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귀신성불록(완)

한 달 간의 귀신성불록 : D-11, 10

★은하수★ 2008. 5. 7. 13:11
 

 D-11 금기를 깨는 경우


 한 때는 희금이라 부르다가, 다시 한 때는 유린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채강이라 부르는 여인이 해무사에 찾아왔다는 기별을 듣고 친히 마중 나갔다. 황룡이 채강을 본 모습으로 되돌려 줬다. 내 어릴 적 기억 속의 희금이 해무사 소전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으니까 내 심장이 멋대로 두근거린다.

 “어서와.”

 채강은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내게 인사했다. 전에 엄마에게 하던 것처럼. 지금 채강은 나와 엄마를 겹쳐보고 있을까? 뭐 상관없다.

 “채강이 이렇게 있다는 건 기가 황룡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는 거지?”

 “네. 어제 현무께서 빙황께 슬쩍 던져놔 주신 덕에 빙황이 직접 황룡께 모든 걸 물어보셨습니다.”

 어제 나와 한 이야기가 헛 게 아니었다니 다행이다. 기가 어떤 표정으로 사실을 듣고 어떤 기분으로 사실을 받아들였을지 짐작 간다. 나와 다를 게 없을 거다. 음. 나보다 좀 더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다. 워낙 편하게 세상을 본 녀석이라 복잡하게 꼬인 현실이 잔인하게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기가 패닉 상태였겠지?”

 “그래도 꿋꿋하게 끝가지 채님의 앞에 앉아 계셨는걸요.”

 그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어도 기가 어디로 가겠어. 나야 대충 시간 때우다가 성에 들어가면 될 입장이지만 기는 갈 데가 없잖아. 이제는 길바닥 잠자리 신세를 면할 때도 됐는데 황룡의 옆에 꼭 붙어 있어야지. 응? 그건 별개 문제고, 곧 황룡의 움직임에 따라 성수계의 동향이 확 바뀔 테니까 차대 왕은 정신 차리고 있어야지. 누구처럼 쓸데없이 갈피 못 잡고 헤매지 말고.

 “오랜만에 성 안에 들어가 볼래? 최근에 싸움이 좀 있어서 상태가…… 별로 아니지만 그래도 많이 고쳤거든.”

 “어제 빙황께서 말씀하셨어요. 대략 3분의 1이 날아가 버렸지만, 무사한 곳은 완전히 멀쩡해서 생각보다 구경할 게 많았다고요.”

 “그래도 좋게 평가해줬네.”

 성 한쪽이 형체가 아주 사라져버렸는데도 신나게 돌아다녔으니 긍정적인 평가를 한 게 당연한 걸지도. 성수의 성은 영력으로 만들어진 거라 보수도 성수와 수호령의 영력으로 이루어진다. 어제는 기가 오기 전에, 가고 나서 거의 성의 보수에 매달렸다. 덕분에 훼손된 것의 20%정도 보수를 마쳤다. 지금도 주, 자와 성을 보수하다가 나온 거다. 일부러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오전 내내 보수만 하고 있다. 역시 내가 힘이 달려서 성인 성수만큼 빨리 고치지 못했다. 그리고 몸 자체가 좋지 못해서 금방 지쳐 자주 쉬어야 했다.

 “백호?”

 대단한 살기와 수상한 기가 산 전체를 뒤덮었다. 백호가 난조와 낯선 성수 하나를 데려온 것 같다.

 “완전히 포위당했어. 아직 그저께의 피해가 복구되지도 않았는데…….”

 백호 성은 어제 천계의 싸움에 참가했을 텐데 전 만큼 당하지 않았나 보다. 연 이틀 싸움을 일으킬 생각을 할 줄이야. 어제 천계에서 다수 대 다수의 싸움이 크게 벌어져서 오늘은 천계나 지상계나 조용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잘못 짚은 것이군. 어제 사움에 참가하지 않거나 힘이 남아도는 성수가 분명 있을 텐데 그걸 간과했다.

 “정님 혼자서 셋은 무리에요.”

 “둘도 무린데 셋은 택도 없지.”

 주변에 풍겨져 있는 기운이 불쾌하다.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직감은 지금 매우 위험하다고 말한다. 주술이라도 걸어 놓은 걸까? 불안감도 상당하다.

 “정님, 산 전체에 주술이 걸렸습니다.”

 천의 말대로다. 산 전체를 덮고 있는 기가 수상하다 싶더니만 주술을 걸기 위해서였군. 어떤 주술이기에 이렇게 규모가 큰지 모르겠지만 위험한 주술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안 그러고선 이 불안감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읏.”

 몸 안의 영력이 멋대로 빠져나가고 있다. 채강, 천 그리고 산 전체의 영력 모두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저들이 걸은 주술로 흡수되는 걸까? 아니면 빠져나간 영력이 그대로 소멸하는 걸까? 말도 안 돼. 이건 금지된 주술이잖아. 큭. 바빠도 부지런히 책을 읽은 덕에 금지된 주술 몇 가지를 알고 있다. 이건 분명히 생혼귀령멸원진(生魂鬼靈滅原陣)이다. 과거 용족이 만들고 성수들 사이에 널리 알렸다가 어처구니없는 위험성이 밝혀지면서 왕의 칙명으로 금지된 것이다.

 “정… 님.”

 “채강! 천!”

 “정님…….”

 겨우 인간이고 수호령인 채강과 천이 이걸 버텨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성수인 나도 이렇게 힘든데 이들이 어떻게……. 빌어먹을. 금기를 쓰면 바로 사형대에 오른 다는 걸 잘 알고 있을 분들이 이런 짓을 해? 아, 왕도 자리에 없고 하니 성수처형관인 내가 죽으면 자기들을 질책할 이가 없다 이거군. 으읏. 버티기 힘드네. 이 상태로 라면 단 몇 분 내로 쓰러지고 말거야.

 [풀썩]

 “채강?”

 [툭]

 “천?”

 이런……. 산 전체가 주술에 걸렸으니 성 안도 무사하진 못할 거다. 주와 자도 지금쯤 버티지 못해 쓰러졌을 지도 모른다. 아, 쓰러졌을 거다. 크읏. 기력이 달리면 육체도 같이 무너진다고 몸에 피가 부족한 것처럼 현기증이 나고 몸이 절로 축 쳐진다. 이렇게 당하기만 하면 안 되는데, 이 주술을 깨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반격하기엔 이미 힘을 너무 뺏겼다. 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만 하면 게임 끝이다. 하필 채강이 온 날 이런 일이 일어날게 뭐람.

 산이 머금고 있던 영력도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몇 백, 몇 천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오며 조금씩 영력을 모아왔을 것을… 한 순간에 무가 돼버리다니……. 아무 것도 못하고 이렇게 지켜봐야만 하는 내 자신이 싫다. 약해 빠진 내가 부끄럽다. 최소한으로 제 몸 조차 지키지 못하는 내가 경멸스럽다.

 점점 시야가 흐려진다. 뿌옇게 보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 것 자체도 한계치를 넘어섰다.

 [툭]

 결국… 주저앉고 마는구나. 의식이… 조금씩…… 천천히…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누군가… 도와주러…… 올… 텐데…. 꼭…… 올… 거다.

 [풀석]

 몸이… 쓰러…… 져도… 아직… 의…… 식은… 있다. ……아… 직… 은…… 괜… 찮…….


 D-10 두 번의 맹세를 하는 이유 -현무가 의식불명일 때의 이야기

 

 성수들의 왕, 황룡 채가 지상계에 있는 자신의 제 5성에 개천파의 수뇌부를 불러들였다. 왕의 등장만 해도 놀랄 만한 일인데 왕이 제정신인 것은 까무러칠 만한 일이었다. 황룡을 몰아내고 빙황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던 개천파는 멀쩡한 왕의 등장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채는 그동안 자신이 성수계 내의 반발분자를 분명하게 골라내기 위해 긴 시간동안 미친 척을 하고 있었으며 이제 살생부를 완성했노라고 밝혔다. 그리고 제멋대로 천계의 중앙을 장악하고 있는 수천파를 말끔하게 제거할 것이라 선언했다. 그러나 개천파가 자신을 몰아내려 한 것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채는 앞으로의 계략을 개천파 수뇌부에게 알렸다. 각 성수가 할 일을 아주 세부적으로 짜 놓은 탄탄한 계획에 개천파 구뇌부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를 정확하게 꿰어 보고 미래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지략에 감탄하면서 그동안 왕을 경시한 것에 진심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이제 왕의 군대가 확실하게 짜여졌다. 충분한 무기와 군수 물자가 확보되었다. 재차 검토 후에 개천파 수뇌부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청룡 지는 채의 명령에 따라 남아 있었다. 그 후 지는 영력이 고갈 직전가지 소모된 채 누워있는 현무 정을 만났다. 정이 백호 성 등 성수 셋에게서 금지도니 주술로 습격을 받았고 그들이 쓰러진 정을 죽이려는 찰나에 채에 의해 구출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