주세요.
-가련한 스쿨드여. 우르드도 베르단디도 없는 지금. 작은 몸으로 혼자 힘들어 하는 구나.
-위그드라실. 부디 이 아홉 세계에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작은 스쿨드. 내가 너희를 힘껏 도와주고 싶지만 그러면 아홉 세계가 완전히 무너져 버릴 것이다.
-위그드라실.
-하지만 네 부탁대로 아움드라의 힘을 중화할 수는 있다. 그 다음 부터는 너희의 일.
-위그드라실!
-위대한 아스 신의 힘으로 어리석은 우주의 피조물을 막아라.]
위그드라실의 마지막 말이 모든 신들에게 전해졌다. 거대한 사명감이 오히려 극도의 긴장을 풀어줬다.
“으읏.”
위그드라실에서 에메랄드 빛 방울이 수천, 수만 개 뿜어져 나오자 아이네가 몸을 움츠렸다. 아이네의 마력이 방울에 의해 지워지고 결계가 천천히 녹아내려갔다. 아이네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선 위그드라실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결계가 완전히 사라지자 신들은 일제히 아이네에게 다가가 온 방향으로 겹겹이 포위했다. 아이네는 지배의 힘으로 신들을 아래로 떨어뜨리려했지만 위그드라실의 힘이 자신을 꽁꽁 싸듯이 막고 있어서 할래야 할 수 없었다.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후회할 거야……. 후회할 거라고. 후회할 거야!”
아이네는 신들을 둘러보면서 소리쳤다. 몸을 부르르 떨면서 잔뜩 화를 냈다.
“난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
“이해? 너희 같은 것들이 어떻게 날 이해하겠어.”
민혁의 섀도우 테크닉과 레이의 체크메이트로 육체가 구속되고 발데르와 프레이야의 마법으로 마력을 서서히 봉인 당하는 중에 아이네는 진원과 격렬한 눈싸움을 했다. 전원에게 아이네의 눈은 욕심이 과한 자의 눈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리석구나, 오딘. ‘그녀’를 봉인하면 분명 후회할 게다.”
멀리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보이는 모습은 중년의 외모나 깔끔하고 훤칠했다. 두 명. 그 둘을 알아보는 건 진원뿐이었다. 아이네도 둘을 알고 있었지만 화가 머리 끝가지 나서 아는 척 하지 않았다.
“모두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그들은 지배의 힘을 쓰지 않았지만 말이나 몸 자체에서 복종해야만 할 것 같은 포스를 풍겼다. 신들은 본능으로 알아차렸다. 이 자들이 진원이 그토록 찾아다니던 빌과 회니라는 것을. 그래서 모두 아이네에게 건 구속을 풀고 뒤러 물러섰다. 진원만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면서 빌과 회니를 살폈다. 긴 세월동안 신의 육체에 옛 마력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너무하는군, 위그드라실. 현명할 줄 알았는데 ‘그녀’를 믿지 못하고, ‘그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이들을 거들어주다니.”
회니가 팔짱을 끼고 코웃음 치며 위그드라실을 흘겨봤다. 아무와 함부로 공명하지 않는 위그드라실은 침묵을 지켰다.
“오딘.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주는 구나.”
빌과 회니는 아이네의 양 옆에 한 쪽씩 서더니 곧장 워프로 사라졌다. 초대 신, 신의 기원이던 비로가 회니가 갑자기 나타나서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 갑자기 ‘그녀’를 데리고 사라지니 허무감과 당황함이 주위를 흔들었다.
‘그녀’가 빌과 회니를 따라 사라지고 사흘째 되는 날. 복잡하게 섞인 세계를 정리하느라 바븐 와중에 진원의 앞에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놀라운 손님이 찾아왔다. 평소에 힘을 조금씩 방출하며 지내느라 심신이 지쳐있던 손님은 진원을 보자마자 긴장이 풀려 쓰러져 버렸다. 아마도 긴 시간 만에 가지는 휴식일 것이다.
“형! 프리그는요?”
우트가르드 로키에게 잡혀 있던 프리그가 돌아왔다는 얘기를 들은 민혁은 잽싸게 진원을 찾아갔다. 진원은 프리그의 옆에서 그녀가 잘못되지 않을까 보살피고 있었다.
“별 이상은 없어. 그저 지친 것 뿐이야.”
신들이 김리궁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아홉 세계 중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김리궁이니 프리그를 김리궁의 한 성에 데려다 놨다. 진원은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었지만 프리그가 진원을 보자마자 쓰러진 바람에 꾹 참아야 했다.
“상당히 행복한 표정인데요.”
“오랜만에 맘 편히 쉬는 거라 그러겠지.”
“사랑하는 님의 곁이니까 그런 게 아니고요?”
민혁은 이 와중에도 진원에게 장난을 쳤다. 진지하면서도 진지하지 않은 성격이다 보니 여유로워보였다.
“내가 언제부터 프리그의 님이었지?”
“아직도 현실 도피에요? 이제 그만 인정하시죠.”
진원은 엷은 미소를 띠며 피식 웃었다.
“아아. 정말이지. 나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을 완강히 거부할 때가 바로 엊그제였는데 지금은 너무 자연스럽게 신으로서 살고 있잖아.”
민혁은 진원의 진심이 무엇인지 뻔히 보였다. 민혁이 도착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프리그의 손을 잡고 있는데 그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게 이상한 것이다. 오딘으로서 각성한 후부터 프리그가 걱정되고 자신을 추스르기 힘들 정도로 보고 싶었을 것이다. 진원도 민혁 만만찮게 감정을 잘 숨기기 때문에 민혁마저 어느 샌가 프리그를 생각하는 진원의 마음을 깜빡 잊어버렸다. 그걸 프리그의 등장 소식을 듣는 순간 상기했다.
“프리그가 나타났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요? 한동안 우트가르드 로키가 보이지 않은 게 상당히 수상쩍은 데.”
“확실히, 우트가르드 로키의 마력이 전혀 감지되지 않고 있지.”
그 날 이후, ‘그녀’의 마력만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우트가르드 로키의 마력도 사라져버렸다. 어디에 꽁꽁 숨어서 뭔 하고 있는지, 다음에 갑자기 나타날 땐 또 어떤 어처구니없는 것을 들고 나올지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우트가르드 로키의 아지트에라도 갔다 와 볼까요?”
일전에 민혁이 마야에게 부탁해서, 제 3의 세계에서 우트가르드 로키의 동생으로 살았던 헤임달-베일리-을 만나 우트가르드 로키의 아지트를 알아냈었다. 미나와 한일-프레이야와 프레이르-은 딱 한 번, 아주 잠깐 들렀던 적 밖에 없어서 아지트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죽은 이와 만나는 귀찮은 일을 해야 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알아낸 아지트로 기습을 시도했는데 4대 보물의 힘을 빌려 만든 몇 겹의 결계 때문에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우트가르드 로키는 허구한 날 여기 찌르고 저기 찌르면서 정작 자신은 그에 안 당하려고 맘ㄴ발의 준비를 갖춰놓은 건 불공평하다며 툴툴대는 철없는 누군가가 있었지만, 결계만큼 뭔가를 준비하고, 꾸미고 있다는 것을 확실할 수 있었다.
“가서 어쩌려고?”
“결계가 건재하면 ‘녀석, 잘 살아 있구나.’하는 거고, 결계가 없으면 들어가서 ‘잘 살아있냐?’라고 안부 인사하는 거죠.”
“너무 너 다워서 맥 빠지는 것 같다.”
민혁과 진원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재미없다는 듯이 픽 웃었다.
“웃을 틈도 없을 것 같은 바쁜 난국에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건 아직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뜻이겠죠?”
민혁은 선반 위에 올려져 있는 향의 연보라색 연기에 양 손을 슬며시 댔다. 실바람이 스쳐지나갈 때와는 다른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었다. 이미 잠들어 있는 자에게 깊은 수면을 유도하는 향이지만 맨 정신으로 깨어 있는 이에게도 효과가 없는 건 아닌 듯했다. 향이 손에 직접 닿으니까 마음이 편안해 지면서 어딘가 기대거나 앉기만 하면 바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여유가 ‘아직 까지’는 있다는 잔인한 증거지.”
진원은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살짝 젖혔다. 빌과 회니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원망스럽게 또 다시 갑자기 사라진 후, 세계를 정리하랴 그들을 추적하랴 제대로 자보기는커녕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그래도 몸은 지쳤지만 정신은 아직 빠릿빠릿해서 진심으로 세계며 프리그며 걱정할 수 있었다.
눈을 뜨고 민혁을 보니, 민혁은 진지한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을 때는 말을 걸면 건 쪽이 배로 손해 본다. 사신의 잔혹한 눈을 보게 될 테니 말이다. 진원은 옅은 한숨을 쉬고 나서 프리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타났을 때, 쓰러지기 전과는 다르게 아주아주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 마음을 위로해줬다.
“한 명이라도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면…….”
프리그의 귀환과 지금의 모습은 진원에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진원은 이 조그만 축복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진짜 프리그잖아.”
방 안의 고요를 싹 물리친 목소리가 있었다. 마력을 드러내지 않고 마법을 얼마든지 구사할 수 있는 ‘그녀’ 아이네가 워프롤 통해 나타났다. 김리궁 전체며 성 하나하나에, 그리고 프리그가 자고 있는 이 방에 각각 결계가 쳐 있었지만 아이네에게 절대 장애가 되지 못했다.
“최소한 기척은 내고 다니지 그래?”
“아…… 싱거운 반응.”
아이네는 손가락으로 민혁의 이마를 툭 쳤다.
“그러면 어떨 줄 알았는데?”
“무지 놀라면서 어디 있었냐는 둥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는 둥 열심히 물어볼 줄 알았지.”
“딱히……. 놀랐다면 충분히 놀라긴 했어.”
“진짜 재미없어.”
민혁이 무표정으로 딱딱하게 대답하자 아이네는 팍 김 새버렸다. 반응이 담담하기는 진원도 마찬가지였다.
“자는 이가 있어서 큰소리 내기도 뭐하잖아요.”
“내가 나타나는 0.1초 동안에 그런 신사도를 생각했단 말이야? 아무튼 대단해.”
모습은 이미 ‘그녀’에 가까워졌지만 말투는 세연의 말투로 돌아가 있었다. 표정도 아이네보다는 ‘세연’스러웠다. 물어보면 뭐든 서스름 없이 다 대답해 줄 것 같은 순진한 모습이랄까. 세연과 십 몇 년을 같이 지내온 민혁에게 그 모습은 거북하지 않았다. 그래도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어떻게 대응해야 할이지 살짝 혼란스러웠다. 아이네가 일부러 세연 흉내를 내는 것 같기도 해서 약 오르기까지 했지만 원채 종잡을 수 없는 피조물이니 가벼운 한숨으로 접어 넘겼다.
“격렬한 반응을 예상했다면 우리가 어떤 질문을 할지도 예상했겠지?”
아이네가 한껏 밝은 표정으로 나오니까 민혁이 상큼한-보다는 ‘간사한’이겠지…-미소를 지었는데 아이네가 다시 활짝 웃으면서 응했다. 좀 더 여유로워 보이는 쪽이 이기는 게임도 아니고 긍정적인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용썼다. 누가 보면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하겠지만 신들에게는 자존심 싸움이었다.
“뻔한 걸 일부러 예측할 필요 없잖아. 그래도 말이야 그쪽에서 친절하게 질문해 줬으면 하는 걸. 난 물어보지 않으면 대답 안 해.”
아이네가 강하게 훈수를 쳐 버려서 민혁은 픽 웃고 바통을 진원에게 넘겼다. 자기에게 조금 불리할 것 같다 싶으면 즉각 남에게 떠넘기는 교묘한 기술이었다.
“당신이 또 멋대로 사라지기 전에 모든 걸 물어봐야겠군요. 아무래도 당신을 여유롭게 볼 기회가 이번이 마지막일 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역시 지혜로운 오딘이야. 네 형들이 네게 제 2의 세계를 맡긴 것도 다 그 머리 때문이겠지.”
“아뇨, 그건 딱히…….”
신족의 결속자이자 제 2의 세계의 최고 권력자라 해서 완벽한 것까지는 아니다. 과거에 오딘이 한껏 자기도취에 빠져있을 때 프리그와 로키에게 들은 충고이자 경고였다. 그 때 자신이 빌과 회니랑 비교해서 얼마나 우매한지 상기하고, 자신보다 더 지혜롭고 어른스러운 그들을 찾기 위해 애쓰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자신의 자리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것을 잊지 않았다.
“아니, 맞아. 누구든 세상 어떤 피조물이든 완벽할 수 없어. 빌과 회니가 물리적인 강함을 갖고 있는 반면에 넌 정신적인 강함을 갖고 있으니까.”
아이네는 부드럽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미소를 지었다. 진원은 그 미소에 그 동안 쭉 갖고 있었던 열등감과 초조함이 녹는 듯했다. 역시 최상위 피조물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싶었다.
“그런데 여기서 얘기해도 괜찮은 거야? 프리그가 깰 텐데.”
“과하게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이상 이 향 때문에 당분간 안 일어날 거야.”
민혁은 향 한 개비를 아이네에게 내밀었다. 정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향이더라도 가까이서 맡으면 현기증이 일어날 수밖에. 아이네는 자신을 향해 뻗어있는 민혁의 손을 슬며시 밀었다.
“좋은 냄새가 난다 했더니 프레이야의 수면초로 만든 향이군.”
“예전엔 세스룸니르에 쫙 깔렸었지만 지금은 김리궁 구석에서 아주 조금밖에 자라지 않는 희귀종이지. 뭐, 그때나 지금이나 신외의 자가 수면초를 뿌리 한 올이라도 갖고 있으면 독하게 처벌당해서 희귀종이 될 수밖에 없지.”
한 때 프레이야 몰래 세스룸니르에 들어가서 수면초를 훔쳐 앙그르보다에게 갖다 주려다가 오딘에게 딱 걸려서 호되게 혼났던 기억이 나자 민혁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생겼다.
“뭐든 ‘금기’ 자체가 문제인 거야.”
한창 밝은 표정을 하고 있던 아이네가 씁쓸하게 웃었다. 억지로 문답을 할 필요 없이 모든 얘기를 자연스레 할 수 있을 듯한 분위기였다.
“최초 피조물이자 최상위 피조물인 당신에게는 금기가 없잖아요.”
“그래서 금기를 만들 수 있었지. 아니… 내가 내 지식을 모아놨을 뿐 그걸 너희가 금기로 정해버렸지.”
아이네의 왼손에 두툼한 책 한 권이 나타났다. 겉은 흰 소가죽으로 깔끔하게 싸이고 가늘고 복잡한 무늬가 금으로 정교하게 수 놓여 있어 한 눈에 범상치 않은 귀한 책임을 알 수 있었다. 아이네는 책의 이름이 보이게 앞표지를 민혁과 진원이 있는 쪽으로 했다.
“-피류온.”
책의 정체를 알자마자 진원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이 책에 대해서 얼마큼 알고 있어?”
“제가 금서로 정한 후에는 모두 잊었습니다.”
피류온을 직접 없앤 지 너무 오래라 잊고 있었는데 아이네가 보여준 책을 보니 단번에 기억나 버렸다. 진짜 피류온의 겉표지가 지금 아이네가 갖고 있는 것과 똑같다는 것을. 사본 파에드니리아는 각 종족이 재주껏 만든 ‘내용 사본’이라서 표지도 제각각이다. 마야가 악마족이 갖고 있는 파에드니리아를 보여줬을 때 진짜 피류온이 생각나지 않은 건 그 때문이었다.
“내용을 물어보는 게 아니야. 이 책 자체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 지 그걸 물어보는 거야.”
“피류온 자체에 대해서라니…….”
“질문을 바꿔볼까? 피류온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알고 있어?”
어린 아이를 가르치는 유치원 선생님의 말투. 부드러운 음성. 진원은 그에 맞춰 고분고분 응하고 싶겠지만 아는 바가 없어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잠깐만. 질문은 우리 쪽에서 하는 거 아니었어?”
“너희가 당최 얘기 방향을 못 잡아서 내가 좀 끌어주는 거야. ……뭐 생각난 거라도 있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연틱했던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아이네 고유의 분위기가 주변을 휘감았다. 하지만 그에도 적응된 민혁은 어색해 하지 않고 자기 페이스를 유지했다.
“아, 그저 즉석 질문이야. 전에 사본을 본 적이 있는데 ‘파에드니리아’라고 써있었어. 모든 사본이 다 그렇다더군. 그런데 네가 갖고 있는 그것엔 ‘피류온’이라고 써있어. 분명 오딘이 없앴을 원본의 이름이 자랑스럽게 새겨져 있는데, 대체 어디서 난거야?”
민혁의 말에 진원은 아차 싶었다. 금서 피류온의 등장에 당황해서 뻔한 사실을 지나쳐 버렸었다.
“역시 로키. 좋은 질문이야. 내가 앞으로 할 말이 바로 그거거든.”
아이네가 간만에 기운찬 표정을 지었다. 아이네가 좋은 표정을 하면 반대로 민혁이 기분이 찜찜했다. 뭐가 튀어나올지 전혀 알 수가 없어서 자동으로 긴자오디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아이네나 우트가르드 로키나 주변에 마이페이스인 녀석들이 둘씩이나 있는 건 역시 정서에 좋지 않아.”
민혁은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이네. 피류온이 당신과 연관된 것이라 말하려는 건가요?”
“호오. 이제 뇌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군, 오딘.”
“저는 피류온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모릅니다. 어느 순간부터 제 손에 있었고 그걸 없앴을 뿐.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기억날 지도 모르겠군요.”
진원의 미소에 아이네도 미소로 응수했다.
“그런 건 기억할 필요 없어. 기억해야 할 건 지금 내가 할 이야기니까.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재미없는 옛날이야기…….”
아이네는 피류온의 겉표지, 속표지부터 낱장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넘겼다. 사본 파에드니리아처럼 손으로 직접 쓴 책인데 보호 마법이 걸려 있어서 방금 완성한 것처럼 보관 상태가 좋았다. 정갈한 글씨체에 내용 별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데다가 그림도 흐트러짐 없이 명확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책장을 넘기던 손이 어느 곳에서 멈췄다.
“피류온은 말이야, 내가 쓴 책이야. 자기가 만들어 놓고 기억하지 못하는 어렵고 복잡한 마법을 적어 놓은 내 지식서지. 이건 내가 틈틈이 쓴 진짜 피류온 원본이고 오딘이 갖고 있던 건 빌이 똑같이 옮겨 쓴 피류온의 그림자 원본이야. 뭐, 파에드니리아는 그림자 원본의 사본이라는 거지. 피류온에는 웬만한 실력이 아니고서야 흉내조차 내기 힘든 고도의 마법이 적혀 있어. 나조차도 여기 마법들을 구사하는데 시간이 걸리니까 그에 대해선 할 말 다 한 셈이야.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피류온의 마법은 어려운 것에 비례해서 아주 위험해. 세계가 뒤흔들릴 정도로 말이야. 그래서 오딘이 피류온을 금서로 정한 걸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사본 파에드니리아가 생겨 버린 건 좀 골치긴 하지만.”
아이네는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펼쳐 놓았던 부분을 민혁과 오딘에게 보여줬다. 눈에 바로 들어오는 것이 있었는데 아주 낯익은 그림 하나였다. 그 부분의 제목을 보니 그들이 생각한 그것과 일치했다. 거인과 똑 닮은 최상위급 골렘 ‘이미르’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미르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진 종족이 거인족이지만. 순서가 어쨌거나 ‘위대한 거인’이라는 뜻을 가진 ‘이미르’가 피류온에 자세하게 있었다.
“제가 피류온을 없앤 궁극적인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지요.”
이미르와 직접 싸워 본 적이 있고 그 위력을 뼈저리게 알고 있는 진원은 누군가 두 번째 이미르를 만들어 낼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본디 지식이란 건 대를 거듭할수록 진화하는 법이니 초대 이미르보다 더 공포스런 이미르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흐응. 우트가르드 로키가 나가의 파에드니리아를 탈취하고 ‘그’를 깨운다고 난리쳤던 게, 피류온에 아주 자세하게 쓰여 있기 때문이었군.”
민혁은 이야기가 점점 아귀를 맞춰나가자 사신의 눈을 번뜩였다. 그가 정말 싫어하는 구질구질한 이야기니 오싹할 정도로 멋진 붉은색이 됐다. 본모습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펜리르나 요르문간드가 그 눈을 본다면 덩치 값 못하고 겁먹어서 꼼짝 못할 것이다.
“그나마 직접 이미르를 만들 실력이 못 되서 내가 만들어 놓은 걸 쓰려고 하는 거지. 그래도 우트가르드 로키는 로키 너만큼 잔머리가 뛰어나서 작동 법을 아주 여러 가지로 응용할 수 있는 것 같아.”
“아이네?”
“그가 어떤 특별한 것들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거야, 아니면 잊어버린 거야?”
아이네는 중요한 걸 어떻게 모를 수, 잊어버릴 수 있냐는 투였다. 하지만 환생한 신들은 우트가르드 로키와 주로 4대 보물을 두고 싸워온 터라 그 외의 것은 짐작 가는 게 없었다. 아마 짐작할 수 없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우트가르드 로키의 물건을 우리가 어떻게 일일이 알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억지라고.”
이번엔 민혁이 아이네를 강하게 몰아 붙였다. 아이네는 ‘읏’하고 뒤로 살짝 물러섰다.
“내가…… 내가 좀 초조해져서 잠깐, 아주 잠깐 이상해진 거야.”
아이네는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기고 입술로 가져가 지그시 눌렀다. 베르단디가 초조해 할 때 나타내는 버릇이었다.
“우트가르드 로키가 철저하게 비밀주의인데 너희보고 그걸 당연히 알고 있으라고 강요하는 건 억지지. ……. 우트가르드 로키는 이미르를 아주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서 별별 것들을 모아왔어. 4대 보물은 이미르를 부활시키기 위한 거였으니까 제외하고, 아홉 세계에서 신의 솔릭에 버금가는 유일무이 레어들을 필요한 것만 추린 듯 해.”
신의 솔릭에 맞먹는 것들이라면 종족마다 혹은 지역마다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밖에 존재하지 않는 희귀품들이었다. 명검이거나 국보 혹은 수호품으로 지칭되는 경우가 많고 대개 아주 유명하다. 그래서 우트가르드 로키가 어떤 것을 가지고 있을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스펠의 눈이나 간다르바의 검처럼 파괴력이 강한 것을 가지고 있을 수 있겠군요.”
“무스펠의 눈은 아닐 거에요. 그건 무스펠 지역을 유지하는 수호정이기 때문에 그걸 가져가 버리면 무스펠은 한순간에 사라지니까요. ……이런. 그러고 보니까 파에드니리아에 대해서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때 마블이 나가족 얘기를 했었잖아……. 그 녀석, 니글레윈을 가지고 있어요.”
니글레윈. 우트가르드 로키가 나가나가족을 거의 몰살하고 나서 갈취한 나가 왕의 지팡이다. 강한 저주력을 갖고 있어서 신족도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명물이다. 마법의 신 오디노가 어둠 마법의 신 굴베이그도 니글레윈의 저주 마법을 완전히 막거나 피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그건 나가족에게 있어 왕의 상징이자 유사신족급 나가의 긍지의 상징이었다.
“뭐야. 하나는 알고 있었잖아. 맞아. 니글레윈을 가지고 있지. 우트가르드 로키가 그걸 어디까지 쓸 수 있느냐가 미지수기도 하고. 다른 건 미카엘의 창, 샤브라시스, 크리스털 드래곤의 하트라 불리는 흐시온체셔. 이렇게 네 개로 추정하고 있어. 그 이상 한 개 정도 더 갖고 있는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아.”
미카엘의 창이라고 하면 대천사 미카엘이 애용하는 무기로, 저주의 용을 단번에 꿰뚫어 죽일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다른 이름은 없다. 샤브라시스는 불사조 중에서 특이 변종인 검은 불사조의 깃털로 만든 부채다.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바람에 닿은 모든 것이 검은 화염에 휩싸여 삽시간에 무로 변해버린다. 드래곤 중에 소수이고, 인간화 했을 때 가장 아름답다는 크리스털 드래곤. 하트를 구하기 어려운 드래곤 제 1순위다. 그래서 그의 하트는 다른 드래곤의 하트와 다르게 흐시온체셔라는 별칭이 붙어있다. 세계의 지식과 무궁한 마력이 잠재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아이네가 이름을 하나씩 거론할 때마다 진원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그 중에 샤브라시스는 솔릭보다 위대한 물건이라 뭔가 대응할 만한 걸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민혁은 재미있다는 듯이 배시시 웃었다.
“이거 제대로 크게 놀아주시네.”
“로키, 이건 평소 때처럼의 장난질이 아니야.”
“장난질? 아, 목숨 걸고 하던 놀이. 그게 장난질이야? 유감이군. 난 언제나 진지하게 죽음을 각오한다고.”
이미 개안한 사신의 눈은 주변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다. 민혁이 마력이나 살기만 내뿜는다면 프리그가 놀라 일어날 정도였다.
“아이네. 당신이 그걸 가르쳐주는 건 우리보고 물러나 있으라는 얘깁니까?”
“이해가 빨라서 좋아. 물론이야.”
[탁]
아이네는 피류온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이 할 말은 다했다는 듯했다. 하지만 민혁이 성큼성큼 다가가서 양 어깨를 내리 누르며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아이네의 눈을 소름끼치는 붉은 눈으로 똑바로 쳐다봤다.
“웃기지마. 네가 어느 편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믿고 가만히 있어? 그게 아니라도 우리에겐 우트가르드 로키를 막을 의무가 있어. 그깟 게 무서워서 숨어 버리면 옛날에 니플헤임으로 도망쳤을 거야.”
“너야말로 웃기지마! 이미르가 어떤 건지도 모르면서 멋대로 지껄이지 마.”
“세계를 엉망으로 만들고, 그 이미르를 깨우려 했던 녀석한테서 그딴 소리 듣고 싶지 않아. 우린 우리 식으로 우트가르드 로키를 막을 거야.”
“제멋대로인 로키에겐 더 이상 할 얘기 없어. 오딘, 지금 당장 신들을 소환해. 세계를 정리하는 건 나중에 하고 김리궁에 얌전히 있으라고 전해.”
아이네는 지배의 힘으로 민혁을 떼 놓고서 텔레포트로 사라졌다. 마력의 여운을 남기지 않는 건 여전했다. 민혁은 아이네에게 또 다시 지배의 힘으로 밀리자 자존심이 확 구겨져서 주먹으로 벽을 강하게 쳤다.
“어째서 세계를 정리하지 말라는 건지…….”
진원도 진원대로 아이네가 이해되지 않았다. 작은 소동이 있었는데도 곤히 자고 있는 프리그의 손을 꼭 잡고 아이네가 말한 것의 의미를 찾기 위해 깊은 생각에 빠졌다. 가끔 아무나 한 번씩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이나 말을 해서 두통이 점점 심해졌지만 진원은 두통이 이미 병적인 상태라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신의재림-두번째라그나로크(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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