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1 벨제뷔트, 몰래 접촉하다?
벨제뷔트님을 피해 다른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세일마글레님은 결국 성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휴가가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 안에서 휴식을 만끽하고 있다 돌아가기 싫다는 분을 바알님이 강제로 끌고 온 것이라 당장 업무에 복귀하지 않을 것이라는 협상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고로, 세일마글레님이 돌아왔지만 난 계속 비서 대리로서 업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세일마글레의 얼굴은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난 지금 사파야님과 같이 창고 조사를 하는 중이다. 진귀한 무기와 마법 아이템이 가득한 곳이다. 실은 혼자 하는 일이지만 나는 그에 대해서 식견이 짧기 때문에 사파야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보시니까 어때요? 괜찮아 보이는 얼굴이던가요?”
“글쎄요. 휴가라고는 하지만 그리 편히 쉰 것 같지 않습니다.”
“역시나. 여전히 피로가 쌓여있는 것 같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파야님은 굳이 따지자면 헬하운드와 오랜 친구사이고, 세일마글레님은 그를 통해 다리건너 알게 된 사이다. 허물없이 말을 트고 지내는 사이라기보다는 그저 면식 있는 정도다. 안부 인사나 간단하게 주고받는다. 세일마글레님이 아바트 길드 시절, 길드원인 적도 있었다지만 사파야님과 소속팀이 달라서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이번에 서로 마주쳤을 때도 ‘오랜만입니다.’, ‘악연에서 벗어나셨다죠.’ 등 형식적인 안부성 대화만 몇 마디 주고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가지 단정한 모양새를 변치 않고 있었지만 눈가에 힘이 살짝 풀리고 억지로 엷은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오랜만에 만난 세일마글레님의 모습이다.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하기 전에 ‘아’ 하는 탄식과 같은 짧은 감탄사가 먼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척 봐도 휴가기간 동안 몸 고생, 마음고생을 실컷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성에 머물고 있는 피브리조님도 세일마글레님을 보더니 가까이 다가가서 양손으로 슬며시 머리를 감싸며 ‘아, 이 불상한 아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세일마글레님의 모습은 모든 마족을 제 자식처럼 생각하는 피브리조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건 뭐죠?”
“리트 리히트입니다. 2, 3초 동안 다주 밝은 빛을 내서 적의 눈을 마비시킬 수 있는 물건입니다.”
인간 세계에 있는 강력한 발광탄 쯤 되는 것 같다. 흰 빛이 터지는 장면을 보면 빛이 사라진 후에도 시력이 원래대로 돌아오는데 수초가 걸린다. 동공이 빠른 속도로 확 축소됐다가 서서히 확장되기 때문에 시야를 정돈하는데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마계에도 이런 물건이 있다니 흥미롭다.
“리트 리히트…… 46개? 은근히 많네.”
대개 한두 개만 있고 아무리 많아봤자 다섯 개가 고작이다. 대개 귀한 것들이라 수가 적은 것이 보통이다. 그래도 흔한 아이템도 몇 개 있어서 리스트의 숫자 중에 간혹 20, 30 이렇게 표시돼 있는 것도 있다. 그런데 리트 리히트는 탁구공만한 구체라서 그런지 개수가 많다. 꽤나 잘 사용되는 건가 보다.
“46개 맞습니다.”
“고마워요.”
내가 리스트를 확인하는 사이에 사파야님이 합지상자에 담겨있는 리트 리히트의 수를 셌다. 개수가 적은 것들은 리스트를 먼저 확인하든 물건을 먼저 확인하든 한 눈에 그 수가 들어오기 때문에 일일이 셀 필요가 없어서 편하다. 인간 세계에서 창고 정리를 할 때는 46개쯤이야 적은 수에 해당하는데 마계에서 보니까 귀찮을 정도로 수가 많게 느껴진다. 그만큼 내가 마계에 적응했다는 얘기다. 인간 세계로 돌아가면 또다시 그쪽 생활 방식에 익숙해져야 할 거다.
“엘더의 축복입니까? 엘더의 축복이군요. 그림으로만 봤지 직접 보는 건 처음입니다. 역시 마왕의 성에 있는 창고라 그런지 진귀한 것들이 많습니다.”
리스트를 빠르게 훑어봤다. 엘더의 축복 1개. 두 마리의 뱀이 교미하듯 몸을 꼬고 있는 형상 위에 암녹색 큐브가 떠있다. 황금상과 큐브를 다 합쳐서 약 30cm쯤 되는데 큐브가 야구공만하다. 뱀 꼬리 두 개 위에서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공중부양하고 있는 큐브는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안에 올리브 잎 한 장이 들어있다. 잎 가장자리가 연한 옥색을 띠며 반짝거리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신비스럽게 느껴진다.
“무척 예뻐요. 보면 볼수록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아요.”
“네. 엘더의 축복은 더럽고 부정적인 힘을 정화하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한 번 사용하고 나면 333년의 휴면기가 필요하다고도 하죠.”
“정말 중요한 순간에만 써야겠네요.”
“오랜 수명이 허락된 상급 마족이라도 333년은 긴 시간이니까요.”
그의 호기심에 찬 눈과 만족감을 나타내는 미소는 지금 그가 기분이 좋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인간인 나를 직접 부를 정도로 지식에 목마르고 새로운 것을 원하는 그답다. 어쩌면 엘더의 축복을 사용하는 모습도 보고 싶은 지도 모른다.
“그것만 있으면 세일마글레가 다시 여자로 돌아갈 수 있지.”
낯선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사파야님이 날 막아선다. 뒤로 돌아서 입구 쪽을 보니 낯익은 듯 낯선 이가 서있다. 레플리카님이 만든 인형과 닮은 수려하고도 매력적인 남성이다. 오른쪽 귀에 붉은색 피어싱을 하고 있다. 더 생각할 거 뭐 있으랴. 마왕 벨제뷔트다. 어제에 이어 또 나타났다. 어제 바알님이 세일마글레님을 성으로 데려왔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찾아온 모양이다. 보통 여자들은 눈치 없이 졸졸 쫓아다니고 진드기처럼 끈질기게 붙어 다니는 남자를 싫어한다는데, 마계에서는 이 공식이 통하지 않나? 아니면 마왕 벨제뷔트가 자신의 힘을 믿고 고집을 부리는 건가? 어느 쪽이든 딱히 바람직하지 않다. 미움 받기 쉬운 타입니다.
“그렇군요. 더럽고 부정한 힘을 정화할 수 있으니까 저주도 풀 수 있겠네요.”
진짜 모습으로 마주보니까 심장이 강하게 방망이질 친다. 내 앞에 있는 저것은 정신연령 7살짜리의 덜 큰 바보다. 내 앞에 있는 저것은 이기적인 욕심만 부리는 꼬마다. 이 자기 암시가 오래가기를 바란다.
“당신이 여기엔 무슨 일로 왔습니까?”
“내 말을 듣지 않는 장난감 따위 필요 없어.”
“그러면 세일마글레님도 필요 없으시겠네요?”
마왕 벨제뷔트가 사파야님을 향해 오른손을 내민 순간 앞으로 나섰다. 지금은 내가 모든 말재주를 다 동원해서 마왕 벨제뷔트로부터 사파야님을 지켜내야 한다. 사파야님이 여기서 다치건 죽건, 레플리카님이 미치도록 슬퍼할 거다. 세일마글레님도 한없이 슬퍼할 거다. 그 얼굴들을 보고 싶지 않다.
“아니야. 세일마글레는 결국 내게 오게 돼 있어.”
“벨제뷔트님께서 힘으로 위협하시면 결국 모두가 말을 잘 듣는 장난감이 되겠지요.”
이런 식으로 트집 잡는 언어 놀이는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 수사법이다. 하지만 막상 생각나는 것이 이런 유치한 말장난뿐이라 어쩔 수 없다. 그의 말에 즉각즉각 대응하지 않으면 이쪽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억지스럽고 터무니없는 말일지라도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 것이 합리적인 말을 하기 위해 시간을 끄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인간은 위협해도 내 편이 돼 주지 않을 거잖아.”
진짜 7살짜리가 구사할 법한 문장이다. 미간을 살짝 찡그린 것도 그렇다. 꼬막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짓는 표정이다.
“마족은 마왕의 명예를 위해 살지만 인간은 자신의 자긍심을 위해 사니까요.”
마계에서 지내는 동안 깨달은 사실 중 하나다. 이 차이가 얼마나 엄청난 건지 직접 느껴보지 않으면 모른다. 타인을 위해 목숨을 내거는 자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거는 자는 사는 방식이 너무나 다르다. 각오의 차이 따위야 개인적인 차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마족보다는 인간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위기 대처에 임하고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한다. 그래서 육체도 약하고 가진 재주도 원시적 수작업이 고작이지만 마족보다 인간이 생명력과 정신력 면에서 강한 것이다.
“인간이 살아 있으면 다들 날 따르지 않을 거야.”
“그러면 좀 더 일찍 죽이러 오시지 그랬어요. 장님놀이니 뭐니 말만 꺼내서 마왕 분들을 겁주시고, 당신을 상대하기 위해 이리저리 머리 굴리기에 치중했던 제 시간을 보상해주지 못하실 거면서.”
“너도 나랑 놀아줄 거라고 생각했어.”
“전 꼬마랑은 놀지 않아요. 유치하거든요.”
보이지 않지만 알 수 있다. 사파야님은 지금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을 것이다. 마왕 벨제뷔트에게 심기 건드는 말만 골라서 하는 건 수명 단축을 재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마왕 벨제뷔트는 날 죽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없다고 확신한다. 무력을 행사해봤자 그 상대는 사파야님에 한정일 것이다. 내게 흥미를 갖고 있는 마왕 벨제뷔트가 아직은 날 죽이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새로운 놀이를 제안할 것이다.
“넌 이 마계가 어떤 곳이라고 생각해?”
“살 수 있는 곳?”
“아아, 나쁘지 않은 대답이야.”
유쾌하게 웃는다. 그리고 사파야님에게서 텔레파시를 받고 급히 날아온 듯한 분들을 천천히 둘러본다. 바알님과 피브리조님과 세일마글레님. 이성 내에 있는 믿을 만한 실력자들이다. 일을 크게 벌이지 않기 위해 루시퍼님과 레플리카님은 부르지 않은 것 같다. 솔직히 지금 온 세 분도 부르지 않았으면 더 좋을 법했다. 현재 마왕 벨제뷔트의 목적은 바로 나니까 내 선에서 조용히 오늘 일을 마무리 짓고 싶다. 루시퍼님이 없는 이상 내 말이나 행동에 끼어들 이는 없지만 그래도 관객이 있는 것보다 없는 쪽이 마음이 편하다. 눈치 볼 필요가 없지만 눈치 보인단 말이다.
“바알. 저기 있는 엘더의 축복, 나 줘.”
“무슨 꿍꿍이야?”
바알님은 팔짱을 기고 의심의 눈초리로 마왕 벨제뷔트를 노려본다. 하지만 마왕 벨제뷔트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표정으로 얼른 달라고 조른다. 그에 꿈쩍도 안 할 바알님이다. 마왕 벨제뷔트와 제일 사이가 안 좋은 마왕이라고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는데 그의 고집을 받아줄 리가 절대 없다. 게다가 세일마글레님이 옆에 있는데 더더욱 자존심을 세울 거다.
“탐나. 갖고 싶어. 그리고 필요해.”
“이 성 안에서 네 녀석한테 줄 건 아무것도 없어.”
“욕심쟁이 바알. 사랑스러운 세일마글레도 네 옆에 있고 재미있는 인간도 네 옆에 있으면서 저런 돌덩어리 하나 못 줘?”
“아무리 하찮은 거라도 네 녀석한테는 안 줘.”
비슷한 어미의 문장이더라도 바알님이 말할 때는 평범하게 들리는데 마왕 벨제뷔트가 말할 때는 유치원생 꼬마가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고집부리는 어린 아이와 그걸 제재하는 아빠 같다.
“세일마글레. 바알한테 저거 나 주라고 해봐. 네가 부탁하면 분명 들어줄 거야.”
심신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세일마글레님은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참았다.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여기서 조용히…….”
“불쌍한 조커님. 당신이 말을 걸 수 있는 상대는 킹과 에이스뿐이에요.”
바알님의 말을 끊은 건 죄송하다. 하지만 트럼프 인형극을 시작할 적기라고 생각하니 어쩔 수 없다. 항상 자기 뜻대로 해오고 마왕 벨제뷔트에게 자신도 무능할 수 있음을 가르쳐줘야 한다.
“그거 트럼프 인형극?”
“네. 제가 지루하지 않게 해드릴게요.”
“응. 좋아.”
어린 아이 같은 말투에 어린 아이 같은 표정으로 즐거워한다. 확실히 모든 것을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지금 나와 새로운 체스를 두는 중이라는 사실은 자각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생각은 하지만 눈에 보이는 태도가 너무 유아스러워서 점점 의심이 된다. 설마 이 태도도 다 가식일까 하고 의심해 본다.
“하지만 트럼프 인형극에는 에이스랑 조커만 필요하잖아. 왜 킹이 있어?”
“제가 에이스 대신 킹을 넣었어요. 그리고 벨제뷔트님은 단순한 모노 조커가 아니라 무려 화려한 컬러 조커에요.”
박수를 치며 좋아한다. 정말 이런 자가 마왕일까? 순진무구한 어른은 정말 순수하든가 정신연령이 실제로 낮든가 둘 중 하나다. 내가 방심하도록 꾸미는 수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판단일까? 다른 마족들의 표정을 보니 마왕 벨제뷔트의 언행이 원래 저런가 보다. 조금 더 지켜보자. 그에 대해 속단해서는 안 된다. 명색이 최고로 꼽히는 마왕이지 않은가.
“좋아. 기대할게. 자세한 규칙은 내일 내 비서에게 알려줘.”
웃는 낯으로 뒤끝 없이 사라졌다. 장님놀이가 시작되기도 전에 내가 알아서 체스판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체스 플에이어야하는 내가 체스판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문제될 거 하나 없다. 트럼프 인형극에 흥미를 갖고 참여하기로 결정한 순간 마왕 벨제뷔트도 체스판 위의 말이 됐으니까 말이다. 말은 상대편 말에 당하기 전에는 절대 체스판에서 내려갈 수 없다. 천방지축 소년이 체스판을 실수로 엎어버리지 않는 이상 모든 체스 말은 자기 자리를 지켜야만 한다. 자, 신이시여,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시겠나이까?
-선우 찬필의 기록 : 트럼프 인형극의 서장.
마왕 루시퍼의 중립 선언으로 인해 클로버K를 맡을 인형이 없어졌다. 레플리카님께 새 인형의 제작을 주문했을 때, 그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바알님과 피브리조님도 강력하게 반대했다. 절대 클로버Kㅓ에 그는 안 된다. 하지만 정체를 숨기고 있던 자들이 모두 모습을 드러냈고 마왕 벨제뷔트가 트럼프 인형극을 수락한 순간 클로버K는 그로 결정됐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마왕보좌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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