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귀신성불록(완)

한 달 간의 귀신성불록 : D-7 눈(目)에서 눈(雪)이 내리는 이유

★은하수★ 2008. 5. 22. 09:46

D-7 눈(目)에서 눈(雪)이 내리는 이유

 

모두가 다 돌아가고 아빠, 기, 공작만 남아서 묵고 점심때가 다 돼서야 돌아갔다. 가장 늦게 돌아간 공작은 모두가 돌아가고 나 혼자가 되길 기다렸다. 내게 명부를 보여주기 위해서 기다렸다. 내게 걸린 자룡의 저주는 황룡이라도 풀 수 없다는 걸 안다. 분명 명부에 내 이름이 있을 테고 일주일이나 그 보다 적은 시간이 남아있을 것이다. 잘 알고 있는 걸 확인 사살할 필요 없다.

“끝까지 안 봤지?”

그래…… 갔다가 돌아온 녀석이 있다.

“응.”

아직 한참 어린 공작이 무사히 영토의 제 성에 들어갈 수 있게 데려다 주는 게 기의 오늘 임무였다고 한다. 성수한테 오늘 임무, 내일 임무가 어딨어. 그냥 뭐 하면 그게 임무, 일이지.

“밖에 나와 봐.”

“어디?”

“해무사.”

요 며칠 계속 성에만 있었다. 물론 불청객들을 성 밖에서 상대했었으나 그건 특별상황이니까 열외. 몸이 내 것 같지 않은데 일부러 나갈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근육이 욱신거리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대로 근육이 굳어버린다. 그래서 조용히 독서 중일 땐 주와 자가 번갈아가면서 찾아와 다리며 팔 등을 주물러준다. 지금 이런 몸인데 어딜 나가.

“해무사 정도는 괜찮잖아. 나도 있고, 천도 있고. 여차하면 자가 따라 나와도 되고.”

지금 날 부축 해 줄 이들이 가까이에 있다. 혼자 집에 틀어박혀서 플스나 하고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적당히 움직이고 적당히 쉬면서, 상태가 안 좋아지면 곧장 도움을 청하고 받을 수 있다. 까짓 거 해무사까진데 상관없겠지.

“나가서 뭐 할 건데?”

“역시. 성에만 있으니까 날씨 개념이 없지. 눈 구경 할 거야. 올 해 첫눈이라고.”

눈? 그렇구나. 지금 12월 하순이지. 올해 첫눈은 작년보다 늦게 내리네. …그래도 올해 내리는 눈은 보고 죽는 구나.

“진눈깨비나 싸라기눈은 별론데…….”

말은 이렇게 해도 눈이라면 뭐든 괜찮다. 게다가 첫눈이 내리는데 그게 어떤 눈이든 ‘첫눈’이니까 용서되는 거다. 그보다 성 안이야 늘 나에게 딱 맞는 조건으로 유지돼서 옷을 가볍게 입고 있는데 이대로 나가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눈 오는 날은 따듯하다니까 상관없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산자락에 있으니까 함박눈이 내리는 것 같은데?”

벌써 대웅전 앞마당이 눈에 덮여 하얗다. 눈이 내린 뒤로 절에 찾아온 사람이 없어서 아무런 발자국 없이 그저 새하얗다. 소전 지붕도 기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얗게 됐다. 눈 오는 날이면 학교에 일찍 가서 아무도 발대지 않은 새하얀 운동장을 보며 가졌던 두근거림을 여기서도 가져본다. 주위는 점점 하예지고 눈은 점점 두껍게 쌓여간다. 첫 발을 내딛어서 발자국을 만들기 아까울 정도다.

“첫눈 보고 울다니……. 어린 소녀는 별 수 없군.”

딱히 첫눈보고 눈물이 다는 것은 아니다. 첫눈이 아니었더라도 울었을 거다.

“이렇게 세상에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데, 어떤 성수들에겐 이게 보이지 않고 …이걸 보지 않고 싸움만 생각하고 있겠지? 언젠가는 이런 평화로운 배경에서 피 흘리며 싸우겠지? 하얀 눈 위에 붉은 피가 떨어질 때, 그게 얼마나 속상하고 안타까운데.”

“진풍경 앞에서 험한 짓은 나도 바라지 않아.”

현무검도 나와 기의 생각에 동의 하는지 영력이 내 심장으로 잔잔하게 흘러들어온다. 그저 이 눈을 보는 지금만큼은 조용하게 보내고 싶다.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이 풍경을 감상하고 싶다. 시인도 선인도 아니지만 이 순간만큼은 풍취를 즐기고 싶은 소박한 소원이다.

[욱신]

심… 심장이…….

[꽉]

“아프면 아프다고 해.”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기가 아빠보다 키가 크구나. 아빠가 안아주면 어깨에 내 이마가 닿는데 기는 심장에 내 귀가 닿는다. (정은 보통 15세 여아들보다 키가 큰 편이다.)

[욱신]

“크읍.”

자룡의 저주는 내가 좋은 걸 보면서 기분 좋게 있는 걸 가만두지 않는다. 심술궂은 저주를 넘어서 악질적인 저주다. 영력으로 통증을 줄여서 이만큼 아프다는 건 그냥 방치해 둘 때 얼마나 아프다는 거야? 고통에 까무러치고, 그냥 날 죽여 달라고 몸부림 칠 지도 모른다. 절대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몸을 파르르 떠는 것에서 만족하지 못할 거다.

“참지 마. 아픈 만큼 소리 지르고 괴로운 만큼 울어. 눈보고 감상에 젖어서 울 수 있다면 지금 참지 말고 울어. 내가, 그 소리가 절대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해줄게.”

[두근! 욱신]

심장이 콱 조인다. 쇄사슬로 칭칭 감고서 세게 잡아당기는 것처럼……. 싫다. 너무 아프다. 싫다. 미쳐버릴 것 같다.

“가슴 쥐어뜯지 말고 날 안아. 가슴 움켜잡는 대신에 소리 지르면서 실컷 울어. 이럴 때 울지 않으면 언제 울어? 체면 따질 거 없잖아. 지금 넌 현무 정이 아니라 송지희야. 그러니까 괜찮아.”

“으읍. 흑, 읍. 으흐흑.”

아프다고 해서 울어본 적 없다. 내가 발작을 일으켜 괴로워할 때면 주변 이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볼 뿐이다. 난 그 눈이 왠지 미안해서 도저히 아픈 티를 낼 수가 없다. 신음소리 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운데 어떻게 소리 지르고 울 수 있어. 못 한다. 할 수 없다. 하지만 기 앞에서는 괜찮을 것 같다. 전엔 기가 뻔히 보는데서 쓰러져봤다. 아픈 만큼 우는 것쯤이야…… 기가 괜찮다는데, 하라는데 못할 거 없잖아.

[꼬옥]

“참고 미치느니 소리 지르면서 다 떨쳐내.”

[두근! 욱신]

“크읍. 읍. 으… 흐앙-.”

“더 큰 소리로 울어도 되니까 실컷 울어.”

초등학교 미술 수업 중에 ‘음악을 듣고 그림 그리기’라는 수업이 있다. 학생들이 음악을 듣고서 자신의 감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음악을 듣고 나서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해보세요.

-어떤 식으로 해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는 거에요.

학생들은 이 추상적인 지시에 당혹스러워 하지만 곧 그에 따라 즐겁게 그림을 그린다.

-이게 뭐니?

-제 느낌이에요.

-이건 낙서잖아.

-하고 싶은 대로 그리라 하셨잖아요.

-그래도 뭔가 보기 좋게, 그림답게 그려야지.

-그게 어떤 건데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이게 아니라고 하니 학생들은 처음보다 더 당혹스러워 한다.

세상을 보는 눈은 제각각이다. 일괄적일 수 없다. 다만 여럿이 편하게 살기 위해 규칙을 정할 뿐이다. 선생님도 학생들에게 규칙을 미리 정해줬더라면 서로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