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귀신성불록(완)

한 달 간의 귀신성불록 : D-6 모든 걸 버리는 이유

★은하수★ 2008. 5. 22. 09:47

D-6 모든 걸 버리는 이유

 

절 입구에서 대웅전까지 들어오는 길 위에는 눈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기도하러 온 신도들이 깨끗하게 쓸어놔서 길 양 옆에만 눈이 쌓여 있다. 몇 차례 밟힌 눈은 황토색을 거쳐 검게 변해 버린다. 그런 눈이 아무도 발대지 않은 흰 눈과 뒤섞여 길옆에 방치돼 있으니까 시내의 길가가 생각난다. 눈이 내리는 중에, 그친 직후는 쌓인 눈이 폭신해서 미끄러지지 않지만 여러 사람이 지나가고 나면 점점 미끄러져서 결국 누군가 눈을 쓸어버린다. 눈은 인도와 차도 사이의 인도 턱 옆에 쌓여서 색이 점점 검게 변한다. 길을 지나가던 꼬마가 밟기도 하고 자동차가 지나가다가 구정물을 튀기기도 한다.

“정님. 몸도 안 좋으신데 그만 들어가시죠.”

지금은 아무도 없는 대웅전의 마루에 외투 하나 걸치고 앉아 있었다. 오늘이 여기서 지내는 마지막 날이라는 걸 생각하니 조금이라도 더 이곳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이곳을 떠나려는 건 내 의지다. 황룡의 명령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어쨌든 여길 버리고 남은 내 며칠을 왕의 검으로써 살겠다는 결심은 순수하게 내 의지에 의한 것이다. 나에겐 더 이상 성에서 안주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새로 맡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성 밖에서 임무에만 집중해야 한다. 수호령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어차피 곧 사라질 목숨, 그들에게 어디 간다, 뭐 한다 일일이 말할 필요 없다. 게다가 죽으러 가는 것을 말해 봐야 서로 분위기가 우울해 지고 대하는 태도마저 서먹서먹해 질뿐이다. 이래저래 조용히 사라지는 게 이득이다.

어제 기가 돌아가고 나서 한 번 더 발작이 일어나 꽤 고생했다. 밤에 잠들기 전에 갑자기 일어난 거라 혼자 이 악 물고 견뎌야 했다. 수호령들도 내가 아프다는 걸 알았을 테지만 내가 이거에 대해서만큼은 간섭받고 싶지 않아 하는 걸 알기 때문에 내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심장이 순간적으로 세게 오그라드는 느낌도 싫지만 근육이 줄기 하나하나 굳어버리는 통증도 만만치 않다. 내 육체가 완전히 고장 나기 전에, 내 령이 사라지기 전에 내 일을 끝내려면 당장 행동을 시작해야 한다. 왕은 내가 죽기 전에 청소가 끝난 성수계를 보여주겠다고 했지만 아무리 절대 군주라도 그건 힘들 거다.

“정님, 차를 내왔습니다. 드시진 않으셔도 잔을 잡고 손을 녹이시지요.”

“고마워.”

음. 따뜻하다. 솔직히 녹차는 왠지 써서 싫다. 그래서 거의 안 마시는 편이고. 하지만 따뜻한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는 건 기분이 좋다. 손 하나가 따뜻해지는 것으로 몸 전체가 따뜻해지는 것 같다. 내 손에서 냉기가 사라지는 것처럼 대지에 온기가 냉기를 대신할 때 모든 것이 끝날까? 일이 시작되기 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 사이에 많은 수명이 냉기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나도 그 중 하나가 되겠지.

“생명은 땅에서 시작돼 땅으로 끝난다. 큭.”

세상 사람들이 걸핏하면 하는 말이다. 순수 령의 상태인 성수들은 이 원리가 맞지 않는데 밀이지. 나처럼 육체가 있는 성수들은 해당하긴 하는데 일반 생명들처럼 혼이 영토로 가 머무는 것이 아니라 순수 령의 상태로 계속 존속할 수 있어서 완전히 맞는 말은 또 아니다.

이대로 더 시간이 흐르기 전에 정리를 해야겠다. 본디 수호령은 주인이 오랜 시간 동안 자리에 없으면 스스로 긴 수면을 선택하거나 영력을 봉쇄하고 평범한 혼령으로서 자리를 지킨다. 그런데 성수가 일부러 주술로 재워 놓으면 차대 주인이 깨우기 전까지 깨어나지 않는다. (막 성수가 돼서 힘이 부족한 차대 성수가 전대 성수의 주술을 풀어 수호령을 깨운다는 건 그의 등장을 뜻한다.) 그들을 재운 성수마저 중간에 깨울 수 없는 것이다. 어차피 성수가 제 수호령을 재우는 건 그만큼 이유 있을 때니까 중간에 도로 깨울 일이 없을 거다. 후회도 없을 것이고.

천이 해무사의 소전을 정리하러 간 새에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 수호령을 재우는 게 고작일 것이다. 영지를 통째로 봉인하는 건 굳이 할 필요 없는 것이지만 지금의 내겐 쓸데없는 힘 낭비니까 하지 않을 것이다.

“무기심면(無期深眠).”

크읏. 힘이 상당히 많이 소모된다. 영력이 쭉 빨려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이거야 뭐, 채강을 만나러는 걸어서 가야겠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말이지.

저들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고 일방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미안하게 생각한다. 진심이다. 그래도, 제 몸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성수가 제 아랫것들을 간수할 수 없다면 차라리 재워버리는 것이 나을 지도. 뭐, 벌써 엎질러진 물이다.

황룡이 내게 내린 특명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와 같이 하는 것이다. 아빠도, 문도, 개천파의 그 누구도 모르게 하는 일이다. 내 생애 마지막 일이 될 것이다. 수천파의 행동대장, 백호 성의 목을 따는 것. 수장 금봉은 황룡이 직접 손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기가 성을 맡게 된 거다. 아무리 2대 1이지만 성이 좀 더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연배에 따른 경력이란 그냥 쌓이는 게 아니니 말이다. 그래도 나만이 쓸 수 있는 몇몇 주문에 승부수를 던져보려고 한다. 사성수의 수장이자 성수처형관 만이 그 이름에 걸맞게 쓸 수 있는 주술에 모든 걸 걸어야 한다.

기 역시 금단아라 해도 빙황이고, 태생적으로 성수의 왕이기 때문에 그만의 특별한 주술이 있다. 기도 한 번도 써보지 않았다는데 우리 둘 다 이번에 처음 그 주술들을 쓰게 됐다. 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겠지만 기는 될 수 있으면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란다. 강하고 무서우면서 유일·특유 주술일수록 덜 쓰는 것이 좋은 거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까 현무계 인물들 중에, 아니 관계자들 중에 내 곁에 끝까지 남아 있는 건 현무검 뿐이다.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서 대화를 나눌 수 없지만 자아가 있는 것처럼 내 감정, 내 생각에 공명하는 나의 분신이다. 성수는 수호령과는 떨어질 수 있어도 무기와는 떨어질 수 없다고, 그 말이 딱 맞다. 내 발톱이자 내 이빨이고 나를 위해 기꺼이 몸을 날리며 희생하는 유일한 것이다. 좀 과한 찬사 같기는 해도 사실이다.

[딩동 딩동]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새에 채강의 집에 도착했다. 현재 기는 조만한 새의 모습으로 채강과 같이 산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집에 없는 것 같다.

[찰칵]

“제가 모를 정도로 기를 숨기면서 오셨으니 아무도 정님의 움직임을 눈치 채지 못했을 겁니다.”

“원래 같은 편까지 속일 수 있는 요원이 엘리트, 에이스라고 불리는 거야.”

아니, 뭐, 그렇다고 내가 요원이거나 우수 두뇌라는 건 아니다. 말이 그렇다는 것뿐이다.

“이번 임무에 아주 집중할 거라 하셨는데 성은…….”

“제 2성은 정리 끝났어. 기가 돌아오면 같이 천계에 가서 남은 두 성도 정리할 거야.”

“그렇다는 건 무기심면을 쓰셨다는 얘기시군요.”

어찌 보면 과한 처사 같기도 하지만 나름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니까 후회할 리가 없다. 채강의 표정이 상당히 사무적이라 후회감을 느끼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뭐가 어떻든 끝난 일이다.

“기님은 채님의 심부름을 가셨는데 점심 전까지는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응.”

왕이 기한테 심부름을 시켰다고? 아직은 개천파 성수들과 사이가 껄끄러운데 그들과의 관계를 호전시켜 주려고? 아니면 수천파의 성수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이 기 뿐이라 그와 관련된 잡일을? 왕의 머릿속은 나보다 한참 더 지능적이고 복잡 묘연해서 멋대로 추측하는 건 그만 둬야겠다. 곧 기가 올 거라는데 창밖을 구경하면서 기다려나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