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귀신성불록(완)

한 달 간의 귀신성불록 : D-3 손에 처음으로 피를 묻히는 이유

★은하수★ 2008. 5. 26. 13:00

D-3 손에 처음으로 피를 묻히는 이유

 

[쉬익. 파지지지직]

“크아악!”

성의 몸 둘레에 반사경을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성은 반사경 12개를 깨기 위해 강력한 주술을 사용했지만 되레 반사된 제 주술에 상처 입었다. 그 전에 나와 기의 특이 주술에 당해 기력을 많이 소진한 터라 제 공격을 받고 나선 거의 정신을 못 차렸다. 후……. 이젠 내 체력이 백호를 얼른 죽이라 부추긴다. 성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둘 다 쉴 새 없이 주술을 퍼부어서 성의 무릎이 땅에 닿도록 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만 하면 되겠지?”

기도 이젠 그만 했으면 하나보다. 그래, 이제 끝내야지. 저 목숨 거둬 가야지.

“휴-. 영박.”

“읏.”

반사경을 없애고 영박으로 성을 구속했다. 성이 기력이 거의 없다 하나 이 정도 영박은 쉬이 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풀지 않을 것이다. 암실척쇄에 들어온 순간부터 자신에게 원군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과 나와 기의 공격을 직접 받아 봤으니 영박을 풀면 다시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공격에 시달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백호 성. 황룡의 명에 따라 당신을 참수형에 처합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다. 현무검을 쥐고 있는 오른손도 긴장하고 있다. 백호가 죽으면 수천파의 힘이 반이나 줄어드는 셈이니 그 큰일을 한다는 생각에 이 마지막 순간이 돼서야 극도로 긴장해 버렸다.

“결국 꼬마애 손에까지 비린내 나는 붉은 피를 바르는군.”

성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다. 이미 누더기가 된 제 령을 지지든 볶든 알 바 아니라는 식처럼 대범해 보인다.

“사성수 중에서 당신만 수천파입니다. 물론, 저는 개천파였었지만 지금은 어느 쪽도 아니지요. 당신도 수천파에서 나올 수 있지 않았습니까.”

“자존심에 죽고 사는 백호가 뭣 하러 중도 하차를.”

“차대 백호가 인질이니 어쩔 수 없이 금봉은 따른 게 아니구요?”

“그 아이라면 내가 일찍이 내 손으로 친히 죽여줬지.”

차대 백호 하(荷)가 실종됐다 해서 성을 떠 본건데 서스름 없이 말한다. 이유는 묻지 않으련다. 그래봤자 하가 살아날 것도 아니고 시간만 흐를 뿐이다.

“그러면 이번엔 제가 친히 죽여 드리겠습니다.”

순간 내 말과 내 살기에 스스로 놀라버렸다. 현무검은 벌서 하늘 향해 곧게 서서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누구 눈치 볼 것도 없이 그대로 내려치면 되는데 별별 갈등이 빛의 속도로 뇌세포를 자극한다. 꼭 성을 죽여야 하는가, 필요한 일이긴 하나 다른 방법도 있지는 않을까, 이대로 성을 죽여 버리면 난 왕의 꼭두각시, 왕의 망나니가 되는 것은 아닌가, 난 정말로 이 일을 원하는가.

[휘익]

[취아악]

솟구치는 핏물을 잔뜩 뒤집어썼다. 겉으론 몇 초 안되는 시간 동안 안에선 수많은 생각을 했다. 검을 내려치는 시간이 몇 분처럼 느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성의 령은 소멸되어 내 앞에 남아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피를 묻혔다 생각했다. 육체 없는 성이 피를 뿌릴 리가 없는데 그렇게 상상해 버렸다. 어디에도 피는 없다. 령이 깨끗하게 사라졌는데 피는 무슨… 내 상상력이 지나치다.

“끝났구나.”

“응.”

허무란 이런 거구나.

“나도 조만간… 이 몸뚱이만 남기고 성처럼 사라지겠지?”

죽는 순간은 그야말로 한순간이다. 다만 그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다사다난할 뿐이다. 편하게 죽는 것만큼 행복한 건 없을 거다.

“너 말고도 여럿 더 사라지겠지. 그 땐 다른 성수들이 너 대신에 반역자 제거란 명목으로 살생을 실행할 지도.”

“성수를 죽이는 건 나에게만 허락된 일이긴 하지. ……역시 비상시란 무섭단 말이지. 모든 걸 뒤엎어버려.”

“허울 좋은 명목도 만들어 주고, 어떤 의미에선 편하지. 다 가능하잖아.”

이걸 보고 ‘회의’라 하는 거다. 후회하고는 조금 다른,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세상사가 다양한 만큼 느낄 수 있는 감정도 다양하다. 그걸 하나씩 깨달을 때마다 난 조금씩 죽어가는 구나라고 생각한다. 죽을 때 삼라만상을 깨닫는다 하지 않던가.

“성이 죽으니까 저절로 사라지는구나.”

기가 말하는 건 암실척쇄다. 내부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절대 사라지지 않는 특수 주술이다. 성이 죽었으니 사라지는 건 당연하다.

“벌레 빼고 뭔가를 죽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화초 몇 개 죽여 봤어.”

“재미없는 농담이십니다.”

“응. 알아.”

지금 혼이 반쯤 육체 밖에서 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인데 어떻게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정말 미치지 않은 이상 살인 후에는 꼭 패닉 상태가 될 것이다. 작당하고 죽여도 엄청난 공포가 육신과 정신을 엄습할 것이다. 제길. 어떤 이유에서든 살인은 용납되지 않는다. 설사 전쟁 중이더라도.

“황룡한테는…… 보고하지 말까?”

나중에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시는지요.

“뭐. 항상 그랬던 거처럼 이번에도 구경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잖아.”

“애석하게도 그 좋은 싸움 구경을 못했다면?”

“대충……. 임무만 마치면 그만이지, 뭐. 별로 상관 안하잖아. 우리 속편한 왕은.”

그래도, 야, 자세한 보고는 못해도 일 끝냈다는 통고 정도는 해야지. 황룡이 속편한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기도 만만찮다. ……뭐지? 현기증이 머릿속 깊은 곳에서부터 천천히 풀어 나오고 있다. 불쾌감은 없는데, 현기증이 점차 내 의식을 침식한다. 시야가 흐릿해 지면서 바로 앞에 있는 것마저 보이지 않는다. 몸 전체에 힘이 없어 그냥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어날 수 없을뿐더러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보통 현기증이 나면 뱃속에서 토기가 올라오는데 그런 것도 없다. 그저 이렇게 가만히 있고 싶다.

 

-결국 현무는 새 성수계를 보지 못하는 겁니까?

-다른 성수도 아니고 형무가 다시 자리를 비워야 하다니…….

-아무리 자룡의 저주가 절대적이다 해도 그보다 서열이 높은 황룡과 청룡이 저주를 풀 수 있는 거 아니오?

-그러면 주작이 공작보다 위라고 명부를 대신 맡을 수 있소?

-지금 금봉이 나선다는데 그깟 꼬마가 뭐가 중요하다고 이 난리입니까?

-그깟 꼬마? 말조심하시오. 성수처형관 현무요. 당신의 직속상관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되지요.

-사성수의 수장이십니다. 성수계의 질서의 상징인 분이신데 이거 큰일 났습니다.

-현무 덕에 백호를 처리하고 수천파를 한 풀 꺾어 놓은 건 경사이나…….

-금봉이 나서봤자 이제부턴 왕께서 직접 상대하겠다 하셨으니 금방 일단락 날 겁니다.

-이게 다 현무의 희생 덕분입니다.

-미처 기뻐하기 전에 현무가 오늘, 내일한다는 소식을 접할 줄이야…….

-현무의 성은 모두 무기심면 상태라지요?

-최대한 빨리 무기심면이 풀렸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현무는 지금 어디 있는 건가요? 친부인 청룡과 같이 있는 것입니까?

-그런 것 같더군요. 황룡이 돌보려 했는데 청룡이 마지막은 부녀가 같이 있게 해달라 청했다는 군요.

-아무래도 금봉의 처형 소식보다는 현무의 별세 소식이 먼저 도착할 것 같습니다.

-이 분쟁에서 현무를 두 번이나 잃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현대 현무가 끝까지 제 역할에 충실해 줘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전 현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그게 아쉽네요.

-사성수입니다. 저주가 없었더라도 몇 백 년에 한 번 밖에 보지 못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