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귀신성불록(완)

한 달 간의 귀신성불록 : D-14 방울을 들고 다니는 이유

★은하수★ 2008. 5. 7. 13:09
 

 D-14 방울을 들고 다니는 이유

 

 하나의 멋있는 작품을 만들고 있을 때 한 가지 흠결을 발견하지 못하고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서 그 작품이 완성되고 자랑스런 마음으로 요모조모 살펴보는데, 아차 하며 놓쳤던 흠결을 발견한다. 그 흠결이 그저 작품의 일부에 해당하는 거라면 그곳만 고치면 된다. 하지만 작품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그 흠결이 생긴 때까지 뒤로 돌아가 다시 작업을 해야 한다. 지금 내가 처해있는 상황이 후자에 해당한다.

 커다란 사태의 진실을 알고 있는 자는 고독하게 고뇌에 둘러싸인다. 달이 구름에 가려지고 별빛마저 약한 밤에, 아무도 없는 넓은 백사장에 홀로 덩그러니 서있으면서 고요히 밀려오는 바다, 그 수평선을 흐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심정이다.

 왕에게서 엄청난 사실을 듣고 차마 성에 들어가지 못한 채 밤거리를 서성이고 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여기저기서 번쩍이고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헤드라이트가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지만 내 눈은 누군가 손으로 가린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다. 나처럼 홀로 걷는 이도, 커플로 다니는 이도, 술모임인지 꽤 여럿 무리지어 있는 사람들도 나와 같은 길 위에 서있지만 난 혼자 있는 것 같다. 내가 사람들을 피하며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날 피해 걷고 있다. 난 그저 다리가 움직이는 대로 앞으로, 앞으로 가고 있을 뿐이다.

 새벽 한, 두시에도 밖에 당당히 돌아다닐 수 있는 나라는 드물 거다. 아, 시간마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부류가 달라서 그렇지 24시간 내내 길가가 안전할 수 있는 곳은 세상 곳곳을 뒤져도 찾기 힘들다. 잠깐만, 아무리 정신이 복잡 곤란하다 해도 이런 것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잖아.

 “조그만 여자 아이야.”

 “그래, 귀여운 여자 아이야.”

 “내 말이 맞지? 오늘은 저 애로 하자.”

 “오늘은 저 애로 해야겠어.”

 하아? 지금 막 정신 차리고 보니까 어느 샌지 귀신 둘이 내 뒤를 졸졸 쫓아오고 있었다. 요력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나잇살 많이 먹은 귀신들인데 그걸 못 알아챌 정도로 맛이 가 있었단 말이야? 정말 한심하다.

 두 귀신에게서 풍겨 나오는 요력이 좀 많이 강하다. 그렇다고 내가 제압될 정도는 아니다. 아니, 혹시 모르지. 요력을 일부 감췄을 수도 있고 머릿수로 해도 1대2니까 안심할 수는 없다. 이 길 위에 날 신경 쓸 사람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귀신들과 맞부딪히면 귀신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은 날 아주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여자 아이의 피는 향기롭고 심장은 부드럽지.”

 “방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지만 여자 아니는 더 그렇지.”

 “오늘 우리의 만찬은 조그만 여자 아이야.”

 “우리에게 미각의 즐거움을 줄 아이는 저 여자 아이야.”

 귀신이 산 사람의 육체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천천히 요력이 쌓인다. 그래, 그동안 얼마나 사람들을 잡아먹었는지 안 봐도 알겠다. 그 나이에 그 요력이라면 뻔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며칠에 한 사람씩 둘이 사이좋게 처리했을 거다. 으윽. 구역질나려고 한다.

 [딸랑]

 불쾌한 방울 소리군. 저 귀신들의 존재를 좀 더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저 소리에 꼼짝없이 당했을 지도 모른다. 흐음. 몸 자체에 보호 주술이 걸려있으니까 아닐 지도 모르고. 아무튼, 요력을 가지고 있는 방울 소리라니, 찜찜하다.

 [딸랑]

 사람을 유혹하고 정신을 지배하는 주술이 걸려있다. 날 조종할 모양이다.

 “아이야 아이야 걸어가거라.

  아이야 아이야 앞을 보아라.

  가느다란 자갈길 너른 꽃밭

  아이야 아이야 꿈을 꾸어라.

  아이야 아이야 춤을 추어라.“

 [딸랑]

 흐음. 무익산(霧翼山)의 지초사(芝草寺)에서 반인륜적인 제사를 지낼 때 불렀던 동요로, 유쾌하리만치 끔찍한 전설을 가지고 있다. 하. 성수들이 후계자 수업을 받을 때 흥미를 갖기 위해 곧잘 접할 수 있는 이야기라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무익산은 지상계와 천계를 연결하는 가장 짧은 길이면서 평범한 사람도 그 길을 지나 천계로 갈 수 있는 문이다. 무익산은 언제나 안개가 끼는 산으로 사람이든 성수든 정신 수양을 할 때 찾는 산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조그만 암자가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이지 꽤 많다. 그 중 ‘지초사’라는 향기로운 이름의 암자가 있었다. 그런데 이 이름은 암자에서 있었던 반인륜적인 제사에 비추어 보면 진짜 미화된 것이다. 혈취사(血臭寺). 이 정도 해야 어울릴 거다.

 아이야 아이야 걸어가거라.

 아이야 아이야 앞을 보아라.

 가느다란 자갈길 너른 꽃밭

 아이야 아이야 꿈을 꾸어라.

 아이야 아이야 춤을 추어라.

 악귀에게 영혼을 팔고 영원히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지초사에서 살고 있던 두 동자가 지초사의 연못을 빙글빙글 돌며 이 노래를 부르면 연못에 어떤 아이의 모습이 비춰진다. 대개 어른들을 혐오하거나 슬픔과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는 아이가 연못에 비춰진다. 두 동자는 자신들의 영혼을 판 악귀의 도움을 받아 연못에 비춰진 아이를 지초사로 데려온다. 두 동자에게 홀린 아이는 연못에 떠있는 연꽃에 올라타서 연못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두 동자와 같이 노래를 부른다. 몇 번이고 계속해서 부르고 나면 아이는 머리, 두 팔, 두 다리가 몸통에서 떨어져 있고 피는 연꽃과 연못을 붉게 물들인다.

 이것이 무익산 지초사 동자 노래의 전설 전반부다.

 [딸랑]

 이 귀신들은 어린 아이의 모습이 아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전설을 흉내 내는 건가 보다.

 [딸랑]

 방울 소리가 한 번씩 한 번씩 들릴 때마다 주술이 점점 짙어진다. 속는 셈치고 그들이 이끄는 대로 걸어가는데 인적이 닿지 않을 법한 컴컴한 골목을 이리저리 후벼 다니고 있다. 아무도 시체를 찾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오… 이들에게 당한 귀신들일까? 겁에 잔뜩 질린 표정의 귀신들이 내 뒤에 있는 두 귀신을 흘끔흘끔 쳐다본다.

 “아이야 아이야 걸어가거라…….”

 “아이야 아이야 다릴 내놔라. 아이야 아이야 피를 내놔라. 조그만 연못에 큰 연꽃에 아이야 아이야 머릴 내놔라. 아이야 아이야 팔을 내놔라.”

 내가 동요의 뜻을 읊자 두 귀신은 당황해 했다. 여자 아이가 동요를 알고 있을뿐더러 주술에 거릴지 않았으니, 여태껏 없었던 일에 당연히 당황스러울 거다.

 “다시 흔들어봐.”

 “다시 흔들어야지.”

 [딸랑]

 아무리 방울을 흔들어도 내겐 먹히지 않는다. 내가 저 귀신들에게 최면 주술을 걸어버리는 게 더 빠를 거다.

 “우리 모습이 보이나봐.”

 “우리 소리가 들리나봐.”

 귀신들을 조금 화난 표정을 지었다가 금새 소름끼친 미소를 짓는다. 입 꼬리를 양쪽으로 삭 당기고 잇몸이 보일 정도로 입술을 벌려 웃는데 얼굴에 분칠하고 진한 화장을 하면 미친 광대로 딱이다.

 “난 너희랑 놀아줄 기분이 아니야.”

 황룡에게 이야기를 듣고 난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성가신 녀석들과 마주봐야 하냔 말이지.

 [딸랑]

 “읏.”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주술력이다. 요력을 숨기고 있었군. 평범한 귀신이 아니다. 요괴가 되기 직전이라고 할까. 나도 기를 활성화하지 않으면 저 녀석들의 기습에 먹혀버릴 지도 모른다.

 “성수와 연결된 아이야.”

 “그런데 혼자인 아이야.”

 “성수는 여기를 몰라.”

 “그러니 여기서 죽여.”

 [딸랑]

 하. 두통이 밀려오는 게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런 녀석들을 영옥으로 보내도 거기서 다시 말썽을 일으킬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이 자리에서 혼을 소멸시켜 버리는 게 가장 좋을 것다. 그거라면 내가 전문이지.

 “재갈.”

 붉은 색으로 주문이 쓰여 있는 갈색 가죽으로 귀신들의 입을 막고 가죽 끈으로 귀신의 온 몸을 칭칭 감았다. 사슬로 감을 수도 있지만 그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가죽 끈을 끊기 전에 내가 먼저 소멸시킬 테니 말이다.

 “읍. 읍.”

 “움직일 수 없으니까 이 방울은 이제 필요 없지?”

 예상대로 귀신 보다는 방울이 요물이다. 방울에 손대는 순간 굉장한 요력이 내 손을 거부했다. 손에 기를 모은 채 방울을 잡고 귀신들에게서 떼 놔야겠다. 억지로 방울에 내 손을 직접 가져다 댔다가는 방울에서 요력이 있는 대로 흘러나와 폭동(?)을 일으킬 지도 모른다. 그리고 방울을 먼저 제거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든다.

 “헌무검. …중권폭류(重拳暴流).”

 [푸콰앙]

 겨우 방울 하나를 상대로 현무 제 11주술을 쓴 것은 어찌 보면 참 쓸데없는 짓이지만 후사를 걱정하는 내 마음이 고른 것이니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길 수 없는 노릇이다. …주술의 발동 소리에 방울이 깨지는 소리가 묻혀 버렸다. 지금…… 작은 놋조각들이 땅 위에 흐드러져 있을 뿐이다.

 “이제 너희 차례지?”

 “읍, 으읍.”

 “참혼(斬魂).”

 내 앞에서 살기 위해, 살려달라고 몸부림친들 아무 소용없다. 난 그 모습을 보기 전에 현무검을 휘둘러서 베어버리니까. 계승식을 거치고 현무검과 일체가 되면 현무의 타고난 성격까지 몸에 배인 다더니 진짜 그런 것 같다. 사고와 행동이 나도 흠칫할 정도로 ‘자동’이다. 지금도 두 귀신은 이미 현무검에 베여 소멸됐다.

 그래, 이제…… 여기에 묶여 있던 억울한 귀신들을 영토로 보내줘야 하는 구나.

 “귀혼영역, 성불.”

 황룡이랑 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판에 이런 자질구레한 일을 하고 있다니… 어쩌면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머리를 식히고 진정할 필요가 있던 중에 내 관심을 다른 데로 잠깐 돌릴 수 있었으니까 말이지.

 다들 미쳤다고 생각한 왕이 아주 제정신이고 현재 성수계의 흐름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왕으로서의 일을 분명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지금도 완벽하게 제 계획을 수행하고 있다. 차대 왕, 기를 보호하고 있으며, 두 파로 나뉜 걸 틈타 왕의 편과 반역 무리를 파악해서 반역 무리를 청산할 일을 꾀하고 있다. 지금은 왕이 직접 나타나서 움직이고 있지 않지만 조만간 기를 앞세워 반역 무리에게 손댈 것이라 했다. 그러니 나보고 지금처럼 자기를 도와달라고까지 말했다. 지금처럼… 도우라고.

 “조금이지만 힘을 발산하고 나니까 좀 개운하세요?”

 유린…… 채강은 대체 언제부터 내 뒤에 있었던 거야? 심장이 마구 콩닥거리네.

 “네 기척은 전혀 없었는데.”

 “채님의 수호 아래에 있으니까요.”

 짧고 정확한 대답. 채강이 내게 존댓말을 끄는 건 영 어색하다. 그래도 2년은 알고 지낸 친구… 였었는데. 어렵다. 세상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복잡한 것이 어렵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고, 진실을 알고 나면 모든 것이 필연이었음을…….

 “있잖아, 다시 희금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아?”

 채강이 작아진 게 황룡의 힘이었다니까 원래대로 돌리는 것도 황룡이 할 수 있을 거 아냐. 엄마가 죽자마자 ‘엄마의 제자’를 보호하기 위해 황룡이 주술을 썼던 것이면, 꼬마긴 해도 어엿한 현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그리고 채강은 이제 황룡의 제자고 스스로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하니까 굳이 애 모습으로 둘 필요도 없고 말이지. 혹시 요새 말로 왕이 쇼타콘인가? 설마, 왕이 늙었대도 쇼타콘이라닛!

 “어디 불편하신가요?”

 “응? 아냐. 뭐가 불펼할 게 있다고.”

 내 표정이 또 묘했나 보군. 불편한 게 없어? 어디서 그런 뻔한 거짓말을! 어렸을 때 ‘이모’처럼 잘 따르던 사람이 지금 ‘친구’로 있는데. 내가 얼마나 기분이 이상한 지 자각하고 있는 거야? 물론 본인은 사정을 다 알고 작아진 당사자니까 그러려니 하겠지. 나한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 오컬트 홀릭의 이유린양보다 믿음직스럽고 강한 희금을 택할 거야.

 “빙황께 모든 걸 알려 드릴 때 원래대로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어요.”

 아, 아까 왕이 조만간 기에게 다 이야기 할 4거라 했지. 조만간이 대체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그 때 진짜 채강을 볼 수 있다는 거군.

 “그런데 여긴 왜 온 거야?”

 지금 중요한 건 채강이 언제 원래대로 되느냐가 아니란 말이지. 이 구석진 곳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건 정작 할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니까.

 “아까 공황상태가 돼서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고 좀 걱정돼서요.”

 하기사, 아까 까지만 해도 상태가 영 아니긴 했지. 귀신이 아니라 수천파의 성수를 만났더라면 당했을 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날 걱정하고 챙겨주는 건 변함이 없구나. 몸이 조그맣게 되면서까지 내 곁에 있으려 한 것도 다 거기서 나온 걸 테니까. 요즘 세상에 이만한 사람 드물지. 가만히 있어도 반짝반짝 빛나는 인대야. 언제 날 이끌어 주는……. 그렇군.

 “쿡.”

 “?”

 “그 표정은 컸을 때나 조그마할 때나 똑같구나. … 날 해무사로 끌고 갔던 건, 더 일찍이 아니라 기랑 같이 있을 때 데려간 건 역시 의도적인 거였지?”

 “네. 채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누가 지금 왕이 미쳤다고 하는가. 이처럼 주도면밀한 두뇌를 가진 왕을. 자연스럽게 나와 기를 떼 놓으면서 아빠가 내 기억을 풀게 하고. 나이는 그냥 먹은 게 아니라는 걸 버젓이 보여주고 있다. 아아… 정말이지 같은 용족인데 어쩜 이렇게 다를까.

 “그 때 자가 우릴 노리고 있었는데 기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어쩔 뻔 했어?”

 “글쎄요? 빙황께서 움직이시는 걸 알고 있어서 별 생각 없었어요.”

 은근히 얌체 같은 대답이다. 뭐, 나도 상관없다 싶다. 기가 움직일 거란 사실은 뻔했던 거니까. 솔직히 ‘자’의 존재는 ‘변수’지만 그 변수를 무력화하는 계획은 정말 완벽한 계획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이제껏 왕이 바란 대로 움직인 사실이 좀 분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