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귀신성불록(완)

한 달 간의 귀신성불록 : D-8 자식이 부모 마음 모르는 이유

★은하수★ 2008. 5. 22. 09:45

D-8 자식이 부모 마음 모르는 이유

 

성수계가 발칵 뒤집힐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서재에서 책을 잔뜩 가져다가 현무검이 있던 방에 쭈그려 앉아 열심히 읽고 있던 중에 주가 그 소식을 이야기해줬다. 금족(禽族)에서 드디어 공작의 유지를 이어받은 아이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몇 백 년 동안 빈 자리였던 영토지휘관 자리에 주인이 생겼으니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개천파며 수천파며 할 것 없이 그에게 접근하려 할 것이다. 영토를 지휘한다는 건 명부를 관리한다는 것. 황룡도 손대지 못하는 명부를 오로지 공작만이 ‘볼’ 수 있다. 명부를 관리한다고 해서 명부에 적힌 자들과 적히지 않은 자들의 수명을 관리하는 게 아니다. 명부가 악용되지 않게, 소실되지 않게 지키는 것이 공작의 임무 중 하나다. 명부는 명실 공히 자연의 섭리에 따라 스스로 이름을 써내려가는 망자록이다. 그러니 최고 권력층에 속하는 황룡, 사성수가 그 임무를 맡을 수 없는 것이다.

금족의 수장인 주작이 개천파에 있으니까 공작도 개천파에? 들은 바에 의하면 수천파 난조의 사촌 동생이라는데 형을 따라 수천파에? 평생의 반 이상을 영토에서 지내야하고 영토에서의 모든 일을 다 맡아야 하는 공작이다. 난 그가 어느 파에 들어갈 게 아니라 순수하게 그의 일에만 열중했으면 한다. 왕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성수계는 곧 정리될 것이다. 공작이, 나랑 비슷한 나이라는 성수가 굳이 끝나가는 내전에 끼어들 이유는 없다.

[똑똑]

“들어 와.”

“청룡께서 곧 손님들을 모시고 올 거라는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아빠가 성에 오기 전에 미리 전갈을 보낼 정도라면 머릿수가 꽤 되는가 보다. 가져온 책들을 다 읽으려면 아직 멀었는데……. 별 수 없지.

“알았어. 자랑 같이 응접실에 가벼운 다과를 준비해 줘.”

“네.”

상처 입고 며칠 쉬고, 또 상처 입고 며칠 쉬고. 육체적으로 상처 입어보고, 정신적으로도 상처 입어보고. 그런 생활이 죽을 때까지 계속 될 것이다. 엄마가 밟아온 전철이니 새삼스레 생각할 걸도 없지만 어딘가 좀 씁쓸하다. 또다시 상처 입을 일이 일어날 텐데, 그걸 알면서 스스로 뛰어드는 것도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이젠 나도 어쩔 수 없는 어린애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기를 타이르고 가르치려 할 때는 언제고 며칠 안 돼서 기에게 구원받을 줄이야. 지금 내가 성인이 된 성수를 이길 수 없다는 건 당연한 사실인데도 스스로 꼴사납게 당했다고 생각하고 자실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보상받아도 날 용서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기가 용서니 뭐니 할 필요도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마음이 아주 정리된 것도 아니지만 어제보다는 좀 낫다.

“주. 이게 뭐야?”

네모반듯하게 생긴 과잔데 색이 투명한 녹색이다. 그 옆에는 같은 모양에 빨간색, 흑색의 투명한 것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주가 만드는 음식은 모두 독특하고 맛있는데 이번 거는 색이 너무 예쁘다. 빛에 비춰보면 이 색들이 하얀 접시에 그대로 비춰질 것이다.

“양갱입니다. 그냥 탁한 검정색보다 이게 나을 것 같아서요. 이건 녹차, 이건 앵두, 이건 흑두로 색을 냈습니다.”

“정님을 위해서 주가 특별히 신경 쓴 거에요.”

“그랬구나……. 예뻐. …정말 예뻐.”

심하게 침울했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검은 오라를 발산할 정도였나 보다. 성수가 우울하면 그 아래 수호령도 같이 우울해 진다는데, 주가 내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진짜 열심히 노력했다. 이 양갱이 주의 고민과 노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마음을 생각해서 꼭 먹어야겠지. 그런데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고 위장에 제대로 떨어뜨릴 수 있을까? 멋대로 어둠 상태에 빠졌던 게 너무 미안하다.

“정님께서 먼저 한 번 드셔보세요.”

수호령 중에서 가장 성격이 밝은 자답다. 서슴없이 앵두 양갱을 내 입 가까이로 들이민다. 자답긴 한데 수호령답지 않게 행동하니까 엄마가 파문시켰겠지. 내가 도로 거뒀긴 해도 수호령답게 되도록 노력 하나를 보이지 않는다. 나니까 그냥 넘어가지 다음 대 현무에게 다시 파문되지만 않았으면 한다.

“응. 맛있어. 앵두가 이렇게 달았구나.”

역시 주의 솜씨다. 하나하나가 식욕을 돋우고 기분을 좋게 해준다. 식전에 보기 좋게 꾸미는 건 기본이고 식후에 훌륭한 포만감을 보장해 준다. 그저 까만 양갱밖에 몰랐는데 이렇게 예쁘고 끌리는 양갱도 있구나. 이거 만들려고 주가 부단히 고민했겠어.

흐응. 아빠가 데리고 오는 손님들이… 수도 수 나름이지만 레벨이 수준급이다. 황룡, 채강, 주작, 문인, 기, 지인, 지검, 모르는 성수 하나. 개천파의 성수 중에서 내가 아는 성수는 아니다. 나에겐 뉴 페이스? 그 정도. 아빠까지 합치면 10명이다. 정말 한 무리를 끌고 오셨어. 몇 명 데려올 지도 미리 알려 주지, 준비해 논 게 모자를 듯… 모자라다.

“주, 자. 마중은 내가 나갈 테니 네 분 더 준비해 줘.”

“네.”

앞마당으로 나갈 때에 맞춰서 손님들이 성 안으로 들어왔다. 그 동안 무단 침입자들이 설치고 다녀서 ‘손님’에 대한 이미지가 팍 구겨지련 찰나, 반갑다고는 할 수 없지만 손님다운 손님이 나타났다. 이런 날 무단 침입자가 또 나타난다면, 왕이 모습을 드러낸 시점에 생각 없이 수천파가 움직이지 않겠지만, 각각 공격 한 방씩만 해서 곧장 쫓아낼 수 있을 거다. 원래 성에 온 손님에게 변고가 생기거나 해를 입히게 되면 성의 주인이 모든 걸 책임져야 하나 이 성의 주인이 워낙 약해서 손님들이 자발적으로 나설 것이다. 현실에 납득할 수밖에.

“꼬마 현무의 제 2성에 이렇게 우루루 몰려오신 이유를 알려주실까요?”

“그런 질문은 손님을 안으로 들이고서 해도 되지 않아?”

“가끔은 주인이 손님을 고를 필요도 있어. 황룡. 당신은 알현 온 신하를 고르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군.”

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내게 다시 토를 다려는 기를 손으로 막았다. 기의 표정이 뚱한 걸 보니 내가 갑자기 엄격하게 대해서 맘에 안 드는가 보다.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내 처사에 태클을 걸려고 하다니… 정신연령 7살. 아빠랑 맞먹는 거야? 유치원 정신연령 콘테스트가 만약 있다면 할 만 하겠어.

“여기 이 작은 아이가 소문의 공작이네. 이 아일 소개시켜 주고 싶어 데려왔다네.”

성수계가 원래 나이 범위가 넓어서 열 몇 살 차이는 그저 그런 나이 차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 생활이 굳어있는 내가 5, 6살 차이를 비슷한 나이라 여길 리가 없잖아. 암만 봐도 초등학교 저학년만한 아인데 그래도 중학생인 나랑 비슷한 나이라 할 줄이야.

“이 성수를 소개해 주시려고 이렇게 잔뜩 몰려오셨나요? 그러면 전 황룡과 공작만 대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니까 다른 분들의 난처한 표정이 문득 보인다.

“딸-.”

[와락]

이 아빠가 정말…….

“아빠도 쫓아낼 거야?”

아빠는 정신연령 5살! 암만 그래도 이 상황에서 그런 소릴 해야 해? …걱정했겠지. 나 쓰러지고 나서 돌봐주러 왔었다는 데 회복 후에 내가 어떤지 보지 못해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거다. 전에 같이 살 때와 다르게 난 더 이상 아빠 손에서 자라지 못하니까, 바로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까 이렇게 꽉 끌어안을 수 있는 거다.

“현무. 여기 이들은 자네가 걱정돼서 자발적으로 온 것이라네.”

황룡. 그렇게 말 안하셔도 알고 있습니다. 표정에서 그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데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저 그 마음들이 부담스러워서 그들을 마주 볼 자신이 없는 것뿐입니다.

“아빠. 언제까지 안고 있을 거야? 들어가야지.”

아빠는 날 놓고 나서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 손이 너무 좋다.

“모두 들어오세요. 지금쯤이면 명 수에 맞게 준비됐을 거에요.”

앞서 들어가는데 아빠가 내 손을 꼭 잡는다. 부모가 자식 걱정하는 마음은 자식이 모른다. 내가 아무리 아빠가 철없고 어린애 같다고 해도 아빠는 아빠다. 내가 아빠한테서 제일 좋아하는 걸 고른다면 이 손이다. 머리 쓰다듬어 줄 때, 손잡아 줄 때 이 손이 너무 따뜻하다.

“아무리 그래도 단체로 병문안을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겸사겸사. 조금씩 왔다 갔다 하는 것 보다 낫잖아.”

뭐, 기의 말에 부정은 안한다. 그것보다 공작이 자꾸 눈에 밟힌다. 무표정으로 성에 들어와서 한 번도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어린 아니지만 자아는 확실하게 갖고 있는 것 같다. 벌써부터 다른 성수들과 편 가르기 놀이는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왕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 영토에서 살 공작이다. 그 아이는 그걸 선천적으로 알고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